이해인 수녀와 백지혜 화가가 부르는 밭의 노래
그림책 『밭의 노래』 로 자연을 그리다 인간이 자연과 함께해야 하는 이유
『밭의 노래』는 이해인 수녀의 시로 만든 그림책이다. 자연을 노래한 동시가 한국화를 전공한 백지혜 화가의 그림으로 생생하게 재현되었다. 제목에서 보듯, 동화책에는 밭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작물과 생물이 담겨 있다.
이해인 수녀의 동화책이 나왔다고 했을 때 반가움이 앞섰다. 그도 그럴 것이 채널예스가 이해인 수녀를 만났을 때는 암 투병이 한창이던 2011년이었기 때문이다. 이후 3년이 흘렀다. 인터뷰가 이뤄진 바로 전날에 독자와 만남에서 무려 500여 명에게 사인을 해줬다고 한다. 피곤할 법도 한데, 이해인 수녀는 여전히 건강하고 밝은 모습으로 채널예스 취재진을 대했다.
⇒ 2011년 이해인 수녀 인터뷰(//ch.yes24.com/Article/View/17240)
이번에 나온 그림책 『밭의 노래』는 수도원에서 텃밭을 가꾼 이해인 수녀의 경험이 담겼다. 밭에는 감자, 배추, 오이 등의 식물과 나비, 벌 등의 곤충이 함께 산다. 도시생활에 익숙한 현대인이 보기에는 생소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자연을 그리워하는 건 인간의 본능. 아이는 물론이고 어른도 이 동화책에서 편안함을 느낄 수 있다.
이해인 수녀가 노래한 동시를 그림으로 옮긴 건 백지혜 화가. 첫 번째 그림책 『꽃이 핀다』에서 전통 채색 기법으로 화제를 모았던 그녀는 이번 책도 마찬가지로 우리의 전통 색으로 밭을 표현해냈다. 특히 집 앞 마당에서 직접 식물을 가꿔가며 세심한 관찰을 바탕으로 밭을 자연에 최대한 가깝게 그렸다.
두 분의 근황을 말씀해 주세요.
백지혜 화가(이하 백) : 작년 가을부터 올여름까지 『밭의 노래』 책 작업을 진행했어요. 책 출간과 동시에, 출간 기념회를 겸해서 그림책에 들어간 원화전을 지난주에 열었고요. 지금은 잠시 휴식을 취하는 중입니다.
이해인 수녀(이해 이) : 백지혜 화가의 그림과 함께한 『밭의 노래』를 보고 수녀원 밭을 유심히 관찰하면서 쉬기도 했고요. 자연과 함께 즐기는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두 분이 어떻게 그림책을 만들게 되었나요?
이 : 출판사로부터 소개받았죠. 마무리할 때쯤 만났어요. 백지혜 화가가 어떤 그림을 그리는지 미리 봤습니다. 좋은 인상을 받아서 믿고 맡길 수 있는 화가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출판사가 맺어준 인연이죠.
실제로 책으로 나왔을 때 기분이 어땠어요?
이 : 책 속에 묻혀 있던 단어가 그림으로 확 살아오는 느낌이 들었어요. 가지, 호박, 오이, 참외와 같은 단어가 실제 모습으로 튀어나오는, 생생한 느낌? 생명력을 부여받는 느낌, 이라고 할까요. 참 좋았어요.
이번 동화책 주제가 '자연'입니다. 실제로 텃밭도 가꾸고 있는데요. 아이들이 자연을 가까이해야 하는 이유를 말씀해 주신다면.
이 : 청소년 범죄가 부쩍 늘고, 순수함을 잃어버리는 게 흙을 멀리하고 자연과 가까이 있지 않은 데서 오는 게 아닐까 싶어요. 매일 인터넷 게임하는 시멘트 문화에 길들어져 있잖아요. 밭이 주는 생명의 노래, 생명의 기쁨 같은 걸 접할 기회가 없으니까요. 시골에서 자라는 사람은 마음이 악해질 수 없는 것 같아요. 아파트에 살더라도사각 궤짝에 상추를 가꿔본다든지, 하는 의도적인 노력을 아이에게 해 주면 마음이 좀 순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요.
백 : 마당에 있는 집에서 태어나서 계속 마당이 있는 집에서 살아왔는데요. 식물이나 꽃과는 친숙했으나, 밭에서 자라는 작물과는 이 책을 그리기 위해 공부하면서 처음으로 친하게 됐어요. 올봄부터 책에 등장하는 가지, 방울토마토, 딸기를 마당에서 키우기 시작했는데요. 비가 오면 비가 와서 걱정이고, 해가 뜨면 식물이 목마를까 걱정이다 보니 스스로가 부지런해져요. 책임감도 생기고요. 생명 옆에서 봉사해야겠다, 작은 것이 가진 소중함, 이런 점을 책을 준비하면서 느꼈죠.
아이에게는 교재이고, 어른에게는 위안을 줄 수도 있을 듯한데요. 요즘 사회가 전반적으로 가라앉은 느낌입니다. 독자에게 위로의 메시지를 주신다면?
이 : 위로, 희망 메시지 주는 게 어렵네요. 우리 심성에 잠들어 있는 선한 마음, 착한 마음을 계속 끄집어내는 노력을 하지 않아서 악한 일이 생기지 않나, 싶어요. 인내심이 부족해서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언어적 폭력, 사람을 죽이기도 해요. 마음 하나를 선하게 길들이지 못하는 데서 사회악이 빚어지는 것 같은데요. 마음을 맑고 선하게 하는 노력으로는 자연과 가까이하는 것도 있고, 좋은 책을 읽거나 좋은 음악을 들을 수도 있겠죠. 착하고 좋은 말을 주고받는 것도 있고요. 혼자만의 노력으로는 되지 않고, 가정과 사회가 함께 착해지려는 노력을 적극적으로 하지 않으면 점점 악한 쪽으로 갈 것 같은 염려가 생겨요. 위로라기보다는 걱정이 많이 돼요. 기도만으로 안 되구나, 어쩌면 좋지, 하는 마음이 저를 힘들게 하는 때에요. 위로도 사실 잘 안 나오네요.
시도 계속 쓰시나요.
이 : 계속 써요. 이상하게 시라는 것이 평화로울 때보다는 걱정 많고 불안하고 괴로운 일이 있을 때 잘 써져요. 어떤 분이 시는 안 쓰고 그림책만 내느냐고 했지만, 그림책을 많이 낸 것도 아닌데요. 그림책으로 나오니까 눈에 띄나 봐요. 그림책은 문학과 미술이 어우러진 것으로 나름의 의미가 있죠. 남녀노소가 함께 볼 수 있다는 점에서 그림책 장점도 있고요.
백지혜 화가는 이번 책을 그리는 과정이 남달랐다고 들었는데요.
백 :『밭의 노래』제안받았을 때, 걱정됐던 부분은 서울에서 태어나서 서울에서 자라서, 밭에 관해 알고 있는 지식이 많지 않았다는 점인데요. 다행히 인터넷으로 알게 된 지인분께서 발달장애청소년들을 위한 농장을 운영하고 있었죠. 거기 가서 밭을 취재했어요. 마을 분위기도 좋아서, 한 번 더 가서 며칠 머물며 아침부터 밤까지 밭에서 스케치했거든요. 그때 제가 그려야 하는 대상이 마음에 와 닿았던 경험을 했습니다. 올봄에는 책에 등장하는 몇 가지 작물을 마당에서 직접 기르면서 스케치를 하고 사진을 찍는 등의 준비를 했죠.
기법도 궁금해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백 :첫 번째 책 『꽃이 핀다』도 그렇고 이 그림도 전통 진채화, 전통 채색화라고 분류합니다. 한국화가 재료와 기법상으로는 크게 수묵화와 채색화로 나뉘는데요. 수묵화는 많이 알려졌듯이, 화선지에 먹으로 그려진 산수화나 문인화 같은 그림들을 말하는데, 상대적으로 채색화라는 장르는 덜 알려진 것 같아요. 하지만 채색화도 전통이 오래됐어요. 고려 시대 불화, 조선시대 초상화, 또 많이 알려진 신사임당의 초충도, 이런 그림들이 진채화에요. 저는 조선시대 초상화를 공부 했는데, 그때 공부했던 기법과 물감 재료로 그림책 작업을 하고 있어요.
이번 책은 바탕이 춘포였는데요. 춘포라는 천은 비단과 모시가 같이 짜여져서 가로세로의 실들이 교차하는 질감이 잘 보여요. 밭이 가진 느낌과 천이 가까이 닿아 있는 게 아닐까 해서 택했고요. 가능한 자연의 색을 살리기 위해 천연 물감을 많이 썼어요. 기존에 나온 밭에 관한 책 많은데요. 그런 책과 다르게 만들고 싶어서 시 한 줄 한 줄이 갖고 있는 잔잔한 감동을 최대한 표현하려 애를 썼어요. 동양화 화가이니, 동양화에서 많이 얘기되는 여백을 많이 살리려고도 했고, 어떤 장면에서는 화훼화나 초충도 같은 느낌이 들게 구성 했어요.
밭에 다양한 생물이 사는데요. 특별히 애정이 있는 종류의 채소, 생명이 있을까요?
이 : 수녀원에서 밥 먹을 때, 가끔은 상추나 쑥갓 같은 여러 쌈을 주줍니다. 사람들이 냄새난다고 쑥갓을 안 먹어요. 저는 좋아해요. 노란 쑥갓 꽃이 예쁜 거예요. 약간의 향기가 있고, 정겹죠. 가끔 노란 쑥갓 꽃 핀 여름이라든지, 쑥갓을 찬미하는 시를 쓰기도 합니다. 가지도 좋아하고요. 감자, 홍당무도 좋지만 그중에서는 쑥갓에 애정이 갑니다.
백 : 가지요. 가지는 새싹이 자라날 때부터 열매 맺을 때까지 봐 왔는데요. 가지 꽃 자체가 갖고 있는 아름다움도 있고, 가지가 자라는 과정을 지켜봐서 애정을 더 많이 쏟는 것 같아요. 가지는 두 번 그렸는데요. 그렇게 나온 두 번째 그림이 마음에 들어요.
수녀님은 10년 전 인터뷰에서 수도원 40년 소회를 말씀하셨는데, 50년을 되돌아본다면?
이 : 10년 전에는 병에 안 걸렸죠. 10년 사이에 환자가 되어서 암으로 6년째 투병을 하고 있어요. 크게 달라진 건 없어요. 더 많은 고통을 경험하면서, 더 많이 감사하고 사물을 보는 시선이 긍정적으로 변했다고 할까요.“사랑은 더 애틋해지고, 기도는 더 간절해지고, 감사는 더 깊어졌습니다.” 제가 한 말을 신문에서 타이틀로 썼는데, 제가 한 말이지만 좋아서 외웠어요. 이게 지난 50년 동안 제 삶을 축약해주는 게 아닐까 합니다. 언어로 쓰는 시도 중요하지만 내 삶을 시로 채우기 위해서는 욕심과 이기심을 버리고 절제되고 간결한 삶을 사는, 존재 자체로 한 편의 시가 되어야겠구나, 결심하게 되더군요. 지상의 소임을 마치고 하늘나라로 이사갈 날이 머지않은 이 시점에서 이 나이에서는 그런 고백을 하게 됩니다.
⇒ 2004년 이해인 수녀 인터뷰(//ch.yes24.com/Article/View/12857)
백지혜 화가도 그림 그리는 세월이 점점 쌓여가는데요.
백 :대학 생활을 포함하면 그림 그린 지 벌써 20년이 되었네요. 저도 깜짝 놀랐죠. 특히 이번 책이 두 번째 책인데, 첫 번째 책은 7년 전에 나왔으니“아, 그만큼 시간이 많이 지났구나.”라고 느꼈어요. 그림을 포기할 뻔했던 적도 있었고, 어려움도 되게 많았어요. 아직도 힘이 되는 기억은, 인사동에서 처음으로 개인전을 열었을 때에요. 아침 10시 반에 갤러리 문을 열자마자 어떤 아주머니가 들어오셨어요. 그림을 30분간 찬찬히 보고 나가셨거든요. 이른 시간에 오신 것도 눈에 띄었고, 보통 5분이나 10분 정도 쓱 보고 나가시는데, 그렇게 오래 머문 게 기억에 남았어요. 1시간 후에 오셔서 비닐봉지를 전달하시는 거죠. 그 안에는 오미자차가 포장되어 있었어요. 그분이 말씀하시길, “너무 마음이 우울해서 눈앞에 보이는 갤러리로 들어왔는데, 그림을 보고 마음에 위안을 얻었다.”
지금도 어떤 그림을 그리고 싶으냐고 질문을 받으면 사람들의 마음에 힘을 줄 수 있는 그림, 위로를 줄 수 있는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이야기해요. 제가 그렇게 마음을 먹으면 그런 그림을 그릴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림책 작업도 일환이에요. 갤러리에서 그림을 발표하는 건, 짧으면 1주일 길면 열흘 정도 기간과 그림을 볼 수 있는 대상이 한정적일 수 밖에 없지만 그림책은 그 그림책을 사서 보는 모든 이를 대상으로 하거든요. 어떻게 보면 제가 생각하는 그림의 의미와 그림책이 맞닿을 수 있겠구나,싶어요. 그래서 그림책을 시작하게 됐고요. 꼭 어린이를 위해서만 아니고 어머니나, 아이가 있지 않은 사람이라도 내 마음을 쉬고 싶을 때 책을 보고 휴식을 취해주시면, 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이해인 수녀님은 교황 관련해서 글도 썼는데요.교황에게 기대하는 게 있다면?
이 : 국민적인 우울증, 의기소침, 침울하고 다운되는 분위기인데요. 반짝 특수, 이런 거 말고 진정한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왜 우리가 좌절과 절망을 딛고 일어나서 희망을 품고 살아야 하는지를 교황님의 자연스럽고 따뜻한 모습에서 각자가 깨달았으면 합니다. 그래서 각자 삶의 질이 좀 더 고상해지고 우아해지면 좋겠어요. 교황님이 다녀가신 후에, 삶에 활기를 찾고 이웃을 배려하고 이기심에서 빠져나와 새 삶을 사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습니다. “멋있는 분이네, 잘 가시오.” 이런 반짝 특수가 아니라 교황님이 일상생활과 결부되는 하나의 촉매제 역할을 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에요.
많은 독자가 수녀님의 시집, 산문집을 기다릴 것 같은데. 다음 작품은?
이 : 시 전집까지 나왔기 때문에, 시집이 안 나와도 되겠구나, 생각했는데요. 글은 계속 써지니까, 단상이건 시집이건 그림책이건 아직도 살아 있다면 몇 권 더 나올 수도 있겠구나, 싶어요. 그렇지만 구체적으로 언제 뭘 내겠다는 건 안 정했어요.
백지혜 화가의 차기작은?
백 :상반기는 그림책에 매진하느라 해왔던 작업에서 잠시 손을 놓았는데요. 내년 봄에 개인전이 잡혀 있으니 본업으로 들어가서 전시 준비를 해야 할 것 같아요. 그리고 다른 책을 준비 중인데요. 집에 사는 사람에 관한 에세이입니다. 지금 오래된 동네에 작은 집을 짓는데, 점점 주택에서 사는 사람이 적어지고 있잖아요. 그 기억을 갖고 있는 사람도 줄어들고 있고요. 어렸을 때부터 마당에서 살았던 경험, 기억을 바탕으로 집을 지으면서 살게 되는 이야기까지를 쓰고 있어요. 언제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준비 중입니다.
밭의 노래 이해인 글/백지혜 그림 | 샘터
《밭의 노래》는 이해인 수녀의 시로 만든 첫 그림책입니다. 이해인 수녀는 어른들을 위한 시로 많이 알려졌지만, 처음 발표한 시는 ‘동시’입니다. 1970년 어린이 잡지《소년》에 동시 하늘, 아침 등이 추천되어 시인으로 등단했지요. 밭노래라는 시는 생전에 동화작가 정채봉 씨가 이해인 수녀의 동시 중 가장 좋아하는 동시로 꼽았던 것으로, 밭에 나가면 만날 수 있는 다양한 채소와 식물, 곤충들을 정겹게 그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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