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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을 기다린 사랑이 눈앞에 나타났다 - 뮤지컬 <드라큘라>
화려한 무대, 그러나 드라큘라에게만 절절한 사랑
“많은 세월을 살아 세상의 모든 것을 알 줄 알았는데 왜 이제야 의심하게 됐나. 무엇이 옳은 길인가? 영원한 삶, 혼자라면 의미 있나?” 대단한 진보다. 무조건 자신이 원하는 방식의 사랑만을 고집하던 드라큘라는 그녀를 끊임없이 갈구하다가 결국 이런 깨달음을 얻게 된다.
뮤지컬 배우 류정한, 김준수 드라큘라 백작으로
드라큘라, 혹은 뱀파이어의 존재는 매력적이다. 인간의 원초적인 숙명이자 한계, 죽음의 문제를 뛰어넘은 불멸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뱀파이어들은 수많은 이야기로 스크린과 무대를 장악해왔다. 자신은 죽음 없는 영원한 삶을 살면서도, 남을 죽여야만 그 영원을 유지할 수 있는 그들의 아이러니한 생명력은 더없이 매혹적인 이야깃거리다. <뱀파이어와의 인터뷰> <트와일라잇> <렛미인> 등등 뱀파이어는 호러, 로맨스, 액션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출몰한다. 뱀파이어라는 명칭만으로도 브래드 피트, 톰 크루즈, 로버트 패틴슨 등 핏기없는 아름다운 배우들의 얼굴이 여럿 떠오른다.
이제는 외국 배우들의 얼굴들에 앞서 드라큘라로 변신한 뮤지컬 배우 류정한과 김준수가 떠오른다. 새하얀 얼굴에 붉은 눈동자. 명불허전 매번 무대에서 배역에 완벽한 모습을 보여주는 류정한과 특유의 쉰 목소리와 두꺼운 팬층을 지닌 가수 JYJ의 김준수가 뮤지컬 <드라큘라>에서 음산한 매력이 넘치는 드라큘라 백작으로 분했다. 브램 스토커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뮤지컬 <드라큘라>는 2001년 샌디에이고에서 초연 이후 2004년 브로드웨이와 스웨덴, 오스트리아, 영국, 캐나다, 일본 무대를 거쳐 한국까지 왔다.
1000년 전 나의 연인과 꼭 닮은 그녀
배경은 19세기 말, 드라큘라 백작이 사는 트랜실바니아의 성에 젊은 변호사 조나단과 그의 약혼자 미나가 도착한다. 드라큘라는 미나를 보자마자 1000년 전에 죽은 연인 엘리자베스를 기억해낸다. 엘리자베스와 똑같은 외모의 미나를 보고 드라큘라는 기다리던 사랑이 드디어 자신을 찾아왔다고 믿고, 미나를 유혹하기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하지만 영문을 알지 못하는 미나는 그저 드라큘라의 유혹에 당황스럽다. 그의 매혹적인 모습에 끌리면서도 미나는 안정적인 미래를 보장해줄 수 있는 조나단과 결혼을 한다. 그럼에도 드라큘라는 스토커처럼 미나 곁을 맴돌며 그녀를 위험하게 유혹한다.
드라큘라가 워낙 훤칠한 모습으로 등장해 섹시하게 노래를 부르니 미나가 유혹에 흔들리는 것까지는 이해한다. 하지만 사랑까지는 모르겠다. 드라큘라가 2막이 끝날 때까지 곧 죽어도 미나에 대한 사랑을, 아니 유혹을 포기하지 않으므로 결국 이 이야기는 ‘유혹받는 미나가 드라큘라 백작에게 진실한 사랑을 깨닫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데, 요즘 말로 하면 ‘얼빠’인 드라큘라에게 관객 역시 진실한 사랑을 깨닫기에는 역부족이다. 왜 ‘얼빠’냐고? 극 속에서 드라큘라가 미나를 사로잡으려고 애쓰는 이유는 오직, 1000년 전 그녀 엘리자베스와 닮았기 때문이다. 관객이 드라큘라 혼자 절절한 사랑에 몰입할 수 없는 이유다.
뮤지컬 <드라큘라>는 나름의 선택과 집중을 했다. 오직 사랑, 그것만을 이야기하기로 한 것이다. 드라큘라의 사랑, 이 또한 얼마나 구구절절한 사연을 품고 있다. 영화 <박쥐>만 떠올려봐도 그렇다. 사랑하는 사람과 생활패턴이 다른 데서 오는 애로사항(연애할 때 대단히 큰 난관!) 식습관이 다른데서 오는 문제(이게 얼마나 큰 문제인데!) 결정적으로 사랑하는 연인이 유한한 존재, 죽음을 앞두고 있다는 데서 오는 존재적인 고민. 드라큘라 백작의 이야기로 풀어낼 수 있는 소재는 무궁무진하다.
사랑 이야기, 선택은 하되 집중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뮤지컬 <드라큘라>는 선택은 하되 집중은 하지 않았다. 깊이가 덜하다. 대사는 쉴 새 없이 퍼붓지만, 메시지는 공허하다. 그저, 너를 원한다는 것뿐이기 때문이다. 아쉽게도 무대 위에 드라큘라는 존재고 고독이고 정체성이고 뭐고 생각할 틈이 없다. 오직 미나한테만 꽂혀 있어서, 하나만 보고 달린다. 지켜보는 관객들은 어쩌고? 생각할 틈이 사라지니 지루할 틈이 생긴다.
사랑을 이루지 못한 드라큘라는 애꿎은 사람들을 공격한다. 미나가 자신을 받아주지 않자, 영원에 눈이 먼 그녀의 친구 루시를 유혹해 뱀파이어로 만든다. “저에게 세상을 준다고 약속했어요.” 얼마나 달콤한가? 하지만 언제나 약장사는 약의 이로움만을 얘기하지, 약의 부작용은 말하지 않는다. 그런 건 약 봉투를 어딘가에 아주 작은 글씨로 명시(암시)되어 있을 테니 스스로 찾아야 한다.
하지만 들뜬 사람이 그런 꼼꼼함을 지닐 수 있나? 자연의 법칙을 맞서서 신이 되고 싶은 사람들은 유혹에 단번에 넘어가 드라큘라에게 조종당한다. 영생의 삶은 행복할 줄 알았건만, 피를 갈구하며 매일 밤 자신을 향해 총을 겨누는 세상에 맨몸으로 뛰어들어야 한다. 잘 살펴보면 자연의 법칙을 맞서고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약자다. 극 속에서도 가난한 사람들이거나 여자였다. 자신의 의지대로 삶을 꾸려갈 수 없는 사람. 부족한 게 열등감으로 작용하는 사람들은, 부족한 걸 적당히 채우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한다. 그들은 필요한 것 이상으로 넘쳐야 만족한다. 영생의 삶이 왜 필요한 건데? 혼자만 영생을 누려서 뭐하게? 초월을 꿈꾸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그런 성찰이 있을 리 없다. 배고픈 사람에게는 밥 한 공기가 언제나 부족해 보이는 법이다.
“영원한 삶, 혼자라면 의미 있나?”
하지만 여기 사랑에 빠진 드라큘라 백작은 드디어 생각이란 걸 해낸다. 이제까지 딱히 생각할 필요도 없었을 거다. 원하는 건 뭐든지 가질 수 있고, 그 오랜 시간 동안 할 수 있는 웬만한 일은 다 해봤을 테니까. 하지만 여기, 자기 뜻대로 조종되지 않는 여자, 평소 자기 맘대로 막대할 수 없는 여자 앞에서 드디어 생각이라는 걸 한다.
“많은 세월을 살아 세상의 모든 것을 알 줄 알았는데 왜 이제야 의심하게 됐나. 무엇이 옳은 길인가? 영원한 삶, 혼자라면 의미 있나?” 대단한 진보다. 무조건 자신이 원하는 방식의 사랑만을 고집하던 드라큘라는 그녀를 끊임없이 갈구하다가 결국 이런 깨달음을 얻게 된다. 내가 원하는 게 아니라 그녀가 원하는 건 무엇일까? 그녀가 원하는 사랑은 어떤 것일까?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사랑은 사람을 진화시킨다.
“당신 때문에 자유를 줘도 소용없어.” “나와 함께 이별 없는 사랑, 죽음 없는 사랑, 영원한 하룻밤”을 보내자는 드라큘라의 유혹은 과히 매혹적이다. 특히 나쁜 남자 캐릭터를 맡을 때 더욱 빛을 발하는 류정한의 뇌쇄적인 연기는 관객인 나까지 술렁이게 했다. 하지만 애초에 알맹이 없이 시작된 사랑은 끝까지 사랑의 알맹이를 채워내진 못한다. 관객까지 드라큘라 백작과 사랑에 빠지게 만들었다면 포스터에 쓰인 광고 문구처럼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사랑이야기가 되었을 텐데. 어떤 의미에서는 결국 드라큘라가 사랑을 이룬 셈인데도, 마음 한구석에 공허함을 남긴 채 막이 내린다.
그럼에도 뮤지컬 <드라큘라>는 보는 재미가 있다. 170여 분의 시간 동안 화려한 무대를 자랑한다. 거대한 기둥이 육중하게 움직이며 무대를 돌고, 세트가 산산이 흩어졌다가 다시 완성되고, 전환되는 무대를 배우가 걸어나갔다 들어오게 하는 4중 회전 무대는 내내 눈을 사로잡았는데, 국내에서 처음 시도된 무대 기술이다.
또 안개로 뒤덮인 음산한 트랜실바니아의 성, 공동묘지, 돌무덤으로 덮여있는 지하 공간 역시 섬세한 기술로 재현되어 대단히 입체적으로 다가온다. 또 믿음직한 배우들의 연기를 보는 맛도 좋다. 류정한, 김준수를 비롯 조정은, 정선아, 양준모, 카이 등 뮤지컬계의 슈퍼스타들이 화려한 무대에서 열연을 펼친다. 뮤지컬 <드라큘라>는 9월 5일까지 예술의 전당 오페라하우스 오페라극장에서 공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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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라는 무대의 주연답게 잘, 헤쳐나가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