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불후의 칼럼 > 하지현의 마음을 읽는 서가
지갑이 쪼들리면 각박해지는 이유
인간성이 아니라 뇌의 용량문제였다 『결핍의 경제학(Scarcity, why having too little mean so much)』
분명한 것은 일단 ‘나의 인간성이 죄가 있는 게 아니라, 지금 나의 지갑상태가 나의 마음을 쪼들리게 한다’는 메커니즘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래야 괜한 자책과 책망, 죄의식으로 아까운 마음의 에너지는 낭비하는 일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5월 셋째 주부터 격주 월요일, 하지현 건국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가
추천하는 심리책 이야기, ‘하지현의 마음을 읽는 서가’가 연재됩니다.
“왜 이런 걸 나한테 물어보는 거야? 세훈 씨 입사 몇 년차에요? 2년차면 이런 혼자 알아서 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옥경 선배, 제가 혼자 알아봐도 되는 일이긴 한데요. 본부장님이 특별히 신경 쓰는 프로젝트라 확인 차.”
“본부장이 신경 쓰는 일과 신경 쓰지 않는 일은 다른 건가요? 똑같이 우리 고객사 일이고, 차별없이 일을 해야지, 본부장님이 관리하는 프로젝트라고 신경을 더 쓰겠다는 세훈 씨 마인드가 기본부터 틀린 거야. 어떻게 생각해요?”
“알았습니다.”
평소 “사람 좋다”는 평판을 들어온 옥경은 같은 팀 후배 세훈에게 자기도 모르게 짜증을 내고 말았다. 특별히 거슬리던 후배도 아니고, 충분히 물어볼만한 일이었는데 말이다. 내 코가 석자라는 마음으로 저녁까지 보내야하는 보고서를 작성하려고 모니터를 쳐다보는데 집중이 잘 되지 않았다. 이때 카톡으로 남자친구가 ‘지금 뭐해?’라는 문자를 보냈다. 할 얘기가 있는 것 같았지만 지금은 웃으면서 통화를 할 기분이 아니라 무시했다. 그러나, 이미 문자를 읽은 것으로 표시는 넘어간 것이 마음에 걸렸다. 어느새 점심시간이 되어 동료들이 밥을 먹으러 가자고 한다.
“언니,오랜만에 스파게티 먹으러 가요. 런치 세트 잘 나오잖아.”
옆 자리의 보라가 빨리 나가자고 재촉을 한다. 왠지 오늘은 내키지 않았다.
“그냥, 난 일이나 할래. 다른 사람들이랑 가. 보고서 아무래도 빨리 끝내서 과장님 검토 받아야지.”
“언니 그런다고 월급 더 주는 것도 아니잖아. 어휴! 알았어요.”
사실 옥경은 보라의 씀씀이를 함께하는 것이 부담스러운 면이 있었다. 유복한 집에서 자라 부모와 함께 살고 있는 보라에게 월급은 용돈으로 쓰는 것 같아 보였다. 같이 다니면 밥먹고 커피 마시는 게 혼자 먹을 때 며칠 치는 쓰게 된다. 오늘따라 확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모두가 나간 텅 빈 사무실에서 멍하니 앉아 있으면서, 한숨이 나왔다.
‘휴... 내가 오늘 왜 그러지?’
인간성이 회사생활에 찌들어 변해버린 것일까
일이 많아진 것은 아니지만, 최근 옥경의 삶에는 이런 변수가 있었다. 이번 달에 집 계약이 만료되는데 집주인이 전세를 2천만 원을 올려달라고 통보를 했다. 거기다 군대를 제대한 남동생이 이번 가을에 복학을 위해 등록금을 도와달라는 SOS를 한 것도 있었다. 남자친구는 결혼을 눈치 주는 데 모아 놓은 돈은 별로 없고, 부모는 사회생활을 꽤나 했으니 자기 결혼자금 정도는 해놓았을 것으로 철석 같이 믿는 눈치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다시 한숨이 푹 쉬어졌다. 내가 뭘 잘못한 것도 아니고, 열심히 남들 하는 것 이상으로 살아왔는데 왜 이런 것이지? 거기다 이제는 인간성마저 이상한 사람이 되어가는 것 같다. 도대체 뭐가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옥경 씨는 요사이 자신의 변화를 이해할 수 없었다. 이러다가 옥경이 제일 닮고 싶어 하지 않았던 선배 같은 마녀가 되어버릴 것 같아 무서웠다.
옥경의 인간성이 회사생활에 찌들어 변해버린 것일까, 아니면 원래 조금 이상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것일까? 옥경의 마음을 달래줄 만한 책이 없을까하고 서가를 둘러보니 눈에 들어오는 책이 한 권 있다. 『결핍의 경제학』이다. 하버드 대학의 경제학과 교수인 센딜 멀레이너선과 프린스턴 대학의 심리학과 교수인 엘다 샤퍼가 함께 쓴 책으로 경제적 궁핍이 인간의 마음을 쪼들리게 하는 메커니즘에 대해서 경제학과 심리학을 통합해서 제시했다.
저자들은 한 사람의 정체성 자체가 야박하고 좁은 시야를 갖고 있는 것보다는 환경과 상화의 변화가 같은 사람의 마음의 씀씀이를 변화시킬 수 있고, 이로 인해 경제적으로 궁핍한 상태가 되면 의사결정 구조도 달라지고 시야가 좁아지고 생각에 더 많은 에너지를 쏟다보니 쉽게 피곤해지는 경향성이 발생한다고 주장한다.
나의 지갑상태가 나의 마음을 쪼들리게 한다
『결핍의 경제학』저자는 다음과 같은 실험을 제시한다.
승용차가 고장 나서 고치는데 300달러가 든다. 보험사가 반을 부담하는데, 이때 바로 고칠 것인지 아니면 그냥 타고 다닐 것인지 판단을 해야 한다. 어떻게 결정을 내릴 것인가? 라는 문제를 낸 후에 인지적 유연성과 추상적 사고능력을 평가하는 RPM이란 심리검사를 시행했다. 그리고 나서는 고치는 비용을 ‘거금 3,000달러’로 바꿔서도 해보았다.
이때 실험 참가자는 부자와 가난한 사람으로 분류했다. 수리비가 300달러 일 때에는 RPM검사에서 차이가 나지 않았는데, ‘거금 3,000달러‘일 때에는 RPM검사에서 가난한 사람 집단에서 확연히 낮은 성적을 냈다. 가상실험에서 꽤 큰 목돈을 놓고 고민을 하게 한 것만으로 갑자기 지적 능력이 떨어져 버린 것이다. 부자에 비해서 가난한 사람들은 경제적 부담을 큰 심리적 압박으로 받아들였고, 이로 인해 인지적 여유가 줄어들어 버리는데 그 수준이 마치 하루를 꼬박 밤을 새운 다음보다도 큰 정도였던 것으로 대략 IQ 검사로는 약 13점에 해당했다.
이번에는 뉴저지주의 쇼핑몰을 찾아온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기판 위에 하트가 나오면 바로 그 자리를 누르고, 꽃이 보이면 반대쪽 화면을 누르는 실험을 했다. 하트를 누르는 것은 별로 어려운 것이 아니지만, 꽃이 나올 때에는 꽃을 바로 누르려는 욕구를 참은 다음에 반대 쪽을 눌러야한다. 즉, 실행 제어를 억제하는 충동억제 능력을 실험하고 비교하는 것이 목적인 실험이다. 아까와 같은 제시문을 받은 다음에 수리비가 300달러일 때에는 부자나 가난한 집단이나 실험 결과가 비슷했다. 그런데 3,000달러를 고민하라고 한 다음에는 가난한 집단의 점수에서 꽃이 나왔을 때 반대쪽 화면을 누르는 점수가 확연히 떨어지는 것이 관찰되었다. 실수가 많아진 것이다. 300달러 질문을 받고 난 다음에 제대로 누르는 비율이 83%였던 사람이 3,000달러를 놓고 고민하라고 하니 바로 63%로 떨어져버린 것이다.
즉, 경제적으로 궁핍한 사람은 이와 관련한 고민을 하는 인지부하(cognitive loading)이라는 일종의 마음의 세금을 내느라고 뇌의 가용자원을 활용하다 보니, 실제 머리를 고도로 써야하는 작업, 여유있게 다른 방향으로도 생각을 해야 하는 인지적 여유, 충동을 억제하는 실행억제능력이 일시적으로 떨어진다는 것을 실험으로 증명했다.
옥경이 세훈에게 참지 못해서 짜증을 내고, 보고서에 집중을 해도 효율이 오르지 않고, 런치 메뉴로 상대적으로 저렴하게 먹을 수도 있고 기분전환도 할 수 있었던 보라와의 점심을 먹자고 할 때도 ‘나는 지금 힘들어’라면서 다른 대안을 생각하지 못한 것도 모두 사실은 옥경이 사람의 성격이 나빠져서 그런 게 아니라, 옥경이 현재 경제적으로 쪼들리는 상황으로 인식하고 있고 그로 인해 많은 고민을 안고 있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던 것이다.
『결핍의 경제학』저자들은 이와 같은 현상을 넓혀서 해석하기도 한다. 가난한 사람들이 다른 대부방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반복해서 높은 이자의 대출을 유지하고 빚을 갚지 못하는 악순환에 있는 이유는 그들의 시야가 좁아져서 다른 대안을 생각할 인지적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급한 불만 매번 끄느라 바빠서 터널링에 사로잡혀 땜질 처방만 하느라고 먼 미래에 대한 계획을 세울 수 없고, 충동억제가 안되어 성급한 판단을 하다 보니 실패를 거듭하고 더욱더 가난의 늪에 빠지게 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결핍의 경제학』저자들은 마음의 여유를 가질 인지적 대역폭을 넓히기 위해 노력하고, 마음의 에너지를 절약하려고 애를 써야하고, 느슨한 완충 장치를 만들 것 등을 해결책으로 제시하고 있다. 쉽지 않은 일임은 분명하다. 분명한 것은 일단 ‘나의 인간성이 죄가 있는 게 아니라, 지금 나의 지갑상태가 나의 마음을 쪼들리게 한다’는 메커니즘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래야 괜한 자책과 책망, 죄의식으로 아까운 마음의 에너지는 낭비하는 일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거기서 터 시작하자.
그리고, 하나둘씩 가난과 쪼들림이 조장하는 판단 실수, 충동적 판단의 악순환에 빠지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나의 마음의 대역폭과 인지적 여유를 넓히고, 이것이 나의 경제적 결핍 상황에 의해서 휘둘리지 않게 하려는 훈련을 해나가는 것이다. 쉽지 않지만 세상이 각박하다고 나까지 각박해져서 인간이 황폐화되지 않으려면, 꼭 필요한 일이다.
[관련 기사]
[추천 기사]
- 산책자의 거리, 용산을 다시 보다
- 밀양의 잔인한 봄을 기록하다
- 세월호, 쌍용차 사태에서 우리가 체험해야 할 것
- 성석제, '투명인간'이라기엔 너무 평범한 남자 이야기
관련태그: 결핍의 경제학
어릴 때부터 무엇이든 읽는 것을 좋아했다. 덕분에 지금은 독서가인지 애장가인지 정체성이 모호해져버린 정신과 의사. 건국대 의대에서 치료하고, 가르치고, 글을 쓰며 지내고 있다. 쓴 책으로는 '심야치유식당', '도시심리학', '소통과 공감'등이 있다.
<센딜 멀레이너선>,<엘다 샤퍼> 공저/<이경식> 역16,200원(10% + 5%)
결핍이 우리의 사고방식을 지배한다! 성공하는 사람은 어째서 마감시한에 임박해서 일을 끝낼까? 조직은 왜 늘 급한 불을 끄느라 정신이 없을까? 사람들은 왜 자기가 충동적으로 소비한다고 걱정할까? 외로운 사람은 왜 친구를 사귀기 어려울까? 빈곤은 왜 사라지지 않을까? 이런 의문들은 서로 아무런 관련이 없어 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