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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 말고 결혼>, 이토록 유쾌한 SOS

공기태가 주장미에게 보내는 구조 요청 로맨스 얼음 성에 갇힌 왕자를 구해내는 공주의 사랑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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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을 들고 공주를 구하는 왕자가 아니라도 좋다. 어여쁜 드레스를 입고 성탑에서 왕자를 기다리는 공주가 아니라도 좋다. 지금의 공기태와 주장미로 충분하다. 주장미를 껴안는 강기태의 팔, 이 이상 유쾌하고 즐거운 SOS는 없을 테니까.

솔직히 말해서 공기태(연우진)가 여태 본 적 없던 유형의, 새롭고 독특한 캐릭터는 아니다. 독신을 목표로 위장 연애를 제안하는 남자 주인공은 10여 년 전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에도 있었고, 활달하고 명랑한 여자 주인공과 갈등을 빚는 차갑고 냉철한 남자 주인공은 이미 고전이다. 아무리 로맨스가 오만과 편견』 이후 새로운 게 없는 장르라지만, 이쯤 되면 고전적 클리셰로 빚어냈다고 할 법하다.


3회, 공기태가 이틀 만에 제 집에서 주장미(한그루)에게 간신히 구조되는 장면은 그래서 눈을 잡아끈다. 왕자는 제 집 화장실에서 벌거벗고 조난당하고, 공주는 두 발 벗고 나서 그를 구출한다. 클리셰를 깨다 못해 로맨스의 환상까지 와장창 부수는 장면이다. 그러나 이내 주장미의 등을 간절히 껴안는 공기태의 손. 이 상황을 떨리는 로맨스로 만든 것은 그 손길이었다. 오죽하면 주장미조차 ‘이 사람 머리가 다친 것 같다’고 할 정도로 강렬한 포옹. 그 손이 그저 인사치레가 아니라 나를 이 얼음 성에서 구해달라는 구조 요청으로 보인 것은 나뿐일까?
 
로맨스의 남자 주인공이 ‘어떻게’ 왕자가 되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태어날 때부터 그림 같은 동화 속 우아한 주인공으로 살아왔다는 사실 증명이면 충분하다. 그런데 공기태, 곰곰 살펴보면 태생부터 왕자는 아니다. 오히려 만들어진 동화 속 배경이랄 만하다. 완벽하고 동화 같은 삶을 바라는 어머니(김해숙)는 필사적으로 아름다운 가정을 유지하려 해 왔다. 아버지의 외도를 모른 척 하고, 다른 가족 구성원의 이야기는 무시하며 어머니의 의사대로 모든 것이 결정돼 온 집이다. 공기태 역시 직접 칼을 들고 공주를 구하러 가는 왕자가 아니라, 프레임 안에 멋있는 옷을 걸치고 서 있으면 그만인 허수아비로 자랐다. 결국 어머니에게 진절머리를 내고 집을 뛰쳐나왔다. 그럼에도 어머니는 호시탐탐 아들을 다시 자신의 ‘동화’ 안에 집어넣으려 한다. 모른 척 정말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을 하나 했더니 어그러졌다. 세아(한선화) 역시 어머니처럼 자신을 손에 쥐고 흔들려 했기 때문이다.

 

자신을 제 인생의 부속품 정도로 보는 세아에게 실망하고 분노했을 기태의 심정은 충분히 짐작 가능하다. 결혼에 질색하고 혼자 있을 수 있는 비혼주의자의 삶을 선택한 것도 이해가 간다. 결혼 자체가 싫어서라기보다 나 자신을 존중받기 위해 선택한 비혼인 것이다. 이렇게 왕자는 스스로 얼음 성을 쌓았다. 아무도 나에게 간섭하지 말라고, 나는 나의 삶을 살겠다고. ‘Let it go’를 부르며 자신의 얼음 성으로 들어가 버 <겨울왕국>의 엘사처럼 공기태는 자신의 얼음 성을 쌓고 그 안에 꽁꽁 숨어버렸다.

 

 연애말고결혼

출처_ tvN

 

이 드라마가 다른 로맨틱 코미디와 달라지는 것은 여기서부터다. 으레 능동적인 태도로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을 그녀의 현실에서 ‘구출’하는 여타의 로맨스와 달리, 이 드라마는 여자 주인공 주장미가 남자 주인공 공기태를 구출한다. 스스로 쌓았기에 더욱 견고하고 깨기 힘든 얼음 성의 문을 두드리며, 이제 그만 나오라고 소리치는 것은 주장미뿐이다. 혼자 있는 시간을 못 견디고 오지랖 넓은 주장미를 공기태는 항상 타박하지만, 그가 조난당했을 때 그를 걱정해준 것은 주장미뿐이었다. 주장미가 타인의 안위와 행복에 대해 언제나 걱정하고 염려하는 따뜻한 사람이었기에 공기태는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았던 집에서 구조됐던 것이다.


<연애 말고 결혼>에서 진정으로 ‘당신은 안녕하냐’고 물어보는 캐릭터는 주장미 단 한 명이다. 이는 드라마를 통틀어 공기태에게 가장 적합한 상대가 주장미라는 뜻도 된다. 니가 뭔데 주제넘게 그런 소리를 하냐는 일갈은 여태 누구도 건드린 적 없었던 기태의 상처를 알아본 유일한 사람이 장미라는 반증이다. 아프고 힘들겠지만, 곪은 상처를 덮는다고 살이 새로 나지는 않는다. 쿡 찔러 고름을 짜내고 연고를 도닥도닥 발라야 상처가 아문다. 그의 상처를 들추고 구조하는 것은 기태의 깊은 상처를 알아본 장미만이 할 수 있는 일일 터다.


6회, 마지막 장면도 그렇다. 위장 연애 증거를 잡기 위해 세아가 사람을 붙인 상황, 이미 세아는 결정적 증거를 갖고 있다. 장미 역시 좋은 감정을 갖고 있는 한여름(정진운)도 함께 있고, 이미 위장 연애를 끝내자고 합의도 한 상태다. 기태야 물론 위장 연애가 밝혀지면 당장 집으로 끌려들어가겠지만 주장미가 여기서 굳이 나설 필요는 없다. 하지만 주장미는 그를 모르는 척할 수 없다. 쇼윈도에 진열된 삶에 공기태가 얼마나 지치고 힘들었는지 알고 있기에. 먼저 나서 위장 연애에 한 발을 보태고, “그동안 나 많이 참았어요. (…) 공기태, 내 남자에요.” 입을 맞춘다. 다시 한 번 공기태를 구조하는 셈이다. 

 
다들 공기태의 얼음 성을 올려다보기만 할 때, 사실은 나 홀로 여기에 있노라고 외치는 공기태의 SOS를 듣고 문을 두드린 것은 주장미였다. 세아건 다른 여자건, 장미보다 못한 여자인 까닭은 그 때문이다. 사랑도 결혼도 싫다, 로맨틱한 환상일 뿐이라 비웃던 이 남자가 실은 얼음 성에서 고독히 SOS를 보내던 조난자였기 때문이다. 칼을 들고 공주를 구하는 왕자가 아니라도 좋다. 어여쁜 드레스를 입고 성탑에서 왕자를 기다리는 공주가 아니라도 좋다. 지금의 공기태와 주장미로 충분하다. 주장미를 껴안는 강기태의 팔, 이 이상 유쾌하고 즐거운 SOS는 없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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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김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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