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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처세왕> , 단순함에서 최고의 처세를 찾다

tvN <고교처세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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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세라는 게 손자병법의 묘책처럼 수가 다양하고 현란해야 좋은 건 아닐지도 모른다고 말해주는,가장 자기다운 그래서 단순한 그 모습이 최고의 처세가 되어줄 거라고 말하는 <고교처세왕>이 시작되었다.

첫 직장에서 나의 처세술은 형편없었다. 예의 바르고, 근태가 성실하고, 일을 잘했지만 속내를 감추는데 능숙하지 못해서 요동치는 감정기복이 고스란히 드러나기도 했다. 그런 점이 불안 요소가 되어 내 발목을 붙잡았다. 지금이야 글을 쓸 때 꽤 좋은 전략이 되어주는 솔직함도 직장생활에서는 미덕이 되지 못했다. 어떤 가면이 필요했지만 그때는 갑갑함을 견딜 수 없었다. 늘 회사 내부가 돌아가는 상황에 관심을 가지고 관계성을 파악해야 했다. 업무보다 오히려 그게 더 중요할 때도 있었다. 나는 그저 맡은 일을 적임자와 함께 했을 뿐인데 라인을 잘못 탄 직원이 되어 이유를 알 수 없는 미움을 받기도 했다. 초년생 때에 그 모든 것이 버겁고 힘들었다. 새벽 3시까지 이어지는 야근을 못 버틴 게 아니었다. 영혼을 두고 출근해야 하루를 버틸 수 있었다. 그런 기묘한 구조 속에서 구르다 보니 때를 탔다고 표현을 해야 할 지 연차가 올라갈수록 조금씩 능청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여러모로 많은 권한을 가지고 좀 더 큰 일을 재량 것 도맡아 처리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을 때 나는 회사를 그만두고 말았다. 나를 잃는 느낌이 싫었다. 이를테면 나는 처세에 실패한 것이다. 그래서 스스로를 자책하기도 했었다. 두 발로 뿌리를 내리고 버티지 못했다는 건 이 사회의 패자가 된 기분을 느끼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그 처세라는 게 손자병법의 묘책처럼 수가 다양하고 현란해야 좋은 건 아닐지도 모른다고 말해주는 드라마가 나타났다. 가장 자기다운, 그래서 단순한 그 모습이 최고의 처세가 되어줄 거라고 말하는 <고교처세왕>.

 

고교처세왕2.jpg

 

요즘 드라마들은 복합 장르를 표방한다. 하나의 장르만으로는 장르 공식을 꿰뚫고 있는 시청자들에게 더 이상 새로움을 선사하지 못한다. 그리하여 <고교처세왕>은 ‘코믹 오피스 활극’이라는 이름을 앞세워 추억의 드라마 <TV 손자병법>처럼 직장인들의 여러 군상을 그려낸다. 활극이라는 말에 걸맞도록 대기업 본부장으로 부임한 이민석은 심지어 18세 고등학생이다. 그 자리에 내정되어 있던 형인 이형석이 어떤 연유로 나타나지 못하고 있으며, 왜 자신을 닮은 동생에게 이런 말도 안 되는 부탁을 하며 자기 노릇을 대신하게 만든 건지가 이 드라마의 핵심 미스터리 축이 된다.

 

하키 선수이자 교내 인기남인 이민석이 학교와 회사라는 동시간 대 생활영역에서 이중생활을 한다는 것이 가장 큰 무리수이긴 하지만, 그 설정만 받아들일 수 있다면 흥미롭게 볼 수 있는 드라마이다. 아직은 방영 초기이기 때문에 18세 이민석의 시점에서 드라마가 전개된다. 복잡할 것 없이 단순한 접근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과정들보다 드라마의 초반 설정을 이해시키는데 디딤돌을 쌓는 중이지만 그럼에도 배우들의 매력이 넘쳐나기 때문에 이 드라마에 집중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이하나는 엉뚱하고 예쁜 척하지 않으면서도 특유의 코믹함이 녹아 있는 정수영를 자연스럽게 연기한다. 매니아를 형성했던 <메리대구공방전>에서 보여주었던 과장스러움의 연장선에 있는 캐릭터이지만, 정수영의 지질한 면도 그녀가 연기하면 사랑스럽게 보인다. 정수영이 처한 상황은 이 드라마에서 가장 현실적이다. 2년째 계약직인 비정규직 여사원으로 녹록하지 않는 직장생활을 견뎌내며 늘 자신에 대해서 고민한다. 대기업 비정규직으로 존재감 없이 잡무만 하던 그녀가 이민석을 도와 활약하는 모습은 이 드라마에서 꿈꿀 수 있는 현실적인 로망이다.  정수영이 유진우 본부장을 짝사랑하고 눈치 없게 고백했다가 냉정하게 거절 당하는 초반 에피소드는, 여주인공이면 무조건 본부장과 연애하게 되는 로맨틱 코메디 장르를 살짝 뒤틀었지만 말이다. (물론 이민석과 러브 라인이 형성되고 말테지만)

 

사장의 혼외 아들인 유진우 역할은 모델 출신 배우 이수혁이 맡고 있다. 특유의 붕붕 벌이 날개짓을 하는 듯한 목소리는 어쩌면 느끼하게 느껴지거나 대사 전달력이 떨어질 만도 한데, 이수혁을 보고 있으면 그에게 빨려 들어가 그의 말들이 스며들게 되는 묘한 경험을 하게 된다. 오히려 집중하게 만드는 요소랄까. 드라마스페셜 <화이트크리스마스>에서 연기자로서의 가능성을 보여주며 차근차근 작품활동을 해왔던 그는, <고교 처세왕>에선  아버지의 사랑을 받기 위해 워커홀릭이 되어 누구의 도움 없이 본부장의 자리에 오른 캐릭터를 연기한다.

 

부친과 격 없이 농을 주고 받는 이형석의 등장은 그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든다. 이 드라마의 갈등과 대립각을 세워줄 이 캐릭터의 또 하나의 비밀은 선단공포증이 있다는 것이다. 완벽하게만 보였던 그를 긴장시키는 그 공포증은, 아마 유진우를 인간적으로 이해하게 만드는 요소로 적재적소에 그 사연이 풀어질 테고, 시청자들에겐 그 이유를 궁금해하며 보는 재미도 선사할 것이다.

 

슈퍼스타 K로 데뷔한 서인국은 가수로서의 입지 못지 않게 연기자로서도 성장하고 있는 배우이다. 고등학생 이민석과 본부장 이형석이라는 이중생활을 능청스럽게 오가지만, 피로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이민석의 고달픔을 제대로 보여준다. 물론 고등학생다운 면모를 숨기지 못해 오히려 그것이 동료 직원들에게는 신선해 보일 만큼 뻔뻔스럽기까지 하다. <고교처세왕>은 세상물정 몰라 해맑을 수도 있는 이민석의 단순한 부분을 가장 큰 무기이자 방패막으로 활용한다.

 

그는 여러 경우의 수를 생각하지 않는다. 관계를 읽어낼 만큼의 통찰력도 없다. 하지만 하키를 통해 익힌 본능적인 공격력과 저돌성은 직장생활에서도 유감없이 드러내며 위기상황에서 예상치 못한 시원한 해결책을 보여준다. 직장 생활을 다룬 드라마에서 위기를 보여줄 가장 쉬운 방법인 PT 에피소드에서 이민석의 활약은, 장르적 공식 수준에 머물러 있었지만 그럼에도 귀엽게 받아들일 수 있는 건 배우의 힘이기도 했다. 물론 18세 소년다운 장난끼 가득한 모습뿐만 아니라,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주변 사람들을 돌보는 힘을 가진 것도 이민석이 부각되는 장점이기도 하다.

 

드라마 초반, 시청자들이 납득할 수 있을 정도로 사연을 풀어놓고 초석을 깔아놓았으니 앞으로 이민석이 형을 대신해 어떠한 처세로 대기업에서 살아남을지 지켜볼 일만 남았다. 수가 얕고 경험이 없기 때문에 단순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니라 가장 명료하면서도 마음의 울림을 줄 수 있는 단순함, 즉, 너무 많은 생각으로 복잡한 수를 만들어내 오히려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가는 경우가 아닌, 오컴의 면도날처럼 단순한 해결 방안이 더 탁월할 수도 있다는 것을 어떤 식으로 보여줄 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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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현정

사랑과 연애 그리고 섹스에 대한 글을 쓰며 살고 있다. 몇 번의 사랑을 경험하며 제법 깊은 내상을 입었지만 그만큼 현명해졌으며 자신의 욕망을 들여다보는 걸 수줍어하지 않게 되었다. 놀라운 재생능력으로 사랑할 때마다 소녀의 마음이 되곤 한다. 누군가의 장점을 잘 발견해내고 쉽게 두근거린다. 『사랑만큼 서툴고 어려운』, 『나를 만져요』 등을 썼으며, 블로그 '생각보다 바람직한 현정씨'를 운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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