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영봉 연출가 “당신이 원하는 평화를 묻고 싶었다”
기내극 <블랙박스>, 블랙코미디와 생리체험 통해
기내를 구성하는 것들, 혹은 지상을 떠서 다른 지상에 도착하는 중간점에 있는 기내 안에서 벌어진다는 자체가 굉장히 현대성을 가졌다고 해야 하나요. 지금까지 제가 읽어왔던 희곡에 없는 것들이 가득 차 있었던 것 같아요.
문화예술 전방위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시인 김경주가 매월 공연 예술인을 만나 여러분께 소개해드립니다. 매달 12일 연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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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락을 겪어야 알 수 있는 진실’이라는 부제를 가진 연극 <블랙박스>가 오는 6월 29일까지 대학로 스튜디오76에서 공연한다. 김경주 극, 유영봉 연출로 올려지는 <블랙박스>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는 2014년식 블랙코미디. 많은 이들에게 작품이 알려졌지만 무대 위에서 현실화 시킬 수 없다는 이유로 제작에 어려움을 겪었던 희곡 <블랙박스>는 무대 미술가로 활동하며 창조적인 감각을 보여준 유영봉 연출과 김경주 작가가 만나 기존의 관습적 패러다임을 허무는 새로운 창작 연극으로 발전했다. 일본에서 공간연출디자인을 공부, 귀국 후 무대미술가로 활동한 유영봉 연출은 2010년 ‘극단 서울괴담’을 창단하고 <외계인출몰구역-(현)두할, 할망할망>을 시작으로 연출가로 활동하고 있다.
김경주 : 먼저 <블랙박스>를 어떻게 연출하게 되었는지 소개 부탁드립니다.
유영봉 : 작가의 주석에 나와 있듯 전체적인 시놉시스을 통해 밤 11시부터 자정까지의 이야기에 주목했어요. 밤 11시라는 것에 매력을 느꼈어요. 다른 공간도 아닌 기내라는 공간 안에서 그 11시라는 시간이 연출적 입장에서 흥미를 유발한 거죠. 아니나 다를까 희곡을 읽으면서 비행기가 떠 있는 허공의 시간과 지면의 시간, 그 기준에 대해서 생각하게 하더라고요. ‘그러면 시간이 어떻게 생겼을까’ 라는 생각도 하게 되고. ‘개인 한 명이 시간을 얘기한다면, 결국은 자기가 죽는 기점으로 시간이 출발되어지지 않겠나?’라는 생각을 했어요. 제가 죽게 되면 이 세계는 멸망하게 된다든가 하는 식의 개인적인 생각들이 지상이라는 것과 허공이라는 것으로 분리되면서도 동시에 이어진다는 게 매력적이었죠. 그래서 형식을 취하기 이전에 이 작품의 수수께끼를 풀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접근했어요. 창작과정이 그 수수께끼를 하나씩 풀어나가는 과정이죠.
김경주 : <블랙박스>는 ‘기내극’이라는 형식으로 표제를 내세우고 있습니다. 기내라는 곳이 연극에서는 많이 다루어지지 않는 이색적 공간일 수도, 현대인의 일상에서는 낯설지만은 않은 공간일 수 있는데요. 그 공간을 바라보는 연출만의 색깔이랄까, 태도가 있었을 것 같은데요.
유영봉 : ‘기내극’이라고 했을 때, 이 지점에서 흥미가 생겼는데요. 공연의 배경이 되는 장소에 따라 ‘거리극’ 이나 ‘샬롱극’ ‘게릴라극’ 이라는 타이틀을 붙여 왔는데, 이 작품 역시 기내라는 공간에서 출발한 이야기였기 때문에 저한테 아주 적격했던 것 같아요. 기내라는 출발지점이 있다면 이건 극장으로도 갈 수 있고 거리로 갈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기내를 구성하는 것들, 혹은 지상을 떠서 다른 지상에 도착하는 중간점에 있는 기내 안에서 벌어진다는 자체가 굉장히 현대성을 가졌다고 해야 하나요? 지금까지 읽어왔던 희곡에 없는 것들이 가득 차 있었던 것 같아요.
진실에 다가서는 방식은 곧 상상력
김경주 : 기존에 유영봉 연출은 ‘거리극’이나 ‘게릴라극’으로 표방되어지는, 혹은 신체를 오브제로 사용하는 작업을 꾸준히 해 오셨습니다. 그런 작업의 연장에서 <블랙박스> 작업이 동질성을 가지고 있는 부분이 있는지, 아니면 이전 작품들과 차별을 두면서 작업을 했는지 궁금합니다.
유영봉 : 저는 ‘거리극’이라고 하지 않고 ‘거리예술’이라고 얘기하는데요. 어떤 공간이 있고 거기에 어떤 인물이 있고 어떤 사건이 있고, 그러고 나서 어떤 여운이 있는 방식인데. 상징적이며 확장되는 지점에서 시적인 부분에서 어떤 코드가 걸려 떨어져요. 거리로 나갔다고 해서 굉장히 선정적인 스타일을 고집해야 되는 지점에 의문이 있었고요. 여기에서 비행기를 타고 어디에 도착했을 때 일단 시간이라는 혼돈이 형성되잖아요. 그 일시적인 시차와 거리를 나갔을 때 시간에 대한 시차가 비슷한 지점이 있어요. 예를 들어 제가 거리에 나갔을 때 갑자기 없는 건널목을 그라피티 등을 이용해서 만들어 놓고 그곳을 건너는 공연을 한다면, 그런 때 사람들이 일상적인 시간에서 전혀 다른 시간으로 이동하는 시차가 있어요. 그런데 극장으로 갔을 때는 그 시차가 분명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극장 문을 들어설 때 그것들이 희석된다는 거죠. 계속 거리를 고집했던 이유가 거리 안에서의 시간성, 거리만이 보여줄 수 있는 자연스러움과 해프닝적인 것 때문이기도 해요. ‘기내극’이라는 것은 제가 그런 방식으로 다가설 수 있다는 거죠.
유영봉 : 이 작품의 공간은 기내이고 관객들은 잠시 기내를 경험하고. 그 공간의 다른 시간을 경험하는 거죠. 그런 경험적인 측면이 굉장히 중요하겠다고 생각해서, 그 경험이라는 것에 대해서 관객이 뭔가를 해석하고 그것에 대해서 이야기를 일방적으로 듣고 나오는 게 아니라 경험하고 나와야 된다는 생각을 하면서 접근했습니다.
김경주 : 연극이 하나의 체험이라는 가정 속에 있다면 결국 거리를 통해서만 보여줄 수 있는 연극적 체험을 지향했고, 이러한 작업의 연장선상에서 ‘기내’라는 것도 극장이 갖고 있는 조형적인 점유율을 벗어나서 ‘거리극’에서만 보여줄 수 있는 걸 기내에서도 시도할 수 있겠다는 지점에서 출발하셨다고 봐도 무방하겠군요.
김경주 : <블랙박스>를 가지고 소통하고 싶은 지점, 혹은 ‘관객이 이 작품을 이렇게 봤으면 좋겠다’ 라는 지점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유영봉 : 결과적으로는 작가의 상상력과 연관된 건데요. 이 상상력이라는 코드에 대해서 항상 고민을 해요. ‘다큐멘터리적인 상상력’이라는 말도 적격한 말은 아닌 것 같아요. 단지 어떤 사실이 있고 그 사건을 그나마 유추해볼 수 있는 블랙박스가 있다고 가정하면, 그 블랙박스는 우리가 귀로 듣는 거잖아요. 귀로 듣고 상상을 하게 되는 그 지점이 저한테는 소중했고요. 사실 세월호도 마찬가지죠. 세월호의 침몰 안에서 우리가 발동할 수 있는 상상력은 어디까지인가라는 이야기가 결과적으로는 가장 중요해요. 블랙박스를 복원해서 들었을 때 과연 우리가 어디까지 진실에 다가설 수 있는지, 저는 진실에 다가서는 방식이 상상력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김경주 : 세월호 이야기를 해주셨는데, 가라앉은 세월호 사건을 통해서 우리 사회의 가려져 있는 진실들이 드러나기도 하고 세월호로 대변되어지는 상징구조가 한국 사회의 폐단들, 부패된 모습들을 고스란히 역설적으로 드러내고 있는데요. 실제로 세월호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는 우리는 전혀 예측할 수 없죠. 상상이라는 것은 때로 정말 참혹한 것이 되어버린다는 생각이 듭니다. 만일 실제로 세월호에 블랙박스가 있었다고 했을 때 그것을 과학적이고 기술적인 방식으로 복원해 본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가 닿을 수 있는 체험이라는 것, 진실의 영역이라는 건 결국은 상상의 영역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쩌면 진실을 알기 위해서는 우리 세계 너머에 있는 것에 대해서 닿으려고 하는 솔직한 접근에서부터 시작이 아닌가 싶기도 한데요. ‘작품 안의 카파의 대사에서 “원래 진실은 좀 가려운 법이야” 라는 구절도 생각이 납니다.
진실은 극장 안에 있는 것
김경주 : 상상력에 관해서 말씀해 주셨는데요. <블랙박스>라는 작품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상상력이랄까, 연출로서 표현하고 싶었던 것이 있었을 것 같아요.
유영봉 : 소리로 듣는 것도 생리적이라는 생각은 들어요. 저는 계속해서 생리적인 상상력을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제가 누군가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사람의 과거나 현재 생각하고 있는 어떤 것을 유추해볼 때, 그때의 상상력과 비슷한 건데요. 결과적으로는 그게 굉장히 생리적이기도 하거든요. 관심이라는 단어가 굉장히 키포인트 같아요.
김경주 : 공간도 생리가 될 수 있다는 말이 인상적입니다. <블랙박스> 안에서의 생리 체험이라는 것, 예를 들어 인간의 불안이랄지, 불안도 생리 체험에 해당하는 거겠군요.
유영봉 : 보통 언론에서 팩트라는 것을 인용해서 보도하는 방식이 있잖아요. 그런 보도의 방식에서는 누락되어 있는 것이 생리적인 체험이 있습니다. 거기까지 근접하지 않고서는 일단 사람들이 각성할 수가 없어요. 그것에 대한 제대로 된 관심도 갖고 있지 않다고 결론지어도 된다는 거죠. 그런데 기본적으로 연극을 보러갈 때는 관심으로 가거든요. 그 사람들을 대상으로 사실을 나열한다면 어떤 의미도 없는 거예요. 사실이라고 하는 것은 보통 말로 전달되어지는 것들이겠죠. 이 작품에서 생리적이라는 말을 쓰는 이유는 예를 들어서 기내 바깥에서 바람이 분다거나 기내 안으로 바람이 스민다는 걸 관객에게 체험시키는 것, 인식뿐 아니라 생리체험을 통해서도 관객이 공간을 체험하는 방식을 통해 사건을 겪는 과정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김경주 : 예술이라는 장르나 극에서 생리 체험은, 결국은 연극을 대하는 관객들이 연극의 고유한 질감을 회복하기 위해서 필요하다는 생각을 갖고 계신 것 같다고 보아도 되나요?
유영봉 : 사실 진실은 극장 안에 있는 거예요.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극장 안에서 배우가 뭔가를 봤다든지 땀을 흘렸다든지, 그 현실에 얼마나 제대로 포착하고 진행되어지는가에 주목할 수밖에 없는 거죠. 연극은 라이브니까요. 그래도 이건 어디까지나 극이고 허위이고. 그래서 사실은 연극에 관한 생각들이 <블랙박스> 안에 굉장히 많이 축적되어 있어요. 극장 안에서 어떤 사람이 피를 토하고 있는데 그 피를 보고도 문학 안에서의 생경함을 찾을 수 없다면 연극은 실패한 지점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렇다면 그것을 어떻게 연극 안에서 해내야 사람들이 진실을 느낄 수 있을까, 이런 지점하고 연결되는 부분이 있는 거죠. <블랙박스>라는 작품을 대하면서 연극자체에 대해 질문을 던져보는 계기가 많이 있었습니다.
김경주 : <블랙박스> 안에서의 갈등, 그리고 연출이 가지고 놀고 싶었던 갈등의 구조, 혹은 이 갈등을 통해서 새로운 진실의 체험에 닿게 하고 싶었던 것이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연출을 해 오시면서 ‘극에서의 갈등이라는 건 다른 장르와 달리 혹은 연극만이 보여줄 수 있는 갈등은 이런 거라고 생각한다’ 이런 부분에 대해 들려주세요.
유영봉 : 극 안에서의 드라마적인 갈등은 이미 희곡에 나와 있는 대로, 두 인물이 이전에 쌓아왔던 갈등들을 기내 안에 고립되면서 얼마만큼 토로해 내느냐에 있어요. 쉽게 얘기하면 진실게임 같은 거죠. 이 고립된 상황 안에서 얼마나 자기 말을 감출 수 있느냐, 감출 수 있을 만큼 견뎌 봐라, 라는 방식이 기본적인 갈등 구조예요. 결국은 얘기하고 싶어 하는 사람, 고백을 해버리는 사람이 지는 게임인 거예요. 말하고 싶지 않은 이유는 너무 많은데, 허공에서는 꽤 오랜 시간 같이 있지만 그 짧은 시간을 자기가 살아왔던 삶을 여기 안에서 다 얘기할 수는 없는 거죠. 그게 훨씬 더 큰 것이고. 그러나 관객들한테 보이는 장면은 겨우 몇 시간 허공에서 떠도는 둘의 갈등 구조인데. 저는 기본적으로 이 극에서의 갈등 구조는, 예를 들어서 복서 두 명이 링 위로 올라가서 싸우는데 그 과정에서 어떤 약점 내지는 자기의 강점을 이용해서 상대방을 눕히기 위해서 끊임없이 여러 작전과 전략을 쓴단 말이죠. 그런데 그 전략이 맞아떨어질 때도 있고 아니면 자기가 말릴 때도 있죠. 예를 들어서 훅을 날렸는데 어퍼컷을 당하는 경우가 있죠. 이런 지점의 갈등이 굉장히 중요한 것 같아요.
유영봉 : 우리가 살아가면서 더 많이 겪는 건 불편한 관계인 것 같습니다. 내가 어떤 목적이 있어서 만났지만 결과적으로는 이 사람 앞에서 정치를 해야 되고 나를 어필해야 되고 나의 어떤 두 가지 면에서 어떤 한 가지를 골라야 되고, 이런 거의 연속인 거죠. 우리가 사는 게. 굉장히 피곤한 삶인데 과연 죽기 직전에도 그런 걸 할 수 있을까. 바로 목 앞에 칼이 들어와도 그런 정치나 여러 가지 것들을 과연 할 수 있는지. 그런데 저는 인간이 그걸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어떻게 보면 우리가 살아가는 데 있어서 가장 큰 함정인 것 같아요. 그게 이 작품의 가장 큰 매력이라고 봅니다.
고독을 공유하고 공감하는 힐링
김경주 : <블랙박스>는 삶이 하나의 거대한 함정이라는 역설의 구조를 가지고 있고, 그것을 극의 방식으로 풀어보고 싶다고 하셨는데요. 이 작품은 기존의 작품들에 비해서 상당히 말이 많습니다. 말의 홍수라고 부를 만큼 말이 많아요. 작가적 의도에는 그 말 뒤에 숨어있는 인간들 혹은 말 속에 숨을 수밖에 없는 존재들 혹은 말이 헛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숨어있을 텐데요. 그랬을 때 이 작품에서 다루고 있는 언어, 혹은 연출이 보는 언어의 차별성, 아니면 이 언어를 가지고 현대 사회의 어떤 지점을 이야기하고 싶으셨는지, 혹은 인간 사회에서 언어랄지 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듣고 싶습니다.
유영봉 : 말처럼 허약한 것이 없다는 생각을 해요. <블랙박스>에 ‘그 분’이라는 인물이 나와요. 극중에 등장하지 않고 이들의 이미지 안에 있는 인물이에요. 사실은 연출이 ‘그 분’인 거죠, 이 공연에. 그랬을 때 제가 생각하는 것은, 예를 들어서 연출이 ‘와 이 음식 너무 달다’라는 말을 뱉고 굉장히 신 레몬을 먹였다면 분명히 말은 ‘달다’라고 하지만 표정은 감출 수가 없을 거예요. 이런 단순한 부분에서도 우리는 제어가 가능한 거죠. 여기에서 언어라든가 말이라는 것에 대한 개념들을 구분할 필요가 있는데요. 행동도 언어이고 표정도 언어이고 냄새도 언어이고 폭력도 언어죠. 그 안에서 말이라는 것은 사실은 굉장히 허약하다는 거죠. 우리가 블랙박스를 복원시켜서 그 말을 듣는다 해도 거기에 대한 진실에는 반의반도 접근하지 못했을 거라는 거죠. 사실 저는 언어가 많은 연극을 선호하지 않아요.
유영봉 : 어떻게 보면 김경주 작가의 희곡만을 연극으로 다룰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어요. 중의적이고 은유적이고 거짓이고 진실이고 말 안에 여러 층위가 있다는 거죠. 그래서 제가 자유롭게 해석이 가능한 거죠. 그렇다면 자유로우니 얼마든지 마음대로 해 놓으면 되는거냐 라고 생각해 버리면 문제가 발생하죠. 그건 관객과의 소통의 문제에 닿게 되거든요. 관객이나 창작자들과 희곡과의 대화 과정에서도 발생하고. 실제 인물들이 내뱉는 말 안에서도 그런 것들은 어떤 목적을 선택하지 않으면 이 공연은 올라가지 않아야 된다는 거죠. 올라가지 않고 읽혀야 된다는 거죠. 그래서 그것에 대해서 선택을 끊임없이 해야 되고, 배우들도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어쨌든 이 안에서 말들이라는 게 어떤 것은 정말 진실이 담겨 있고, 그것을 관객은 끊임없이 구분해서 가야 하는데 연출은 그 구분하는 원칙을 제시하는 거죠. 그것마저도 열어놓는 것이 많죠. 어떤 면에서는 느슨하게 시를 읽을 때, 서서 낭독을 하는 게 아니라 이불에 퍼질러져서 시를 읽는 기분으로 봐야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김경주 : 연극의 매력이라면 언어로 쓰인 것들이 말이라는 방식으로 전달된다는 것일 텐데요. <블랙박스>가 많은 말 속에서 중의적이고 상징적인 측면이 있다면, 언어로 쓰여야 될 것들이 말로 전달되거나 혹은 말로 되어야 될 것들이 글쓰기의 언어(문어체)로 말하고 있다거나, 이런 식의 작가의 의도적인 대립이 많이 있습니다. 관객의 입장에서는 그것들을 어느 선에서 따라가지 못하면 상당히 모호해질 수 있는 지점들이 있고, 그 선택의 지점들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는 것이 연출의 역할이라는 말씀을 하셨는데요. 그건 결국 작가가 인간의 말에 담긴 ‘고독’을 이야기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작가는 고독한 자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거고, 그것은 김경주 작가가 구현하는 <블랙박스>는 우리는 모두 고독하다는 거죠. 고립의 문제 혹은 고독의 문제들을 바라보는 연출님의 태도 혹은 그것들을 관객에게 전달하고 싶은 지점에 대해서 이야기 해주세요.
유영봉 : 침묵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는데요. 인간이 가장 힘든 두 가지가 지루함과 외로움이라고 이야기하잖아요. 고독이라는 말과 외로움이라는 말은 차이가 있을 수 있겠지만. 홀로 있는 것에 대해서는 같이 있어도 홀로 있다거나 정말 혼자 있어서 홀로 있다거나가 성립해요. 저는 이 <블랙박스>에서 카파와 미하일이 그런 상태를 자주 반복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따라서 침묵이 갖고 있는 의도가 굉장히 다양하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연출은 연극 안에서마저 그 침묵의 의도를 개입시켜야 되는 게 숙명인 것 같아요. 저는 인생을 살면서 사건이 없는 침묵은 아예 없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사람들이 수명을 연명해 가는 것 같은 생각도 들어요. 만약에 그것(사건이 없는 상황에서 그런 침묵이 강요된다거나 침묵을 해야 되는 상황)이 진짜로 존재한다면 그 즉시 그 사람은 끝날 것 같아요. 고독이라는 지점에서 우리가 따로 있는 시간들, 다른 지점에 있었던 여러 가지 상황들이 같이 있었을 때도 계속 그걸 무겁게 끌고 가기 때문에 그런 지점이 <블랙박스> 안에서 아주 극명하고 상징적으로 드러나 있다고 봐요. 그렇지만 둘은 만나기 전부터 분명히 관계가 형성되어 있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고독의 농도가 더 진해지는 거죠. 결과적으로 이 공연은 진정한 힐링이에요. 고독을 공유하고 공감하다는 의미에서 힐링이라고 볼 수 있다는 거죠.
한없이 진지해야 코미디가 발생한다
김경주 : <블랙박스>의 이야기는 하나의 여정입니다. 비행기를 타고 가는 한 시간 동안의 이야기이고. 여정이라는 것은 사건의 연속인 거죠. 사건이 존재하지 않는 여행이란 없기 때문에. 이 작품 안에서의 여정, 여행의 서사를 관객과 어떻게 체험하고 싶었는지 궁금합니다.
유영봉 : <블랙박스>에 세 인물이 등장하는데 그들 안에서 여정의 정도가 각기 달라요. 우리가 진짜 진실을 볼 수 있는 힘은 그곳을 처음 겪어본 사람의 시선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어떤 공간이나 경험을 처음 겪은 사람의 시선, 그리고 그 생리나 섭리를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의 진실도 중요하게 되죠. 그랬을 때 낯선 자의 시선 혹은 외부자의 시선이 여정에는 그게 항상 깔려 있거든요. 우리가 늘 지나치는 어떤 것들에 의구심을 갖거나 그것에 적응해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여정을 느낀다고 생각하거든요. 여정을 겪으며 공통의 것도 분명히 존재하지만 개별성인 각자의 것도 굉장히 변해갑니다. 여정이라는 건 어떤 것을 경험하고 나서의 바로 그 변화인 것 같아요. 그러니까 여정이라는 게 문학이나 예술의 굉장히 큰 모티프로 작용한다는 것은 결국은 변화인 것 같아요.
김경주 : 작품 안에서의 이미지에 관한 이야기도 해야 할 것 같아요. <블랙박스> 안에서 연출님이 보시는 이미지, 그런 부분에서의 생각이 있으셨는지? 미술을 전공하셨으니, 이미지를 대하는 연출님만의 방식이 궁금합니다.
유영봉 : 이미지 안에서 초현실이라는 코드를 배제할 수 없는데요. 초현실이라는 게 생경한 현실을 희석하면서 생기는 게 아니라 극대화하면서 생기는 거거든요. 연극에서는 두 개의 장면이 섞이는 장면을 훨씬 효과적으로 하는 방법이 있어요. 더 생경하게 만드는 방식이죠. <블랙박스>의 배경이 기내이기는 하지만 기내 안에 다양한 공간이 설정되어 있어요. 예를 들어서 일상에서 찾아볼 수 있는 술집이라는 공간이 갑자기 설정되고요. 허공의 기내임에도 불구하고 지상의 술집이 표현되는 경우도 있어요. 그리고 안마하는 장면이 잠깐 나오는데, 살을 만지고 그것에 의해서 쓰이지 않던 혹은 뭉쳐있던 근육이 풀리거나. 그 공간 자체는 안마 시술소라는 묘한 공간이 되기도 하고, 이미 퇴폐가 형성되어 있는 업소가 아니라 집에 여자를 불러다가 스트립쇼를 시킨다거나 하는 퇴폐적인 공간이 존재해요. 그것들이 다 초현실적인 코드인데. 리얼리즘을 넘어서는 게 초현실인데, 그 리얼리즘의 기반이 없고 그 단계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바로 초현실로 가는 것들이 자유로운 상상 안에서 상당히 많았다고 생각되거든요.
유영봉 : 초현실은 오히려 과학에 더 가까운 거예요. ‘비행기가 날고 있을 때 문을 열면 과학적으로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에 더 집중하는 것이 초현실이라는 거죠. 이것을 더 확장해서 생각하면 지금 현실에 있는 모든 것들은 이미지인 거예요. 쉽게 얘기하면 이미지가 시간이 지나면 현실이 되는 거예요. 이미지가 곧 현실이고 현실이 곧 이미지라는 추상적인 말에 결론이 다다르는 건데요. 공연 안에서 구성된 오브제나 공간들을 어떻게 풀 것인지 제가 고민했을 때, 형체가 있는 것과 없는 것으로 확실히 구분을 했거든요. 예를 들어서 기내의 창문은 제가 보기에는 형체가 없는 것에 가까워요. 빛이 형체가 있는지 없는지를 얘기하기에 우리 언어는 너무 비약하고 허술해요. 창문은 유리로 되어 있고 게다가 기내라는 동그란 선실의 정형성을 떠올리게 돼요. 그 정도의 정형성은 당연히 들어가지만 이 창문의 기능을 봤을 때 빛을 받아들이고 바깥과 외부의 공간을 이어주는(오브제이죠), 오히려 창문이 없다면 바깥과 안의 공간은 이어지지 않죠. 아예 뚫려있다면 그건 이어지고 말고 할 것도 없는 거고요. 이어진다는 매체인 거예요.
김경주 : 현대 연극에서 혹은 대학로의 많은 연극, 나아가서는 이 세계에 우리가 연극이라는 양식으로 표현되어지는 다양한 것들이 있는데, <블랙박스>라는 작품을 통해서 주고 싶은 하나의 메시지 또는 같이 고민해보고 싶은 지점이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유영봉 : 사실은 오늘 중요한 이야기 중에 화두로써 ‘코미디에 대한 접근’이라는 말이 나왔을 법한데 나오지 않은 이유가 뭘까요? (웃음), 사실 이 작품은 블랙코미디라는 양식이 강하기도 하고 작가가 글을 쓸 때 예상했던 코미디적인 요소가 굉장히 많으니까요 기본적으로 장난기가 굉장히 많이 섞여 있어서, 그 장난기라는 게 사람들이 본능적으로 갖고 있는 건데, 그 장난기가 여러 방식이 있는 거죠. 저는 극중 인물들이 어떤 상황 안에서 한없이 진지해야지만 코미디가 발생한다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비극을 거쳐야지만 코미디가 일어난다는 생각을 갖고 있어요. 이 지점에 대해서는 아마 모든 사람들이 공감할 거예요. 쉽게 얘기하면 코미디를 의도하는 지점은 항상 코미디가 아닌 게 되는 거죠. 코미디는 의도되어져서는 안 되는 것 중의 하나예요. 극중 인물을 두고 얘기했을 때 그렇다는 거죠.
유영봉 : 어떤 비행기가 추락을 했고, 블랙박스 하나를 두고 사람들이 여러 가지 해석들을 하는데 이건 정말 굉장히 아이러니하고 코미디로 보일 수 있는 거죠. 사실은 저 안의 시간 속에 진실이 들어 있는데, 그것을 밖에서 유추하고 노력한들 코미디에 불과한 거예요. 그래서 이 작품의 메시지를 얘기한다면, 결국은 관심인 것 같아요. 요즘 저는 인간들끼리 아웅다웅하는 것에는 크게 관심을 갖고 있지 않아요. 거기에서 줌 아웃해서 옆에 있는 나무와 새소리 같은 것들이 모두 개입이 되고, 멀리 가서 지구인들의 이야기라는 것이 되어야지 메시지로써 작용할 것 같거든요. 결국은 신의 시선으로 본 인간일 수도 있어요. 너무 묵중한 이야기일 수도 있겠지만, 그 신이 대단하지도 않아요. 결과적으로는 그것도 한 관점일 뿐인 거죠.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발버둥치는 것에 대해서, 그리고 우리가 갈등을 겪는 것에 대해서, 그것이 굉장히 소중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어떤 경우에는 조금 내려놓아야 되는 측면이 있는 것 같아요. 그 지점에서 제가 변화되기를 원하고, 그런 변화에 대한 욕구는 강렬한 것 같아요.
김경주 : 비극을 거쳐야만 코미디에 닿을 수 있다는 말은 삶은 역설이라는 거잖아요. 너무 슬프면 웃음이 나와 버리고 너무 웃기면 울음이 나오는 것은 사실 굉장히 간단한 차이이기 때문에 발생하는 희화화이기도 하구요.
유영봉 : 비극에 대한 상상력 너머에 코미디가 있는 거죠. <블랙박스>에서도 ‘너는 목적지가 어디냐’고 물었을 때 ‘평화’라는 말을 그냥 툭 내뱉거든요. 사실 마지막 장면은 평원, 평화에 관한 이야기에요. 굉장히 험난한 여정이 마쳐지는 과정 안에서 주고 싶은 것은 ‘당신이 원하는 평화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인 것 같아요. 넓게 얘기했지만 아주 작은 것일 수도 있거든요. 물리적으로 작용해서 작아지는 것이어도 상관없어요. 그 안에서의 평온이나 평화는 개인이 만들어내야 되는 것들 중에 하나인 것 같아요. 그것을 만드는 건, 저나 작가, 배우, 관객들에게도 여전히 쉽지 않은 일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김경주: 긴 시간동안 밀도 있는 이야기 감사합니다.
기획: 엄지혜 기자
정리: 임나리
*극장뎐 줌 인(zoom in) - <블랙박스>
많은 이들에게 작품이 알려졌지만 무대 위에서 현실화 시킬 수 없다는 이유로 제작에 어려움을 겪었던 희곡 <블랙박스>가 무대미술가로 활동하며 창조적인 감각을 보여준 유영봉 연출과 김경주 작가가 만나 새로운 창작 연극으로 발전했다. ‘추락을 겪어야 알 수 있는 진실’이라는 부제를 가진 연극 <블랙박스>는 ‘기내극’이라는 시도로 기획된 첫 번째 작품으로,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2014년식 블랙코미디로 관객들을 찾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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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자 극작가. 연극실험실 '혜화동 1번지'에 작품을 올리며 극작가로도 활동 중이다. 야설작가, 대필작가, 카피라이터 등을 전전하다가 시집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를 펴내면서 이 문단과 대중으로부터 호평을 받으며 주목받기 시작했다. 2008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시'상, 2009년 오늘의 젊은 예술가 문학 부문상, 2009년 제28회 김수영 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독립영화사 '청춘'을 확장 개편한 무경계 문화펄프 연구소 '츄리닝바람'을 운영하면서 다양한 인디문화를 제작하고 개발하며 공연기획들을 하였다. 최근에는 스튜디오 '나는 공항'에서 다양한 문화 작업과 실험극 운동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