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연재종료 > 바다 소년의 포구 이야기
미더덕을 먹는 단 한가지 방법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고현리 고현포구
고현 포구에 와선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다. 미더덕은 그냥 먹어도 맛있었다. 속살을 안주려 애를 태우다니, 그건 미더덕에 대한 모욕이었다. 봄철의 미더덕은 엄지보다 두 배는 더 컸다.
간이 뗏목 작업장에서
벚꽃이 세상을 환하게 밝히던 사월이었다. 서너 그루의 벚나무가 낮은 언덕에 서서 바다 쪽으로 얼굴을 들이 밀었다. 미더덕으로 유명한 고현 포구에는 간이 작업장이 설치된 커다란 뗏목이 네댓 개 띄워져 있었다. 뗏목 사이마다 작은 배들이 드나들었다. 뗏목 작업장은 해산물을 해감하는 데에도 어선과의 인접성을 위해서도 훌륭했지만 무엇보다 하나의 경치로 자리해 포구를 더욱 고즈넉하게 만들었다. 청록색 함석지붕에 오른 물때야 말로 세월의 더께를 얹어둔 풍경이었다. 물결마다 청록색 지붕이 잔잔하게 흘러댔다.
선창 맨 안쪽에 있는 작업장에서는 음악이 흘러나왔다. 소리에 홀려, 비밀스럽게 닫힌 입구에 끌려 뗏목으로 통하는 다리를 건넜다. 천막으로 된 문을 열자 오래된 풍경이 정지한 듯 펼쳐졌다. 풍로 위에는 주전자가 놓여 있고, 벽에는 집기와 작업복이 여러 개 걸려 있었다. 선반 위에는 작고 빨간 ‘금성사’(GoldStar) 라디오가 음악을 흘려보내는 중이었다. 테이프를 재생하고 있는 카세트 라디오는 턴테이블 바늘이 LP판을 긁어내듯 무언가를 긁어댔는데, 어쩌면 그건 나의 기억 속이었다. 내게도 똑같은 라디오가 있었던 것이다. 그건 나의 보물이었으나 이젠 잃어버리고 잊어버려, 그래서 보물이라 부를 수 없는 어떤 것이었기 때문에 문득 서글퍼졌다. 흘러나오는 음악은 내가 모르는 가요였다. 풍성한 아코디언 연주가 미어질 듯 미끄러지는 사이마다 사각사각 칼 소리가 끼어들었다.
작업장에는 세 명의 아주머니와 한 명의 아저씨가 목욕탕 의자에 앉아 있었다. 아주머니는 빨간 대야에 가득 담긴 미더덕을 칼로 깎고 있었고, 아저씨는 무뎌진 칼들을 갈아내고 있었다. 미더덕은 사과를 깎듯이 껍질만 조심스레 벗겨내자 발그스레한 속살을 드러냈다. 하긴 그다지 조심스럽게 깎고 있다고 말하기는 힘들 것 같다. 거의 2초에 하나씩은 벗겨지고 말았으니. 왼손에 미더덕을 쥐고 한 바퀴 돌돌 말면, 오른손으로 쥔 두꺼운 칼날에 껍질이 베어졌다. 단단한 껍질에 칼날은 금세 무뎌졌고, 그 칼은 아저씨가 숫돌에 갈아주었다. 그렇게 칼날이 짧아지는 동안, 작은 포구의 뗏목은 하나의 풍경이 되었다.
미더덕의 맛
물(水)의 옛 말인 ‘미’를 산에서 나는 울퉁불퉁한 ‘더덕’과 결합시켰으니 생김새와 영양이야 더 이상 말 할게 없지만 아무래도 크기나 맛에 대해서는 첨언을 해야겠다. 어린 시절, 된장찌개를 유독 좋아하는 나는 뚝배기의 바닥이 드러날 때까지도 미더덕만은 먹지 않으려고 숟가락을 이리저리 뒤집기 일쑤였다. 미더덕이 번데기처럼 생긴 탓도 있지만 무엇보다는 쭈글쭈글한 껍질이 혀에 닿을 생각만 해도 밥맛이 달아나곤 했다. 하지만 여동생은 오도독 오도독 미더덕을 씹어댔고, 나는 신이 난 그 표정에 질세라 눈을 꾹 감곤 미더덕을 입에 넣어 보았다. 아무리 씹어도 무슨 맛인지 모르겠어서 뱉어내려 앞니로 깨물자 그제야 인심 쓰듯 연한 살을 내주었다. 감질이 났다. 그 쌉싸름한 속살을 맛보려고 그렇게 씹어대나 싶었다. 어머니는 미더덕이 깊은 국물 맛을 더해준다고 설명해 주었다. 된장찌개를 다 비워놓고선 미더덕은 안 먹었다고 시침을 떼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고현 포구에 와선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다. 미더덕은 그냥 먹어도 맛있었다. 속살을 안주려 애를 태우다니, 그건 미더덕에 대한 모욕이었다. 봄철의 미더덕은 엄지보다 두 배는 더 컸다. 살집도 탱탱하고 투명해서 씹히는 맛도 좋았다. 고현 포구에서는 미더덕을 회로 먹기도 했고, 덮밥으로, 심지어는 튀김과 전으로도 요리를 했다. 보리흉년이 들어 음식이 귀할 때에는 미더덕에 콩나물만 넣고 끓여도 훌륭한 찜국이 되었다는 아주머니들은 미더덕이 보물이라고 말했다.
“어떻게 먹으면 더 맛있어요?”
단순하지만, 뜻 깊은 말이다. 아니, 뜻 깊은 맛이다.
“오래 씹으면 돼.”
옛날에게 부치는 서(書)
미더덕을 씹을 때면, 생각나는 친구가 있다. 돌아오는 토요일엔 대학가의 꽃다지 민속주점에서 막걸리를 먹자는 전화를 받았던 게, 그가 죽기 불과 이틀 전이었다. 미더덕 찜에 밥 두 공기를 비벼먹는 게 어때? 우리는 대학시절 내도록 꽃다지에서 얼마나 많은 미더덕을 씹어댔던가. 얼마나 많은 막걸리를 마셔댔던가. 생각만 해도 침이 고였다. 그의 목소리 역시 상기되어 있었다. 그 대화 속에서 내가 놓친 고독의 그림자는 무엇이었을까. 그 전화를 내가 먼저 끊었던 걸까. 우리가 만나기로 한 시간은 몇 시며, 과연 친구에게는 그 시간이 존재할 예정이었던 걸까. 이미 그에게는 존재하지 않을, 다음 생(生)과도 같은 토요일에, 그저 대학가 민속주점에 당도할 우리의 모습을 그려본 우울한 몽상이었을까.
어느 날에는 잊고 있었던 노래를 되찾게 될 때가 있다. 오래된 카페 앞이나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이리저리 라디오 주파수를 맞추면서도. 그 노래들은 불쑥 튀어나와 마음을 찔러대기도 한다. 내 몸 속 어딘가에는 분명, 소리의 우물이 웅숭깊게 파여 있을 것이다. 깊고 어두운 우물 속으로 손수 두레박을 던져서 소리의 조각을 길어오를 때도 있겠지만 이렇게 예고 없이 찔리고야 마는 날에는 그저 가만히 멈춰 서게 된다. 귀 기울이게 된다. 기어코 나의 영혼은 그때 그 시절로 끌려가고야 만다. 아무렇게 펼쳐든 책의 한 구절이 나를 이쪽이 아닌 저쪽으로 옮겨줄 때가 있다. 영화 속 한 장면은 나를 다른 곳으로 데려가기도 한다. 음식의 향이야 말로 옛날 내가 살았던 집의 낮은 담장 너머로 까치발을 들게 한다. 이젠 어디서도 맛볼 수 없을 것만 같은 옛날의 맛. 그건 나만 잃은 것은 아니다.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게스트를 맡은 적이 있다. 시를 읽어주고, 제목이나 시어에 얽힌 사연을 문자 메시지로 받는 프로그램이었다. 매주 시를 고르는 것도 나름의 행복이었지만 무엇보다도 청취자의 문자를 읽어줄 때에는 묘한 기분에 휩싸이고 만다. 좁은 부스 안에서 DJ와 대화를 나누고 있지만 전파는 어디론가 날아가선 누군가를 찔러대고 있었나 보다. 나는 수십 통의 문자 속에서 수십 개의 고백을 들었고, 공감했다. 한 편의 시가 노래가 되고 노래가 사연이 되고 사연이 시가 되는 마법을 나는 보았다. 그건 공동으로 잃어버린 옛날에 대한 그리움일까. 나는 설명할 재간이 없다.
다만, 미더덕을 먹을 때면 오래도록 오물거릴 뿐이다. 뱉는 방법을 잊은 사람처럼 오래.
바다를 사랑하는 사람
씨네필
문학청년
어쿠스틱 밴드 'Brujimao'의 리더.
<곽재구> 저11,700원(10% + 5%)
이방인의 머리 속에, 고만고만한 배들이 들고나는 포구의 어스름은 스산함이나 적막함으로 각인돼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시인 곽재구는 먹빛 바다를 바라보며 술잔을 기울이는 거친 사내들의 왁자함이나 마치 등대처럼 노란 불빛을 밝히고 있는 여염집을 바라보며 '인간의 따뜻함'을 발견해낸다. 작가는 전국 곳곳의 포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