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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킹>, 영특함과 사랑스러움을 보여주세요
MBC <호텔킹>, 프랜시스 호지슨 버넷 <세라 & 세드릭 이야기>
지금까지 배우 편식이 심하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잘 만든 드라마를 좋아하긴 하지만 그에 앞서 좋아하는 배우가 나오면 일방적으로 의리를 지켜왔다. 그런 내가 이 드라마를 끝까지 볼 수 있을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동욱 씨, 차재완을 연기하는 게 쉽진 않죠? 하지만 그건 결코 당신 탓이 아니랍니다.
세라와 세드릭 이야기
세계명작동화를 읽기 시작했을 때 나는 신데렐라, 백설공주, 잠자는 숲 속의 미녀 이런 종류의 이야기에 매료되지 않았다. 남자 잘 만나 평생 행복하게 잘 살았다는 이야기를 읽으며 내게도 백마 탄 왕자가 나타나주길 바라는 망상 같은 건 하지 않았다. 어머니를 닮아 예쁘장했던 남동생과 달리 아버지를 닮은 나는 남자같이 생겼다고 생각했고 이런 얼굴은 그런 이야기를 꿈꿀 만큼의 경쟁력은 없다고 냉정하게 판단했다. 그래서 미모나 여성성이 아닌 예의 바르고 영리하고 다정해서 사랑 받는 게 내게는 조금 더 수월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연유로 열 살 여자아이가 책 모서리가 닳도록 읽은 건 세라와 세드릭의 이야기였다.
이미지 출처: MBC호텔킹 공식 사이트
호의를 베푸는 사람이 주인공의 이성적 매력에 빠진 대상이 아니라는 사실만 제외하고는 세라와 세드릭이야기도 신데렐라 스토리 류만큼 황당무계하고 개연성이 없는 전개를 보여주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귀한 태생임을 증명이라도 하듯 환경이 어려워져도 훌륭한 인품으로 어려움을 극복하고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고 돌볼 줄 아는 마음가짐은 단지 예뻐서 팔자 고치는 이야기보다 감동적이었다. 부유함과 고결함이 동급이라고 생각한 건 아니었지만 세라나 세드릭를 보고 있으면 머리카락을 쓰담쓰담 해주고 볼에 입맞추고 싶을 정도로 사랑스럽고 기특했다! 그렇다면 나 역시 이번 생에서 도전해볼 만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도전에 앞서 한 가지 가능성을 먼저 확인해 보기로 했다. 부모님 앞에 진지하게 무릎 꿇고 앉아 “제가 이제 열 살이 되었으니 말씀해 주셔도 됩니다. 사실을 받아들일 수도 있어요. 그동안 저를 맡아 길러주시느라 고생이 많으셨죠. 전 어느 집 귀한 자제입니까?”라고 물었다가 책 읽기를 일주일 동안이나 금지 당하기도 했다. 이렇게 나를 좌절시킨 사건은 지금까지도 두고두고 회자되고 있다. (그런 나에게 어머니께서는 벼룩시장에 광고를 내서 나를 팔아버리겠다고까지 하셨다.)
변주의 실패?
내가 그토록 사랑한 이 명작동화의 기본 플롯은 다양하게 변주되어 드라마로 만들어지곤 했다. <호텔킹> 역시 그 룰을 충실하게 따른다. 한국 최고의 호텔 씨엘 그룹 회장의 버려진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자신의 자리를 되찾기 위해 완벽하고 근사하게 자라 호텔 총지배인이 된 차재완과 아버지의 죽음으로 자신의 지위를 위협받는 상속녀 아모네는 세드릭과 세라를 떠올리게 하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그들이 그 자리로 돌아가고 지키는 것에 대한 당위성을 획득하는 것부터 쉽지 않아 보인다. 차재완과 아모네를 제외하고라도 씨엘 호텔을 둘러싸고 로얄패밀리를 위협하며 야망을 키워나가는 이중구나 누구 편이며 어떤 목적을 가졌는지 전혀 속내를 알 수 없는 백미녀 등 갈등을 일으킬만한 캐릭터는 충분히 등장시켜놓고 4회차까지 방영된 드라마치고 이렇다 사건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 보니 사건을 통해 표출되는 인물의 매력을 전혀 느낄 수 없고 특히 차재완의 심리적 변화에 대해 극의 흐름만 놓고 보면 공감하기 쉽지 않다.
애써 이해한다 치더라도 드라마 도입부에 차재완이 아성원 회장을 찾아가 자신이 아들이라고 밝히는 장면은 의아스럽기 짝이 없었다. 십여 년을 넘게 복수의 칼날을 갈아온 사람치곤 허술했고, 존재를 인정받고 싶었던 사람치곤 애절하지 못했다. 왜 그 순간이어야 했나? 드라마의 시작을 위한 억지스러운 사건으로 밖에 여겨지지 않았다. 심지어 아들이라고 주장하려면 적어도 DNA 검사 결과라도 들이밀어야 하는 게 아닌가? 철두철미하고 완벽한 남자라는 설정치고는 열한 살 어린 남자애가 관심 받고 사랑 받고 싶다고 투정부리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차재완이 아성원의 아들이 아니며 이중구의 계략에 놀아난 희생양일지도 모른다는 건 애초부터 짐작 가능한 부분이다. 가난하고 나약한 앵벌이 소년 제이든에서 냉정하고 건조한 차재완이 되기까지 개 훈련시키듯 때리고 위협하며 복수의 화신이 되도록 조정 당한 결과일까? 분노 조절에 장애가 있는 캐릭터처럼 보였다. 차재완이 고결한 혈통이 아니더라도 열한 살 제이든이었던 그 때에도 자기보다 약하고 어린 동생을 보살피고 지켜주려고 노력하는 따뜻한 마음을 가진 아이였다. 그 기본 성품은 잃은 듯한 위악적인 차가움은 납득이 쉽지 않다. 자기가 잃은 것, 마땅히 자기가 가져야 할 것을 천진난만 혹은 지랄발광하며 누리고 있는 아모네에 대한 심경의 변화 역시 매끄럽지는 않다. 그 역시 둘 사이의 사건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이미지 출처: MBC호텔킹 공식 사이트
아버지의 자살 소식을 듣고 입국한 아모네가 호텔로 직행해 상속녀 패리스 힐튼 못지 않게 진상VIP를 자처하며 차재완을 괴롭히며 호텔을 들쑤시고 다닐 때, 그것을 연기하는 이다해의 엉뚱발랄 상또라이 같은 귀여움을 보는 건 소소한 즐거움이었지만 그 장면들은 이 드라마의 장르와 동 떨어져 극 전체의 흐름을 끊어놓곤 했다. 그런 행동의 본래 목적은 위장이었으며 도망친 것처럼 상대를 안심하게 만든 다음 쇄신한 모습으로 당당하게 등장하기 위함이었지만 그 장면 역시 통쾌하다거나 장하단 생각이 들지 않았다.
32부작의 갈 길이 먼 드라마이기에 초반부에 등장한 여러 가지 상징들을 해석할 만큼 이야기가 충분하지 않았고 우선 사건보다는 충실히 캐릭터를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하더라도 <호텔킹>은 시청자와의 줄다리기에서 힘을 놓치고 있어 보인다. 새로운 진실을 알게 된 차재완과 마음가짐을 달리한 아모네가 어떻게 합심하여 자신들의 자리를 지켜나갈지 기대하고 볼 수 있도록 이 둘 캐릭터는 조금 더 영특해지고 사랑스러워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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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연애 그리고 섹스에 대한 글을 쓰며 살고 있다. 몇 번의 사랑을 경험하며 제법 깊은 내상을 입었지만 그만큼 현명해졌으며 자신의 욕망을 들여다보는 걸 수줍어하지 않게 되었다. 놀라운 재생능력으로 사랑할 때마다 소녀의 마음이 되곤 한다. 누군가의 장점을 잘 발견해내고 쉽게 두근거린다. 『사랑만큼 서툴고 어려운』, 『나를 만져요』 등을 썼으며, 블로그 '생각보다 바람직한 현정씨'를 운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