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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하지 않았던, 비겁한 <색계>의 그 남자
<색, 계>의 광위민(왕리홍)
세상을 구하는 일과, 내 옆의 인간에게 따뜻한 손 내미는 일. 둘 중에 무엇이 먼저일까? 누군들 무엇이 맞다고 강력히 우길 수 있을까. 내가 대답해도 된다면, 솔직히 모르겠다고 하겠다. 그러나 남들이 뭐라거나, 한 순간도 솔직하지 않은 남자가 가장 나쁘다, 라고 말하겠다.
영화 <색,계>의 광위민
"난 사람들이 연애할 때 전쟁이나 혁명을 할 때보다 더 대담하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말했던 여자의 사진을 보고 있다. 1920년 중국 상하이에서 태어난 여자, 장아이링이다. 그녀는 소설가다.
그녀의 조부는 청나라 관료였고 조모는 양무운동을 주동한 리훙장(李鴻章)의 딸이었다. 어떤 집안의 자손이라는 것과 한 아이의 행복은 완벽히 별개다. 아이가 2살 때 어머니는 유학을 위해 유럽으로 떠났고, 부모는 이혼했다. 아버지는 폭력을 썼고 계모와는 사이가 나빴다. 아이는 조숙하고 똑똑했다. 4살에 이미 당시를 외우고, 14살엔 「모던 홍루몽」을 썼다. 1938년 런던대학교에 수석 합격했지만,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유학을 포기하고 홍콩대학교에 입학한다. 하지만 1941년 일본군이 홍콩을 점령하자 학업을 중단하고 이듬해 상하이로 돌아와 소설을 쓴다.
1943년의 데뷔작은 ‘기적 같다’는 찬사를 들었다. 23살이었다. 「첫 번째 향로(第一香爐)」, 「경성지련(傾城之戀)」, 「붉은 장미와 흰 장미」 등이 그 시절 작품들이다.
24살에 친일파 관료 후란청과 결혼했지만 곧 이혼한다. 폭발적인 에너지로 작품을 썼고 천재 작가라는 경탄이 늘 뒤를 따라다녔지만 20대 여성 소설가에게 삶은 녹록하지 않았다. 공산주의하에서 공공연하게 ‘말세 작가’라는 지탄을 받았고 사생활까지 공론화되어 화제가 되거나 부당한 비난을 한 몸에 받곤 했다. 모국을 떠나 멀고먼 나라로 떠나는 것 말고는 이 젊고 예민한 작가 앞에 놓인 다른 선택지가 없었을 것이다.
1955년에 장아이링은 이민의 형식으로 미국에 정착한다. 1956년, 35살에 재혼한 상대는 65세의 미국 작가였다. 40대에 사별한 뒤 그녀는 이국땅에 혼자 살았다. 혼자 썼다. 모국어로도 쓰고 영어로도 썼다. 지병과 생활고가 끊이지 않았다. 로스엔젤레스의 한 아파트에서 그녀가 죽은 지 여러 날 만에 발견되었던 해는 1995년이다. 1995에서 1920을 빼 본다. 75가 나온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비밀과 고독, 비애와 쾌락에 대해 평생 탐구하고 썼던, 한 인간의 생애 75년이다. 설명할 길 없이, 마음이 아리다.
그녀의 대표작 『색, 계』는 우리에겐 이안 감독의 영화로 알려졌다. 색계는 ‘배우’라는 역할 놀이를 통해 무대의 안과 밖에서 정체성 혼란을 겪는 이십 대 여성의 성장사인 동시에, 두 편의 불우한 사랑에 관한 이야기이다. 중심축에 놓인 사랑은, ‘이’(량차오웨이)와 왕치아즈(탕웨이) 사이의 것이다. ‘이’는 조국을 배신하고 동족을 살육하는 사람이다. 그는 아무리 뜯어봐도 도무지 속을 짐작하기 어려운 것 같은 사람이다. 그런데 실은 ‘이’가 왕치아즈에게 흔들리는 과정은 비교적 명확하다. 조국과 동족을 배신하고 친일을 하는 ‘이’는 삶의 부조리와 불안과 두려움을 안고 사는 남자다. 그가 도망치려는 곳은, 순간의 관능과 정념 속이다.
영화 <색,계> 광위민
나에게 ‘이’보다 더 흥미로운 남자는 광위민이었다. 그는 대학생이던 왕치아즈의 짝사랑이자 첫사랑이다. 그는 대의를 위해 앞장서 싸우는 사람, 투사이다. ‘조국 해방’이라는 단 하나의 투철한 신념만이 그를 움직인다. 그 대의명분에 의해 그는 사고하고 행동한다. 세상일이야 어찌 되었든 내 새끼발가락의 티눈이 더 중요하다 여기는 범속한 인간들에 비해서야 대단하다. 행동 전략이 때론 어설프고 무모해 보인다고 해서 애국주의자의 그 큰 뜻까지 폄하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지만 사랑 앞에서라면 그 남자는 비겁했다. 홍콩 시절부터 그가 그녀에게 가졌던 감정이 우정인지 연민인지 사랑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아마도 그것들이 한데 뒤섞인 성질의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적어도 그는 자신을 수줍고 떨리는 눈길로 바라보는 왕치아즈의 마음은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 나쁘다. 딱 잘라서 여자의 마음을 거절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건 대의가 아니냐고 꾸짖지 않아서가 아니다. ‘섹스 연습’을 위해 왕치아즈가 다른 남자와 첫날밤을 치르도록 방조하고, 그녀를 대의를 위한 성적 도구로 이용하도록 해서도 아니다. 위험에 빠지게 될 줄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사지에 몰아넣는 행동도 어이가 없긴 하지만 참을 수 있다.
하지만 시종일관 모호함을 견지하는 그 태도에 대해서는 정말로 너그러이 용서하기 어렵다. 3년 후에야, 뒤늦게 자신을 사랑했던 여자를 어떻게 해보려는 행동이야말로 최악이었다. 뒤늦게야 안으려 드는 남자를 향해 왜 3년 전엔 이렇게 하지 않았느냐는 왕치아즈의 대사는 아프고 절절하다. 물론 그 3년 전에 광위민과의 사랑에 대한 확신을 가졌더라도, 그들이 함께 뜨거운 청춘의 열정을 불살랐더라도, 그들에게 닥칠 현실이 크게 변하진 않을 것이다. 왕치아즈는 여전히 ‘막 부인’으로 살아야 할 테고, 이 대장과 영육의 위험한 줄타기를 했을 것이다.
영화 <색,계>의 주인공들
그래도 그녀는 지금보다는 조금 더 자신에 대해 잘 알게 되었을 것이다. 스파이가 아니라 진짜 무역상의 하릴없는 세 번째 부인으로 살게 되었대도, 훨씬 덜 허무했을 것이다. 후회와 자기부정에 사로잡히는 시간보다, 스스로만 아는 자발적 동력이 그녀를 더 치열한 스파이나 더 치열한 생활인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광위민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았으며 결과적으로 왕치아즈가 내면이 ‘허망한’ 인간이 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세상을 구하는 일과, 내 옆의 인간에게 따뜻한 손 내미는 일. 둘 중에 무엇이 먼저일까? 누군들 무엇이 맞다고 강력히 우길 수 있을까. 내가 대답해도 된다면, 솔직히 모르겠다고 하겠다. 그러나 남들이 뭐라거나, 한 순간도 솔직하지 않은 남자가 가장 나쁘다, 라고 말하겠다.
1972년 서울 출생으로 단편 「낭만적 사랑과 사회」로 2002년 제1회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문단에 나왔다. 이후 단편 「타인의 고독」으로 제5회 이효석문학상(2004)을, 단편 「삼풍백화점」으로 제51회 현대문학상(2006)을 수상했다. 작품집으로 『낭만적 사랑과 사회』『타인의 고독』(수상작품집) 『삼풍백화점』(수상작품집) 『달콤한 나의 도시』『오늘의 거짓말』『풍선』『작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