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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원 소설 선집』 책 속 밑줄 긋기
살아야해, 사랑해
사랑, 이라고 김지원은 자주 썼다. 그녀는 사랑이라는 단어의 주변을 맴돌지 않고 사랑이라는 단어로 직진해버리는 소설가다. 그녀의 소설 속에서 사람들은 모두 사랑을 하거나, 했거나, 할 것이다.
사랑, 이라고 김지원은 자주 썼다. 그녀는 사랑이라는 단어의 주변을 맴돌지 않고 사랑이라는 단어로 직진해버리는 소설가다. 사랑해, 라고 말하기까지 두려움에 떨어본 일이 있는 당신이라면, 「사랑의 기쁨」(1975)과 「사랑의 예감」(1997)에 대해 거침없이 쓰는 김지원의 소설을 무모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사랑해, 라고 말한 뒤에도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두려움에 심장 부근을 가만히 눌러본 일이 있는 당신이라면 더욱, “그가 웃으면 하내는 자기가 그를 행복하게 만든 것 같아 기쁘다.(『겨울나무 사이』)” 라고 정직하게 쓰는 김지원의 소설을 순진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두려움을 몰라서 사랑을 사랑이라 쓴 것이 아니다. 김지원은 사랑이라는 감정이 어떻게 강렬하게 불타오르는지 알지만, 얼마나 허망하게 무너지는지도 아는 소설가다. 운명적으로 만났다고 생각되는 ‘착한 남자’가 사실은 우연히 만난 범죄자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사랑의 기쁨」), “이상적인 남자는 많은 것이 이상적이 아”닌 남자일 수 있다는 것을(『물이 물속으로 흐르듯』), 그녀는 안다. 김지원은 다만 사랑의 순간에 충실할 뿐이며, 그 충실함을 충실하게 서술할 뿐이다. 사랑이 시작될 때 거침없고 정직하던 김지원의 문장들은 사랑이 무너질 때도 똑같이 거침이 없고 거짓이 없다. 김지원은 당신이 나를 사랑하지 않아서 몸이 바늘이 되어버린 듯하다고, 화상을 입은 피부 위에 옷을 입은 듯하다고, 적나라하게 쓴다. 또한 김지원은 한때 함께 행복을 꿈꾸었던 남편이 더 이상 “자기에게로 오는 것 같지 않으며 더욱이 자기가 있는 곳에서 출발하는 것 같지조차 않다.”(『겨울나무 사이』) 고, 사랑하는 당신이 없어서 “낮은 길고 저녁은 쓸쓸하고 밤은 공허했다.”( 『폭설』)고 정직하게 쓴다.
김지원 소설의 대부분은 이렇듯 사랑의 탐구에 바쳐지고 있다. 그녀의 소설 속에서 사람들은 모두 사랑을 하거나, 했거나, 할 것이다. 60대 노인이 “사랑에 빠진 사춘기 소녀”처럼 사랑을 시작하기도 하고, 중년의 여인이 쓸쓸하게 사랑을 끝내기도 한다.(『바닷가의 피크닉』) 소설가라면 좀 더 다양한 주제를 다루어야 하지 않느냐고 누군가는 물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김지원은 사랑이라는 감정에 매몰된 소설가가 아니다. 그녀는 삶의 문제를 사랑으로 수렴하지 않고 오히려 사랑을 삶의 문제로 확대한다. 가령, 『폭설』에서 사랑은 생의 손님이 아닌 생의 주인이 되는 일이자, 자기 자신을 탄생시키는 일로 여겨진다. 「사랑의 기쁨」에서 도래할 사랑에 대한 기대로 가득 찬 소녀는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나는 오늘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다, 사랑이 찾아왔기 때문이다.”
김지원의 소설에서 사랑하는 것은 살아가는 것이고, 살아가는 것은 사랑하는 것이다. 덕분에 김지원의 소설은 이민문학에 속하면서도 이민이라는 특수한 상황에 고착되지 않는다. 김지원은 의식적으로 이러한 고착화에 부단히 저항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녀가 소설 속 인물의 입을 통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맨날 망향가만 부르거나 소수 인종의 비애만 읊으려거든 한국으로 돌아가시오(…) 내가 보기에 예술은 그 이상의 것이오.(…) 진정한 의미의 코스모폴리탄이 되든가 한국으로 가든가 둘 중 하나요.”(『폭설』) 김지원은 사랑이라는 주제를 놓지 않음으로써 이민문학이라는 틀에 갇히지 않고 보편성의 바다를 향해 나아갈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사랑은 우리 모두가 하는 것이지만, 우리 모두가 다르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의 슬픔은 여기에서 시작되곤 하는데, 김지원 소설의 갈등 역시 바로 여기에서 시작되고, 지속된다. 그래서 김지원의 소설은 사랑의 완성에 대한 소설이 아니라 사랑의 방법에 대한 소설이다. 『폭설』 은 서로 다른 사랑의 방법들이 충돌하다가 결국 파국을 맞이하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곡진히 들려준다. 김지원은 이 소설을 통해 결혼이 사랑의 완성이 아닌 사랑의 과정일 뿐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주장하려는 듯하다.
결혼 후에도 부부는 “서로 다른 방향으로 자라”버리기 일쑤고, 누군가는 결혼을 통해 영원한 합일을 꿈꾸지만, 누군가는 결혼을 한 뒤에도 자유를 주장하며 아내가 아닌 다른 여자와의 연애를 꿈꾸기 때문이다. 결혼식 때 진주와 기 두 사람이 함께 듣는 “서로 사랑하라, 허나 사랑에 속박되지 말라. (…) 함께 서 있으라, 허나 너무 가까이 서 있지는 말라. 사원의 기둥들도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을. 참나무, 사이프러스 나무도 서로의 그늘 속에선 자랄 수 없다.”는 칼릴 지브란의 시구는 아름다우나, 우리는 기둥도 나무도 아니기에 함께 서 있으되 너무 가까이 서 있지 않는 법을 잘 알지 못한다. 잘 알지 못해서 나와 너는 그렇게도 자주 너무 가까이서 환희를 느끼거나 너무 멀리서 괴로워하는 것이다. 『물이 물속으로 흐르듯』에서 거듭된 사랑의 상처로 괴로워하는 윤하도 그래서 기뻤고, 그래서 슬프다. 그녀는 말한다. “당신은 나를 세상 꼭대기에 올려놓더니 그다음에는 희망과 노여움과 억울함과 수치스러움을 알려주었다.” 윤하에게 ‘나’와 ‘너’의 관계가 마치 ‘물이 물속으로 흐르듯’ 평화로웠던 시간은 순간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실패한 사랑이라고 해서 사랑이 아닌 것은 아니다. 윤하는 고통으로 심장이 조여들면서도 이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그는 윤하에게 허물어지는 지붕에 깔려 사는 것 같던 첫 결혼 생활을 떠날 용기를 주었으며 가슴을 열고 애정을 주고받는 것이 무엇인지를 잠시나마 알려주었다. 그것은 어쩌면 자기가 영원히 고마워해야 할 일인지도 몰랐다.(『물이 물속으로 흐르듯』)” 어쩌면 김지원이 진주와 윤하를 통해 쓰고 싶었던 것은 숱한 실패에도 불구하고 ‘그러나’의 힘으로 생을 살아내는 사람들의 이야기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는 어떻게 가능해지는가. ‘그러므로’라고 말하며 주저앉지 않고 ‘그러나’라고 말하며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것은 아마도 김지원의 여자들이 외부의 영향을 받기 쉬운 개방적인 주체라는 데에서 비롯되는 듯하다. 그녀의 소설에서 어떤 여자는 “전과 다른 주파수로 진동”하며 자신의 몸을 “가장자리 없이 넓은 바다인 듯” 느끼고(「사랑의 예감」), 어떤 여자는 “주위 여러 사람의 느낌을 받아들이는 매개물 같은 투명한 상태가 되어”버리기도 하며(『폭설』), 또 어떤 여자는 행복감에 젖어 “악기처럼 떨며 공명”한다.(『잠과 꿈』) 영향받기 쉬운 주체는 자그마한 일로도 깊게 상처 입을 수 있지만 자그마한 일로도 쉬이 회복할 수 있다. 김지원은 이러한 회복탄력성을 스펀지에 비유하기도 한다. “생명의 물 한 방울까지 다 짜낸 뒤에 스펀지로 돌려보내도 스펀지는 즉시 도로 살아난다. 여자는 잘도 견뎌낸다.”(『물이 물속으로 흐르듯』)
그런데 김지원의 여자들은 사랑으로 인해 자신이 서서히 죽어가고 있다고 느낄 때조차도 사랑이 아닌 다른 회복 방법을 알지 못한다. 김지원에게 사랑은 “불가능한 것을 사람들에게 믿게 해주는” 마술과도 같은 힘을 지니고 있어서 “외롭고 쓸쓸한 것 같으면서도 사실은 살아 있다는 사실에 늘 행복했었다는 것을 기억”하게 만든다(『마술의 사랑』). 김지원이 펼쳐 보인 신산한 삶의 풍경이 결코 행복해 보이지 않으면서도 완벽히 불행해 보이지 않는 것은 이 소설가에게 이렇듯 ‘사랑’이라는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믿음이 다음과 같은 아름다운 대화를 가능하게 했을 것이다.
“겨울나무 사이로 뭐가 올까?”
“햇볕이 더 분명히 보이겠지.”
“그래, 햇볕이.”
- 『겨울나무 사이』 중에서
겨울나무의 스산함에 지지 않고 겨울나무 사이를 바라볼 줄 알던 소설가 김지원은 이제 죽고 없고, 그녀의 소설만이 남아 우리에게 말을 걸어온다. 나는 그 목소리를 이렇게 받아 적는다. 살아야 해, 사랑을 해.
정실비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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