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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원의 소설을 다시 읽다

부유하는 삶 또는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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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운명은 이미 그 안에 자기 존재를 해체하는 요소들이 잠복되어 작용한다는 점에서 비극적일 수 있다. 일상의 삶에 혼재되어 있는 열정과 사랑은 그 자체가 실의와 환멸을 내포한다. 그러므로 그 속에서 이루어지는 사랑과 섹스의 욕망도 사실은 사랑 그 자체의 결핍과 부재의 다른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소설가 김지원이 자신의 작품을 통해 그리고자 한 지점도 바로 이것이다.


뉴욕의 거리에서

소설가 김지원이라는 이름을 떠올리면 가슴에 스산한 바람이 일어난다. 이 바람은 쓸쓸하다. 그러나 때로는 뜨거운 소용돌이를 일으킨다. 보이지 않게 마음을 할퀸다. 어디로 불어갈지 알 수 없는 바람, 그 바람을 쓸어안으면서 김지원의 소설을 다시 읽는다는 것은 말할 수 없는 아픔이다.

김지원 소설의 원점에는 「사랑의 예감」 이 자리 잡고 있다. 이 작품은 1997년 제21회 이상문학상 대상 수상작이다. 당시 심사위원들은 이 작품에 대해 세상의 모든 일들이 있는 그대로 들춰내지는 현실 속에서 아직도 어딘가 신비화시킬 수 있는 여지가 남아 있다면 그것은 사랑의 힘이라는 점을 강하게 전달하고 있다고 평했다.

김지원의 중편 소설 「폭설」 은 초기의 작품 세계를 대표한다. 이 소설의 뒤에 「겨울나무 사이」 와 「잠과 꿈」 같은 작품이 놓여 있다. 「폭설」 과 「잠과 꿈」 은 공통적으로 이야기의 무대를 뉴욕으로 설정하고 있다. 그리고 바로 이 공간 설정 자체가 가장 문제적인 요소가 된다. 일상적인 현실의 구체적인 장소로 그려지는 뉴욕에는 꿈을 찾는 사람과 꿈을 잃은 사람들이 섞여 있다. 그러므로 이 공간에는 환락의 낙원과 낭패의 지옥이 공존한다. 이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불안정한 존재로서 도시적 공간인 뉴욕을 자신의 일상 속에서 끊임없이 해체한다. 그러므로 뉴욕은 실재적 공간으로서의 뉴욕이 아니라고 해도 문제될 것이 없어 보인다.

이 두 편의 소설에서 작가는 뉴욕이라는 도회의 모습을 일상의 무의미함으로 환치시켜 놓고 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다. 일상에 짓눌려 있는 사람들은 거기서 벗어나려는 노력도 없이 되풀이되는 몸짓을 보여준다. 이런 상황 속에서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서로 단절된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억압과 채울 수 없는 결핍과 끝닿는 곳이 없는 욕망이 넘칠 뿐이다. 물론 일상은 반복되며 그 자체로 지속을 드러낸다.

실제로 소설 속 인물들의 하루하루는 때로는 가볍게 때로는 무겁게, 그리고 때로는 지루하게 때로는 간략하게 그려진다. 아침에 자리에서 일어나고, 커피를 마시고, 느지감치 밖에 나와 카페에서 친구를 만나고, 미술관에 가고,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고, 파티를 즐기고, 섹스를 하고, 술을 마시고… … 이런 식으로 이어지는 그들의 일상을 따라가다 보면, 이 평범한 일상이 하나의 삶의 틀로 자리하고 있다는 점에 놀라게 된다. 매일같이 비슷하게 반복되는 일상의 삶이 서사를 지탱하는 중심축으로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작가는 하찮게 보이기도 하는 일상을 떠받치는 뉴욕이라는 공간의 도시성(都市性) 자체를 놓치지 않는다. 왜냐하면 뉴욕이 아니고서는 말하기 어려운 미술과 연극, 영화 등의 예술적 담론과 환락과 섹스를 함께 구석구석에 끼워놓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근원을 알 수없는 허무를 앓고 있는 인물들의 욕망에 사랑이라는 환상을 덧씌우고 있다.

그러므로 두 소설이 그려내고 있는 참주제를 사랑이라는 한마디로 규정하기는 어렵다. 소설 속의 이야기 자체가 세속화되고 있는 성의 문제를 일상의 영역에서 가볍게 터치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가볍다는 것은 진지하지 못하다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성의 정치’와 같은 이념성을 제거하고 있다는 점에서이다. 이 작품이 성의 풍속도를 그리는 것도 아니고 성에 관한 태도를 논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지만 문제의 핵심이 성과 관련된다는 것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와인 가게에서 일하는 모습

두 편의 소설에서 가장 크게 부각되고 있는 것은 결혼이라든지 가정이라는 제도의 불안정한 상태와 거기서 오는 불안이다. 소설 속 인물들은 이미 결혼의 실패를 겪었거나 비슷한 이유로 독신으로 살아가면서 자유롭게 성을 나눈다. 결혼을 유지하고 있는 인물들의 경우에도 가정이라는 제도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경우가 드물다. 하지만 그러한 불안정한 상태 속에서도 여전히 가치를 부여하고 있는 것은 가족이라는 개념이다. 그들은 가족이라는 관습적 테두리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면서도 결국은 그 테두리에 의지하고자 한다. 따라서 이 두 편의 소설이 여성의 삶과 그 성에 관한 가치의 위기만을 그려내고 있다고는 할 수 없다. 불확실하고 혼란스럽기는 하지만 소설 속의 인물들은 모두 사랑에 대한 믿음을 가장 강하게 요구하고 있다는 것이 올바른 지적일 것이다.

인간의 운명은 이미 그 안에 자기 존재를 해체하는 요소들이 잠복되어 작용한다는 점에서 비극적일 수 있다. 일상의 삶에 혼재되어 있는 열정과 사랑은 그 자체가 실의와 환멸을 내포한다. 그러므로 그 속에서 이루어지는 사랑과 섹스의 욕망도 사실은 사랑 그 자체의 결핍과 부재의 다른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소설가 김지원이 자신의 작품을 통해 그리고자 한 지점도 바로 이것이다. 김지원은 스스로 이렇게 밝힌 적이 있다.
“나는 가끔 동그라미라는 생각을 한다. 이리 봐도 절대 안전한 동그라미고, 저리 봐도 절대 안전한 동그라미인데, 살아가며 여러 경험을 하는 동안에 이해의 영역이 넓어지면 그 동그라미는 커진다. 아니, 안 커지고는 배겨낼 수가 없다.”
김지원이 이상문학상을 받은 뒤 수상 소감에 쓴 말이다. 자기 문학의 세계를 설명하면서 남겨놓은 이 말은 여러 가지 방향으로 읽힌다. 가장 직접적으로는 어떤 새로운 가능성에 대한 도전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자기 문학에 대한 대단한 자부심일 수도 있다. 어쩌면 무한한 포용력을 추구하고자 하는 욕망처럼 보이기도 한다. 어떤 특징적인 외형으로 자신의 문학이 평가되는 것을 거부한다는 뜻으로도 읽을 수 있다. 완결성을 추구하는 작가 정신으로 읽어도 무방하다. 그런데 나는 이 동그라미에서 김지원이 꿈꾸었던 ‘구원의 사랑’을 본다. 이 동그라미 속의 이야기를 김지원의 소설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문학과 인간, 삶과 사랑이 모두 하나가 된, 그녀가 그려낸 그녀만의 세계일 수 있기 때문이다.


* 이 글은 ‘김지원 소설 선집’ 1권 『폭설』 에 실린 작품 해설 「부유하는 삶 또는 사랑」 가운데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관련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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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원 소설 선집 세트 김지원 저 | 작가정신
고(故) 김지원 작가는 맑고 섬세한 감수성과 아름답지만 절제된 문체를 통해 인간의 내면을 깊이 있게 탐구해온 독자적인 문학세계를 가지고 있다. 김지원 작가는 미국이라는 나라뿐만 아니라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세계에서 타자이자 이방인이었던 여성으로서의 삶과 정체성을 탐구했으며, 남녀 관계를 통해 인간관계의 본질을 파고드는 집념을 보여주었다. 『김지원 소설 선집』 은 한국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인 김지원의 40여 년에 걸친 문학 세계를 재조명하고 보전하기 위해 기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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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권영민(문학평론가, 서울대 교수)

1948년 충남 보령에서 태어났다. 서울대 및 동 대학원을 졸업한 후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미국 하버드대 객원교수, 버클리에서 한국문학 초빙 교수를 역임했다. 1990년 현대문학평론상, 1992년 김환태평론상, 2006년 만해대상 학술상을 수상한 바 있으며, 이외에도 서울문화예술상을 수상했다. 현재는 서울대 국문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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