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드리히 대왕의 시골 궁전
클레페에서 자동차로 10여 분 달리다 보면 베트부르크 하우라는 아주 조용하고 한적한 도시가 나온다. 클레페도 인구 5만이 안 되는 작은 도시지만 이곳은 1만2,000명이 조금 넘게 사는 정말 시골 마을 같은 곳이다. 이렇게 작고 조용한 도시에 한때 프로이센 왕국을 지배했던 프리드리히 대왕의 궁전이 위치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별로 없을 것이다. 또한 그런 고성이 미술관으로 변신해 주옥같은 근현대 예술품들의 안식처가 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더더욱 드물 것이다. 그 주인공은 바로 700년의 전통과 역사를 지닌 모일란트 궁전미술관이다. 알지도 못했고 평생 찾아가볼 엄두도 못 냈을 이 작은 도시까지 내가 기꺼이 찾아가게 된 것도 순전히 프리드리히 대왕이 살았던 궁전에 대한 호기심과 그곳에서 만나는 현대미술은 어떤 모습일지 직접 확인하고 싶은 충동 때문이었다.
모일란트 궁전미술관 전경
모일란트 궁전미술관은 자동차가 들어갈 수 없는 조용하고 한적한 숲 속에 위치해 있다. 울창한 나무들로 에워싸인 잘 닦인 산책로를 따라 10분 정도 걸었더니 위풍당당하면서도 도도한 궁전이 모습을 드러냈다. 사실 ‘14세기에 지은 독일 궁전’이라는 정보만을 가지고 찾아갔기에 건축물 자체에 대한 기대는 크지 않았다. 당시의 독일 건축이란 너무도 보잘것없었기 때문에 아무리 궁전이라 하더라도 우리가 떠올리는 17세기나 18세기 프랑스의 화려한 바로크식 궁전과는 비교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일란트 궁전은 기대 이상으로 매력적이고 웅장했다. 둥글고 육중한 기둥과 뾰족한 탑 들이 인상적인, 전형적인 독일식 고딕 건축물이었다. 붉은 벽돌로 지은 건물은 세월의 흔적을 반영하듯 이끼와 담쟁이넝쿨로 곳곳이 덮여 있었는데 낡아 보이기보다는 오히려 정감과 운치가 느껴졌다. 하얗게 칠해진 창문과 출입문 들은 외관의 붉은 벽돌과 대조를 이루면서 단정하고도 세련된 인상을 주었다. 특히 새하얀 색으로 칠해진 주 출입문은 까만색의 특이한 나뭇잎 패턴으로 장식되어 있어 현대인의 눈에도 무척이나 세련돼 보였다. 궁전 주변의 정원들 역시 깔끔하게 잘 정돈되어 있어 오랜 세월 동안 공들여 가꾼 흔적이 엿보였다. 이곳이 미술관임을 암시하듯 정원 곳곳에는 야외 조각품들이 놓여 있고, 해자로 둘러싸인 성은 마치 작은 섬 위에 떠 있는 것처럼 신비롭게 보였다. 저렇게 고풍스러운 중세 궁전 안에는 분명 렘브란트나 바토가 그린 화려하고 장엄한 고전 회화 작품이 멋지게 걸려 있어야만 할 것 같았다. 그런데 저 안에서 미술 전문가들조차 난해하게 여기는 현대미술가들의 설치작품을 대거 볼 수 있다는 사실이 상당히 아이러니하고도 흥미로웠다.
요제프 보이스의 학교 후배, 그의 후원자가 되다
이곳의 소장품은 원래 클레페 지역의 컬렉터였던 판 데어 흐린턴 형제가 50년간 수집한 것으로 회화에서 조각, 드로잉, 판화, 사진, 응용미술까지 그 장르도 다양하고 19세기부터 현대미술까지 시기도 다양한 예술품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중에서도 20세기 독일 미술을 대표하는 요제프 보이스의 작품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데 보이스의 초기작부터 말기작까지 4만여 점이 넘는 회화와 조각, 드로잉 들이 이곳에 소장되어 있다. 또한 미술관 안에 위치한 ‘요제프 보이스 아카이브’는 보이스가 직접 기증한 10만 점이 넘는 보이스 관련 기록물과 사진 들을 보유하고 있어 보이스 연구자들에게는 중요한 자료실 역할도 하고 있다. 모일란트 궁전미술관이 이렇게 특정 작가의 작품을 많이 소장하게 된 것은 바로 흐린턴 형제와 보이스와의 특별한 인연 때문이었다.
평범한 농가 가정에서 태어난 두 형제는 대학 때 미술사를 전공한 뒤 각각 큐레이터와 교사로 일하면서 지역에서 활동하는 젊은 작가들의 작품을 사 모으기 시작했다. 지인의 소개로 당시 무명이었던 요제프 보이스를 알게 되었는데 보이스는 그들 형제가 다녔던 클레페 지역의 고등학교 선배이기도 했다. 학교 선후배 사이가 막역한 건 한국뿐 아니라 독일도 마찬가지인지 흐린턴 형제는 보이스의 작품을 보자마자 곧 매료되었고, 컬렉터로서 작품을 구입하는 데 그치지 않고 보이스의 첫 개인전과 두 번째 개인전까지 열어주는 등 열렬한 후원자가 되었다. 이렇게 보이스가 작가로 데뷔하던 시절부터 시작된 그들의 우정은 작가가 생을 마감할 때까지 이어졌고 모일란트 미술관 곳곳에 전시된 보이스의 작품들은 바로 그 우정의 흔적이자 증거품인 것이다.
미술관 곳곳에 설치된 요제프 보이스의 작품들 중 하나.
위 작품은 「카프리 배터리」, 1985년작
토니 아워슬러의 영상설치 작품이 부르크하르트 베예를(Burkhart Beyerle, 1930~)의
평면적인 회화 작품들과 함께 전시되어 있다.
이런 사연으로 이곳에 터를 잡게 된 요제프 보이스의 작품들을 비롯해, 대부분의 근현대 작품들이 시대적 구분 없이 한 공간에 섞여 전시되어 있다. 미술사적인 분류보다는 시대와 장르, 매체를 초월하는 다양한 작가의 작품들을 한 공간에 동시에 전시함으로써 방문객들에게 또 다른 감상법과 소통 방식을 제시하려는 것인데 이 역시 요제프 보이스가 제안한 아이디어였다고 한다. 가령 미디어 작가 토니 아워슬러(Tony Oursler, 1957~)의 실험적인 영상 설치작품이 평면적인 20세기 모던 회화 작품들과 한방에 나란히 전시되는 식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전시 방식도 정기적으로 바뀐다. 때로는 주제나 작가별로 나뉘어 전시되기도 한다. 수많은 소장품을 최대한 많이 보여주기 위함인지 작은 그림들은 복도나 전시실 벽에 아래위 할 것 없이 그룹을 지어 다닥다닥 붙여놓았는데 그 자체가 하나의 설치미술 같았다.
시골 미술관의 넉넉한 인심
좁고 가파른 계단을 몇 번 오르락내리락하다 보니 진땀이 나긴 했지만 옛 궁전의 다락방을 오르는 것은 분명 특별하고도 유쾌한 경험이었고 또한 꽤나 재미있는 일이기도 했다. 생각보다 미술관 규모가 크기도 하고, 지하부터 꼭대기 층까지 다 챙겨서 구경하다 보니 어느덧 마감 시간이 다 되어버렸다. 안내 데스크 직원에게 인사하고 밖으로 막 나서려는데 그 직원이 바깥 별관 건물에서 하는 전시도 꼭 보라고 일러준다. 처음 미술관을 들어설 때부터 한국에서 일부러 왔다고 하니 이것저것 브로슈어도 챙겨주고 아낌없이 설명을 해주던 친절한 독일 아줌마였다. 미리 예약한 지역민들이 전시를 보러 와서 관장님이 직접 전시 설명까지 해주실 예정이란다. 관장님께는 지금 연락할 테니 예약자 명단에 없어도 그냥 그룹에 합류하라는 안내가 따랐다. 숲 속이고 늦은 시간이라 잠시 망설였지만 호의를 거절할 수도 없어 시키는 대로 했다.
별관에서는 스페인 작가 안토니 타피에스의 기획 전시가 열리고 있었고 미술사 박사 느낌이 물씬 풍기는 구레나룻까지 기른 나이 지긋한 관장님이 지역민들에게 열심히 전시 설명을 하고 계셨다. 전시장 문을 조심히 열고 들어서자 예기치 않은 동양인의 등장에 미소 지으며 악수까지 청해주신다. 와줘서 고맙다며 전시 투어 끝나고 간단한 다과가 마련되니 꼭 먹고 가란다. 이것 역시 대도시의 미술관에서는 절대 경험하지 못할 시골 미술관의 인심이자 환대 방식이다. 이미 퇴근 시간을 넘긴 늦은 저녁에 지역민을 위해 관장님이 직접 전시 설명을 하고 있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그 시간에 숲 속 미술관에 와서 전시를 즐기는 지역 아줌마 부대의 열성도 대단해 보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곳은 일요일에도 전시를 기획한 큐레이터나 관장이 직접 나와 전시 설명을 해주는 등 미술을 통해 지역민들에게 봉사하고 소통하고 있다고 한다. 그 방식이 참으로 감동적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다과 덕분에 저녁까지 해결한 후 다시 길을 재촉했다.
독일 작가 이네스 타르틀러의 설치미술 작품 「자동차 차고」, 2004
그런데 입구의 자동차가 다시 눈에 들어오면서 호기심이 발동했다. 전시장 입구에서 안내를 맡고 있는 여직원에게 살짝 물어봤다. “저 차 누구 거예요? 여기 주차해도 되는 건가요” 직원의 말이 충격이었다. “물론 안 되죠. 저 차들 작품이에요.” 독일 출신의 이네스 타르틀러라는 젊은 여성 작가의 설치미술이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언젠가 미술잡지에서 본 적이 있는 것도 같다. 이후에 확인해보니 베를린에서 활동하는 타르틀러는 2004년 베를린에서 처음 ‘자동차 차고’ 프로젝트를 선보인 후 이후 영국과 뉴질랜드 등에서 계속 이 프로젝트를 업데이트해 전시하고 있었다. 보통 자동차 덮개는 대부분 검은색이나 회색 등 눈에 띄지 않고 때도 덜 타는 짙은 무채색인 경우가 많다. 그런데 우연히 주차장이나 길에서 호화스런 금색 천으로 덮인 차를 본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 얼마나 고가의 비싼 차였으면 덮개마저도 금색일까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튀는 걸 좋아하는 유명 연예인의 차로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람과 장소, 환경에 대한 관계와 고정관념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는 타르틀러는 그저 평범하고 일반적인 자동차에 번쩍번쩍 호사스런 금색 덮개를 한 번 씌우는 행위를 통해 보는 이들에게 궁금증을 불러일으킨다. 또한 모일란트 성에서처럼 자동차를 주차하면 안 될 만한 곳에 세워둠으로써 이것이 작품인지 불법주차인지 알 수 없게 만든다. 이렇게 현대미술은 조금만 방심해도 나름 전문가라는 사람의 눈까지 속여버린다. 라인강 언저리에 영원히 꼭꼭 숨어버릴 뻔했던 옛 독일 궁전. 이 숲 속 궁전에서 보이스를 비롯한 유쾌한 현대미술과 함께 보낸 그 하루는 내게 잊지 못할 또 하나의 특별한 추억을 만들어주었다.
모일란트 궁전미술관 아트숍 전경.
조각공원과 연결된 허브 정원이 있어 아트숍에서는 허브 관련 서적도 다양하게 눈에 띈다.
모일란트 궁전미술관과 연결된 허브 정원의 모습
조각공원 작품 중 하나, 토마스 귀납펠, 「심장들」,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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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연미술관을 걷다 이은화 저 | 아트북스
이 책은 대도시 유명 미술관 코스에 싫증난 이들, 한가로운 미술관 여행을 꿈꾸는 이들을 독일과 네덜란드의 국경에 자리한, 라인강 주변 자연미술관으로 안내한다. 현대미술과 관계된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이은화가 지난 10년간 직접 다닌 미술관 여행을 바탕으로, 여느 여행서에서도 쉽게 찾을 수 없는 비밀 루트를 공개했다. 미술관의 탄생 배경뿐 아니라 건축 콘셉트, 전시 프로그램, 작가와 작품에 얽힌 뒷이야기 등을 충실히 담아 여행을 계획하는 독자를 위한 내실있는 가이드북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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