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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을 때 『워거즐튼무아』

워거즐튼무아? 아무튼 즐거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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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들 때는 정말 힘들다고 주위 사람들에게 반드시 말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밤 그 일을 잘 해서 넘기는 것이 필요하다면, 과한 성분이 가득 담긴 에너지 음료 대신 이 투명하고 맑은 그림책을 읽고 주문을 외워보는 것은 어떨까.

“자, 이제 정신 차리고 하던 일이나 합시다.”

퇴근이 가까워지는 느지막한 오후, 사무실에서 이런 얘기가 들린다는 건 아직 할 일이 무척이나 많이 남았다는 얘기다. 외근 나갔던 누가 한입거리 간식이라도 사들고 들어오면 겸사겸사 둘러 앉아 연예계 뉴스로 수다라도 떨면서 한없이 가라앉는 몸을 깨워보지만 일거리 앞에 앉으니 도로 눈이 감긴다. 사람 몸에도 남은 배터리라는 게 있다. 아침부터 벌써 몇 시간을 눈 돌릴 틈도 없이 일했는데 뭘 좀 집어 먹는다고 기운이 펄펄 날 리가 있겠는가.

퇴근까지 남은 시간은 얼마 안 되고 일감은 산더미처럼 남아 있고 야근이 눈에 보인다. 시험 보기 전날이면 느닷없이 서랍 정리를 시작하는 학생처럼 할 일이 밀리면 더욱 딴청을 부리고 싶어진다. 일이 많아졌으면 사람을 더 채용하는 것이 맞을 텐데 멀쩡히 있는 사람도 내보낸다. 우리 사무실만 그런 줄 알았는데 옆 사무실은 더 짜다니 어디 마땅히 도망갈 데도 없는 것 같고 사람을 더 쓰자고 해봐야 시장 상황이 어떠니 하는 장편 설교만 되돌아올 것이 틀림없고, ‘무슨 낙이 있어야 일을 하지’라는 한탄이 절로 나온다.

이런 기분이라면 하늘 아래 무슨 그림책을 꺼내 본들 도움이 될 리 없다. 누가 와서 내 일을 척척 대신 해준다면 모를까 감히 책 따위가 어떻게 나를 위로한단 말인가. 나는 지금 배터리 아웃이다. 퇴근, 퇴근, 퇴근을 달라. “죄송하지만 전혀 머리가 안 돌아갑니다, 부장님”하고 그냥 다 던지고 문을 나서고 싶다. 오직 퇴근만이 답이다.

맞다. 가능하다면 99.9%의 상황에서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 하지만 살다보면 정말 퇴근을 할 수가 없는 상황이 있다. ‘내가 꼭 처리해놓고 가야 하는 남은 일’이 있고 그건 직원의 애사심이나 의무감 때문이 아니라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 확실한 이유가 백 가지쯤 있는 경우.


오늘 소개하는 그림책은 어떻게든 오늘의 고비를 넘겨야 할 때 외울 수 있는 짧은 주문을 가르쳐준다. ‘라몰도지일꽃팔나, 라몰도지일박수, 워거즐튼무아’. 얼토당토않은 얘기 같지만 주문을 외우면서 상당히 효과를 본 사람이 있다. 마음이라는 게 참 이상해서 가끔 뜻 모를 주문이라도 외우면 답답하던 가슴이 좀 뚫리고 진행을 멈췄던 생각이 스리 슬슬 풀려나가기도 한다. 이 그림책의 주인공인 어린 왕자가 주문으로 효과를 좀 본 사람이다. 그는 왕과 신하의 잔소리에 파묻힌 채 날마다 폭풍 공부를 해야 하는 가엾은 처지였다. 수학, 국어, 지리, 역사, 법률, 외국어, 천문학, 승마, 활쏘기, 검술, 음악, 춤, 예의범절… 왕자가 배워야 하는 교과목은 끝도 한도 없이 많아서 세상에 놀이라는 걸 아예 모를 정도였다. 심지어 왕과 왕비는 한 달간 여행을 가면서 자신이 없는 사이에 ‘공부를 더 많이 해 놓도록 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출장 떠나면서 “나 없는 사이에 더욱! 알지?”라고 말하는 사장님 저리가라다.

왕자는 견딜 수가 없었다. 너무 힘들었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그 순간을 버텨야 할 때면 언젠가 궁궐 밖 나들이를 갔다가 보았던 텃밭의 글귀를 생각했다. 텃밭에는 이름 모를 식물이 자라고 있었고 그 곁에 꽂힌 널빤지에는 ‘라몰도지일꽃팔나 라몰도지일박수 워거즐튼무아’라고 쓰여 있었다. 이 주문을 생각하면 신기하게도 기분이 살짝 나아졌다.

왕자의 기분이 나아졌다는 건 그 순간을 어찌어찌 넘겼다는 것뿐이지 폭풍 공부가 갑자기 즐거워졌다는 건 아니다. 그 신통한 주문은 사실 텃밭 주인인 뚱보 아줌마가 써 놓은 것이다. 뚱보 아줌마는 부엌을 청소하다가 이름 모를 작고 까만 씨앗 한 알을 발견한다. 동네 사람들에게 물었더니 답이 다 달랐다. 누구는 나팔꽃 씨앗일 거라고 하고 누구는 수박씨라고 했다. 요리를 즐겨하는 뚱보 아줌마는 이 씨앗이 무엇으로 자라더라도 아무튼 즐거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정성껏 씨앗을 심고 널빤지 조각에 ‘나팔꽃일지도 몰라 수박일지도 몰라 아무튼 즐거워’라고 적어 둔 것이다.

살아가는 일도 그렇다. 오늘 하는 일이 내일 어떻게 될 지는 아무도 모른다. 날마다 물과 양분을 빨아들이고 용감하게 싹을 틔우고 손바닥만큼이라도 햇빛을 보려도 달려들어야 겨우 조금씩 자라날 수 있다. 씨앗이 그렇듯, 힘겨운 분투의 나날이다. 그러나 이 분투에는 반드시 휴식이 필요하다. 자신을 돌아보고 쉴 틈이 있어야 ‘아무튼 즐거워’라고 작은 희망을 걸고 유쾌하게 말할 수 있는 에너지가 생긴다.

그림책 속의 왕자는 계속 주문을 외우면서 잘 버텨냈을까. 아니다. 주문외우기로도 해결이 되지 않는 정점에서 왕자는 “이제는 아무 것도 다 못 하겠다”고 폭발해버린다. 책도 안 보고 물 한 모금 먹지도 않는 왕자를 놓고 신하들은 전전긍긍한다. 그러다가 문제의 주문을 찾아나서기로 한다. 어쩌면 주문의 주인이 왕자의 넉다운에 대한 해결책을 갖고 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

뚱보 아줌마를 찾아낸 신하들은 그 사이에 텃밭에서 훌륭하게 자란 탐스러운 호박을 발견한다. 그 씨앗은 수박도 나팔꽃도 아닌 호박이었던 것. 자신을 찾아온 신하들을 보고 상황을 간파한 뚱보 아줌마는 기지를 발휘하여 왕자를 구해준다. 왕자가 앓는 마음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는 이 ‘워거즐튼무아’ 호박밭의 호박으로 만든 특제 호박파이를 먹으면 되는데 반드시 시원한 바람이 부는 한가로운 곳에서 가장 편안한 옷을 입고 친한 친구들과 함께 먹어야 한다고 신하들에게 일러준 것이다. 신하들은 왕자를 살리기 위해서 뚱보 아줌마의 명을 따른다. 왕자는 무거운 책 더미와 답답한 궁전에서 빠져나와 오랫동안 꿈꾸던 자유와 여가를 즐긴다. 물론 뚱보 아줌마가 만든 특제 호박파이는 최고의 맛이었다.

주문을 외워야 하는 순간이 오지 않도록 하는 것이 가장 좋다. 그리고 주문은 주문일 뿐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는 없다. 왕자는 ‘쉼’을 얻은 후에 비로소 ‘다 하기 싫다’에서 ‘조금씩은 하고 싶어’로 마음이 바뀌었고 세상에 대해서 더 알고 싶은 것도 생겼다. 경쟁만 부르짖는 세상에서 산더미 같은 일에 시달려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주문이 아니라 아줌마의 특제 호박 파이 같은 몇 박자 이상의 충분하고 편안한 휴식이다. 힘들 때는 정말 힘들다고 주위 사람들에게 반드시 말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밤 그 일을 잘 해서 넘기는 것이 필요하다면, 과한 성분이 가득 담긴 에너지 음료 대신 이 투명하고 맑은 그림책을 읽고 주문을 외워보는 것은 어떨까. 아마도 ‘라몰도지일꽃팔나 라몰도지일박수 워거즐튼무아’는 하루 이틀 밤 정도는 당신을 돕는 신통력을 발휘해줄 것이다.


함께 선물하면 좋은 책

최고의 간식: 감자 고구마 단호박

안세경 저 | 동녘라이프

뚱보 아줌마의 특제 호박 파이만큼은 아니겠지만 피로에 지친 직장인과 수험생의 영양 간식이 되어줄 수 있는 맛있는 간식이 가득 담긴 요리책이다. 책 속의 모든 간식은 감자, 고구마, 단호박을 주재료로 하여 만든 것이다. 단호박생크림푸딩, 단호박포카치아, 단호박해물떡찜, 단호박치즈만두 등 듣기만 해도 군침이 도는 레시피가 실려 있다. 누구나 도전해볼 수 있도록 친절한 설명이 되어 있지만 사진이 정갈하고 먹음직스러워서 그냥 책장을 넘겨보는 것만으로도 일단 기분이 좋아진다.



Oasis - (What's The Story) Morning Glory?

Oasis | SonyMusic/SonyMusic

나팔꽃은 영어로 ‘Morning Glory’다. 오아시스는 같은 이름의 곡이 들어간 멋진 음반을 남겼고 이 음반에 실린 곡들은 노엘 갤러거의 재능이 최고에 달했던 90년대 오아시스의 걸작이라는 평을 들으면서 팬들의 뜨거운 사랑을 받았다. 이 음반은 오아시스를 잘 모르는 사람들도 귀에 익숙할 “Don't Look Back In Anger” 등 불후의 명곡을 포함하고 있다. 전 세계에서 1천 9백만 장 이상이 판매되었고 지금도 수없이 팔려나가고 있을 이 전설의 음반에 포스트잇으로 ‘라몰도지일꽃팔나’라고 써서 가벼운 피로회복 음료, 그림책과 함께 3종 셋트로 건네는 것도 좋은 아이디어가 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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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지은 (동화작가)

김지은. 동화작가, 아동문학 평론가. 어린이 철학 교육을 공부했다. 『달려라, 그림책 버스』, 『그림책, 한국의 작가들』을 함께 썼고 EBS '라디오멘토 부모'에서 '꿈꾸는 도서관'을 진행했으며, 서울시립대, 한신대, 서울예대에서 아동문학을 강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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