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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시드니 달링 하버의 밤바다

자신의 연필을 잠시 내려놓고 싶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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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게도 아름다움 앞에서는 죽음을 목도하는 기분이 들 때가 있다. 경외와도 같은 감정일 것이다. 그러니, 달링 하버도 내가 사랑하는 것의 목록에 써 넣어야 한다. 달링 하버의 밤바다를 표현하는 데에 있어서 어떤 글을 써나가야 할까. 고심 끝에 하나의 비유를 들어보려 한다. 그리 대단할 것 없는, 유치한 비유다. 그저 그런 연필에 관한 단상이다.



모든 게 바다

돌이켜보니, 나는 무언가로부터 압도당하는 순간들을 사랑했다. 그 순간들은 여행지에서 느낄 수 있거나, 혹은 여행과도 같은 시간을 보낼 때였다. 나를 압도하여 몰입의, 몰아(沒我)의 상태로 밀어 넣는 것은 대부분 죽어있으면서도 살아있는 것이었다. 노트르담 대성당의 천장을 올려볼 때가 그랬고, 램브란트의 그림들을 볼 때가 그랬다. 하지만 무엇보다 나의 마음을 움직이는 건 바다였다. 어디까지 밀려왔는지 헤아리기 힘든 밤바다가 특히나 그랬다. 파도는 밀려오는 걸까, 밀려나가는 걸까.

밤바다에 대해선, 누구나 그렇겠지만 나도 할 말이 조금 있다. 기억은 두서없이 떠오른다. 2008년 여름, 옛 친구와 통영의 바다를 바라보며 술을 마셨다. 절반이 어설픈 욕인, 나머지 절반은 문학이나 사랑이나 삶에 대한 이야기였다. 아니, 모든 게 노래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부산의 영도에 살고 있었다. 영도 해안도로 방파제는 술상이었다. 나는 몇 번이나 방파제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넘어질 뻔 했다. 단 한 번도 넘어진 적은 없었다. 모든 게 춤이었다. 서귀포 항 어귀에 앉아서 밤새도록 들국화의 노래를 부른 적도 있다. 모든 게 청춘이었다. 나는 사이렌의 노래에 홀린 사람처럼 밤바다 앞에만 서면 무식하게 술을 들이켰다. 그쯤 되면, 마시고 있는 게 술인지, 바닷물인지 모를 정도가 된다. 내 몸을 돌고 있는 피가 짜더라도 할 말이 없다. 모든 게 바다였으니까.

가장 최근에 다녀온 밤바다 하나를 기억에 끼워 넣으려 한다. 시드니의 오페라 하우스에서 도보로 30분 정도 떨어진 거리에 달링 하버가 있다. 1980년대 이후 재개발된 달링 하버에는 아쿠아리움과 아이맥스 영화관과 쇼핑몰 센터가 자리하고 있다. 부산의 영도다리처럼 개폐식 다리인, 피어몬트 프리지도 있다. 재개발 덕분에 대표적인 관광명소가 되었지만 무엇보다 이곳으로 간 이유는 밤바다를 보기 위해서였다. 바다는 어디론가 끝없이 흐르고 있었고, 모든 걸 비춰내고 있었다. 도시의 건물이, 불빛이, 사람들이 모두 흘렀다. 흘러가고 있었다. 흐르길 멈추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아름다움 앞에서는 죽음을 목도하는 기분이 들 때가 있다. 경외와도 같은 감정일 것이다. 그러니, 달링 하버도 내가 사랑하는 것의 목록에 써 넣어야 한다. 달링 하버의 밤바다를 표현하는 데에 있어서 어떤 글을 써나가야 할까. 고심 끝에 하나의 비유를 들어보려 한다. 그리 대단할 것 없는, 유치한 비유다. 그저 그런 연필에 관한 단상이다.




연필에 관한 단상

누구나 태어나면 연필을 한 자루씩 받게 된다. 육각의 나무연필은 길고 날렵하다. 가운데에는 검은 흑심이 박혀 있다. 연필심을 꺼내기 위해서는 칼을 쥐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우리는 그 칼이 얼마나 날카로운지, 연필은 어떻게 깎는지, 또 연필은 어떻게 쥐는 것인지, 연필심을 왜 꺼내는지, 도대체 이걸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아나간다. 연필에게 질문을 건네도 묵묵부답일 테니, 스스로 알아내는 수밖에 없다. 그렇게 연필을 깎는 동안, 연필이 조금씩 짧아지고 있다는 사실을 견지하기란 여간 쉬운 일이 아니다. 다만 어느 순간부터는 연필을 편안하게 쥐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몇몇은 뾰족하게 심을 다듬는 방법도 깨우쳤을 것이다. 누군가는 부드럽게 미끄러지는 연필 끝으로 사랑의 밀어를 적어나고 있다. 또 누군가는 꿈을 향해 전진하는 중이다. 낙서를 즐기는 이도 있다. 반면에 쓰길 포기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안타깝지만, 단 한글자도 쓰기 전에 심이 부러져버리는 사람이 생기기도 한다. 우리는 이 연필을 누가 준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 다시 뺏길 지도 알 수가 없다. 도무지 알 도리가 없다.

최초의 뾰족한 연필심은 사용할수록 점점 무뎌지게 된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연필을 깎는 방법을 배웠다. 빠르고 섬세하게 뾰족한 심을 깎을 수가 있다. 이쯤 되면, 뾰족하지 않은 심을 원하는 사람도 생겨난다. 각자 원하는 형태로 연필을 깎아나간다. 그리고 또 다시 무언가 써내려가고, 또 다시 연필을 깎을 것이다. 그러다 보면 연필 깎기는 이제 어떤 배움이나, 노동이나, 희열도 아니게 된다. 그저 연필은 하나의 연필이 된다.

어느 날 문득, 자신의 연필을 잠시 내려놓고 싶다면(불가능 할 테지만! 그런 기분이나마 느끼고자 한다면) 시집을 읽거나 여행을 떠나야 할 것이다. 어쩌면 사랑을 하는 게 그 답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옥타비오 빠스의 시집을 들고, 사랑하는 사람과 여행을 떠나는 건 어떨까.

1990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이 멕시코 시인의 시를 한 편 옮겨본다. 시드니의 달콤한 항구를 한 컷 옮겨본다. 사랑하는 사람은, 지금 그대의 곁에 있다고 믿는다.
휴식
                                                  옥타비오 빠스
새 몇 마리가
찾아온다.
그리고 검은 생각 하나.
나무들이 수런댄다.
기차소리, 자동차소리.
이순간은 오는 걸까 가는 걸까?

태양의 침묵은
웃음과 신음소리를 지나
돌들 사이 돌이 돌의 절규를 터뜨릴 때까지
깊이 창을 꽂는다.
태양심장, 맥박이 뛰는 돌,
과일로 익어가는 피가 도는 돌:
상처는 터지지만 아프지는 않다,
나의 삶이 삶의 참모습으로 흐를 때.
연필이 닳아서 몽땅 연필이 되었을 때는 어떤 기분일까.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의 벤자민처럼 이 연필이 거꾸로 자라나길 바랄 것인가. 아니면 버킷리스트를 만들어서, 앞으로 꼭 써야 할 목록을 꾸릴 것인가. 나는 아직 알지 못한다. 그러나 짐작할 수 있다. 그때가 되면, 여태껏 연필로 써내려간 나의 흔적을, 그 증거들을 살피지 않을까. 그러니 나는 나의 증거가 되기 위해 여행을 떠날 것이다. 사랑을 할 것이다. 그 흔적을 쓸 것이다. 어쩌면 나는 너의 증거가 될 것이다. 아니다. 비로소 연필 쓰기를 중단하는 순간까지 나는 우리의 증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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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오성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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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필
문학청년
어쿠스틱 밴드 'Brujimao'의 리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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