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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리게, 보다 느리게 걷는 섬 증도

전남 신안 증도 검산 포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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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뜨기 전 아침의 물안개에 하늘과 갯벌의 색이 비슷하게 닮아 보였다. 하지만 횡으로 진하게 그어진 수평선은 분명하게 경계를 나누고 있었다. 한참동안 할아버지가 작업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작은 썰매 배에 의지한 채로 낚싯대를 높이 든 그에게선 뭔가 묘한 것이 있었다.



속도에 대하여

언젠가부터 하루에 두 번씩 이 메일을 확인하는 습관이 생겼다. 인터넷이 잘 터지지 않는 여행지에서는 와이파이나 인터넷 선의 유무가 숙박업소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기도 했다. 그다지 중요한 메일을 기다리는 것도 아닌데, 딱히 별다른 소식이 없을 걸 알면서도 하루를 시작하고 마감할 때마다 확인을 하려는 것이다. 그런 내 모습을 보다보면, 조선시대 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서신을 주고받고 살았을지 경외감이 들기도 했다. 꼬박 며칠 밤을 달려 서간을 전해주는 그 시간들을 어떻게 견뎠을지.

스마트폰은 시간의 단축이라는 화두를 던진다. 보다 빠른 웹서핑과 업무처리 등 인터넷을 기반으로 한 모든 영역에 관해 끝 간 데 없을 것 같은 속도를 보여주고 있다. IT 강대국인 대한민국은 화살촉과도 같은 위치에서 보다 높게 솟아오르는 중이다. 하지만 화살은 언젠가 떨어지기 마련이다. 보다 빠른 동력은 결말을 앞당기는 기분마저 든다. 그러한 예감을 느낀 자들은 이미 속도전쟁을 포기하고 느리게 돌아가고 있다. 어느 것이 옳은 건지 답을 낼 수는 없다. 삶은 자신의 가치 기준에 따른 방향으로 살아가야만 한다. 그것만이 스스로의 존재를 살피는 참된 일이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가장 빠른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선풍기를 돌리는 모터도 아니며, 전구를 깜빡이는 필라멘트도 아니다. 손가락으로 모든 걸 해결해주는 스마트 폰은 더더욱 아니며, 나의 타자 속도는 말할 것도 없다. 그것이 빠르지 않다는 이유는 언젠가 이것들을 느리게 만들어버릴 기술이 우리의 상상과 현실 속에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봉화를 지펴 먼 곳에 신호를 보냈다. 하지만 지금은 전화 한통이면 가능하다. 이 또한 현시대에 국한된 것이다. 시속 1280㎞로 달리는 튜브 열차가 개발 중이라고 한다. 이 열차를 타면 LA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 30분이면 도착한다. 이토록 짜릿하며 무서운 세상은 도대체 얼마나 더 빨라지길 욕망하는 것인가.

아마도 인류의 미래는 느림을 향해 흘러가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느림을 발견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가. 내가 생각하는 그것은 과일의 씨앗 속에서 숲을 발견하는 일, 한 방울의 물로 바다를 보는 일, 지는 해와 뜨는 달을 바라보는 일, 별의 빛남을 손가락으로 그려보는 일이다. 시간의 폭을 개인에서 인류로, 인류에서 자연으로, 자연에서 지구로, 지구에서 우주로 넓히면 많은 것이 달라진다.

속도는 분명히 사고의 문제다.




증도를 걷다

증도 대교를 지나기 전, 잠시 차를 세울 수밖에 없었다. 화폭에 담으면 고스란히 산수화가 될 풍경이 시원하게 펼쳐졌다. 높은 건물이나 빠르게 달리는 차량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보다 넓고 느리게 보였다.

증도에는 여의도보다 몇 배나 큰 염전이 있었다. 하지만 나에게 더 관심이 간 것은 민어였다. 최대 민어 어업지인 신안군이 초행길은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이번에는 1m가 넘는 민어를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증도로 들어서자마자 한참 조업 중이라는 검산포구를 곧장 찾았다. 하지만 민어 배들은 대부분 자취를 감추었고, 남아있는 배들은 허탕을 치고 와 조업을 중단한 상태였다. 불행 중 다행인지 한 척의 배가 출항 준비를 했다. 선장에게 부탁을 했지만 사정은 여의치 않았다. 어획이 부진하여 자잘한 민어들도 값을 비싸게 쳐 신경이 곤두선 것이었다. 무엇보다 한나절 내내 노역하는 선원들 옆에서 사진이나 찍으며 구경할 염치가 없었다. 7월에서 9월이 제철인 민어였지만 그만큼 귀한 생선이었다. 아쉬운 마음에 발길을 돌리는데, 곳곳의 표지들이 눈에 띄었다. 슬로우 시티 증도.

슬로우 시티란 느림을 추구하며 자연으로 회귀하고자 하는 국제적인 운동의 일환이다. 유럽에서는 패스트 푸드에 반대하여 슬로우 푸드를 지향하기 시작했고, 그를 확장시켜 도시에 적용시켰다. 이는 산업사회에 대한 반성과 성찰의 대안으로 증도는 아시아 최초의 슬로우 시티로 선정되었다.

기분 탓일까, 자동차 클랙슨 소리를 들을 일도, 발광하는 전광판을 마주할 일도 없을 것만 같았다. 그 예감은 적중했다. 마음을 비우고 조금만 걸으니 물 흐르는 소리와 곤충들의 노래 소리, 갈대밭 깊은 곳에서 은은하게 들려오는 바람의 소리가 오히려 생생하게 귓가를 두드렸다.

오후 네 시 무렵 염전을 찾았다. 염전 옆으로 난 도로를 따라가며 일정한 간격으로 지어진 소금창고의 개수를 세었다. 하지만 이내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신안은 군청조사로 1004개의 섬을 가졌다고 기록되어 천사의 섬이라 불렸다. 소금창고도 섬의 수 못지않았다. 소금창고는 바다 위를 수놓은 신안의 섬처럼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포구를 여행하며 염전을 찾은 일이 여러 번 있어, 그 과정이 눈에 훤했다. 염도를 맞춘 바닷물을 밭처럼 넓게 짠 틀 위에 고이게 한다. 한나절이 지나면 햇빛과 바람에 의해 수분이 증발한다. 눈처럼 하얀 소금 알갱이가 형성되면 긴 막대로 한 데 모은다. 들 것에 거둔 소금을 창고로 옮겨 쌓아둔다. 최대 5년까지 간수를 제거한다.

이론상으론 단 몇 줄로 소금이 체취 되지만 그러한 간단은 현장에선 통용되지 않았다. 작업복을 입은 염부들이 염전으로 하나 둘 나오기 시작했다. 내가 도착했을 때 막 소금을 거둬들이는 시간이라 염전 가득 하얀 소금 알갱이가 햇빛에 반사되어 빛나고 있었다. 연금술과도 같은 신비한 자연의 마술에 이리저리 카메라 렌즈를 들이밀었다. 하지만 불볕아래서 묵묵히 소금을 모으는 염부들 앞에서 신비함은 단번에 달아났다. 한 염부가 말했다.

“땀 한 방울과 소금 알갱이를 바꾸는 심정으로 일하고 있어요.”

아직도 해는 자신의 위용을 감추지 않았다. 그늘 없는 염전 위에서 그들은 묵묵히 소금을 긁어모았다.




갯벌 위를 걷는 노인

다음날 이른 아침, 짱뚱어를 낚는 할아버지와 약속을 해둔 터였다. 그의 집 마당에는 낡은 이륜 오토바이 한 대가 세워져 있었다. 내가 그 집에 도착했을 때, 그는 나무로 만든 작은 썰매를 뒷좌석에 올리고 있었다. 내가 멀뚱히 쳐다보고 있자 눈을 흘기는 폼이 내가 영 못마땅한 듯 했다. 나는 얼른 다가가서 썰매를 붙잡고 섰다. 그가 썰매를 묶는 동안 나는 뒤늦은 인사와 몇 가지 궁금한 것들을 물었지만 묵묵부답이었다. 전라도의 다른 지역에선 갯벌에서 타는 배를 널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그의 배는 조금 특이했다. 이걸 뭐라고 부르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가 입을 열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얼마 동안 무성영화의 한 장면처럼 우린 그렇게 떠날 갈 채비를 했다. 부엌에서 할머니가 나왔다. 밭을 갈러 가는 모습이었다. 바구니에는 호미가 몇 자루 있었다. 할아버지의 낡은 오토바이엔,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썰매 배가 모두 탈 수 있었다. 갯벌로 가는 중간에 할머니를 내려주곤 할아버지는 속력을 올렸다. 쌀알 같은 가랑비가 쏟아지는 8월의 아침이었다.

한참을 달려 외길로 들어섰다. 오토바이가 가기엔 편했지만 아침의 물안개와 좁은 길 탓에 자동차를 운전하기란 여간 쉽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기다려주거나 뒤로 돌아보지 않았다. 코너를 돌다가 할아버지를 놓쳤지만 길이 하나였기에 천천히 쫓아갔다. 얼마 안가서 갯벌이 나타났다. 안개에 가려 어디까지 뻗어있는지 알 수 없는 광활한 갯벌 옆길에 오토바이 한 대가 서 있었다. 할아버지는 어느 새 썰매 배의 밧줄을 풀고 낚싯대를 정비하고 있었다. 그는 썰매 배를 갯벌위에 올리더니 엉덩이를 내리 깔고 앉았다. 두 다리를 노 삼아 쭉 뻗으면 썰매는 갯벌에 빠지지도 않고 앞으로 나아갔다. 육지에서 이십 미터 정도 갔을까, 그가 낚싯대를 세우더니 저 멀리 던졌다. 그리곤 순식간에 당겼다. 바늘 끝엔 무언가 펄떡이는 것이 있었다. 짱뚱어였다.

“어르신, 미끼 같은 건 없나요?”

바보 같은 질문이었을까. 그는 말없이 짱뚱어를 낚았다. 해가 뜨면 갯벌에는 물이 차올랐다. 그렇기 때문에 짧은 시간 안에 많은 양을 낚아 올려야 했다. 하는 수 없이 그의 작업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해뜨기 전 아침의 물안개에 하늘과 갯벌의 색이 비슷하게 닮아 보였다. 하지만 횡으로 진하게 그어진 수평선은 분명하게 경계를 나누고 있었다. 한참동안 할아버지가 작업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작은 썰매 배에 의지한 채로 낚싯대를 높이 든 그에게선 뭔가 묘한 것이 있었다. 낚싯대의 유연한 움직임과 활처럼 휘어지는 곡선, 짱뚱어를 낚아챘을 때의 용맹스러운 그의 표정은 무엇이며, 소리 없이 그를 받아들여주는 넓은 갯벌은, 우리를 감싼 물안개는, 저 하늘은, 증도의 아침은 무엇인가. 물안개가 걷히고, 사위가 밝아지기 시작했다. 갯벌은 여전히 숨을 쉬었고, 짱뚱어는 할아버지를 피해 이리저리 활개쳤다. 더운 기운이 땅에서부터 올라왔다. 안개에 가려 느끼지 못했지만 태양은 벌써부터 내려쬐고 있었던 것이다. 할아버지의 낚싯대는 점점 힘을 잃어갔다. 그럼에도 바늘은 목표를 놓치는 법이 없었다. 할아버지는 『노인과 바다』의 산티아고처럼, 나는 노인을 기다리는 소년처럼, 그렇게 우린 갯벌 위에 있었다. 무엇도 걱정할 것 없었던, 이 메일 따위 생각나지도 않았던, 세상의 모든 아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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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오성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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