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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다시는 춥지 않을 거예요

이글루 안에 난로를 들여놓는 『추위를 싫어한 펭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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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따뜻한 나라로 가는 중이라고. 지옥의 밑바닥이 아니라, 포근한 나라를 찾아 가는 과정이라고. 그리고 그 나라로 가면, “이제 다시는 춥지 않을 거여요”라고. 아마 동화와 인생이 다르니까, 나는 따뜻한 나라로 가려면 아주 오래 걸릴 것이다. 그러나 그 주문은 겨우 일어나서 따뜻한 나라로 갈 힘을 선사해 주었다. 이제 다시는 춥지 않을 거여요, 이제 다시는 춥지 않을 거여요.

지난 일주일 간 지옥에서 살다 온 기분이었다. 아니, 살다 온 것도 아니고 그냥 지옥에 내버려져서 그냥 살아 있는 기분이었다. 오래 끈 고통이라 더 그랬다. 작년 4월에 설마 내 인생이 좀 꼬이는 루트를 타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하고 생각할 만한 사건이 생겼고, 그 뒤처리를 하느라 회사도 다닐 수 없어 그만두고 2013년을 통째로 날렸다. 이제 그 일이 마무리 될 참인데, 마무리가 되면 시원섭섭할 줄만 알았다. 그런데 막상 마무리해보니 각종 원한과 분노, 슬픔과 울화가 뒤섞여 지옥의 칵테일이 되었고 나는 그 잔의 마지막 한 방울까지 마신 셈이었다.

그런데 집에 돌아와서 기다리고 있는 게 새 인생이 아니라 회한과 증오라서, 잠도 별로 없는데 계속 일어날 힘이 없어 침대에만 누워 있다가 갑자기 토하기도 하고 어두우면 각종 헛것이 보였다. 오늘부터 겨우 일어나서 바깥 활동을 하기 시작했는데 제일 먼저 생각난 것이 예스24. 내가 이곳에서 책 이야기를 하는 것이나, 읽어 주시는 분들의 댓글에 꽤 자주 마음이 따뜻했나 보다.


어쨌든 그 환청과 이명이 들리는 시간 동안 정신을 놓지 않으려고 계속 애쓰며 떠올린 책이 있는데, 저번 『늙은 나귀 좀생이』 와 같은 전집에 들어 있던 『추위를 싫어한 펭귄』 이라는 책이다. 주인공은 파블로라는 펭귄인데, 추운 걸 몹시 싫어해 이글루 안에 난로를 들여놓을 정도다. 친구들은 해수욕이 아니라 설수욕이라고 하나, 그런 걸 즐기고 맨몸으로 얼음 같은 바다에 다이빙도 하고 눈 위에서 미끄럼도 타는데 혼자 장갑과 털모자를 쓴 파블로는 이런 게 다 싫다. 따뜻한 나라로 가고 싶어 궁리를 하다가 결국 배낭을 챙겨 뜨거운 물을 넣는 고무 주머니를 발에 붙인 뒤 남쪽으로 향하는데, 한 걸음 한 걸음 갈 때마다 뜨거운 물 때문에 바닥이 녹는다는 것을 깜빡 잊어버린다. 결국 커다란 얼음 덩어리가 된 파블로를 친구들이 네모 모양 얼음으로 잘라 데리고 집으로 돌아온다.

죽을 고생을 했지만 파블로의 따뜻한 나라를 향한 집념은 변함이 없다. 이번에는 아예 자기 이글루가 서 있는 나무를 톱으으로 오각형으로 잘라내 그대로 집으로 만든다, 친구들은 손수건을 흔들며 작별을 하고, 파블로는 털장갑을 낀 손(?)을 흔든다. 이제 남국으로의 미래가 펼쳐질 거라고 생각하며 기다리던 햇볕이 보이자 파블로는 너무나 행복한 표정으로 털장갑과 모자를 벗어 던지고 갑판에 대자로 누워 해를 만끽한다. 그런데 이게 웬일? 얼음집 배가 녹아 버리고 있는 것이다. 필사의 순간, 파블로는 욕조로 달려가 샤워기를 배수구와 연결해 일종의 욕조 모터 보트 같은 걸 만든다, 섬에 내려 보니 세상에! 바나나가 있다! 바나나를 까먹으며 파블로는 거북이가 가져다 주는 칵테일도 마시고 해먹을 달아 햇살을 즐긴다. 내가 이 이야기를 좋아하는 구절은 마지막 한 문장 때문이다. “이제 다시는 춥지 않을 거여요.”

자살해 달라는 부탁까지 받은 마당에 내가 더 살 이유가 무엇인가, 생각할 때마다 파블로가 속삭여 주었다. 지금은 따뜻한 나라로 가는 중이라고. 지옥의 밑바닥이 아니라, 포근한 나라를 찾아 가는 과정이라고. 그리고 그 나라로 가면, “이제 다시는 춥지 않을 거여요”라고. 아마 동화와 인생이 다르니까, 나는 따뜻한 나라로 가려면 아주 오래 걸릴 것이다. 그러나 그 주문은 겨우 일어나서 따뜻한 나라로 갈 힘을 선사해 주었다. 이제 다시는 춥지 않을 거여요, 이제 다시는 춥지 않을 거여요. 펭귄은 펭귄답게 눈과 얼음을 좋아하는 게 정상이지만, 하필 당신도 추운 걸 싫어하는 펭귄으로 우연히 태어나고 말았다면, 주문을 외자.

이제 다시는 춥지 않을 거여요.
이제 다시는 춥지 않을 거여요.
그럼, 우리는 춥지 않을 것이다. 그렇고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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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현진(칼럼니스트)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는 오래된 캐치프레이즈를 증명이라도 하듯 '88만 원 세대'이자 비주류인 자신의 계급과 사회구조적 모순과의 관계를 '특유의 삐딱한 건강함'으로 맛깔스럽게 풀어냈다 평가받으며 이십 대에서 칠십 대까지 폭넓은 독자들에게 사랑받는 에세이스트. 『네 멋대로 해라』, 『뜨겁게 안녕』, 『누구의 연인도 되지 마라』, 『그래도 언니는 간다』, 『불량 소녀 백서』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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