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길 예찬
건축은 시대정신 우리는 어떤 공간을 꿈꾸는가
골목길 오타쿠도 기차 오타쿠처럼 별로 내세울 것 없다. 보통 상가 뒤에는 골목이 있는데, 골목을 누비며 정처 없이 걷는다. 거기에 사진에 관심을 두게 된 뒤에는 셔터를 누르는 행위 정도를 추가했다. 프로이트는 무의식을 형성하는 데 유년시절이 중요하다는 별 특별할 것도 없는 주장을 폈는데, 필자의 골목길 사랑도 유년시절의 성장 배경과 밀접하다.
지인 중에 기차에 환장하는 사람이 있다. 그냥 까놓고 말하자. 기차 오타쿠다(편의상 A라고 하자). 애니 오타쿠, 게임 오타쿠, IT 오타쿠야 흔하지만 기차 오타쿠는 드물다. 이는 아마도 한국의 철도 역사와도 관련이 있지 않을까 싶다. 근대는 철도의 시대였는데, 한국은 압축적인 성장을 하면서 마이카 시대가 다소 빨리 왔다. 철로가 놓일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았다는 의미다. 요즘 중부내륙 관광열차, 남도해양관광열차 등이 인기를 끌고 있지만 철도 강국 일본에 비한다면 노선의 절대적인 길이나 다양성 면에서 한국 철도는 미진하다.
A의 올해 여름휴가 계획은 일본에서 기차 타기다. ‘오타쿠’라는 말에서 뭔가 편집증적인 느낌이 들지만 기차 오타쿠의 취미 생활은 단조롭다. 기차 오타쿠라고 해서 뭔가 거창한 게 있지는 않고 그저 기차를 타고 바깥 풍경을 보면서, 역에서 파는 도시락(에키벤)을 냠냠 쩝쩝 후루룩 하고 목적지를 정해놓지 않고 발길 닿는 대로 역에 내리는 게 다다. 가끔은 그 역에서 용변도 보고. 그러고 보니, 하루키의 소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에 등장하는 주인공도 넓은 의미에서 기차 오타쿠다! 어쨌든 이쯤에서 A의 성공적인 여름휴가를 기원해 보자.
필자에게도 A처럼 남에게 자랑하기 뭣한 취미가 있다. 바로 골목길 탐방이다. 취미라고는 하나, A가 일본 철도를 5년에 1번 탈까 말까이듯 필자도 그렇게 자주 골목길 탐방에 나서지는 않는다. 최근에 골목길 여기저기를 누빈 게 지난주였다. 아니, 그 정도면 꽤 자주 아닌가, 하고 반문할 수 있지만 1년에 1번 정도인 듯하다.
골목길 오타쿠도 기차 오타쿠처럼 별로 내세울 것 없다. 보통 상가 뒤에는 골목이 있는데, 골목을 누비며 정처 없이 걷는다. 사진에 관심을 두게 된 뒤에는 셔터를 누르는 행위 정도를 추가했다. 프로이트는 무의식을 형성하는 데 유년시절이 중요하다는 별 특별할 것도 없는 주장을 폈는데, 필자의 골목길 사랑도 유년시절의 성장 배경과 밀접하다.
이제 한국의 대표적인 주거 형태는 아파트이지만, 대문을 나서면 골목이 있는 주택에서 나고 자랐다. 그곳에는 사람이 있었고 정이 있었다…… 라고 쓰려는 건 아니다. 물론 앞집 뒷집 옆집 대각선 집에 위치한 집 이웃과 안면을 트고 최소한 가족 구성원의 이름 정도는 아는 사이였으나 골목에도 이권 다툼이 있었고 권력 투쟁이 존재했다.
동네 아주머니들은 몰려다니는 남자아이를 꽤 싫어했다. 여성아이는 고무줄이나 공기놀이로 사회적 유대와 신체적 발달을 도모했지만 남자아이는 예나 지금이나 공놀이가 주다. 의성어로 표현하자면, 여성 아이는 소곤소곤이고 남자아이는 우지끈 뚝딱 와장창. 공놀이의 가장 큰 문제는 기물 파괴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도스토옙스키를 읽어볼 리 없는 아이지만, 죄와 벌에 관한 관념은 이미 있는지라 부수면 도망간다. 동네 아이들이야 거기서 거기. 설득과 협박으로 동네 아이 몇 명을 조사하다 보면 범인을 발견한다. 그 범인(편의상 B라고 하자)은 곧 아줌마들 사이에서 공공의 적이 된다. 사회적 낙인은 굉장히 강해, 그 아이가 나타나기만 해도 “딴 데 가서 놀아!”라는 말을 듣기 일쑤였다.
쇠똥구리가 똥 굴리듯, 말도 돌고 돌면 커진다. B는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만날 놀러 다닌다더라. B가 동네 문방구에서 뽀빠이를 훔치다 걸렸다더라. 알고 보니 B의 친형이 본드를 했다고 하더라. 이런 소문은 결국 “너, 앞으로 B랑 놀지 마”라는 정언 명령으로 이어진다. 소문을 들은 B의 어머니는 소문을 유포한 아주머니들과 거하게 한 판 붙었다.
어머니들 사이에서 저렇게 싸우든 말든 또래 아이들은 골목을 누비며 열심히 놀았다. 당시 짬뽕이라는 놀이가 유행했는데, 그게 왜 짬뽕이었는지는 아직도 이유를 모르겠다. 짬뽕은 이런 놀이다. 고무공을 벽에 치고 숫자를 부르면, 그 숫자에 해당하는 아이가 잡는다. 공을 잡으면 다시 벽에 쳐서 숫자를 부르면 된다. 만약 공을 잡지 못하면, 공을 잡을 동안 다른 아이는 있는 힘껏 달린다. 공을 잡은 술래는 도망친 다른 아이를 향해 공을 던져야 하는데, 이때 그 공을 받거나 피하면 술래는 벌칙을 받는다. 말로 하니 굉장히 복잡한 놀이 같으나, 공기놀이와 고무줄과 마찬가지로 사회적 유대와 신체적 발달을 도모하기에 적합한 놀이로 해보면 간단하고 중독성도 있다.
여기서 관건은 벽에 고무공을 던져도 빗자루를 들고 뛰쳐나오지 않을 만한 착한 이웃집을 찾는 것이다. 불행히도 그런 어른은 거의 없었으므로 아이들은 탐험에 나설 수밖에 없다. 오늘은 빨간 벽돌집. 내일은 파란 시멘트 집. 모레는 돌담 집. 이런 식으로. 그러다 보면 이웃 동네까지 원정 갈 때도 있는데, 골목 앞으로 펼쳐진 새로운 풍경에 반해서 해야 할 ‘짬뽕’을 잊고 돌아다니다 온 적도 많았다.
애석하게도 구불구불 이어진 골목을 보기가 점점 힘들어졌다. 발레리 줄레조가 대한민국을 『아파트 공화국』이라 표현했듯, 아파트가 대표적인 주거 형태로 자리 잡으면서다. 마당과 골목이 사라진 그 자리에는 주차장과 도로가 대신했다. 아파트라는 주거 형태에 있는 장점도 있겠으나, 확실히 아파트는 골목이 주었던 변화무쌍함이나 다양성이 없다. 그래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지도 않고 정감도 없다.
공간을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가 건축이고 건축은 곧 시대정신이다. 정도전이 경복궁을 설계하면서 유교적 민본주의를 염두에 둔 것이나, 하늘 높이 뾰족하게 솟은 모습으로 신에 닿고자 했던 노트르담 대성당이나 당시의 시대정신을 반영한다. 빅토르 위고는 이 문제에 천착했는데, 『레미제라블』이나 『파리의 노트르담』에서 집요하게 파리의 뒷골목이나 성당의 모습을 묘사한 이유가 시대정신을 표현하려 했기 때문이다.
건축술의 최대의 산물은 개인적인 작품이라기보다 사회적인 작품이요, 천재적인 사람들이 내던져 놓은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전통을 겪은 민중들의 산이요, 한 국민이 남겨놓은 공탁물이요, 허구한 세월이 이루어놓은 퇴적물이요, 인간 사회의 계속적인 발산물의 침전이라는 것을. (빅토르 위고, 『파리의 노트르담 1』, 민음사, 216쪽)
위고의 표현처럼 골목은 사회적인 작품이고 전통을 겪은 민중의 산일 텐데, 재개발과 뉴타운에 너무 손쉽게 허물어버린 게 아닐까 하는 아쉬움이 든다. 그래서 앞으로도 기회가 생길 때마다 골목을 누비고, 골목을 사진에 담아보고 싶다. 그나저나 골목도, 마당도 없는 아파트가 왜 이렇게 비싼 걸까. 『월든』의 저자 소로우는 ‘문명이 인간의 생존 상태를 본격적으로 개선했다고 단언하려면 값을 올리지 않고도 더 좋은 주택을 생산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했다. 생각할 거리를 던지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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