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에 노발리스(Novalis, 1772~1801)라는 시인이 있었습니다. 물론 소설도 썼지만 그래도 ‘시인’이라는 명칭이 더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초기 낭만주의를 거론할 때 빠지지 않는 인물인데요, 폐병을 앓다가 스물아홉 살에 요절했습니다. 사실 저는 이 양반의 작품을 그닥 읽지 못했습니다. 청년 시절에 소설가 이병주 선생(1921~1992)의 글을 통해 간접적으로 접했던 독일의 문학가입니다. ‘아, 이런 시인도 있구나’라는 정도로 건성 스쳐지나갔습니다. 한데 몇해 전에 국내에서 번역돼 나온 독일의 철학자 프레데릭 바이저의 책 『낭만주의의 명령, 세계를 낭만화하라』 를 읽다가 다시 이 시인의 이름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책의 제목에도 등장하는 “세계를 낭만화하라”는 말, 정확히 옮기자면 “이 세계는 낭만화되어야 한다(Die Welt muss romantisiert werden)”는 유명한 말이 바로 노발리스의 펜 끝에서 나왔습니다. 그의 소설 『하인리히 폰 오프터딩엔』 에 등장하는 표현입니다.
200여 년 전의 문구를 다시금 거론하는 까닭은 현대인들이 낭만의 결핍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가 오늘날 처해 있는 현실은 ‘결핍’이라는 표현으로는 부족한, 아주 극단적인 낭만의 고갈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돌이켜보자면 우리는 오래도록 낭만을 조소하며 살아왔습니다. ‘낭만적’이라는 말은 몽상적이거나 현실도피적인 것, 뭔가 철이 안든 한심한 것을 지칭하는 의미로 빈번히 사용됐습니다. 한데 이러한 언어의 용법(用法)은 우리가 얼마나 경쟁적이고 실리추구적인 세상에서 살고 있는가를 고스란히 방증합니다. 이른바 속전속결의 근대화 과정에서 자본은 거대하게 몸집을 부풀렸지만, 대다수 사람들의 삶은 점점 왜소해지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하루하루 삶을 이어가는 것에 쫓기면서 종종걸음으로 내달리는 사람들에게 낭만은 이제 기억조차 희미한, 박물관의 화석처럼 되고 만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글을 클릭해 읽을 당신은 여전히 낭만을 꿈꾸고 있다고 믿습니다. 음악을 듣고 감동한다는 것은 자신의 내면에 깃들어 있는 예술성을 다시 발견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앞에서 인용한 책의 언급에 따르자면 “(낭만이란) 우리 안에 잠자고 있는 예술가적 재능을 일깨워 각자가 자신의 삶을 아름다운 전체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나와 타인, 인간과 자연과의 통일성을 회복하는 것”이며, ‘따로 또 같이’ 사는 공동체의 회복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음악사에서 ‘낭만’을 거론할 때 떠오르는 음악가들은 세기 어려울 만큼 많습니다. 베토벤에서 잉태된 음악의 낭만은 슈베르트와 슈만, 낭만적이면서도 고전적 기풍을 중시했던 멘델스존, 프랑스 낭만주의의 꽃을 피운 베를리오즈, 음악극으로 새로운 낭만의 장르를 개척한 바그너, 피아노 한 대로 낭만의 진경(眞境)을 펼쳐보였던 쇼팽 등으로 이어졌습니다. 19세기 후반부로 접어들어 활약했던 브람스와 브루크너, 말러,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등의 음악은 이른바 ‘후기 낭만’의 시대를 이뤘습니다. 그렇게 숱한 음악가들이 낭만의 시대를 장식했고, 오늘날 우리가 가장 즐겨 듣는 음악들이 대체로 낭만의 산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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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베르트(Franz Peter Schubert, 1797~1828), [출처: 위키피디아] |
오늘은 그중에서도 슈베르트의 실내악 한 곡을 골랐습니다. 다들 좋아하시는 <피아노5중주 A장조 D.667>입니다. ‘송어’(Trout)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져 있지요. 사실 이 곡을 고른 이유는 며칠 전 입춘(立春)이 지났기 때문입니다. 아직은 추위가 고스란히 남아 있지만 그래도 입춘이 지났으니 우수(雨水)가 멀지 않았습니다. 이달 19일입니다. 우수는 말 그대로 얼음이 풀린다는 의미입니다. 봄비가 내리고 싹이 튼다는 뜻도 있습니다. 중국의 시인 도연명(陶淵明, 365~427)은 ‘사시’(四時)라는 시에서 봄의 이미지를 물(水)로 표현했지요. ‘춘수만사택’(春水滿四澤)이라는 시구입니다. ‘봄물은 못마다 가득하도다’라고 해석할 수 있겠지요. 사람마다 봄의 이미지가 제각기 다를 수 있겠지만 시인의 마음속에서는 ‘물’이 가장 먼저 떠올랐던 것 같습니다.
슈베르트의 피아노5중주 A장조가 바로 그런 느낌입니다. 얼음을 풀린 계곡에서 상쾌하게 흘러내리는 ‘깨끗한 물’의 이미지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겠지요. 물론 ‘송어’라는 이름 때문에 그런 인상이 짙은 것도 사실입니다. 슈베르트는 이 곡의 4악장에서 1817년에 작곡했던 가곡 <송어>의 선율을 주제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송어’라는 별칭을 갖게 된 것이지요. 한데 우습게도 한국에서는 오랫동안 이 곡의 별칭을 ‘숭어’로 표기해 왔습니다. 중고등 교과서에도 등장할 만치 유명한 곡인데도 일제 강점기 때부터 잘못 사용해온 ‘숭어’를 그대로 써왔던 것이지요. 불과 3~4년 전에야 바로잡힌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송어(독일어로는 ‘Die Forelle’ 영어로는 ‘Trout’)와 숭어(영어로 ‘Mullet’)는 엄연히 다른 물고기입니다. 송어는 민물에서만 사는 민물고기입니다. 반면에 숭어는 기본적으로 바닷고기입니다. 바닷물과 민물이 만나는 지점까지 왔다갔다하면서 살지요. 그래서 국내에서는 경기도 김포 전류리에 가면 숭어횟집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슈베르트는 스물두 살이던 1819년에 친구인 미하엘 포글과 함께 여행을 떠났습니다. 포글은 몇 주 전에 썼던
<내 인생의 클래식 101>에도 잠시 등장했던 인물이지요. 슈베르트의 ‘아르페지오네 소나타’를 설명하면서 ‘슈베르티아데’라는 모임에 대해 얘기했었는데, 바로 그 모임의 주요한 멤버였습니다. 슈베르트보다 나이가 29살이나 위였지요. 당대의 유명한 바리톤 가수였습니다. 슈베르트는 스무 살이 되던 1817년에 포글과 알게 됐는데, 그 후 포글은 슈베르트의 가곡을 널리 알리는 역할을 합니다. 가곡 <송어>를 초연한 가수도 바로 포글이었습니다. 슈베르트와 그는 친구처럼 우정을 나누면서 모두 세 번의 여행을 같이 합니다.
1819년에 여행했던 곳은 포글의 고향인 슈타이어(Steyr)였습니다. 오스트리아 북부의 고지대에 있는 도시입니다. 슈베르트는 이곳에서 매우 즐겁게 시간을 보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좋은 경치와 친구의 배려 덕택이었겠지요. 게다가 슈타이어의 음악애호가들은 슈베르트를 자신의 집으로 초청해 음악 연주를 청해 듣곤 했습니다. 저택의 살롱에서 연주했으니 주로 여흥을 위한 음악, 다시 말해 디베르티멘토(희유곡) 풍의 음악이었을 겁니다. 그렇게 슈베르트를 초대했던 슈타이어의 유지 가운데 한 명이었던 광산업자 질베스타 파움가르트너(Silvester Paumgartner), 아마추어 첼리스트이기도 그 사람이 바로 피아노 5중주의 작곡을 의뢰한 인물이었습니다. 이 곡에 디베르티멘토 풍이 반영돼 있는 것은 바로 그런 맥락입니다. 디베르티멘토는 18세기 후반에 귀족들의 고상한 오락을 위해 유행했던 기악곡이지요. 일부 귀족들은 직접 악기를 들고 연주에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파움가르트너가 슈베르트에게 부탁했던 것도 바로 그런 것이었습니다. 슈베르트의 악보를 필사해 작품의 소실을 막았던 친구 알베르트 슈타틀러(1794~1888)의 기록에 따르면 “슈베르트는 사랑스러운 가곡 ‘송어’에 매료된 파움가르트너의 부탁으로 이 곡을 썼다”고 합니다. 한데 <피아노 5중주 A장조>의 작곡 연도는 좀 불분명합니다. 일반적으로 1819년으로 알려져 왔지만, 슈베르트는 포글과 함께 1823년과 1825년에도 슈타이어를 여행했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이 곡은 슈타이어의 아름다운 자연과 그곳에서 기분 좋은 나날들, 아울러 곡을 의뢰한 파움가르트너의 요구에 부응하는 디베르티멘토 풍의 우아함과 경쾌함이 잘 살아 있는 음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특징은 독특한 악기 편성입니다. 피아노5중주는 대체로 ‘피아노+현악4중주’로 이뤄지는 법인데, 슈베르트는 제2바이올린을 아예 제외하고 그 대신에 콘트라베이스를 배치해 놨습니다. 다시 말해 이 곡은 피아노,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콘트라베이스로 이뤄진 편성입니다. 이 역시 파움가르트너의 요청 때문이라고 봐야하겠습니다. 앞서 언급한 슈타틀러는 “훔멜의 5중주와 같은 편성의 곡을 파움가르트가 희망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1악장의 분위기는 전반적으로 상쾌하고 청명합니다. 피아노를 비롯한 네 대의 현악기가 서주부를 연주한 뒤에 바이올린이 첫번째 주제를 제시합니다. 가요풍의 아름다운 선율입니다. 피아노가 이에 호응합니다. 두번째 주제는 첼로와 바이올린이 서로 주고받으면서 연주합니다. 앞의 주제에 비해 약간 애상적인 듯하지만, 피아노가 담백한 터치로 이어받습니다. 발전부와 재현부에서는 빈번한 조바꿈이 일어나면서 음악의 표정에 다채로운 변화를 주고 있습니다.
2악장은 느린 안단테 악장입니다. 서정적인 분위기가 짙습니다. 크게 세 부분으로 이뤄져 있는데, 먼저 피아노와 바이올린이 서정적인 선율을 느리게 제시합니다. 두번째 선율은 비올라가 주도합니다. 짙은 애상감을 풍기는 단조의 선율입니다. 이어서 잘게 쪼개지는 듯한 현악기들의 반주 위에서 피아노가 리드미컬한 선율을 연주합니다. 이 3개의 악상을 조를 바꿔 한차례 더 재현합니다. 3악장은 프레스토로 템포가 빨라지는, 활기 넘치는 스케르초 악장입니다. 위트 넘치는 분위기가 펼쳐집니다. 중간부(트리오)에서 템포가 느려졌다가 다시 원래의 속도로 되돌아옵니다.
4악장이 바로 그 유명한 ‘송어’의 선율을 변주하는 악장입니다. 먼저 현악기들이 주제 선율을 한차례 연주하고 그것을 다섯 차례 변주합니다. 가장 먼저 피아노가, 이어서 비올라가, 그 다음에는 첼로와 콘트라베이스가 변주를 이끕니다. 네번째 변주에서는 조바꿈이 일어나면서 음악이 격렬하고 화려해집니다. 마지막 다섯번째 변주에서도 역시 또 한차례의 조바꿈이 일어나면서 첼로가 멋드러진 선율을 연주합니다. 바로 이렇게 여러 악기가 다양한 변주를 선보이는 것이야말로 4악장의 매력입니다. 마지막 장면에 이르면 템포가 약간 빨라지면서 다시 원래의 선율로 돌아옵니다.
마지막 5악장에는 알레그로 주스토(allegro giusto)라는 지시가 붙어 있습니다. 빠르고 정확하게 연주하라는 뜻이지요. 템포감이 확연히 느껴지는 밝고 산뜻한 악장입니다. 연주를 듣다보면 슈베르트가 왜 ‘알레그로 주스토’라고 지시했는지 금방 감지할 수 있습니다. 속도감 넘치는 악장인데다 명확하게 분절되는 듯한 악상들이 빈번히 등장합니다. 때때로 익살스러운 분위기를 풍기기도 합니다. 피아노와 네 대의 현악기가 한데 어울려 격렬하게 고조되면서 음악의 마지막 방점을 찍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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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프레트 브렌델ㆍ클리블랜드 쿼텟/1977년//PHILIPS
당시 40대 중반이었던 브렌델의 패기가 느껴지는 명연이다. 생동감 넘치는 앙상블이 잘 살아 있다. 적어도 1970년대에 국한하자면, 클리블랜드 4중주단은 줄리아드 4중주단과 함께 미국의 4중주단을 대표했다고 할 만하다. 1968년 말보로 페스티벌을 계기로 창단됐으니 이 곡을 녹음할 당시 10년이 채 되지 않은 ‘젊은 4중주단’이었다. 이제는 거의 40년 전의 레코딩으로 고색이 창연할 만큼 세월이 흘렀지만, 당시만 해도 젊고 신선한 연주로서 부족함이 없는 명연이었다. 슈베르트의 피아노5중주 ‘송어’를 연주한 레코딩 가운데, 현재 국내에서 일반적으로 가장 많이 추천되는 음반이라고 할 수 있다.
▶ 클리포드 커즌ㆍ빈8중주단 멤버/1957년/Decca
LP시절의 애호가들에게 사랑받았던 녹음이다. 말하자면 전통적인 명연이라고 할 수 있다. 빈 스타일의 격조 있는 연주라는 평가가 따라붙는다. 커즌의 영롱한 피아노 터치도 좋지만 빌리 보스코프스키가 이끄는 4중주단의 음색이야말로 ‘빈 스타일’이라는 호평의 근거라고 할 만하다. 현악기들의 탄탄한 연주가 무엇보다 매력적인 음반이다. 워낙 옛 녹음이어서 오늘날의 사운드 감각과는 다소 어긋날 수도 있지만, 슈베르트의 피아노 5중주 ‘송어’를 거론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음반이다. 두 장의 CD에 ‘아르페지오 소나타’(로스트로포비치)와 ‘환상곡 C장조’(라두 루푸), ‘현악8중주 F장조’ 등이 함께 수록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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