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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진에게 독서의 즐거움을 준 최초의 책

『늙은 나귀 좀생이』 이야기를 들어 보실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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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제일 좋아하는 이야기, 나도 이런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다고 생각했던 그런 이야기, 이야기를 읽거나 쓰게 되는 것을 너무나 좋아하게 만들었던 그런 이야기. 지금은 가지고 있지 않지만, 그것은 『늙은 나귀 좀생이』라는 동화책이다.


짧지도 길지도 않은 지금까지의 인생에서 잘한 일과 잘못한 일을 가려 보자면 아마 20대 80정도가 아닐까. 잘한 일과 잘못한 일이라는 것이 이득이 되는 선택, 손해가 나는 선택 혹은 옳은 일과 잘못한 일이라는 의미로 추려 보아도 역시 20대 80, 혹은 10대 90정도일 것 같다. 아무리 자신을 잘 봐주려 해도 75대 25정도일까. 하지만 그럼에도 이 일은 좀 가혹하다, 라고 여길 만한 일이 작년 봄에 일어나 아직까지 현재 진행 중이다. 그 전에도 콧노래를 부르듯 평탄한 길을 밟아 온 건 아니었지만 지난 30여년의 인생이나 그 중의 힘들었던 순간들이 어설픈 게임 튜토리얼로 여겨질 만큼 잔혹했다.

작년 가을에 소개한 『아웅산 테러리스트 강민철』 을 쓴 정치학자 라종일 선생은 사람이 받을 수 있는 고통은 많고 많지만 그 중에서 가장 끔찍한 것은 ‘이야기를 빼앗기는 것’이라고 한다. 강민철 사건을 라 선생께서 굳이 책으로 쓴 이유도 그에게 이야기를 되찾아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선생의 이 말은 한 단계 더 나아가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이야기가 된 고통은 치유된다’는 것이다. 고통을 이야기로 풀어놓을 수 있다면 치유가 시작된다는데, 그렇다면 나의 치유는 아직 손이 닿지 않는 먼 곳에 있는 것 같다.

이게 내 마지막 직장이라고 결심하고 어렵게 입사했던 회사를 작년 여름 나왔고, 직장과 별도로 준비하고 있던 원고 작업을 도저히 할 수가 없어서 하나씩 컴퓨터 하드 한켠에 밀쳐 두었고, 그나마 책 읽는 것이 힘이 되어 즐겁게 하고 있던 예스24의 이 코너 작업도 1월 한 달 꼬박 쓰지 못했다. 도서관에 가는 것조차 전혀 즐겁지 않은 삶의 지경에 다다르자 10대나 20대 때 오기로 중얼거리던, 나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어차피 나를 강하게 만들 것이라는 구절도 전혀 힘이 되지 못했다. 그건 내가 진심으로 두려워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상황이 진짜로 나를 죽일까봐. 또라이 테크를 착실하게 밟아 온 인생답게 새파랗게 어렸을 때에 좌우뇌 대사물질 불균형과 우울증,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등이 복합적으로 덮쳐 왔을 때 죽으려는 생각이나 죽으려는 짓을 안 해 본 것은 아니었다. 이후로는 그런 고통을 떨쳐 버리려고 필요 이상으로 격렬하게, 열심히 산답시고, 현실을 잊으려고 별 짓을 다 하다가 씻을 수 없는 상처를 타인에게 입히고 나도 입기도 했다. 하지만 그 때는 지금과 달랐다. 엄연히 ‘죽으려고 한 것’이지, ‘죽을 것 같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더럽고 짜증나고 슬퍼서 내가 못살겠네, 하고 내가 죽으려고 하는 것과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상황과 사건과 슬픔 앞에서 힘을 내려고 웃어가면서, 이런저런 일을 해보려고 궁리도 하면서, 찾는 데가 있으면 으쌰으쌰 힘을 내어 가기도 하면서, 그러다가 휴대폰 배터리가 깜빡깜빡 다 되듯이 힘이 천천히 떨어져 서서히 아무데도 못 가게 되고 결국 방 안에만 틀어박히는 지경이 되자 미래에 대한 비관적 생각 말고는 아무것도 들지 않고, 결국 극단적인 돌파구만 남은 것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자살을 선택하는 사람들에게 흔히 죽을 힘으로 살아라, 라고 이야기하지만 그렇게 되는 사람들은 죽을 힘이 있는 게 아니라 점점 힘이 빠져나가서 죽을 힘말고는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는 거구나, 하고 뼛속까지 이해하게 되었다.

이 과정을 통해 나는 무엇 하나도 장담할 수 없는 인간이 되었다. 하루에 서너 시간씩이라도 활기차게 걸어 다닐 수 있던 시절은 남 일 같고, 집에 틀어박혀 허옇게 부었다. 우울해하는 사람에게 재미있는 것을 해 보자고 책이나 영화를 권하던 것도 옛날 이야기다. 재미있는 것이 없으니 글을 쓰는 일이 되지 않는 것은 당연지사, 글 쓰는 사람들이란 원래 다른 사람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 주고 싶은 욕망이 남보다 배는 강한 사람들인데 나는 이제 재미라는 단어가 뭔지도 잊어버릴 지경이다. 이런 상태니 누굴 만나고 싶을 리가 없다. 인생의 극한 시기에 있을 때 사람들은 흔히 주변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하라고 하지만,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연락을 하려면 좋은 소식을 전하고 그들을 즐겁게 해 주고 싶은 게 인지상정인데 늘 변함없는 우는 소리만 고장난 라디오처럼 나오는데 송구하고 미안해서 과연 누구를 만만하게 괴롭힌단 말인가. 술독에 빠지는 것도 좋은 선택이 아니다. 술로 녹일 수 없는 압도적인 고통과 고독 앞에서 알콜까지도 무력해지는 건 믿을 수 없는 경험이었다. 적어도 고통을 둔화시키기라도 했었는데, 오히려 고통은 발톱을 간 맹수처럼 정교해졌다.

제일 괴로운 것은, 하고 싶은 것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몇 권의 에세이와 영화 작업 한 편, 게임 시나리오 몇 개, 지금까지 대단히 성공한 작업은 없지만 이야기를 만드는 것을 쭉 좋아했기 때문에 기회가 있으면 늘 덤벼들어 열심히 썼고 아무리 짓눌려 있을 때에도 그 일을 좋아하는 마음까지 눌린 적은 없었다. 살아 있는 한 즐거운 일은 있을 것이고, 부귀영화는 못 누린다 하더라도 내 이야기를 재미있어 해주는 사람이 있는 한 그만큼 고맙고 복된 일은 없다고 쭉 생각하면서 애써서 살았다. 그런데 웬걸,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좋아하는 것이 없게 되어 버리고 말았다. 이러다간 정말로 큰일이 나는 게 아닌가 덜컥 두려운 마음이 머릿속으로 이야기의 근원을 찾기 시작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이야기, 나도 이런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다고 생각했던 그런 이야기, 이야기를 읽거나 쓰게 되는 것을 너무나 좋아하게 만들었던 그런 이야기. 지금은 가지고 있지 않지만, 그것은 『늙은 나귀 좀생이』 라는 동화책이다. 어린이책으로 유명했던 ‘계몽사’에서 『디즈니 그림 명작』 이라는 그림책을 시리즈로 낸 여러 권 중 한 권인데, 애니메이션으로도 유명한 『마법사의 제자』 도 있고, 도날드 덕이 구두쇠 스크루지 영감으로 나오는 식으로 명작 동화들과 디즈니 캐릭터의 만남이 꼬마들에게 꽤 인기를 끌었다. 30대 이상 독자들은 어렴풋이 기억하실지도 모르겠다. 『늙은 나귀 좀생이』 와 『추위를 싫어한 펭귄』 은 그 디즈니 시리즈 중 별로 인기 없는 책들이었는데, 나는 이 두 이야기가 정말이지 죽도록 좋았다. 딱 하나만 고르라면 『늙은 나귀 좀생이』 인데, 나는 이 이야기를 읽을 때 항상 울었고, 지금도 떠올리면 늘 눈물이 난다. 새 책을 읽을 힘이 없어 최초의 독서를 심폐소생술처럼 계속 떠올리면서, 그렇게 살 힘과 내가 기어코 쓰고 싶은 글의 원형, 살아야 하는 힘의 원형을 찾아 헤매는 이 와중에 독자 여러분께도 좀생이의 이야기를 해 드릴까 한다.

어느 가난한 집에 소년이 살고 있다. 이 집에는 좀생이라는 늙은 나귀가 있는데, 아주 착한 나귀다. 소년은 좀생이와 둘도 없는 친구로 지낸다. 밭을 함께 갈고 일하면서, 둘은 떨어질 수 없는 사이다. 착하고 순한 좀생이는 외로운 소년의 좋은 놀이 친구가 되어 주지만 엄하고 무서운 엄마는 결국 좀생이를 팔기로 하고, 소년에게 장에 가서 좀생이를 팔아 오라고 호통친다. 못 팔아 오면 혼날 줄 알아라! 엄마의 호령은 추상 같고, 좀생이와 헤어지기 싫은 소년은 울면서 장에 간다. 좀생이가 어떤 집에 팔려갈지도 걱정이다. 좀생이는 너무 늙어서 일을 할 수가 없다. 그나마 마음 착한 주인이라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소년은 희망을 갖지만 늙고 초라한 좀생이를 팔려고 가져가지만 시장에서는 짓궂은 아저씨의 놀림거리가 된다.

힘도 없고 털 빠지고 늙은 나귀를 팔러 왔다며 킬킬대는 어떤 아저씨는 약한 좀생이의 등에 강제로 올라타고, 아이는 좀생이를 사 주겠다는 사람도 없어 어찌할 바를 모른다. 좀생이를 사겠다는 사람이 하나 있긴 한데, 그는 무두장이다. 그나마 좀생이의 털색이 조금 특이해서 가죽으로는 괜찮겠다면서 싼 값으로 좀생이를 인수하겠다고 하지만, 좀생이를 벗겨질 가죽으로 팔 수 없는 아이는 엄마의 호통이 두려워 그대로 집으로 돌아갈 수도 없다. 지친 좀생이는 소년 옆에서 슬픈 눈을 하고 있다. 둘은 도대체 어쩌면 좋을까.

그 때 차림새가 허름하지만 마음이 착해 보이는 청년 하나가 둘에게 다가온다. 그 나귀 팔려고 하니? 혹시 가죽을 탐내는 걸까, 아이는 덜컥 놀란다. 선한 눈을 가진 청년은 좀생이를 살펴본다. 아이는 슬프게 말한다. 우리 좀생이는 늙어서 무거운 짐을 끌지 못하고, 힘도 세지 않아요. 청년은 웃으며 말한다. 나는 아주 얌전하고 착한 나귀가 필요하단다. 일 때문에 고향에 돌아가야 하는데, 아내가 임신 중이거든. 우리는 천천히 가야만 하는데, 조심스럽게 아내를 태워 줄 착한 나귀가 필요하단다. 좀생이는 고기가 되거나 특이한 빛깔의 가죽이 되지 않아도 되고, 죽도록 수레를 끌거나 농사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

소년은 기뻐서 외친다. 좀생이를 데려가세요! 좀생이는 정말 착해요! 눈빛이 선한 부부와 함께 가게 된 좀생이도 기뻐 보인다. 소년은 기쁘게 좀생이와 작별한다. 좀생아 잘 가, 잘 가! 좀생이는 몸이 무거운 아내를 태우고 타박타박 길을 가고, 소년은 계속 손을 흔든다. 눈이 선한 청년의 이름은 요셉이고 배부른 아내의 이름은 마리아다. 그들은 호적 조사 때문에 베들레헴이 가는 길이다. 좀생이 이야기는 여기서 끝난다. 아마도 좀생이는 그 유명한 마굿간에서, 그 유명한 구유를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나는, 이 이야기에 그토록 끌렸던 이유를 찬찬히 생각해 보니 아마 본능적으로 늘 꿈꿔 왔던 것 같다.

상품성 없는 것들의 구원을.
시장에서 놀림감이나 되는 것들의 자리를.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호화로운 말과 마차를 끌고 오지 않고 어린 나귀를 택했던 예수도 어지간히 반골이었다. 뭐랄까, 그는 ‘쫄리는’ 것들의 편이었던 사람인 것이다. 질식할 것 같아 괴로워하면서도 계속 좀생이를 생각하고 있는 한, 아직 희망을 버리지 않은 것 같다. 그것만이 희망이다. 벌써 입춘이 지났다. 혹시라도 괴로워하고 있는 분이 계시면, 그 분에게도 좀생이가 희망이 되어 주길. 좀생이를 붙잡고 함께 가자, 봄으로…


(※ 이미지는 2012년 2월 22일 인터뷰 사진으로 본 칼럼과 관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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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현진(칼럼니스트)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는 오래된 캐치프레이즈를 증명이라도 하듯 '88만 원 세대'이자 비주류인 자신의 계급과 사회구조적 모순과의 관계를 '특유의 삐딱한 건강함'으로 맛깔스럽게 풀어냈다 평가받으며 이십 대에서 칠십 대까지 폭넓은 독자들에게 사랑받는 에세이스트. 『네 멋대로 해라』, 『뜨겁게 안녕』, 『누구의 연인도 되지 마라』, 『그래도 언니는 간다』, 『불량 소녀 백서』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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