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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란 여인과 해남 땅끝 포구

전라남도 해남군 어란 포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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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란 포구에 도착했을 때는 눈이 그친 새벽이었다. 해가 뜨려면 한 시간은 더 기다려야 했다. 밀려오는 졸음을 내쫓으려 차에서 내렸다. 바닥이며, 선창이며, 굴러다니는 타이어와 그물 위에도 모두 눈이 쌓여 있었다. 흰옷을 입지 않은 것은 유일하게 바다밖에 없었다. 바다 위의 색색의 부표들은 줄을 맞추어 우아하게 춤을 췄다.

이것이 픽션일지라도

 

이안 감독의 <색, 계>는 친일파의 정보부 대장의 암살계획으로 투입된 스파이가 연기가 아닌 실제로 사랑에 빠지게 되는 혼란스러운 상황을 다루고 있다. 이처럼 영화 같은 이야기를 한 포구에서도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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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재란, 일본의 장수 칸 마사가게는 먼 바다에 띄워 둔 부표의 움직임을 바라보며 파도의 방향을 살폈다. 어두웠던 구름이 흩어지고 한 줄기 빛이 바다로 쏟아졌다. 둥글게 자리를 잡은 빛은 점점 더 영역을 넓혀나갔다. 급기야 해남만의 파도는 금빛으로 일렁였다. 마사가게는 몸 속 어디에선가부터 촉발된 전율이 머리끝까지 차오르는 걸 느꼈다. 힘들게 진을 친 해남의 기후를 파악하기 위해서 최대한의 오차를 줄이는 통계를 만들어 내야했다. 물살이 센 지리적 요인으로 보았을 때, 날씨가 최대 변수였다. 그럼에도 이번 전쟁은 규모로 보나, 시기로 보나 모든 면에서 승전고를 울릴 수밖에 없는 조건을 갖추었다. 그는 부하들에게 술과 고기를 하사하며 출병이 다가왔음을 알렸다. 하지만 정확한 출병 날짜와 시간은 누구도 알 수 없었다. 마사가게는 누구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수많은 전쟁을 통해서 그가 체득한 유일한 전략은 바로 불신(不信)이었다.
 

그는 어느 때와 마찬가지로 점호를 끝낸 후에 어란이라는 이름을 가진 여인을 막사로 불러들였다. 난로에는 다 탄 장작이 으스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여인은 난로 속에 새 장작을 하나 집어넣었다. 언제나 그래왔다. 여인은 마사가게가 어떤 말을 꺼내기도 전에 머릿속을 읽은 듯이 행동했다. 여인은 조용히 다가와 비어있던 그의 잔을 가득 채웠다. 그는 다시 잔을 비워냈다. 여인은 다시 잔을 따랐다. 그때 그가 여인의 여린 손목을 잡아챘다. 여인은 술병을 놓치며, 옅은 신음을 뱉었다. 마사가게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여인의 품에 안겼다. 그리고는 어린아이처럼 울기 시작했다. 부하를 호령하던 강인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여인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으며 감춰왔던 말을 뱉어냈다. 그의 울음 섞인 고백 속에는 출병에 대한 두려움도 포함되었다. 그는 한 여인의 품에서 불신의 신념을 스스로 깨트리고 있었다.

 

‘9월 14일. 맑다. 북풍이 크게 불었다. 벽파진 건너편에 신호 연기가 오르기에 배를 보내어 실어와 보니 바로 임준영이었다. 임준영이 육지를 정탐하고 보고하기를 적선 200여척 중 55척이 이미 어란(해남군 송지면 어란리)앞바다에 들어왔다, 적에게 포로가 되었던 김중걸이 왜선에 결박을 당하고 있을 때 김해 사람인 어떤 사람이 왜장에게 빌어 묶인 것을 풀어주면서 조선해군을 보복하기 위해 모든 전선을 모아 조선해군을 전부 몰살하고 경강으로 올라가겠다고 왜놈들이 말하더라고 해서 전령선을 우수영으로 보내 피난민들에게 육지로 올라가라고 타이르도록 했다’ - 난중일기

 

난중일기에 나온 김해 사람이 바로 ‘어란 여인’이라는 설은 논란과 함께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설화에 따르면 그녀는 스스로 간첩역할을 자처해, 이순신 장군에게 적군의 출병을 전하게 된다. 이순신 장군은 첩보를 신중히 판단해 9월 15일에 벽파진에서 우수영(右水營)으로 진을 옮긴 뒤 장병들에게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則生, 必生則死)라고 말했다. 9월 16일 왜선 133척이 어란포를 떠나 명량으로 공격해왔다. 첩보가 정확하게 들어맞은 것이다. 잠복해 있던 13척의 전선은 이순신 장군의 전략으로 적군을 막아낸다. 기적과도 같은 대승을 거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명량대첩이다. 이 전투의 가장 큰 공은 물론 이순신 장군이다. 어란 여인은 어디까지나 가설로만 존재한다. 하지만 어란 포구에서 어란 여인은 단순히 설화 속 주인공이 아니다. 명량대첩에서 죽음을 맞이한 마사가게의 소식을 들은 어란 여인은 벽파진의 절벽에 뛰어들어 생을 마감한다. 어란 포구에는 어란 여인의 공과 혼을 기리기 위해서 석등롱이 설치되어 있다. 이것이 픽션일지라도 이 이야기를 들으면, 어란이라는 이름은 쉽게 잊을 수가 없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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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에서 농사짓는 어민들

 

곽재구 시인은 어란포구를 어머니의 알집으로 표현한다. 이름에서 즉각적으로 떠오르는 이미지가 마치 바다를 껴안은 포구와도 절묘하게 겹치기에 더없이 아름다운 해석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어란(於蘭)은 늘어진 난초를 뜻한다. 활등처럼 쑥 들어온 만(灣)의 형태를 띠어서 붙인 이름일까, 논이 한마지기도 없다는 땅 끝 마을이라서 그 기후적 특색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일까.
 

어란 포구에 도착했을 때는 눈이 그친 새벽이었다. 해가 뜨려면 한 시간은 더 기다려야 했다. 밀려오는 졸음을 내쫓으려 차에서 내렸다. 바닥이며, 선창이며, 굴러다니는 타이어와 그물 위에도 모두 눈이 쌓여 있었다. 흰옷을 입지 않은 것은 유일하게 바다밖에 없었다. 바다 위의 색색의 부표들은 줄을 맞추어 우아하게 춤을 췄다. 끝도 없이 펼쳐진 부표를 바라보자 저절로 까치발이 올라갔다. 고작 몇 센티미터가 커진다고 이 부표를 한눈에 담을 수는 없었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나의 뒤꿈치는 내려오지 않았다.
 

해가 산 너머로 고개를 드밀자마자 시동소리가 들려왔다. 다른 포구에서 보았던 어선들과는 달리, 낮고 납작한 배들이 출항준비를 했다. 한 대의 배가 포구를 떠나자, 다른 배들도 줄을 이었다. 배들은 일정하게 거리를 두며 각자의 부표를 찾아 서서히 나아갔다. 마치 소를 이끌고 자신의 논을 찾는 농부의 모습 같았다. 선창 끝에서 불과 백 미터 정도 떨어진 부표에 도착한 배부터, 어느새 섬 뒤로 돌아가 보이지 않게 된 배들까지, 모두가 자신의 양식장을 찾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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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란의 바다를 맛보다

 

독특한 배의 형태는 김 양식장을 관리하기에 용이하게 설계되어 있었다. 가난했던 어란을 풍족하게 만들어 준 것이 바로 김 양식이었다. 자연적 요건도 훌륭하지만 무엇보다 고향마을을 떠나지 않고, 성실히 하루하루를 견뎌낸 포구 사람들의 노동이 그들의 브랜드를 만들어 갔다. 해가 뜨기 전에는 모두 출항해야 하는데, 오늘은 눈이 와서 늦어졌다고 했다.
 

어란의 바다는 김이 자라기에 물이 깨끗하고 수온이 적당했다. 바다 아래는 갯벌이라서 영양도 풍부했다. 김은 1월이 제철이었다. 그 덕에 포구는 드나드는 배로 생기가 넘쳤다. 위판은 정오가 되기 전에 펼쳐졌다. 그러니 해가 뜨기 전부터 네댓 시간동안 배 위를 김으로 가득 채워내야 했다. 오후에는 김발을 뒤집어서 햇빛에 말려주고, 부표가 엉키지 않게 손질해야 했다. 쉴 틈이 없이 양식장을 관리해야만 맛있는 김을 선보일 수가 있었다.
 

김은 홍김과 흑김으로 나뉘었다. 나는 아무리 만져보고 맛을 보아도 어떤 김이 상태가 좋은 지 알 수가 없었다. 위판장에 모인 사람들은 물김을 만져보고 향도 보고 맛도 보았다. 그러고 보니, 그들은 매일 어란의 바다를 손끝으로 혀끝으로 코끝으로 확인하는 것이 아닌가. 이방인인 나로선 어란의 김을 판단할 자격이 없었다. 그것은 오로지 바다를 자신의 몸처럼 아끼고 돌보는 어란 사람들만의 특권이었다.
 

이 물김을 그대로 끓여먹는 ‘김국’이야 말로 이 지역에서만 맛볼 수 있는 독특한 음식이었다. 어업을 마친 어민들이 노인장에 쉬고 있던 어르신을 포구 앞으로 모셔다가 김국을 대접했다. 평상을 깔고, 막걸리를 받아오고, 김국을 한 솥 끓여왔다. 분명히 오래도록 끓인 것 같은데도 김이 많이 나지 않았다. 마치 매생이 국과 흡사해 보였다. 미운 사위에게 내준다는 매생이 국의 위트 넘치는 유래를 들은 적이 있다. 식은 줄 알고 먹었다가 혀가 덴다는 것이었다. 내가 뜨거움을 못 이겨서 숟가락을 후후 불어대자, 옆에 앉은 할머니가 보란 듯이 그릇을 두 손으로 들었다. 할머니는 입술을 대더니, 후루룩 김국을 들이켰다. 나도 할머니를 따라서 김국을 들고 그대로 마셨다. 입 안으로 물김이 가득 들어왔다. 어란의 바다가 입 안을 풍성하게 채웠다. 미역국과는 달리 고소하고 쌉쌀한 맛이 일품이었다. 평상에 앉은 사람 중에 미운 사위는 없었다. 어르신들은 오래된 익숙함에 더없이 평온한 표정이었다. 
 

그 표정을 곽재구 시인이 먼저 들여다 본 것일까. 아무래도 ‘어란’은 늘어진 난초보다는 어머니의 알집이라는 해석이 절묘하다. 따뜻한 기운이 온몸을 맴도는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숟가락으로 김국을 먹고 있는 이는 나밖에 없다. 자처해서 미운 사위가 될 수는 없다. 아예 숟가락을 놓고 김국을 마신다. 그러고 보니, 1월인데도 춥지가 않다. 새하얀 눈이 오랜 시간 쌓여 있는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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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오성은

바다를 사랑하는 사람
씨네필
문학청년
어쿠스틱 밴드 'Brujimao'의 리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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