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연재종료 > 김현진의 책 뒤집어보기
존 비비어는 이제 그만
예수님, 존 비비어를 저에게서 멀리하소서!
천주교 내부에서도 정의구현사제단 때문에 불편해한다는데, 주로 ‘조용히 신앙생활 하면 안되나요’라는 의견이 많다고 한다. 그런 신자들에게는 아쉬운 소식이지만, 예수는 단 한 번도 조용히 신앙생활을 한 적이 없다. 그 3년 동안 단 한 번도.
나는 요즘 충청도의 어느 도시에서 부엌데기 노릇을 하고 있다. 세상 돌아가는 일들이 모조리 골치가 아픈지라 외부와의 접촉을 최소화하고 좋은 주방 보조가 되는 데에 아침 여덟 시부터 오후 네 시 반경까지 골몰하다 보니 칼질이 꽤나 늘었다. 얼추 풀타임에 가까운 노동을 하고 있지만 이번에는 무급 노동이다. 교사와 학생을 합쳐 사십 명이 될까 말까 하는 자그마한 대안학교의 주방에서 무급 봉사로 점심과 저녁을 준비하는데, 학교에서 내가 먹을 밥은 준다. 돌아오는 길에 근처 대학 캠퍼스에서 책을 대출해 돌아오며 잡념을 깨치고 삶을 단순화하려 노력하고 있지만 이게 쉽지 않다. 내가 책을 대출해 보는 대학교는 소위 명문대의 반열에는 전혀 들지 못한다. 서울에 있는 대학 캠퍼스에서는 보지 못했던 ‘축 유치원 교사 합격’ 같은 플래카드가 나부끼는데 이게 교내에 나부끼는 축하할 일이 적힌 플래카드의 전부다. 물론 준비하던 유치원 교사 시험에 합격한 것은 축하할 일이지만 서울의 그럴싸한 대학들과의 온도차 때문에 마음이 복잡해졌다. 도서관에 들어가면 신간 코너가 언제나 반질반질하다. 서울의 구립 도서관에서 웬만하면 빌릴 수 없을 만큼 인기 있는 책들은 뭐든 찾기만 하면 거의 언제나 대출할 수 있고, 누가 읽은 흔적도 별로 없다. 다들 취직 때문에 바빠서 재미있는 책을 읽을 마음의 여유 같은 게 없나 보구나. 내가 원하는 책을 재깍 빌려 읽을 수 있는 것이 이 학교 학생들이 취업 준비 때문에 바쁜 틈을 타서 새치기 한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미안했다. 그러다가 그 미안함이 싹 가셨는데, 거의 대부분의 책들이 반질반질 새 책이건만 수없이 빌려가 꼬질꼬질하고 표지가 잔뜩 구겨져 있는 책들의 제목을 확인한 다음이었다.
같은 책을 두 권 이상 갖추고 있지 않은 도서관인데, 대여섯 권이나 같은 책이 있는 걸 보니 학생들이 희망도서로 신청한 게 틀림없었다. 제목은 『아프니까 청춘이다』. 『천 번을 흔들려야 어른이 된다』. 어찌나 열심히 봤던지 책장에 머리를 쿵 박고 싶었다. 얘들아 읽지 마. 이런 건 서울대 애들이나 읽게 놔두란 말이야. 걔들이나 아픈 청춘을 천 번 흔들어서 어른이 되게 내버려 둬. 너네는 안 읽어도 된단 말이야. 너네까지 서울대 교수에게 돈을 보태줄 필요는 없어. 머릿속에 복잡할 때는 어려운 책을 봐서 뇌세포를 모두 분주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이 나의 생존 방책이다. 하필 이 날 고른 책은 한나 아렌트의 『전체주의의 기원』 이었다. 내 뇌세포 수준에는 좀 지나쳤다. 이 책과 격투하고 처참하게 패배한 뒤 다음날 아침 비척비척 파를 다지고 있는데 주방의 대장님이 말을 걸어오셨다. 참고로 이 학교는 개신교의 어느 선교회에서 운영하는 곳이라 운영 주체들이 보수(는 무슨, 반동이라고 읽자)적인 개신교 신앙을 지니고 있다. 분쟁지역 등에 파견되어 아이들과 함께 입국할 수 없거나, 경제사정 등으로 자녀와 함께 생활활 수 없는 선교사의 자녀들이 생활하며 공부하는 학교다.
“뉴스를 봤더니 천주교가 완전 내분이 일어나서 난리가 났다 아임니까!”
어쩐지 아주 고소해하시는 것 같았다. 치프는 좋은 사람이다. 오랫동안 영양사로 근무했던 체격도 좋고 마음도 좋은 할머니신데, 다정 물론 나처럼 무급 봉사다. 이 학교의 모든 교사들은 모두 무급으로 봉사하고 있다. 이것을 이쪽 업계 용어로는 ‘자비량 선교사’라고 하는 모양이다. 모두 열심히 일하고 있다. 믿음이 뜨겁지 않다면 어찌 이렇게 하겠는가. 치프도 물론 믿음이 뜨겁다. 나로 말하자면 가끔 델 것 같아서 문제지만. 내가 지금 충청도의 주방에서 암약하고 있는 이유를 치프는 모른다, 주방의 일은 간단하다. 썰고, 자르고, 끓이고, 머인다. 치프가 시래기국을 끓인다고 하면 나는 시래기를 썬다. 치프가 계란말이를 한다고 하면 나는 85개의 계란을 섞어 당근과 파를 다져 넣는다. 아이들이 그것을 먹는다. 간단하다. 동그랑땡처럼 손이 많이 가는 음식들도 있지만, 원론적으로는 쉽든 어렵든 나는 시키는 걸 하고 아이들이 그걸 먹는다. 그러나 치프가 들떠서 하는 말은 이 단순한 아름다움을 심각하게 저해한다.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인가 뭔가 하는 사람들이 나라 일에 대고 저거가 뭔데 뭐라 캐싸가, 신문 방송에서 난리대예. 참내, 정의는 무슨 정의? 우째 생각하노?”
낮은 조리대 앞에서 어깨를 움츠린 채 40인분의 양배추를 채썰다 보면 해질녘에는 목덜미가 욱신거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가 양배추를 채치면, 아이들이 그것을 먹는다’는 이 단순한 질서를 위해 여기 있는 것이다. 양배추가 됐든 뭐가 됐든. 그러나 치프가 사정없이 그것을 방해하고, 나는 목덜미를 주무르며 대답한다.
“용기 있게 발언하는 게 대단한 것 같은데요.”
치프는 기겁한다. 그녀는 내가 개척교회에서 목회를 하다가 암으로 죽은 목사의 딸이라고만 생각한다. 물론 그것은 사실이다. 나는 모른 척 양파를 다지는데 전념한다. 치프는 흥분한다. 허공에 손짓을 하는 치프의 손에는 하필이면 그 잘 든다는 장미칼이 들려 있다. 치프는 칼을 휘두르면서 계속 말한다.
“종교는 정치에 관여하면 안 된다 아이가.”
나는 당근을 썰면서 명랑하게 말한다. 치프의 칼이 무섭긴 하다.
“신부님들이 공천을 받은 것도 아니고 장관이 된 것도 아니고 어디 입당을 한 것도 아니고 뭐 공천에 압력을 넣은 것도 아닌데요 뭐. 이거 더 채썰까요?”
“성경에 위에 있는 권위에 복종하라 켔는데 자기들이 뭔데 대통령을 내리라 마라 카노?”
“무조건 권위에 복종해야 하면 히틀러한테도 복종해야 되게요.”
“하모, 당연히 복종해야제. 지도자는 다 하나님의 뜻으로 세워진기라. 하나님이 히틀러를 들어 쓰셨잖아.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였으니까 하나님이 히틀러를 통해서 유대인들을 심판하셨잖아.”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는 오래된 캐치프레이즈를 증명이라도 하듯 '88만 원 세대'이자 비주류인 자신의 계급과 사회구조적 모순과의 관계를 '특유의 삐딱한 건강함'으로 맛깔스럽게 풀어냈다 평가받으며 이십 대에서 칠십 대까지 폭넓은 독자들에게 사랑받는 에세이스트. 『네 멋대로 해라』, 『뜨겁게 안녕』, 『누구의 연인도 되지 마라』, 『그래도 언니는 간다』, 『불량 소녀 백서』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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