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경상남도 남해를 다녀왔다. 예쁜 지명을 좋아하는 까닭에 언젠가 꼭 한 번 가보고 싶었던 곳이 남해였다. 가보면 실망한다는 독일마을, 사진발이라는 다랭이마을. 두 군데를 들러보자는 마음으로 서울에서 남해군 남면까지, 구간단속구간을 아슬아슬하게 통과하며 5시간을 달렸다. 준비 없이 떠나는 여행이 언제나 만족스럽진 않지만, 지나친 기대는 허탈한 마음만 선물할 뿐이다. 늘 그렇듯 최소한의 정보만 머릿속에 담고 1박 2일, 짧은 여행을 시작했다. 단 이번 여행은 두 시간만이라도 사색을 즐기고자 배낭에 책을 세 권이나 쑤셔 넣었다. 결론적으로는 나를 과대평가하는 오류를 범했다. 차가 잠시 정체됐을 때, 10페이지 독서를 한 게 전부였다. 대부분 멍 때리며 하늘을 보다가, 자다가, 운전 교대를 했다.
다랭이마을바닷가마을을 가면 늘 회를 먹어야 한다는 의무감에 사로잡히곤 하는데, 동행자가 해산물을 좋아하지 않는 탓에 회는 식단에서 제외했다. 나 또한 올 초 속초 동명항에서 흡입한 자연산 광어를 뼈째 먹고 탈이 난 후로, 여간해서 회가 당기지 않는다. 남해에 들어서니 우리를 반긴 건, 멸치쌈밥집의 행렬이었다. 이름 한 번 깔삼한 멸치쌈밥. 그러나 지나치게 강렬한 간판 탓에 선뜻 식당에 들어서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소박한 간판 식당을 목격하면 들어가보기로 하고 다랭이마을을 둘러보았다.
따뜻한 남쪽 바람을 맞으며 잠시 잠깐 낭만에 젖어드려는 찰나, 뱃속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간식 말고 밥을 달라는 신호였다. 이렇게 반가울 수가! 드디어 배꼽시계가 알람을 우렁차게 울려댔다. 신속하게 인터넷을 검색하는 대신, 지나가는 현지인을 붙잡고 ‘가장 가까운 맛집’을 물었다. “주변에 식당 자체가 얼마 없어요. 차로 10분 거리에 있는 남해자연맛집이 전복죽으로는 꽤 괜찮아요.” 남해의 전복죽? 원하던 메뉴는 아니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빨리 달려 7분만에 도착. 다행히 Break Time과 겹치지 않았다. “여기 전복죽 두 개요”를 외치며 식탁으로 향하는데 매우 인자한 표정의 사장님이 매우 미안해하면서 개인적 사정으로 지금 문을 닫는단다. 울상을 하며 식당에서 나왔다. 어쩔 수 없이 그냥 액셀을 밟아보기로. 가장 먼저 보이는 첫 번째 식당에 두말없이 들어가기로 결정하고 이내 식당을 발견했다. 아무리 식사 때가 아니었기로서니 손님이 한 테이블도 없는 조용한 횟집. 전복죽이 메인 메뉴가 아닌 식당이었다. ‘맛있는 건 못 먹어도 맛없는 건 먹지 말자’가 내 평소 신조이건만 살짝 망설여졌다. 그렇다고 당기지도 않는 회를 먹을 수도 없는 노릇. 이내 전복죽 두 그릇을 시켰다.
배고픈 자에게는 꽤나 오랜 시간이 지나고, 전복죽이 세팅됐다. 적어도 새로 끓였다는 확신은 들었다. 한 수저 떴다. ‘간이 심심하네.’ 두 수저 떴다. ‘적어도 죽 전문점 수준은 넘어서네.’ 세 수저 떴다. ‘맛있다.’ 점점 속도가 붙었다. 동행자가 혹시라도 내 그릇을 탐낼까 꽤 빠른 속도로 그릇을 비웠다. 따뜻해지고 있는 구들장만큼 내 마음도 너그러워졌다. 1만 5천 원, 조금도 아깝지 않았다. (음식점은 남해해월정횟집. 홍보 아니다. 궁금해할 독자 몇 분을 위하여)
뱃속이 따뜻해지니 자연스레 수다가 이어졌다. 동행자는 “역시, 밥은 배고플 때 먹어야 해”라며 무척 관대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 식사 시간이 되었다고 배고프지도 않는 뱃속에 무턱대고 음식을 주입하는 건, 식탐가나 할 일이다. 언젠가부터 우리 나라 사람들은 맛집에 대한 강박증이 생겼다. 페이스북에 올려지는 수많은 맛집 탐방기, 배고프지 않을 때 사진을 보고 있노라면 전혀 흥분되지 않는다. 마치 자신이 만든 음식인 마냥 극찬을 아끼지 않는 맛집 블로거들. 이제 식당 주인들도 똑똑해져서 무조건 DSLR을 들이댄다고 서비스를 주지 않는다.
특히 해외 여행을 갔을 때. 내가 언제 또 이 나라를 와보겠냐며, 시간대별로 각종 음식을 맛본다. 배고프지 않을 때 먹는 음식은 제아무리 훌륭한 레시피를 가졌더라도 만족을 주기 어렵다. 나 또한 여행자의 의무인 마냥, 새로운 여행지의 낯선 현지 음식은 주저 없이 먹었다. 다양한 음식을 먹기 위해 소량 주문하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지나가는 여행자들이 먹고 있는 각종 간식을 목격하면, ‘이 것도 먹어야 하는데’ 조급할 따름이었다.
전복죽을 만족스럽게 먹은 후, 떠오른 음식은 올 가을 늦은 휴가로 다녀온 비엔나에서 먹은 슈니첼(Schnitzel). 송아지 안심살과 같은 고기를 부드럽게 다진 다음 밀가루, 빵가루, 계란물을 입혀 기름에 튀긴 음식. 얇은 왕돈까스를 상상하면 되는데 조금도 느끼하지 않고 담백하다. 내가 선택한 곳은 비엔나에서 가장 유명한, 1905년에 문을 연 슈니첼 전문 레스토랑 ‘피그물러’. 유일하게 줄 서서 기다린 끝에 들어간 곳이었다. 길게 늘어선 줄 때문에 점원은 우리 일행을 끝으로 손님을 받지 않겠다고 말했다. 때마침 우리 뒷줄에 서있던 한국인 모녀는 발을 동동 구르며, 아쉬워했다. 모녀는 근처에 있는 2호점을 갔다가 다시 1호점에 와 우리에게 합석을 청했다. 동지애가 불끈 솟아 “좋다”고 답했지만, 이미 점원은 우리 일행이 2명인 것을 파악한 후에 줄을 끊은 것이었다. 짧은 영어로 설득을 하려던 차, 우리 앞줄에 있던 젊은 청년이 입을 열었다. 알고 보니 이 남자 또한 한국인. 그는 유창한 독일어로 점원과 쇼부를 쳤다. 다행히 모두가 큰 테이블에 다같이 동석할 수 있었다.
이윽고 기대하던 슈니첼이 나왔다. 접시가 좁다며 사방으로 튀어나온 슈니첼은 얇지만 양이 거대했다. 레몬을 살짝 뿌리자 느끼함은 온데간데 없었다. 배고팠던 우리 일행. 폭풍 흡입을 시작했다. 배가 다소 불러왔지만 문제되지 않았다. 한 조각 한 조각, 음미하듯 꼭꼭 씹었다. ‘역시 뭐든지 배고플 때 먹어야 해’라는 상념에 사로잡혀 있는데, 누군가의 시선이 감지됐다. 합석한 모녀와 젊은 청년. “기대보다 덜하다”며 예쁘게 조각 낸 슈니첼을 더 이상 먹지 않았다. 이럴 수가! 우리도 작은 기대를 안고 온 곳인데, 기대 이상 훌륭한 음식이었단 말이다. 입맛 까다로운 내가 별 다섯 개를 줄만한 곳이었는데, 역시 그들은 배고픈 자들이 아니었다. 남김 없이 슈니첼을 비운 우리 일행을 신기하듯 쳐다보았다.
우리는 만족스러운 식사를 마치고 매서운 칼바람을 맞으며, 비엔나의 유명한 젤라또를 먹으러 갔다. 추웠지만 ‘언제 먹겠어? 먹을 수 있을 때 먹어야지.’ 간단한 디저트였지만 이미 배가 부른 우리에게 적당한 타이밍은 아니었다. 아차차, 우리 배부르지?
여행에서 기억에 남을 음식을 만나려면, 적어도 한 번은 쫄쫄 굶은 상태에서 맛집을 찾아야 한다. 다음 여행지에서도 우리는 빈 속으로 식도락을 즐길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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