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고 형태로 이 책을 읽고 있었을 때, 과연 “이 원고가 책으로 나올 수 있을 것인가?”라는 의문이 먼저 들었다. 정치나 사회, 더군다나 북한에 대해 잘 모르는 나로서도 어째 희망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내가 아는 출판사나, 내가 알고 있는 소설가들에게 주섬주섬 이 원고를 내밀고 한국사회에 꼭 출간되어야 하는 원고라고 생각하는데 검토해 달라, 라고 파일을 내밀고 다녔을 때 이 책의 제목은 아직 『아웅산 테러리스트 강민철』이라는 현재의 제목이 아니라 저자인 라종일 선생께서 붙인 ‘고발’이라는 제목이었다.
과연 창작과비평사라는 한국 최고의 출판사에서 책으로 만든 것을 보니 나 같은 사람이 주섬주섬 외판원처럼 한국사회에 꼭 출간되어야 하는 책이다, 라면서 여기저기 내밀고 다닌 게 좀 무안해지기는 하지만 그런 무안함 같은 것은 이 책의 의미에 비하면 너무나 사소한 일이다. 아웅산 테러리스트 강민철의 삶, 그리고 그런 그의 생을 남한에서 잘 먹고 잘 살고 있는 우리에게 전달하는 저자 라종일의 목소리는 팽팽하게 두껍지 않은 책 속에서 치열하게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이 책 속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두 사람의 목소리, 물론 그 중 주인공은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아웅산 테러리스트 강민철의 목소리다. 과거 ‘버마’라고 알려진 미얀마에서 전두환을 노린 테러가 일어났다. 하지만 전두환은 아무 해를 입지 않았고 미얀마와 한국의 공직자 등 여러 사람들이 대신 희생을 당했다. 처음에는 짓궂게 북한 사람들, 테러를 하려면 잘 좀 하지 왜 목표물을 놓쳐서 무고한 희생을 이렇게 많이 냈는가, 하고 책장을 읽다가 뼈와 살이 잔혹하게 흩어져 있는 현장에 대한 묘사를 읽었을 때 아무리 대상이 ‘19만 원’이라 해도, 그런 생각을 품었던 것까지 스스로가 죄송하고 잔혹하게 느껴졌다.
아웅산 테러 사건도 벌써 30년, 테러와 폭탄과 총기, 이런 것에서 우리는 이미 농담으로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멀리 있는 것이다. 아주 보통의 선량한 남한 사람이 2013년 현재 ‘통일이 안 되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우리만 너무 고생하는 것 아니냐’ 뭐 이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말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강민철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우리는 자세히 알지 못한다. 그가 탁월한 군인이었으리라는 것 정도는 당연한 이야기다. ‘북한’이라고 하면 무조건 ‘북괴’라는 단어를 떠올리며 김씨 집안의 세습 통치가 삼대에 접어든 지금까지도 무시무시한 혹이 난 김일성의 이미지를 잘 벗지 못하는 우리들인지라, 이 책에서 지속적으로 제기되는 테러 사건의 배경으로 80년 광주에 대한 북한의 불타는 복수심이 적지 않게 언급되는 것은 흥미로운 지점이다.
개인적으로는 이 사건이 80년 광주에 대한 복수였다면(물론 온갖 정치적인 계산이나 이런 것들을 빼고 생각할 수 없으니 일종의 무협지처럼 감성적으로 생각했을 때), 그 수괴인 29만 원을 향한 테러라면
<26년> 같은 영화처럼 아예 응원하고 싶어지는 마음까지도 생겨나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어쨌거나 지금은 강민철의 목소리에 집중하자. 거사 후, 모선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 거사를 치르고 모선을 통해 북한으로 복귀하라고 했지만 거사는 실패로 돌아갔다. 강민철과 다른 테러리스트들은 모선을 찾기 위해 헤맸다.
그러나 모선은 없었다. 이것은 거사 실패에 대한 벌일까? 만약 테러가 성공했다면? 그래도 모선이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강민철과 다른 테러리스트 ‘진모’는 두 사람 다 미얀마 경찰과 대치 후 전투 상황에서 사로잡혔는데 그들이 사용한 수류탄은 상대를 공격하기 위한 무기로 보기에는 폭발이 지나치게 빨랐다. 그 수류탄이 제거하려고 한 제 1의 목표는 그 수류탄의 사용자라는 것을 누구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그 증거로 두 사람 다 수류탄을 쓰던 팔을 잃었다. 모선도 없었고 팔을 잃은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먼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지만, 강민철은 살고자 했다.
얼마만큼 살고자 했느냐고? 그가 죽은 것은 2008년이었다. 그 때까지 미얀마 감옥에 갇혀 있었고, 병으로 앰뷸런스에 실려 가다가 불과 한국 대사관과 10분 떨어져 있는 거리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가 화장 혹은 매장되었는지, 유해가 어디에 안치되었는지는 아무도 알려 하지 않았다. 라종일이 미얀마에 강민철의 사후 그 사실을 알고자 한 유일한 사람이었다. 남한에서는 테러리스트, 북한에서는 우리와 상관없는 사람으로 제 3국의 감옥에서 내내 썩다 간 그 사람은 그래도 한국말을 쓸 수 있는 곳에서 여생을 보내고 싶어했으나 그를 받아 줄 곳이 없어 석방되지 못했다.
그럼 사람 죽인 게 잘했단 말이냐? 이런 질문을 수없이 받은 것은 저자인 라종일이다. 이 원고가 주간지에 얼마간 소개되었을 때 댓글을 통한 공격은 물론이고 논설위원 등 사회 중진들이 그를 향해 눈살을 찌푸렸다. 한마디로 왜 우리보고 이러냐는 것이다. 안보수석 등을 지낸 정치인이고 주일, 주영 대사를 지낸 외교관이며 대학 총장을 지낸 학자인 그는 김대중 정부의 최고 공적 중 하나인 ‘햇볕정책’이 실행되던 당시 그 중심에 있었다. 그리고 그 광경을 기록한다. 남과 북의 만남이 이루어지던 그 자리에서는 돈과 자원과 술까지도 넘쳐났으나 미얀마의 한 감옥에 돌아갈 몫은 요만큼도 없었노라고.
나는 그 구절을 읽었을 때 복잡한 마음에 왈칵 울고 말았다. 이 책에서 앞서 말한 두 사람의 목소리, 먼저 말하는 강민철의 목소리, 살고 싶다고 강렬하게 호소하는 그의 목소리 뒤에서 끊임없이 차분하게 말하는 또 하나의 목소리가 라종일의 목소리다. 테러가 옳다는 것이 아니다. 사람을 죽이는 것은 옳지 않다. 어떤 정치적인 이유로든 누군가가 지워지는 것은 옳은 일인가? 라고 계속해서 묻는 라종일의 목소리. 아니 그게 우리 책임이에요, 라고 신경질을 내는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그럼 그게 누구 책임이냐고 묻는 목소리. 하나님이라면 무어라고 물으셨을까. 네 형제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는 벌 받을 죄를 지어 미얀마 감옥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테러리스트인데 무슨 아벨입니까? 땅이 그가 흘린 피를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는 네 형제가 아니냐? 그에게 테러를 하지 않을 자유가 있었느냐? 너는 그의 피에서 무죄하냐? 우리는 강민철의 피에서 무죄한가?
실제 라종일은 강민철이 살아 있을 때 그를 제 3국으로 송환하기 위해 여러 루트를 통해 노력했으나 실패했고, 남북한이 한참 관계가 좋던 때에 그의 이야기를 꺼냈다가 오히려 분위기 파악 못한다는 식의 반응만 들었다. 정전 50~60년에 이르기까지, 이 견고한 현실의 벽에 막혀 결국 라종일이 강민철을 위해 해 줄 수 있었던 것은 ‘고발’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땅에서 지워진 네 형제가 어디 있느냐, 라는 목소리에 답하기 위해서.
[관련 기사]
-빨강머리 앤 뒤집어보기 “어휴, 언니, 고생 많이 하셨구려”
-김경의 도발은 더 유연해지고 우아해졌다
-문장의 한구절이 인생에 혁명을 일으킨다 - 박총
-단 5권의 책만 소장할 수 있다면, 시드니 셀던
-크리스토퍼 히친스, 그가 싸움닭이 되어가면서까지 이야기하려 한 것은…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