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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노래에 하늘을 날던 기러기떼가 떨어졌다?

오랑캐 땅엔들 어찌 화초가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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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소군, 이 언니를 보라. 의순공주를 비롯, 이민족에게 희생양으로 시집간 다른 언니들을 보라. 비난받는 재혼을 한 다른 여성들을 보라. 세상의 모든 화냥년들을 보라.

누가 어떤 기준으로 정했는지 알 수 없지만, 인터넷 검색을 하면 중국 4대 미녀라며 서시(西施), 왕소군(王昭君), 초선(貂嬋), 양귀비(楊貴妃)의 일화를 소개하는 글이 많이 보인다. 어떤 글은 출처가 불분명하거나 야사나 소설의 내용을 사실이라고 소개하고 있어, 역사 왜곡은 물론 여성에 대한 편견까지 조장하는 것처럼 보인다. 심지어 초선은 실존 인물도 아닌 소설 속 인물인데 말이다. 그런데 이들 중, 현대 중국 정부까지 나서서 기념사업을 벌이고 추모하는 특별한 미인이 있다. 바로 이번 이야기의 주인공인 왕소군(王昭君)이다.



중국 현대 화가 유패(劉佩)의 사미인도(四美人圖) 중 왕소군 그림 [출처: 위키피디아]


한족과 북방 유목민족간의 대립과 갈등, 융합 관계

중국역사는 한족(漢族)만의 역사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농경정착민족인 한족과 북방 유목민족간의 대립과 갈등, 융합 관계를 보지 못하고 한족 위주의 중화사관으로 서술된 책만 본다면 역사의 반쪽 면만 본 셈이다. 한 예로 중국이 자랑하는 만리장성이란, 다른 한편으로는 중국 한족의 힘의 한계를 보여주는 기념물이기도 하다.

흉노는 기원전 3세기 말 역사무대에 가공할 만한 큰 세력으로 처음 등장하였는데, 이때는 바로 진나라(기원전 221 - 206)가 중국을 통일하였을 때다. 위험을 예상한 진시황제는 장군 몽염을 보내 만리장성을 완성하게 했다. 만리장성은 기원전 215년 이래 흉노로부터 중국 영토를 보존하는 역할을 하였다. 기원전 214년경 몽염은 현재 오르도스 지역과 황하의 만곡으로 둘러싸인 지역에서 흉노를 몰아냈다. 그러나 두만선우(頭曼單于) 시대에 흉노는 감숙 서부 지역에 존재하고 있었던 월지를 공격하면서 팽창하기 시작하였다. (중략) 한나라를 건국한 고조 유방(劉邦)이 흉노를 물리치기 위해 달려왔지만 현재 산서의 변경인 대동 지역에 있는 그 당시의 평성 근처 백등산에서 포위되는 신세가 되었다. 그가 이런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야만인들보다 더 잘할 수 있었던 협상을 통해서 뿐이었다. -「유라시아 유목 제국사(pp.71~72) 르네 그루쎄 지음, 사계절」

한나라를 설립한 고조 유방이 흉노에게 포위되었다가 도망쳐 나와 굴욕적인 화친을 청한 위의 사건 이후, 전한 시대 내내 한은 공주와 재물을 흉노에 보낸다. 한 무제 때 일시적으로 흉노를 공격해 성공을 거두기는 했지만, 효과에 비해 비용이 너무 많이 들었다. 중국은 전쟁이나 성벽 건설보다 화친정책이 훨씬 싸게 먹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말로는 ‘책봉체제’에 ‘조공제도’였다지만 사실상 중국 조정은 유목민에게 여성과 비단, 술, 쌀 등 금품을 제공하고 평화를 산 셈이다. 중국과 대결하는 유목민족의 지배자 입장에서도 중국에서 받은 사치품으로 추종자들을 끌어들이고 상대적으로 강국인 중국 황제의 인정을 받는 것이 자신의 권력 유지에 유리했다.
중국 왕조의 이민족 정책(기미정책)의 하나는 궁궐의 여성을 이민족 군장의 처로 보내는 통혼정책이다. 이러한 여성들은 그 후 당 대에는 화번공주(和蕃公主)라고 불렸는데, 이 화번공주가 시작된 것도 한 대였다. 최초의 예는 한의 고조 유방이 훙노 대군에게 포위되었다가 간신히 도망쳐 나와 흉노와 화친했을 때 행해졌다.
당시 유방은 황실의 여성을 흉노 묵특선우의 처로 보낼 것을 약속하였는데, 그 경과가 <사기> 유경전에 기록되어 있다. 유경은 장공주, 즉 이 경우에는 유방의 딸을 보내야 한다고 주장하였지만, 황후인 여후(呂后)가 딸 잃는 것을 슬퍼하며 하소연하였기 때문에 유방은 대신 ‘가인(家人)의 여식‘을 장공주라고 이름 붙여 선우에게 보냈다고 한다.
-「중국과 고대 동아시아 세계(pp.117~118) 호리 도시카즈 지음, 동국대학교출판부」

공주 대신 흉노로 시집간 왕소군

중국 측은, 공주를 시집보내기로 약속했지만 황제의 친딸만을 보내지는 않았다. 대개 종실의 딸을 공주로 책봉하여 보내거나 궁녀들 중에서 뽑아 보냈다. 상대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어차피 황실의 공주 신분으로 봉해졌으며 공주 신분에 맞는 혼수품을 가져오기에 문제 제기를 하지 않았다. 화번공주(和蕃公主)라는 말 자체가 중국과 이웃 번국(蕃國) 사이의 평화를 담당하는 공주라는 뜻이기에 혈통보다 역할이 중요했다. 왕소군도 이런 방식으로 흉노의 선우(고대 북방 유목민족의 군장)에게 시집간 여인이었다.

경녕 1년(전 33년) 선우는 다시 입조하였다. 예우와 물품 하사는 처음과 같았으나 의복과 비단 명주솜을 더 주었는데, 모두 황룡 시기에 추가로 사여한 양보다 곱절이었다. 선우는 한 종실의 사위가 되어 자신이 한의 친족이 되길 원한다고 스스로 말하였다. 원제 때 이후 궁에 있던 양가자(良家子) 왕장(王牆), 자는 소군(昭君)을 선우에게 사여하였다. -「한서 94 <흉노전>, <한서 외국전 역주 上> (p.186)」

왕소군은 흉노에서 영호연지(寧胡閼氏)라고 불렸다. 아들 하나를 낳았는데 이도지아사(伊屠智牙師)이고 우일축왕이 되었다. 호한야는 즉위한 지 28년이 되어 성제 건시 2년에 죽었다. (중략) 복주류선우는 다시 왕소군을 처로 삼아 두 딸을 낳았다.-「한서 94 <흉노전>, <한서 외국전 역주 上> (pp.192~193)」



왕소군 무덤 앞에 있는 왕소군과 호한야선우의 기마상 [출처: 위키피디아]

위 기록에서 '양가자(良家子)'라는 말은 한나라 대에 3대 이상 범죄와 관련이 없어 벼슬을 하는 데 결격사유가 없는 가문 출신 사람을 의미한다. 화번공주로 보내진 왕소군의 신분이 종실인 유씨가 아니라 왕씨 궁녀였던 것은, 이 시기에 흉노 세력에 분열이 일어나 흉노의 군사력이 약해졌기 때문에 한의 입장에서는 굳이 진짜 공주나 종실의 여성을 보낼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여하튼, 궁녀 신분이었던 왕소군은 흉노의 호한야선우에게 시집가서 아들 한 명을 낳는다. 그녀를 부른 영호연지(寧胡閼氏. 연지는 흉노에서 왕비를 부르는 칭호. 학자에 따라 알지라고도 읽는다)라는 칭호는 오랑캐를 평안하게 하는 왕비란 뜻이니, 아마 한에서 붙인 칭호였을 것이다. 시집갈 당시 50대 후반이었던 호한야선우가 결혼한 지 만 2년 만에 사망하자 20대 전반 나이의 왕소군은 호한야와 다른 부인 사이에 태어나 다음 선우가 된 복주류선우와 재혼하여 딸 둘을 낳는다. 기록에 의하면, 아들과 두 딸 모두 흉노 사회에서 높은 신분에 속했다. 그녀의 자녀들이 높은 위치에 있었다는 것은 그녀가 높은 대접을 받고 성공적으로 흉노 사회에 정착해 살다갔음을 추측하게 한다.

왕소군에 관한 정사 기록은 많지 않다. <한서(漢書)>의 <원제기(元帝紀>와 <흉노전(匈奴傳)>, 그리고 <후한서(後漢書)>의 <남흉노전(南匈奴傳)>에 적힌 몇 줄이 전부이다. 이상의 기록에 드러난 것만으로 보면 왕소군은 비록 이역만리 낯선 곳에 평화사절을 빙자한 하사품으로 보내졌지만, 시집가서 비교적 안정된 지위를 누리고 잘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범엽이 지은 <후한서>의 <남흉노전>에는, 왕소군은 입궁한 지 몇 년이 지났지만 황제의 눈에 들지 못하자 원망을 품고 원제가 호한야선우에게 하사할 궁녀 5명을 뽑는 데 자원했다고도 적혀 있다. 어쩌면 왕소군은 희생자가 아니라 새로운 삶을 살 기회를 찾아 스스로 움직인 적극적인 여성이었을 수도 있다.


후대에 변형된 왕소군의 이미지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왕소군은 비련의 여성 이미지를 갖고 있다. 그 이유는 후대의 문학 때문이다. 실제 그녀의 삶과 다른 전설이 생겨나 전해지다 기록되면서, 이를 바탕으로 문인들이 시를 지었다. 왕소군의 이미지는 사실과 상관없는 상태로 굳어졌다. 이런 변형과 전승이 널리 퍼질 수 있었던 이유는 일차적으로 당시 한과 흉노 사이의 격렬한 대립이란 흥미로운 배경에 비해 왕소군에 관한 정확한 역사 기록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한편, 후대의 사람들이 그 시대 자신의 입장에서 하고 싶은 발언을 왕소군의 생애에 빗대어 계속 해왔기 때문일 수도 있다. 여하튼, 1907년 둔황에서 다른 고중세 문서들과 함께 <왕소군변문>도 발견된 것으로 보아, 왕소군 이야기는 민중들 사이에서 매우 인기 있는 대중문학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변문이란 운문과 산문을 섞어 낭독하는 통속문학을 말한다.


<왕소군변문> 사본 사진. [출처 : 중국문학의 파노라마(p.59)]

서진시대 갈홍(葛洪)이 편찬한 <서경잡기(西京雜記)>는 왕소군 전설을 가장 최초로 기록한 책이다. 이 책에 의하면, 한나라 원제는 궁녀들의 초상화를 보고 후궁을 뽑았기에 궁녀들은 화공에게 뇌물을 주며 예쁘게 그려달라고 했다. 왕소군은 그러지 않았기에 앙심을 품은 화공은 그녀의 초상을 추하게 그렸다. 그래서 원제가 초상화를 보고 가장 못생긴 궁녀를 골라 흉노에 보낼 때 왕소군이 뽑혔다. 뽑은 후 만나 보니 아름다운 여인이어서 원제는 그녀를 보내기 싫었지만 흉노와의 관계를 고려해서 보낼 수밖에 없었다. 이후 화공들은 사형에 처했다. 이런 유형의 이야기는 표면적으로는 억울하게 희생된 왕소군에 대한 안타까움을 표현한다. 한편 이면적 의도도 보인다. 화공 때문에 미인을 알아보지 못한 황제의 이야기에 빗대어, 인재를 제대로 알아보고 등용하지 못하는 황제의 우매함을 조롱하는 숨은 의도가.

원대의 저명한 극작가 마치원(馬致遠)이 지은 희곡 <한궁추(漢宮秋)>에는 위의 이야기가 더 극적으로 꾸며져 있다. 화공 모연수는 뇌물을 주지 않은 왕소군의 초상을 흉하게 그렸다. 어느 날 산책하던 원제가 왕소군을 만나 사랑을 느낀다. 그러나 아무리 초상화를 찾아봐도 그 여인을 찾을 수가 없다. 황제의 벌이 두려운 모연수는 흉노 땅으로 도망가 선우에게 왕소군의 미모를 사실대로 그린 초상화를 보인다. 왕소군에게 반한 선우는 한나라로 쳐들어가 왕소군을 달라고 하고, 원제는 할 수 없이 보낸다. 그녀는 흉노로 가는 도중 흑하라는 강에 투신자살한다. 이는 사실과 다르다. 왕소군은 자살하지 않았다. 그런데 작가는 왜 시집가서 아들 딸 낳고 살다 세상을 떠난 왕소군을 자살한 것으로 그렸을까? 이 희곡은 대단한 인기를 누렸다. 왜 당시의 사람들은 왜곡된 사연에 감동받았을까? 몽골족이 한족을 지배하던 원나라 때였다. 이 시기 몽골인의 지배에 대한 한인의 민족 감정이 왕소군의 이야기에 반영되었을 것이다.


왕소군의 무덤이라고 알려진 청총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후한말기 채옹(蔡邕)의 작품으로 알려진 <금조(琴操)>에는 왕소군이 자살하는 결말이 더 비극적으로 그려져 있다. 이 작품에 의하면, 왕소군은 남편인 호한야선우가 죽은 후 자신이 낳은 친아들이 생모인 자신과 결혼하려 들었기에 음독자살했다. 다 거짓이다. 왕소군이 재혼한 선우는 전남편의 아들이었지만 왕소군의 친아들이 아니었고, 원래 흉노의 수혼제(Levirate marriage, 일족의 남자가 죽은 자의 아내를 아내로 삼는 것)는 친자식에게는 예외이기 때문이다. 물론 왕소군은 자살하지 않고 젊은 새 선우와 결혼하여 딸 둘을 더 낳았다. 이렇게 한족의 여인 왕소군이 흉노족에 자살로 저항하는 이야기에는 명백히 한족을 도덕적으로 우월하게 보고 이민족을 야만으로 보는 왜곡된 중화주의가 반영되어 있다. 하지만 이 풍습도 알고 보면 다 합리적인 이유가 있다.
흉노에는 “부자형제가 죽으면 그의 처를 취하여 아내로 삼는다.”는 이른바 수혼제가 행해지고 있었다. 이것은 훗날 칭기즈칸 시대의 몽골에서도 보이는데, 가계를 상속받은 자가 선대의 처를 계승함으로써 씨성의 혈통이 유실되는 것을 막으려 함이었다. 그것은 처라고 하는 것은 일정한 대가를 지불하고 그 출신 씨족으로부터 얻은 것이므로 아버지와 형의 처를 얻음으로써 혈족의 단결을 지키고 재산의 유출을 막는다고 하는 씨족기구의 원칙이 관철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흉노(p.125) 사와다 이사오 지음, 아이필드」

왕소군 삶의 변형에 담긴 남성들의 시선

왕소군의 삶은 후대의 시인들에게도 영감을 주었다. 왕소군을 노래한 시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은 이백의 <소군원(昭君怨)>과 동방규의 <왕소군(王昭君)>이다. 이 아래 작품은 당나라 때 시인 동방규(東方叫)의 <왕소군> 제 2수인데, <고문진보(古文眞寶)>에는 이백의 <소군원>으로 나와 있기에 어느 책에는 이백 작품이라 하기도 한다.
소군이 옥안장에 올라타는데                               紹君拂玉鞍
말에 오르자 붉은 뺨에 눈물 흐르네                    上馬啼紅頰
오늘은 한나라의 궁인이지만                               今日漢宮人
내일 아침에는 오랑캐 땅의 첩                             明朝胡地妾
이 시의 내용 역시 사실이 아니다. 왕소군은 오랑캐 군주의 첩이 아니라 왕비인 연지가 되었기 때문이다. 유라시아 초원은 유교의 영향을 받지 않았기에, 여성의 권리가 중국보다 높았다. 연지는 자국 내에서 중국 황후가 갖는 것보다 더 높은 권한을 행사했다. 이 시는 사실을 반영하지 못한 것뿐만 아니라 왕소군의 심정을 제대로 그려낸 것 같지도 않다. 비록 이민족이 사는 낯선 곳으로 시집가는 것이지만 외로운 궁녀로 평생 후궁에 갇혀 살다 죽는 삶에서 벗어나 한 남자의 아내가 되어 가정을 꾸리러 가는 길인데, 그렇게 슬프기만 했을까? 불안하지만 한 젊은 여자로서 기대되고 설레는 마음도 있지 않았을까?
오랑캐 땅에 꽃과 풀이 없으니                           胡地無花草
봄이 와도 봄 같지 않구나                                  春來不似春
저절로 옷 허리띠가 느슨해지니                        自然衣帶緩
허리몸매를 위한 것은 아닐세                            非是爲腰身
위의 시는 우리나라의 정치인이 1980년 ‘서울의 봄’때 ‘춘래불사춘’을 언급하여 더 유명세를 얻은 동방규의 <왕소군> 제 5수이다. 왕소군이 시집갈 때 비파를 타며 즉석에서 지어 슬프게 노래 불러서 하늘을 나는 기러기떼가 떨어졌다는 전설이 있다. 시 전체의 내용은 흉노에 억지로 시집간 왕소군이 고향의 봄을 그리워하며 자신의 처지를 비관, 몸이 여위어 간다는 내용이다. 정말 그녀는 그랬을까? 자원해서 시집갔다는 설도 있는데, 정말 한족 시인의 생각대로 흉노 땅에 적응하지 못하고 떠나온 한나라를 그리워하며 여위어갔을까? 혹시 왕소군은 허리띠 잘 매어 옷자락을 정돈한 후, 넓은 초원을 말 달리며 새로운 인생을 활기차게 살지는 않았을까?


중국 드라마<왕소군> 중 왕소군과 호한야선우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정확한 역사 기록이 없어 사실을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이렇게 왕소군의 삶을 슬프게만 노래하는 시를 보면 당사자인 왕소군이 아니라 시를 짓는 남성들의 입장이 더 보인다. 아름다운 여성을 남의 품에 보냈지만 그녀가 자신을 잊지 않고 그리워해 주기를 바라는, 그녀가 불행하기를 바라는 이상한 심리가 보인다. 전해지는 전설 중에는 흉노에 보내는 여인으로 뽑힌 왕소군의 미모를 보고 반한 원제가 그녀와 3일 밤을 같이 지낸 후에야 시집보냈다는 이야기도 있다. 참으로 황당하다. 이는 남 주기 아까운 여자를 보내기 전에 성욕이나 채워보려는 비열한 행위가 아닌가. 사실도 아닌데 이런 이야기를 만들어 전하고, 또 이를 아름답고 안타까운 사랑이야기로 여기는 사람들의 심리는 도대체 뭘까?


현대에도 이용되는 왕소군

왕소군이 자원했든 억지로 뽑혀갔든, 그녀가 한나라의 안보 정책에 희생된 여인인 것은 확실하다. 현대 중국에서도 그녀는 계속 이용된다. 오늘날 내몽골 수도인 후허하오터(呼和浩特) 시에는 왕소군의 묘가 있다. 원래 이름이 없었는데 두보의 시구를 따서 청총(靑?)이라 부른다. 여기에 고국 한나라와 원제를 그리워하는 변함없는 마음 탓인지 늘 푸른 풀이 돋아 있다는 전설이 또 붙었다. 하지만 이는 왕소군의 진짜 무덤이 아니고 신발 한 짝만을 묻은 의관총(衣冠塚)이다. 내몽골 지역에는 이 무덤을 비롯하여 열 몇 개의 왕소군 묘가 더 전해지고 있지만 후허하오터의 청총이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현재 중국 정부의 북방정책 때문이다. 이 무덤은 현재 중국과 몽골 우호의 상징으로 성대하게 꾸며져 있다.

물론 왕소군이 시집간 이후 한과 흉노는 60여 년간 평화적 관계에 있었다고 하니, 그녀가 평화의 상징이긴 하다. 하지만 그녀의 업적을 지나치게 찬양하고 거짓 기념물까지 성대하게 짓는 데에는 다분히 정치적 의도가 깔려 있다. 중국은 '현재 중국 강역을 중국사의 범위로 삼아야 한다'라는 모택동의 교시에 따라 ‘통일적 다민족 국가론’의 틀에 맞춰 몽골사를 중국사로 바꾸는 역사 편입 작업을 계속해 왔기 때문이다. 몽골 등 한족이 아닌 북방 이민족들의 독립을 막기 위해 추진하는 이런 역사 프로젝트를 ‘북방공정’이라 부른다. 이렇게 왕소군은 이천여 년이 흐른 현재까지도 한족 지배층에게 이용당하고 있다.



왕소군 무덤 앞 비석 사진. ‘호한화친’이라 적혀 있다. [출처: 위키피디아]


우리나라의 왕소군, 의순공주

이렇게 왕소군의 삶이 문학적으로 해석, 변용되고 현실적으로 이용된 모습을 추적해가면 당시 중국인들의 자민족과 타민족을 보는 시각뿐만 아니라 여성의 삶을 보는 일부 남성들의 왜곡된 시각도 엿볼 수 있어 흥미롭다. 그런데 소중화 의식에 젖은 우리나라의 문인들도 유행처럼 <소군원>류의 시를 모방해 지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도 왕소군처럼 왜곡된 전설을 가진 공주가 있다. 바로 의순공주(義順公主)이다. 종실의 여성이었던 그녀는 병자호란 후 효종 때 청나라 섭정왕인 구왕(도르곤)의 요구에 진짜 공주대신 공주로 봉해져서 청나라로 시집갔다. 구왕 사망 후에는 청 황실의 일족에 속하는 남성과 재혼했다. 시집간 지 7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왔으나 오랑캐에게 몸을 더렵혔으며 재혼까지 했다고 죽을 때까지 주위의 멸시를 받으며 살았다. 하지만 전설 속의 의순공주는 오랑캐에게 몸을 더럽히느니 죽는 편이 낫다고 말하며 청나라로 시집가는 길에 강물에 몸을 던졌다고 한다. 지금도 의정부에는 의순공주의 무덤이 남아 있는데, 공주의 시신을 찾지 못해 족두리만 건져서 무덤을 만들었기에 족두리 무덤이라 부른다.

왕소군이든 의순공주든, 이렇게 사실과 다른 전설이 생겨나 사실보다 더 널리 알려진 이유는 뭘까. 자신들의 안전을 위해 타국에 보내는 여성을 지켜주지 못해 상처받은 자존심을 이런 식으로나마 보상받으려는 심리가 있었던 아닐까. 자신들의 재산인 여성을 외국 남성에게 빼앗기기 싫어서 오히려 적반하장으로 여성의 정절을 강요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런 생각이 너무 지나치다면,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로 끌려갔다 돌아온 여인인 ‘환향녀(還鄕女)’를 부르는데서 기원한 욕인 ‘화냥년’을 생각해보자. 돌아온 그녀들은 주위의 시선이 두려워 한양 성 안에 바로 들어오지 못하고 서울 서대문 밖, 지금의 홍제동에 머물렀다. 조정에서는 홍제천 냇물에 몸을 씻게 하는 상징적 의식으로 이혼 위기에 처한 그녀들을 구해주려 했지만 남편들은 받아주지 않았다. 오랑캐에게 몸을 더럽히고서도 자결하지 않고 뻔뻔하게 살아 돌아왔다며 그녀들을 죄인으로 여겼다.

그렇다면 실제는 화냥년으로 손가락질하면서, 전설에서는 절개를 지킨 여성으로 숭상하여 자살시켜 버리고 가짜 무덤을 만들고 제사까지 지내며 그녀를 기리는 것은 결국 나약한 남성들의 소심한 자기 위안 정도가 아니었을까.


오랑캐 땅엔들 화초 없을까

그러나 이 땅의 모든 남성들이 그런 찌질한 의식을 가졌던 것은 아닌 모양인가 보다. 다음과 같은 멋진 시도 전한다.
조선시대의 일이다. 어떤 고을의 향시(鄕試)에 제목이 ‘호지무화초(胡地無花草)’로 내걸렸다. 응시생들은 모두 왕소군의 고사를 들어 장광설을 늘어 놓았다. 막상 장원에 뽑힌 작품은 덩그러니 제목을 네 번 반복해서 쓴 한 서생의 작품이었다.

오랑캐 땅 화초가 없다고 하나                     胡地無花草
오랑캐 땅엔들 화초 없을까?                       胡地無花草
어찌 땅에 화초가 없으랴마는                      胡地無花草
오랑캐 땅이라 화초가 없네.                        胡地無花草

어떤가? 같은 글자의 풀이가 모두 제가끔이다. 한문 해석의 모호성을 말할 때 인용하곤 하는 이야기이다. 위 시는 흔히 김삿갓(金炳淵, 1807 ~ 1863)의 시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한시 미학 산책(p.153) 정민 지음」
그렇다, 오랑캐 땅이라고 어찌 화초가 없을까? 오랑캐 땅이라고 편견을 갖고 보니 화초가 있어도 화초로 보이지 않는 것이다. 왕소군을 비롯, 이민족의 땅으로 시집간 모든 여인들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 또한 마찬가지 편견을 갖고 있지는 않았을까? 그래서 시집간 그녀들이 늘 고국과 고국의 남성을 그리워하며 불행했다고 생각해 버린 것은 아닐까? 오랑캐와 문명인은 누가 어떤 기준으로 구분하는가? 어디든 사람 사는 곳이면 다 마음 두고 화기애애 웃음꽃 피우며 잘 살 수 있지 않은가? 남편될 사람의 사람됨이 문제이지 그 민족이 문제였을까?

“슬프구나! 흙으로 지은 집에 사는 한나라 사람들이여! 자신을 돌아보고 마음대로 말하지 마시오.” 이는 사마천이 쓴 <사기 열전>의 제 50편 <흉노열전>에 실린, 한나라 환관이었다가 흉노에 투항하여 두 세계를 다 겪어본 중행렬이 하는 말이다. 자신들의 안전을 위해 이민족에 보낸 여성들의 삶을 왜곡하고 이용하는, 비뚤어진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에게 딱 해주고 싶은 말이다.


세상의 모든 화냥년들을 보라

왕소군, 이 언니를 보라. 차지하지 못한 아름다운 여인에 대한 남자들의 미련이 이 언니의 삶을 불행한 것으로 그려냈고, 자민족 여성을 이민족에게 빼앗긴 상처받은 자존심이 그녀의 자살 이야기를 지어냈다. 이게 뭔 말인가. 지켜주지는 못할망정 보내놓고, 자신들의 평화를 지켜준 고마운 여인에게 뭔 헛소리인가. 소중한 생명, 누구를 위해 쓸데없이 정절을 지켜 그녀가 자살하기를 바라는가. 그런 삶이 뭐가 아름답고 가치 있다고 여겨 왜곡된 전설에 감동받아 현대인인 우리까지 역사적 사실인양 이야기하는가.

왕소군, 이 언니를 보라. 의순공주를 비롯, 이민족에게 희생양으로 시집간 다른 언니들을 보라. 비난받는 재혼을 한 다른 여성들을 보라. 세상의 모든 화냥년들을 보라. 어쩌면 그녀들은 불리한 현실에 적응하여 새로운 인생을 개척한 씩씩한 언니들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그녀의 치열했던 삶을 겨우 어줍잖은 자기 본위 중화사상이나 정절 따위로 모욕하지 말라. 부디 “자신을 돌아보고 마음대로 말하지 마시오.” 열심히 사는 언니들이 있는 곳, 그곳이 바로 아름다운 화초가 피어나는 곳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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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박신영

한글을 뗀 이후로 책 읽고 글 끄적거린 것 외에는 한 일이 없다. 《소년중앙》과 계몽사 세계 명작 동화 전집, 삼중당 문고와 창비 시선, 문학과 지성사 시선을 통해 세상을 배웠다. 숙명여대 국문과 입학 후 대하 역사소설을 쓰겠다는 커다란 꿈을 품고 사학을 부전공했다. 그러나 신춘문예에 몇 번 떨어진 이후 그동안의 과대망상과 능력 부족을 깨닫고 겸허하게 독자로 돌아가기로 결심, 한동안 조용히 책 읽고 밥벌이를 하며 살았다. 그렇게 혼자 놀다 보니 너무 심심해서 블로그(blog.yes24.com/mkkorean)에 ‘껌정드레스’라는 닉네임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래, 무작정 읽고 쓰다 보면 언젠가는 되겠지’라는 게으른 배짱으로 역사를 공부하며 독서 기록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기록들이 모여 어느새 한 권의 책이 되었다. 그 책이 2013년 1월 출간한 <백마 탄 왕자들은 왜 그렇게 떠돌아다닐까>이다.지금까지 문학, 역사, 인간이라는 세 개의 열쇠로 세상을 여는 역사 에세이를 쓰는 데 주력해 왔다. 앞으로도 익숙한 이야기들에 낯선 질문을 던지는 즐거운 탐험을 계속할 예정이다.

오늘의 책

이 세계가 멸망할지라도, 우리는 함께 할 테니

사랑은 우리를 좀 더 나은 사람이 되도록 만든다. 그래서일까. 최진영 작가의 이번 소설집에는 사랑과 사람을 지키려는 마음으로 가득하다. 전쟁, 빈부격차 등 직면해야 할 현재와 미래를 이야기하면서도 그 속에 남아 있는 희망을 놓치지 않았다. 2024년 올해 꼭 읽어야 할 한국단편소설집 중 하나.

동시대 가장 주목받는 SF 작가 켄 리우의 단편집

『종이 동물원』 작가 켄 로우가 다시 한번 독보적인 13편의 단편소설로 돌아왔다. 다양한 주제와 강렬한 역사의식을 바탕으로 중국의 당나라 시대부터 근미래의 우주까지 시공간을 넘나들며, 기상천외하고 대담한 상상력을 선보인다. 강렬한 표제작 「은랑전」은 할리우드 영화로도 제작될 예정.

고객의 행동을 읽어라!

침대 회사 시몬스를 ‘침대를 빼고도’ 사람들이 열광하는 브랜드로 이끈 김성준 부사장의 전략을 담았다. 고객의 행동을 관찰하고 심리를 유추해 트렌드를 만든 12가지 비밀 코드를 공개한다. 알리지 않아도 저절로 찾아오게 만드는 열광하는 브랜드의 비밀을 만나보자.

우리의 세계를 만든 유목민들의 역사

세계사에서 유목민은 야만인 혹은 미개한 종족으로 그려져 왔으며 역사 속에서 배제되어 왔다. 이 책은 정착민 중심의 세계사에 가려져왔던 절반의 인류사를 들여다본다. 대륙을 방랑하며, 자연의 흐름에 따라 살며, 문명과 문명 사이 연결고리가 된 유목민들의 삶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울림을 준다.


문화지원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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