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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미실, 이 언니의 사랑과 욕망을 보라.

미실, 과연 그녀는 어떤 기준에서 악녀이고 음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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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은 무려 400 명이 넘는다. 그런데 남성 풍월주 32명의 전기 형식으로 구성된 전체에 책서 가장 많이 등장하며 관계의 중심에 있는 이름은 뜻밖에 유명 화랑이 아니라 한 여성의 이름이다. 또한 그 이름은 <화랑세기> 전체를 통틀어 가장 매력적인 인물의 이름이기도 하면서 우리에게 가장 큰 충격을 주는 인물의 이름이기도 하다.

역사에 관심이 많다고 내 소개를 하면 자신 역시 그렇다면서 반가워하시는 분들이 있다. 공통 관심사를 가진 분을 만나 이야기 나누는 것은 즐겁다. 그런데 역사 이야기라고 하면서 역사 속 유명 인물들의 연애담이나 성적 에피소드를 나열하시거나 내게 물어 보시는 분들도 꽤 많다. 보통은 실재와 다른 부분이나 과장, 왜곡된 부분을 알려주는 정도에서 대화를 이어가곤 하지만 어떨 때에는 듣기 불편할 때도 있다. 여성이나 동성애자들의 경우만을 희화화해서 이야기하는 경우이다. 아니, 전쟁하고 서로 죽이는 것이 문제지, 열심히 사랑하며 자신의 시대를 산 것이 뭐가 문제란 말인가? 선덕여왕이나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이 생물학적으로 처녀 여왕이든 아니든 도대체 뭔 상관인가? 이럴 경우, 나는 살짝 사악하게 웃으면서 이렇게 말하고 싶어진다. “정말 쎈 언니 한 분 소개해 드릴까요?”

<화랑세기(花郞世紀)>라는 책이 있다. 1989년 발췌본이, 1995년 필사본(연구자들은 이 책을 모본(母本)이라 부른다)이 발견되어 세상에 나오기 전까지 이 책은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김대문의 저서라고 언급만 되어 있을 뿐 현재까지 전해지지는 않는 책이었다. 그래서 1400여년이 지나 등장한 <화랑세기>는 세상에 나오자마자 진위논쟁에 휘말린다. 발견된 <화랑세기>를 위작이라 주장하는 쪽의 학자들은 이 작품을 필사자인 박창화 선생의 한문 창작 소설로 본다. 다른 쪽의 연구자들은 박창화 선생이 직접 원본을 보고 필사했다고 주장한다. 박선생은 해방 직전 일본 궁내성의 도서료에 근무했기 때문이다. 이는 쉽게 결론이 날 논쟁이 아니다. 결정적인 관련 유물이나 유적이 새로 발굴되거나, 일본 궁내성에 있을지도 모를 원본이 등장해야만 끝날 논쟁이다.

여하튼, 681~687년 경 신라 귀족 김대문에 의해 저술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화랑세기>는 문노와 김유신, 김춘추 등 신라 화랑의 우두머리인 풍월주 32명의 족보인 세계(世系)를 다루고 있다. 정식 혼인관계와 정식 출생자들의 족보뿐만이 아니다. 책은 풍월주를 비롯한 화랑들이 속한 지배계층들을 설명하기 위한 모든 관계, 즉 왕과 왕비, 후궁들, 화랑의 아내들과 연인들 사이에서 맺어지는 정식 혼인관계와 비공식 사통((私通) 관계의 이야기를, 그리고 남녀뿐만 아니라 남남과 근친 사이에서도 벌어지는 온갖 성관계와 출생 이야기를 세세히 담고 있다. 그렇기에 이런 충격적인 신라인의 성 풍속 내용 자체가 위작이라는 한 근거가 되기도 한다.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은 무려 400 명이 넘는다. 그런데 남성 풍월주 32명의 전기 형식으로 구성된 전체에 책서 가장 많이 등장하며 관계의 중심에 있는 이름은 뜻밖에 유명 화랑이 아니라 한 여성의 이름이다. 또한 그 이름은 <화랑세기> 전체를 통틀어 가장 매력적인 인물의 이름이기도 하면서 우리에게 가장 큰 충격을 주는 인물의 이름이기도 하다. 그 이름은 미실(美室), 아름다운 집.

미실은 풍월주가 아니었기에 정식으로 <화랑세기>의 전기에 자신의 이름을 달고 등장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화랑세기> 전 편에 걸쳐 다른 풍월주들의 전기에 계속 등장하고 있다. 1세 풍월주 위화랑의 증손녀인 미실은 10세 풍월주인 미생의 누나였다. 5세 풍월주인 사다함과 7세 풍월주인 설화랑(혹은 설원랑)은 그녀의 연인이었으며 6세 풍월주 세종은 그녀의 남편이었다. 11세 풍월주인 하종은 미실과 남편 세종 사이에 태어난 그녀의 아들이었고, 16세 풍월주 보종은 미실과 연인 설화랑 사이에 태어난 그녀의 아들이었다. 15세 풍월주 김유신과 18세 풍월주 김춘추는 각각 미실의 손녀 사위였다. 또 미실은 8세 풍월주 문노, 12세 풍월주 보리공과 정치적으로 대립한 것으로도 <화랑세기>에 기록되어 있다. 자, 이쯤 되면 궁금해진다. 과연 이 언니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출처: MBC]


미실은 <화랑세기>에만 등장하는 인물이다. <화랑세기>에 의하면, 당시 신라에는 남자로 계승되는 성골 진골 등의 골품 외에 여자에서 여자로 이어지는 인통(姻統)이란 것이 있었다. 인통에 속한 여자들은 신라 왕실 남성들의 결혼 상대가 되거나 색공(色供), 즉 정식 혼인 외 성적 쾌락의 상대가 되어 지위를 획득했다. 446~550년경에 대원신통의 일원으로 태어난 미실은 외할머니 옥진의 지도 아래 진골정통에 맞서 가문을 일으켜야할 자신의 역할을 잘 알고 있었다. 옥진과 미실에게 성행위란 곧 ‘도’였다.

옥진이 “이 아이는 우리의 도를 일으킬 만하다”말하고 좌우에서 떠나지 못하게 하며 교태를 부리는 방법과 가무를 가르쳤다. 태후의 명으로 세종의 궁으로 들어가려 할 때 옥진이 근심하여 말하기를 “내가 너를 가르친 것은 장차 너의 숙모의 잉첩이 되게 하려는 것이지 어찌 전군을 섬기라고 한 것이겠느냐?” 하였다. 미실이 “빈첩의 도는 색공에 있는데 어찌 진흥제 를 받들지 못하겠습니까?”하였다. 옥진은 크게 기뻐하여 등을 어루만지며 말하기를 “이 아이는 족히 도를 말하니 나는 근심이 없다”하였다.
-이종욱 역주 <화랑세기> 122쪽

진흥왕의 동생인 세종 전군에게 색공을 바친 미실은 시어머니인 지소태후의 미움을 사서 궁 밖으로 쫓겨 나간다. 이때 화랑 사다함을 만나 색공이 아닌 진정한 사랑을 하게 된다. 세종은 미실을 못 잊어 다시 궁으로 부른다. 이에 미실은 후궁이 아닌 정비(正妃)의 자리를 요구한다. 사랑에 눈먼 세종은 정비를 버리고 미실의 요구를 들어주지만 미실은 진흥왕의 후궁이 되자 불편한 관계가 된 남편 세종을 변방으로 보내 버린다. 이후 미실은 진흥왕, 진지왕, 진평왕 3대에 걸쳐 색공을 하는 후궁으로서 30여 년간 신라 왕실의 권력을 장악하게 된다. 미실은 이모이자 진흥왕의 정비인 사도왕후와 손잡고 진지왕 폐위와 진평왕 옹립을 주도하며 자신이 왕비에 즉위하려 했지만 여론이 좋지 않아 실패한다. 그 사이 왕 외에 화랑 등 다른 남자들과도 자유로운 성생활을 즐기며 4남 4녀를 낳았다.

미실이 30년간 늘 탄탄대로로 권력을 행사한 것만은 아니다. 미실은 진흥왕의 장자인 동륜 태자의 죽음과 관련한 성적 스캔들에 휘말려 궁을 나오게 되기도 한다. 하지만 곧 다시 왕의 총애와 예전의 권력을 회복한다. 친동생 미생과도 관계한 점 등 당시 기준으로도 지나치게 방탕했던 점 때문에 공격을 받자 화랑 조직을 개편하여 자신이 화랑들의 우두머리인 원화가 되기도 한다. 이렇게 위기를 타개해가는 과정을 보면 그녀가 단순히 미모와 성적 능력만으로 성공한 여자는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왕이 업무를 볼 때 미실이 문서를 보며 옆에서 모셨다는 점과 그 어려운 향찰로 향가까지 지었다는 점, 죽기 전에 수기 700권을 남겼다는 점으로 볼 때 그녀는 지성과 미모를 겸비한 존재였음을 짐작해볼 수 있다.

진흥제가 사도왕후에게 말하기를 “너의 조카는 하늘 높은 줄 모르는 미녀인데 어찌 너의 잉첩이 되지 못하고 다른 데로 시집갔는가?”하였다. 사도왕후는 이에 미실을 3대(부ㆍ자ㆍ손)을 모시는 자리로 진흥제에게 추천하였다. (중략) 전주(미실)는 문장을 잘 지었다. 진흥제가 조정에 나아가 업무를 볼 때 전주가 옆에서 모셨다. 문서를 보고 참견하여 그것이 옳은지를 (다루었기에) 조야의 권세가 옥진궁으로 돌아갔다. 대원신통이 다시 성하게 일어났다.
-이종욱 역주 <화랑세기> 123쪽

이정도로 당시 신라에서 미실이 큰 권력을 행사했다면 미실은 고대 삼국역사에 매우 중요하게 기록되어야 한다. 그러나 미실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미실과 관계있는 다른 인물들은 위의 세 문헌에 모두 등장하는 반면, 미실은 오로지 <화랑세기>에만 등장할 뿐이다. 그 이유가 뭘까? 이런 미실의 존재가 바로 <화랑세기>가 위작이며 소설이라는 증거가 될까? 혹시 당대의 신라인 김대문이 신라 당시에 기록한 문헌에는 미실이 등장하지만 후대에 고려인 김부식과 일연이 기록한 문헌에는 등장하지 않는 점에 숨은 답이 있지 않을까? 즉 미실이란 존재는 후대의 유교적 도덕률로는 재단할 수 없는, 특수한 성윤리와 풍습을 가졌던 당시 신라 사회의 맥락에서만 이름이 남겨지는 특별한 존재가 아니었을까?

[출처: 국립경주박물관]


서양이건 동양이건 크리스트교와 유교의 승리 이전 고대사를 보면 성 풍습이 지금과 매우 달랐다. 우리나라의 경우 고대 삼국 중에서도 특히 신라가 그랬음을 알 수 있다. 그 증거로 1974년, 신라 13대왕 미추왕릉 지구에서 발굴되어 1978년에 국보 제195호로 지정된 ‘토우 장식 장경호'에 부착된 토우의 예를 들 수 있다. 이 흙항아리에는 후배위로 성교하는 남녀 한 쌍의 토우가 부착되어 있는데 이를 왕릉의 부장품으로 넣었다는 데에서 신라인의 성의식과 생활을 엿볼 수 있다. 이 외에도 박물관에 가 보면 남녀의 성기를 과장하거나 성행위의 체위를 표현한 신라의 토우가 얼마든지 더 있다. 또 문헌 자료도 있다. 유학자 김부식이 저술한 <삼국사기>에 옥문곡에 숨은 백제 군사를 소탕하는 고사가 등장하는데, 이야기 속 선덕여왕은 남자 중신들 앞에서 스스럼없이 성교와 남녀의 성기를 언급하고 있으며 그 분위기는 매우 자연스럽다. 이런 예를 보아 당시 신라인의 성 풍속은 지금과 매우 달랐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므로 지금의 윤리도덕의 잣대를 가지고 <화랑세기>와 미실을 재단하려 들면 안 된다. 아무리 낯 뜨거워도 이 역시 우리의 역사이고 아무리 충격적이어도 미실 역시 우리의 선조이다.

물론 <화랑세기>가 위작이어서 우리의 미실이 박창화 선생의 창작 속 인물이라면 이런 고민을 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미실이 허구의 인물이라 할지라도 <화랑세기> 속 고대 신라 여성 미실의 이야기를 읽는 현대인인 우리는 그녀의 거침없는 삶과 욕망 추구에 어느 정도 문화 충격을 받게 되기 마련이다. 그녀에겐 충격적인 성적 에피소드가 얼마든지 있다. 남편이 있는 몸으로 스스로 이모의 남자인 진흥왕의 후궁이 되는 것, 진흥ㆍ진지ㆍ진평 등 3대에 걸쳐 왕의 후궁이 되는 것, 30대에 10대인 진평왕을 몸으로 성교육 시키는 것, 자신의 딸과 동시에 한 왕인 진평왕에게 색공하여 각각 딸을 낳는 것, 진흥왕이 병에 걸려 성불능이 되자 이모 사도왕후를 위로하기 위해 남편 세종을 사도왕후와 동침하게 권하는 것, 친동생 미생과 관계 갖는 것… 등등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미실, 그녀의 삶에서 불편함을 느끼는 이유는 이런 말초적인 성 관계 에피소드보다 다른 곳에 있다고 난 생각한다. 도덕적인 면이 비난받아 마땅하다면 미실의 상대 남자들도 같이 받아야 한다. 즉 제수씨이자 처조카를 후궁으로 삼은 진흥왕도, 미실 모녀와 동시에 동침한 진평왕도 같이 받아야 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대개 권력자 남성의 성생활은 비난받지 않는다. 그러므로 문제는 도덕이나 문란한 성에 대한 것이 아니다. 또 당시 신라에는 임신한 처(妻)를 상관에게 바쳐 이득을 꾀하는 마복자(磨腹子) 제도라든가 남성의 성 상대인 용양신(龍陽臣) 제도 등 남성과 관련되어 현재의 우리로서는 도저히 이해 못할 성 풍습도 많았다. 사회 자체가 그랬기에 미실 만을 비난할 수는 없다. 그리고 역사를 살펴보면, 미실 정도의 성편력을 행한 여성은 얼마든지 더 있다. 색과 성을 무기로 권력자 남성 옆에서 방자하게 굴거나 친정 세력을 동원하여 권력을 행사한 여성의 예도 많다. 그런데 왜 우리는 유독 미실의 경우만 더 불편한 것일까? 왜 <화랑세기>를 위작으로 보고 싶을 정도로 책 전체에 걸쳐 미실이란 존재가 가장 걸리는 것일까?

설원은 양위를 하고 미실을 따라 영흥사로 갔다. (중략) 그때 미실궁주가 이상한 병에 걸려 여러 달 동안 일어나지 못하였다. 공이 밤낮으로 옆에서 모셨다. 미실의 병을 자신이 대신하겠다고 밤에는 반드시 기도하였다. 마침내 그 병을 대신하였다. 미실이 일어나서 슬퍼하여 자신의 속옷을 함께 넣어 장사를 지내며, “나도 또한 오래지 않아 그대를 따라 하늘에 갈 것이다”하였다. 그 때 나이가 58세였다.
-이종욱 역주 <화랑세기> 89쪽

미실은 나이 들자 색공과 정치일선에서 은퇴하고 영흥사에 거주한다. 애인 설원랑(설화랑)이 그녀를 따라 온다. 미실이 병에 걸리자 설원랑은 지극한 사랑으로 그녀를 간호하다 먼저 죽는다. 미실 역시 58세의 나이로 설원랑의 뒤를 따른다. 이것이 <화랑세기>에 서술된 미실의 최후이다. 어떤가? 미실의 성 편력 부분보다 이 부분이 더 납득하기 어렵지 않은가?

미모와 성적 매력으로 권력자를 사로잡아 베갯머리 송사로 권력을 휘두른 여성으로는 장희빈이나 정난정도 있다. 높은 신분 출신으로 상대 남자들을 가리지 않고 친척 관계의 남성들과도 성을 즐긴 여자로는 어우동도 있다. 미모로 높은 지위과 권력을 누린 외국 여성들을 찾아보면 양귀비나 앤 불린도 있다. 이들과 미실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앞서의 언니들은 모두 비극적으로 죽었다. 심지어 장희빈과 앤 불린은 믿고 사랑하던 남편인 왕에 의해 처형당했다. 하지만 미실은 끝까지 사랑받다가 자연사했다. 사람들이 미실의 삶을 볼 때 가장 불편한 점이 바로 이 점이 아닐까? 희대의 악녀이자 음녀인데, 권선징악의 규칙이 적용되지 않고 누릴 것 다 누리고 받을 사랑 다 받고 살다가 해피엔딩으로 역사서에 기록된 점. 미실, 그녀의 삶을 읽는 후대의 우리들은 그녀의 방탕과 권력욕보다 그렇게 살던 그녀가 아무 천벌도 받지 않았다는 사실이 더 놀랍고 불편한 것 아닐까? 그래서 미실을 등장시킨 현대 드라마 <선덕 여왕>에서는 미실을 자살로 처리한 것이 아닐까? 그녀의 해피엔딩, 우리가 받아들이기엔 너무도 불편했기에.

<화랑세기>의 진위를 떠나 이미 미실은 소설로 드라마로 생명력을 얻은 대중적 캐릭터가 되었다. 그런 점에서 미실, 그녀의 존재와 삶이 우리에게 불편한 이유를 따져 보는 것은 꽤 의미있는 작업이다. 미실, 과연 그녀는 어떤 기준에서 악녀이고 음녀인가? 그 기준은 누가 정하는 건가? 사람들은 왜 마음껏 성과 욕망을 추구한 여성은 악녀이므로 반드시 파멸해야 한다고 자연스럽게 생각하는 것일까? 사람들은 왜 미실 시대의 성도덕이 현대와 달라 불편함을 느낀다고 그 시대의 기록물이 위조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왜 민족의 역사는 항상 현대 후손의 시각에서 바람직하고 이로운 것만 정사(正史)로 채택되어야만 하는 것일까? <화랑세기> 속에 그려진 우리의 고대 신라사와 미실이 우리에게 불편한 이유, 바로 거기에 민족사와 여성을 보는 우리의 편견이 존재한다. 그리고 여자인 우리의 세상의 시선에 대한 두려움 역시 존재한다.

내가 <화랑세기>에 대해 처음 들었던 때는 1989년, 고교 고전문학 시간이었다. <화랑세기> 발견 소식을 신문에서 읽으신 선생님께서 그 책에 대해 이야기해 주셨다. 나는 수업진도 안 나가는 것만 좋아서 신문이 말하는 놀랄만한 성 풍습에 대해 조심스럽게 말씀해주시는 선생님의 이야기를 건성으로 들었다. 아마 당시의 나는 <테스>의 비극이 순결을 잃은 탓이라고만 생각하던 여고생이었던가. 대학에 들어가고 1995년, 부산에서 모본이 발견되었다. 진위 논쟁이 이따금 신문에 실리는 것을 읽었다. 1999년, 이덕일 이희근 공저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 2> 에 화랑세기 위작 논쟁이 소개된 것을 읽고 흥미를 느껴 그 책에 몇 달 앞서 발간된 이종욱 역주 <화랑세기>를 찾아 읽었다. 난 미실이란 언니에게 단박에 매혹당했다. 이어 2003년 <이덕일의 여인 열전> 속의 미실과 2005년 김별아의 소설 <미실> 속 미실을 만났다. 2009년에는 드라마 속의 미실을 만났다. 미실은 이런 과정으로 1400년 전의 <화랑세기>에서 걸어 나와 현대 여성인 나와 만났다. 나는 왠지 지금까지 나의 성인 여성으로서의 삶을 이 언니와 같이 걸은 느낌을 갖는다. 아, 미실과 그녀의 삶이 비난받는 것을 보며 나는 무슨 생각을 했던가. 혼자 상처받기 일쑤였던 나에게 미실은 어떤 말을 해 주었던가.

여자는 언제 여자가 되는가. 미실이 묻는다. 나는 머뭇거린다. 내 답을 기다리지 않고 미실은 말한다. 여자의 생식기를 갖고 태어난 그 순간부터 여자인 것은 아니다. 자신이 사람을 받아들일 수도 내보낼 수도 있는 열린 몸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여자는 여자가 된다. 그러니 여자인 자신의 몸을 인정하고 사랑할 것. 그 과정에서 남의 시선과 징죄를 지레 상상하고 겁먹지 말 것. 세상은 나쁜 여자가 받을 벌을 말하지만 그런 것은 없다. 끝까지 자신을 잃지 말고 너가 갈 길을 가서 원하는 것을 얻으라. 미실, 그녀가 계속 말한다. 자신의 욕망을 추구하는 여자가 파멸한다는 것은 역사의 루머일 뿐이다. 언제까지나 첫 생리혈을 본 어리버리한 소녀의 두려움으로 세상의 시선을 겁내며 움추려 살 수는 없다. 그러니 눈을 크게 뜨고 나 미실, 이 언니를 보라. 너의 사랑과 욕망을 보라.

 

 

*편집자 주 : 한국의 시오노 나나미를 꿈꾸는 '박신영의 이 언니를 보라'가 매월 첫번째, 세번째 월요일에 독자 님을 찾아갈 예정입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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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박신영

한글을 뗀 이후로 책 읽고 글 끄적거린 것 외에는 한 일이 없다. 《소년중앙》과 계몽사 세계 명작 동화 전집, 삼중당 문고와 창비 시선, 문학과 지성사 시선을 통해 세상을 배웠다. 숙명여대 국문과 입학 후 대하 역사소설을 쓰겠다는 커다란 꿈을 품고 사학을 부전공했다. 그러나 신춘문예에 몇 번 떨어진 이후 그동안의 과대망상과 능력 부족을 깨닫고 겸허하게 독자로 돌아가기로 결심, 한동안 조용히 책 읽고 밥벌이를 하며 살았다. 그렇게 혼자 놀다 보니 너무 심심해서 블로그(blog.yes24.com/mkkorean)에 ‘껌정드레스’라는 닉네임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래, 무작정 읽고 쓰다 보면 언젠가는 되겠지’라는 게으른 배짱으로 역사를 공부하며 독서 기록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기록들이 모여 어느새 한 권의 책이 되었다. 그 책이 2013년 1월 출간한 <백마 탄 왕자들은 왜 그렇게 떠돌아다닐까>이다.지금까지 문학, 역사, 인간이라는 세 개의 열쇠로 세상을 여는 역사 에세이를 쓰는 데 주력해 왔다. 앞으로도 익숙한 이야기들에 낯선 질문을 던지는 즐거운 탐험을 계속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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