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경제가 버블의 극에 달했던 1980년대 말, 세계의 미술시장이 들썩였다. 막대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엄청난 물량의 미술품을, 엄청나게 비싼 가격으로 사들였기 때문이다. 1987년부터 1990년까지 일본이 사들인 해외 미술품 수는 당시 전 세계에서 거래된 미술품의 절반 이상이었다. 그 기간 동안 매입가는 계속해서 사상 최고가를 갈아 치웠고, 일본 미술 시장의 거래 총액은 1987년 2000억엔에서 절정기인 1990년에 1조 5000억엔으로 뛰었다. 그럴 수도 있다. 막대한 돈으로 미술품을 사들여 제대로 대중에게 공개한다면 큰 문제는 없다. 하지만 일본은 그러지 않았다. 당시 막대한 돈으로 사들인 미술품의 상당수는 버블의 붕괴와 함께 은행에 담보로 넘어가는 신세가 되었다. 은행은 담보물인 미술품을 전시하는 대신 창고에 쌓아뒀다. 그들에게 미술품은 인류의 소중한 문화예술이 아니라 단지 자산일 뿐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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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셰 박사의 초상(빈센트 반 고흐 作) [출처: 위키피디아] |
모치즈키 료코의
『대회화전』 은 그런 비상식적인 상황을 배경으로 깔고 전개된다. 책 표지에 그려진 그림은 고흐의 <가셰 박사의 초상>이다. <가셰 박사의 초상>은 뉴욕 크리스티 경매장에서 당시 미술 경매 사상 최고가인 8250만 달러에 제지 회사 명예회장인 사이토 료헤이에게 팔렸다. 사이토가 사망한 후, 비공개로 매각된 그림은 지금도 대중에게 공개되지 않은 상태다.
『대회화전』 은 그러한 사실에 픽션을 가미하여, ‘루비’란 가상의 경매장에서 <가셰 박사의 초상>이 일본의 화상에게 1억 2000만 달러에 팔린 것으로 시작된다.
<가셰 박사의 초상>과 아무 상관도 없는 남녀가 있다. 시골 유지의 장남인 소스케는 시부야에서 호기롭게 디자인 사무실을 시작하지만 애초에 그럴 그릇이 되지 못했다. 남의 눈에 보이는 것만을 중시하고, 돈이 생기면 일단 즐기고 보는 소스케는 결국 소비자금융에서 돈을 빌리는 지경까지 이른다. 긴자의 호스티스였던 아카네는 사장에게 진 막대한 빚 때문에 야반도주했다. 악착같이 돈을 모아 도쿄에서 작은 스낵을 열었지만 여전히 도망치는 신분이라는 것을 자각하고 있다. 소스케와 아카네에게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며 유혹의 손길이 다가오고, 결국은 더 많은 빚만 남게 된다. 궁지에 몰린 소스케와 아카네에게 다시 구원의 손길이 접근한다. 은행 창고에 잠자고 있는 <가셰 박사의 초상>을 함께 훔치자는 것이다. 컨테이너에 잠들어 있는 200억엔 어치의 다른 그림들과 함께.
간단하게 줄거리를 요약했지만
『대회화전』 은 이런 내용만으로는 어떤 소설인지 짐작하기가 힘들다.
『대회화전』 은 영화로 치면 <오션스 일레븐> 같은 케이퍼 무비(범죄자들이 모여 무엇인가를 강탈하는 과정을 그린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소스케와 아카네에게 시로타라는 남자가 나타나고, 함께 은행 창고를 털기 위한 계획을 세워 실행하는 이야기니까. 하지만
『대회화전』 은 단지 훔치는 과정의 치밀함과 반전만으로 멈추지 않는다. 소스케와 아카네는 어쩔 수 없이 말려든 사람이다. 모치즈키 료코는 그들의 인생, 그들의 생각도 섬세하게 보여준다. 오랜 동안 남자들 곁에서 살아온 아카네를 통해 이런 대사들도 곁들이면서.
남자란 자신이 인기 없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것을 굉장히 슬퍼하는 생물이었다. 달콤하게 말을 걸어 주면 기뻐하며 돈을 내놓는다.
『대회화전』 에는 많은 사람이 등장한다. 버블 시대에 미술품을 사들이면서 엄청난 이득을 올린 ‘경제 야쿠자’도 있고, 그들과 엮이면서 어쩔 수 없이 부정행위에 가담하게 된 사람도 있고, 아슬아슬하게 선을 지키면서 거액의 미술품을 사들여 유명해진 화상도 있고,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지만 여전히 배를 곯으며 세상을 원망하는 화가도 있다. 혹은 사랑하는 여자가 <가셰 박사의 초상>을 사달라고 했지만 경매에서 놓치고, 십 년이 넘게 그림을 손에 넣기 위해 애를 쓰는 외국인도 있다. 역사로 들어가면 2차 대전 당시 <가셰 박사의 초상>이 나치에게 압수되면서 복잡해진 소유권을 주장하는 사람들과 미술관도 있다. 그들 모두가
『대회화전』 의 ‘미술품 강탈 사건’에 직간접적으로 얽혀 있고, 모치즈키 료코는 그들의 사정 모두를 비교적 상세하게 설명해준다.
일단 이해관계가 성립되면 서로 도울 수밖에 없었다.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물려 하나의 톱니바퀴가 되고 나면 그 안에 있는 인간은 톱니바퀴에서 손을 뗄 수가 없는 법이었다.
『대회화전』 은 서로 접점이 없는 것 같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세세하게 보여주다가, 그들이 만나 뭉치는 순간 빠르게 달려간다. ‘케이퍼 무비’의 즐거움이 그렇듯,
『대회화전』 의 미술품을 훔치는 과정의 드라마틱한 상황과 반전은 흥미진진하다. ‘강탈’의 과정을 즐기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럽다. 그리고 모든 상황이 완료되면
『대회화전』 이 왜 그리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장황하게 설명해주었는지 알게 된다.
‘기획한 사람과 이득을 얻는 사람과 실행하는 사람 사이에 접점이 없어야 했’기 때문이다. 아무런 접점이 없는 사람들이 하나의 사건에 얽혀 있기 때문에, 그들 모두의 사정을 일일이 보여준 것이다. 그들이 이 사건에 어떻게 들어오고,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드러내기 위해.
기발한 미술품 강탈의 과정을 보여주는 것과 함께
『대회화전』 은 ‘미술’에 대한 애정을 강하게 보여준다. <가셰 박사의 초상>을 훔친 주범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온다.
‘저는 그림에 대한 자신의 의무를 다하고 싶었습니다. 우리들이 이 세계에 입힌 상처를 지우고 싶었습니다.’ 개인적인 복수도 있었지만, 모든 사건의 핵심에는 결국 ‘미술'이 있었다. 이 소설의 제목이 ’대회화전‘인 이유도 그것이다. 미술품은 대중에게 보여져야 하고, 그 작품을 그린 화가의 열정과 바램에 공감해야 한다. 그림을 돈으로 사고, 창고에 처박아두고, 자기들끼리 주고받는 행위가 대체 어떤 의미가 있는가.
거장이라 불리는 사람들의 그림이 사람들에게 감명을 주는 것은 사실은 그림의 완성도 때문이 아니라 시대를 그림 속에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인 겁니다. 그림 속에는 언어라는 비문화적인 필터를 거치지 않은, 시대의 어느 순간의 진실이 담겨 있습니다. 화가는 시대를 남기는 일에 생명을 전부 불태우기 때문에 슬픈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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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회화전 모치즈키 료코 저/엄정윤 역 | 황금가지
방만한 경영으로 어렵게 디자인 사무실을 운영하는 소스케와 긴자의 호스티스 출신으로 빚 때문에 야반도주를 하여 작은 가게를 차린 아카네. 두 사람은 거액을 벌 수 있는 주식 사기에 동참할 것을 제안받고 돈을 빌리면서까지 투자를 감행한다. 그러나 그것은 사기였다! 이에 전직 은행원이었던 시로타가 가세하여 은행 창고에 잠자고 있는 고흐의 「가셰 박사의 초상」을 훔치자고 제안한다. 그러나 문제의 그림은 다른 명화들과 함께 보관되어 있어 찾아내기 불가능한 상황. 세 사람은 명화들이 보관된 두 컨테이너, 총 2000억 엔어치의 그림을 훔쳐낸다는 무모하고 대담한 계획을 세우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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