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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를 위해 공주가 아닌 여전사가 된 여자

토스카나의 마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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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스카나의 마틸다, 이 언니를 보라. 교황과 황제의 권력 다툼이 정점에 달했던 11세기, 두 세력권 사이에 낀 북 이탈리아 토스카나에 태어나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원치 않았으나 운명적 싸움에 휘말린 여자. 그러나 운명의 중심이 되어 스스로 싸워나간 여자. 이 언니의 삶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 할까?

이번 이야기는 한 장의 그림에서 출발한다. 아래 그림을 보자. 한 눈에 보기에도 중세 유럽 스타일로 보이는 이 그림. 중고교 세계사 교과서에도 실려 있어서 눈에 많이 익었을 것이다. 그렇다, 이 그림은 중세 유럽사의 ‘카노사의 굴욕’이란 항목에 참고자료로 자주 실리는 그림이다.


‘카노사의 굴욕’에 등장하는 교황이 교황이 아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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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노사의 굴욕 장면. 도니초의 <Vita Mathildis>에서. [출처: 위키피디아]

이 그림에는 세 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왼쪽 아래 무릎 꿇고 용서를 빌고 있는 남자는 하인리히 4세 황제다. 왕관을 쓰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알 수 있다. 왼쪽 위, 편안한 의자에 앉아 중재의 손짓을 보여주는 인물은 클뤼니 수도원 원장인 후고다. 수도사 복장과 지팡이를 통해 그가 종교계 인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성 안에 있는 인물은 누구일까? 황제가 자신을 파문한 교황이 머무르고 있는 카노사 성에 가서 3일 동안 빌어 간신히 용서받았다는 역사대로라면 그는 그레고리우스 7세여야 한다. 그런데 다시 보자. 성 안의 고귀한 인물은 여자의 두건을 쓰고 있다. 교황이겠지 생각하며 대충 보고 지나갔던 이 인물은 교황이 아니었다. 이 인물이 교황이라고 잘못 표기한 책도 많다. 이 인물은 누구일까? 이 언니가 바로 이번 이야기의 주인공인 토스카나의 여백작 마틸다(Matilde, la Gran Contessa della Tuscany)다.

마틸다는 11세기 중반 북부 이탈리아 지역의 영주인 토스카나 후작 보니파체의 딸로 태어났다. 북 로렌 공작의 딸인 어머니 베아트리체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 3세와 이종사촌간이었다. 부부 사이에는 마틸다 외에 프레데릭과 베아트리체라는 아들과 딸이 더 있었다. 마틸다가 언제 어디서 태어났는지, 몇 번째 아이인지에 관해서는 자료마다 의견이 다르다. 확실한 것은, 보니파체 후작과 베아트리체 사이에 태어난 자녀 중에서 마틸다만 살아 남아 부모의 영지와 지위를 계승했다는 사실이다.

아직 마틸다가 어린 아이였을 때, 야심을 품고 정복 사업에 나선 아버지 보니파체 후작이 암살당한다. 어머니 베아트리체는 광대한 영지를 탐내는 영주들로부터 가족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친정 아버지 쪽 친척인 남 로렌 공작 고드프리 3세와 재혼한다. 마틸다도 고드프리 3세와 전처 사이에 태어난 아들인 고드프리 4세와 약혼했다는 설도 있다. 여하튼, 후에 마틸다도 그와 정략결혼하게 된다. 베아트리체과 고드프리 3세의 결합은 광대한 두 영지의 결합이었기에 황제 하인리히 3세는 분노한다. 게다가 이탈리아 국왕 자리를 노리는 고드프리 3세는 황제에 대해 반란을 일으켜 황제의 독일 영토를 잠식하고 북 이탈리아를 장악했다. 이를 벌하고자 1055년, 하인리히 3세는 알프스 산맥을 넘어 대군을 이끌고 이탈리아로 남하한다. 고드프리 3세는 자신의 고향인 로렌으로 도망쳐 버렸다. 그러나 원래 토스카나 지역이 근거지인 베아트리체와 아이들은 영지를 버리고 도망갈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베아트리체는 남편 대신 용서를 빌기 위해 하인리히가 궁정을 연 피렌체에 죄인의 복장을 하고 찾아간다.

베아트리체는 맏딸 마틸다를 데리고 피렌체에 머물고 있는 황제 하인리히 3세에게 알현을 신청했다. 마틸다는 아직 열 살밖에 안 된 소녀였지만 그 날의 치욕을 평생 잊지 못했다. 어머니는 백작 부인의 화려한 의상을 버리고 죄인이 입는 누추한 베옷을 몸에 걸친 채 황제의 어전에 엎드려서 남편의 악업을 사죄했다. 그녀는 부당하게 확대한 영지의 반환을 맹세하며 옛 영토의 보전을 애원했다. 그러나 황제는 냉담하게 그 호소를 물리치며 모녀를 그 자리에서 체포해서 독일로 연행하라고 명령했다. 포로가 되어 끌려가는 여정을 더욱 고달프게 하려는지 슬픈 소식이 뒤쫓아 전해졌다. 카노사 성에 남겨 두고 온 아들과 둘째 딸이 급사했다는 것이다. 사인이나 사정은 알 수 없었지만 두 사람은 황제의 명령으로 살해당한 것이 틀림없다고 확신했고, 눈물을 삼키며 복수를 맹세했다.-「이탈리아에서 역사와 이야기는 같은 말이다(pp.61~62) 후지사와 미치오 저 | 일빛」


마틸다, 공주가 아니라 여전사가 되다

이 장면은 22년 후인 1077년에 마틸다 일가의 주성인 카노사에서 등장 인물만 바뀌어 재현된다. 하인리히 3세의 아들인 하인리히 4세와 베아트리체의 딸인 마틸다 사이에서. 아니, 재현되어야만 했다. 그것만이 토스카나의 새로운 영주가 되어야 하는 마틸다의 존재 이유였다. 그녀는 장차 자신의 영지를 지키고 제대로 통치하기 위해 다양한 지식을 습득한다. 4개 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그녀는 복수를 위해 남자들 틈에서 이를 악물고 군사훈련까지 받았다고 한다. 그녀는 얌전한 공주가 아니라 백마를 타고 전장을 달리는 여전사로 성장했다.


파르미지아니노가 그린 마틸다의 초상화 [출처: 위키피디아]

일년 후 하인리히 3세가 사망한다. 그의 6살 난 어린 아들이 하인리히 4세가 되어 아버지의 영지를 계승했다. 황제로 인정받지는 못했다. 당시는 왕조를 향한 충성심보다 영주 개인의 역량과 현실적인 군사력이 중요한 시기였기에 어린 하인리히 4세의 영향력은 아버지 대에 비해 삽시간에 줄어들었다. 그 기회를 노리고 고드프리 3세는 토스카나와 로렌의 소유권을 다지며 자신이 도망간 사이 하인리히 3세 편을 들었던 도시들을 무력으로 응징한다. 또 자신의 동생을 스테파누스 9세 교황으로 만든다. 자신이 이후에 이탈리아 왕이 되었을 때, 교회측의 승인을 쉽게 하기 위한 포석이었다. 이때부터 마틸다 가족과 교회와의 관계는 친밀해졌다. 그러다 1069년 고드프리 3세는 세상을 떠난다. 베아트리체는 다시 과부가 되었지만 이번에는 재혼하지 않고 교황청의 실력자인 클뤼니 수도원 출신 힐데브란트를 지원하며 그에게 의지한다. 마틸다 역시 신앙심이 깊었기에 개혁파 힐데브란트를 영혼의 아버지로 여겼다.

마틸다는 의붓오빠인 고드프리 4세와 결혼했다. 그는 딸을 낳은 후 자신의 영지인 로렌을 통치하기 위해 돌아갔지만 마틸다는 자신이 물려받은 토스카나의 영지를 다스리기 위해 남았다. 이것이 부부의 영원한 이별이 되었다. 후에 마틸다는 교황에게 부탁하여 고드프리 4세와 이혼한다. 1076년, 어머니 베아트리체가 세상을 떠났다. 하나뿐인 딸도 어린 나이에 하늘 나라로 갔다. 마틸다는 더욱더 신앙과 힐데브란트, 아니 이제 교황이 된 그레고리우스 7세에게 의지하게 되었다.

한편 교회 개혁에 솔선수범하고 마틸다의 적인 황제에 맞서는 그레고리우스 7세는, 어려서부터 고난을 겪고 신앙에 의지하며 복수를 위해 살아온 마틸다의 이상을 충족시켰다. 교황 역시 빠른 속도로 성장해가는 하인리히 4세의 군사력에 대항할 수 있는 현실적인 무력 지원이 필요했다. 교황은 토스카나 시골 출신인 자신이 어려웠던 시절에 마틸다의 어머니인 베아트리체가 도와준 사실을 인간적으로도 잊지 않았다.



마틸다가 다스리던 토스카나 영지와 카노사 성의 위치 [출처: 위키피디아]


황제냐 교황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더 중요한 사실은 마틸다가 다스리는 이탈리아 북부의 토스카나 지방은 그녀의 정치적 선택과 상관없이 황제의 영토와 교황의 세력권 사이에 운명적으로 위치해 있었다는 것. 황제냐 교황이냐, 선택을 망설일 필요는 없었다. 마틸다는 어릴 적 어머니가 겪었던 치욕을 잊지 않았기에. 마틸다는 흔쾌히 그리스도의 전사가 되었다. 그녀의 병사들은 전투에 앞서서 이렇게 외쳤다. “마틸다와 성 베드로(교황을 의미함)를 위하여!”

새로 교황이 된 그레고리우스 7세는 성직자의 결혼과 축첩을 금지하는 것을 시작으로 성직자 집단 내부의 도덕적 정화작업을 펼쳤다. 이어서 황제의 성직자 서임권을 철폐하고, 교황 중심으로 서유럽 전체를 통일한 후 십자군을 일으켜 셀주크 투르크 족에게 점령된 성지 예루살렘을 되찾으려 했다.

최종적으로 그레고리우스는 신정정치를 꿈꾸었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그리스도가 설립하신 것이기 때문에 잘못을 저지른 적이 없으며, 결코 잘못을 저지를 수도 없다. 주교를 해직하거나 복직시키고, 새로운 법이나 주교직을 설치하고 오래된 교구를 분리하거나 주교들을 인사이동하거나, 공의회를 소집하거나 황제를 폐위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은 교황뿐이다. 그러므로 군주들은 그의 발에 입을 맞추어야 하고 교황의 사절들은 주교보다 우위에 있어야 한다.-「기독교의 역사(p.357) 폴 존슨 저 | 포이에마」

한편, 이 시기 어린 하인리히 4세 역시 차근차근 성장하며 세력을 키워 나가고 있었다. 자연 황제보다 우위에 선 신정정치를 꿈꾸는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와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둘은 1076년 밀라노 대주교의 임명권을 놓고 정면으로 충돌했다. 대주교의 지위는 세속적으로 보면 영지가 딸린 백작에 해당한다. 자기 편 사람을 임명하는 권리는 교황이건 황제이건 내 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이권이었다. 하인리히 4세는 독일 지역의 주교들을 모아 교황의 폐위를 선동했으며, 폐위 통지서를 받은 그레고리우스 7세는 자신의 폐위를 결정하는 회의에 참석한 주교 전원과 황제 하인리히 4세에게 파문을 선언했다.

파문(破門, excommunication)이란 세례받은 신자가 잘못을 저질렀을 때 그를 공동체에서 제외하는 처벌이다. 파문되면 장례 미사도 치르지 못하고 교회 묘지에 묻힐 수도 없기에 죽어서도 영원히 구원받지 못한다. 이교도와 똑같은 대접을 받는다. 신이 주신 모든 지위와 권리가 박탈당하기 때문에 파문당한 자에게는 복종할 의무도 없다. 독일 지역의 영주들 중에서는 황제의 파문 소식을 듣고 오히려 거리낌없이 자신의 주군을 공격하여 사리사욕을 채울 수 있어 기뻐하는 자들도 많았다. 이때는 아직 독일 통일 훨씬 이전 시대다. 황제는 독일 지역 수많은 영주 중의 하나였으며 세습이 아니라 선출로 제위에 올랐다. 그런 황제의 권력이 커지는 것을 경계했던 독일의 영주들은 황제를 견제하기 위해 교황을 지지했다. 황제를 지지해 온 주교들마저 파문 선고에 겁먹고 교황에게 항복했다. 그들은 그레고리우스 7세의 주재 아래 1077년 2월2일,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종교회의를 열기로 합의했다. 하인리히 4세에게는 그때까지 교황에게서 파문을 해제받지 못하면 후임 황제를 선출할 것이라는 통보를 보냈다.

통보를 받고 고민하던 하인리히 4세는 군사를 동원하는 대신 교황과 직접 교섭하기로 마음 먹고 교황이 있는 로마를 향해 출발했다. 교황은 이미 아우크스부르크로 떠난 뒤였다. 하인리히 4세는 교황이 도중에 카노사 성에서 머무른다는 소식을 접하고 카노사로 향했다. 카노사 성이 있는 이탈리아 북부 토스카나 지방은 마틸다의 영지였다. 마틸다는 미리 키노사 성에 가서 하인리히 4세를 기다렸다.


당시의 카노사 성을 그린 그림 / 현재의 카노사 성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패배를 자인한 하인리히 4세는 사면을 구걸하기 위해 교황청이 있는 로마로 향했다. 그가 알프스를 넘을 무렵 교황 일행도 아우크스부르크를 향해 북행하고 있었다. 교황과 황제는 1077년 1월 21일 알프스의 카놋사 성에서 만났다. 황제는 참회자답게 맨발에 거친 옷차림으로 꼬박 3일 동안 죄를 고백하고 사면을 애걸했다. 1077년의 알프스 산악지대는 중세 전체를 통해 유난히 추웠던 것으로 전해진다. 상상만 해도 참으로 놀라운 광경이 아닐 수 없다. 전쟁에 패해 포로가 된 것도 아닌데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그렇게까지 비굴할 수가 있는가? 1636년 청나라에 패한 인조가 한강의 삼전도에서 청나라 태조에게 무릎을 꿇은 굴욕이 떠오른다. 교황은 참회를 받아들여 황제를 사면했다. 그리고 역사는 그 일을 '카놋사의 굴욕'으로 기록한다.-「초기 기독교 이야기(p.55) 진원숙 저 | 살림출판사」


마틸다, 마침내 복수하다

마틸다는 맨발로 누추한 털외투만 걸치고 성문 밖에서 용서를 비는 황제 하인리히 4세를 냉정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그의 곁에는 황후 베르타와 어린 아들이 함께 서 있었다. 아마 마틸다는 22년전 어머니와 어린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마침내 어머니와 형제들의 복수를 한 것이다. 마틸다의 종군신부였던 도니초가 영웅 서사시 형태로 1115년에 완성한 <Vita Mathildis>에 의하면, 이때 하인리히 4세는 육촌누나인 마틸다에게 “나의 사촌 누이여, 그대가 나를 위해 변호를 해 주오.”라며 마틸다에게 애걸했다고 한다. 물론 그 역시 속으로는 언젠가는 이 치욕을 꼭 갚겠다며 이를 갈았다. 이렇게 성문 밖에서 금식하며 버티기를 3일째, 드디어 그레고리우스 7세는 성문을 열게 하고 하인리히 4세를 만났다. 황제는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었고, 교황은 그를 미사에 참석시켜 파문을 거둬들였다.


카노사 성 밖에 맨발로 서 있는 하인리히 4세 / 하인리히 4세의 가족들 [출처: 위키피디아]

이 ‘카노사의 굴욕’은 교황의 영원한 승리였던가? 아니었다. 장기적으로 보면 교황과 황제간 대결의 최종 승리자는 황제였다. 파문이 취소된 후 근거지로 돌아간 하인리히 4세는 반격에 나선다. 그는 독일 내 영주들의 지지를 모아 곧 세력을 회복한다. 한편 교황의 사면이 불만이던 황제 반대 세력은 슈바벤 공작 루돌프를 새로운 독일황제로 선출했다. 전쟁이 벌어졌다. 그레고리우스 7세는 루돌프를 지지하며 하인리히 4세를 재차 파문하고 폐위를 선언했다. 그러나 루돌프는 전사했다. 하인리히 4세는 황제파 주교들을 소집하여 그레고리우스 7세의 폐위를 선언하고 클레멘트 3세를 대립(對立) 교황으로 임명한 뒤 이탈리아 원정에 나섰다. 복수를 위해 황제군 중 일부는 카노사로 향했지만 마틸다는 용감히 싸워 성을 지켰다.

로마에 도착한 하인리히 4세는 그레고리우스 7세가 도망간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신성로마제국 황제로서 정식 대관식을 치른다. 그때, 그레고리우스 7세는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얼마 안 떨어진 성 안젤로 요새로 피신해 있었다. 4년 동안의 농성 후에야 그는 남부 이탈리아를 지배하던 노르만 족의 도움으로 요새를 나올 수 있었다. 그러나 이민족 군대의 약탈에 분노한 로마 시민들에게 쫓겨, 그레고리우스 7세는 노르만 군대와 함께 로마에서 물러나야만 했다. 그는 이탈리아 남부의 살레르노에서 또다시 하인리히 4세를 파문했지만 아무 효력이 없었다. 1085년 그레고리우스 7세는 쫓겨간 살레르노에서 사망한다. 영원의 도시, 성 베르드로의 도시 로마에 영원히 돌아오지 못한 채. 그레고리우스 7세와 하인리히 4세의 싸움에서는, 하인리히가 이겼다.

마틸다 역시 하인리히 4세의 복수의 칼날을 받아야만 했다. 황제군과의 전투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그녀는 직접 전쟁터에 나가 앞장서서 전투를 지휘했다. 끈질기게 반 황제 선동에 나서서 반란을 배후조종했다. 심지어 하인리히 4세의 두 아들 콘라트와 하인리히 5세가 아버지를 배신하도록 사주하기도 했다. 1106년, 아들에게 배신당한 상처를 안고 하인리히 4세는 세상을 떠났다. 하인리히 4세와 마틸다의 싸움에서는, 마틸다가 이겼다. 이제 마틸다의 복수는 끝났다. 마틸다는 그 후 10년을 더 살다 1115년 카노사 성에서 숨을 거둔다. 황제에 대항하며 영지를 지키고, 교황을 위해 싸운 한 평생이었다.

생전에 마틸다는 하인리히 4세가 추대한 대립 교황 클레멘스 3세에 맞서 새로운 교황으로 빅토르 3세를 옹립했다. 그가 사망하자 개혁파 클뤼니 수도원 출신의 주교를 새 교황으로 지지했는데 바로 이 교황이 후에 십자군 전쟁을 일으키는 우르바누스 2세이다. 십자군 전쟁의 역사적 과오는 논외로 하고, 여하튼 마틸다가 숭배하던 그레고리우스 7세가 간절히 원하던 사업이, 그녀가 옹립한 그의 계승자를 통해 실현된 셈이다.

교회는 그녀가 영면한 카노사 성이 마틸다 사후 100년 경에 파괴되자 1635년에 그녀의 무덤을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으로 옮겨왔다. 현재 우리가 보는 마틸다의 무덤은 바로크 조각가인 베르니니(Gian Lorenzo Bernini)가 만든 것인데, 관 정면에 ‘카노사의 굴욕’ 장면이 부조로 새겨져 있다. 이는 마틸다 인생의 가장 큰 사건이자 업적인 ‘카노사의 굴욕’에서 그녀가 중심 인물이었으며, 교회는 마틸다의 기여를 잊지 않는다는 의미이리라. 사후 600년이나 지나 이런 무덤을 조성해 줄 정도로.

마틸다 무덤.jpg
베르니니가 만든 마틸다 무덤 조각.
무릎 꿇고 교황의 발에 입 맞추고 있는 황제의 모습이 석관에 부조로 조각되어 있다.
[출처: 위키피디아]

역사가들은 이 사건을 카롤루스 대제(샤를 마뉴)와 오토 대제 이후 당연시 여기던 알프스 너머 황제들의 북이탈리아에 대한 영향력이 쇠퇴하기 시작한 첫 번째 계기로 본다. 독일인들에게 그 충격이 얼마나 컸던지, 황제가 사라지고 교황의 실질적 지배도 사라진 오늘날에까지도 ‘카노사로 가다(nach Canossa gehen)라는 말은 하기 싫어도 억지로 굴복해야 하는 상황에 쓰이는 숙어라고 한다.

세인의 주목을 끌었던 카노사의 굴욕은 상징적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독일 대표단의 성좌(聖座) 파견 문제를 놓고서, 1872년의 독일 제국 의회에서 비스마르크는 ‘우레와 같은 박수를 받으면서 일사천리로 진행된 연설’을 한 바 있다. “우리는 카노사로 가지 않을 것이다. (Nach Canossa gehen wir nicht.)” 개인적으로 이 문장을 좋아했던 비스마르크는 이후에도 같은 말을 여러 차례 반복했고 당시의 문화부 장관이었던 팔크 역시 그에 못지 않았다.-「교황의 역사(p.143) 호르스트 푸어만 저, 차용구 역 | 도서출판 길」

이렇게 유럽사에 큰 족적을 남긴 마틸다는 그저 복수에만 눈먼 전사가 아니었다. 그녀는 생전에 종교 기관을 후원하여 교회, 수도원 등 종교 기관에 자신의 토지를 기부했다. 당시의 교회나 수도원은 학문 기관이자 지역사회 복지기관도 겸했으므로 마틸다의 기부는 고위 성직자들뿐만 아니라 주민들에게 혜택이 돌아가는 선행이었다. 후계자 없이 사망한 마틸다의 영지는 교황의 직할령이 되었다. 한때 마틸다의 영향 아래 있던 북부 이탈리아 지역에는 이제 피렌체, 루카, 피사, 볼로냐 등 자치 도시들이 번성한다. 이 마틸다의 도시들에서 이후 이탈리아 르네상스가 꽃핀다. 세계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볼로냐 대학은 마틸다가 후원한 교회법 연구 기관이 그 모태이기도 하다. 지금도 볼로냐에 가 보면 이 대학도시에 기여한 마틸다의 업적을 기리는 기념물이 꽤 많이 남아있다고 한다.


마틸다의 삶에서 우리는 무엇을 봐야 하나


현재 성벽만 남은 카노사 성 / 성벽의 부조 [출처: 위키피디아]

게다가 그녀는 현대인인 우리의 시각으로 보기에도 강한 의지를 지닌 여성이었다. 부모의 이른 사망으로 대영지의 상속녀가 되어 주위 세력의 암투와 전쟁에 휘말린 공주들은 역사에 많다. 그러나 마틸다처럼 자신의 운명을 무기를 들고 스스로 개척한 강인한 여성은 드물다. 고드프리 4세와 이혼 후 벨프 집안의 어린 소년과 정략결혼을 한 번 더하기는 했지만 그녀는 두 번 다 이혼하여 남편의 힘에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영지를 지켰다. 교황에게 의지했다고 하나 그건 정신적인 의존이었다. 그녀는 남자 뒤에 숨지 않고 군사력이 없는 교황을 대신하여 싸움으로써 오히려 자신이 존경하는 남자를 보호했다. 스스로 무기를 들고 전투에 나가 병사들의 자발적 지지와 복종을 받아냈다. 잔인한 정복과 학살, 약탈을 자행하기는 했다. 그러나 그 시절 영주들은 모두 그랬다. 그 시절의 그들은 관료를 두고 문치에 나서는 태평성대의 군주가 아니라 실질적 무력으로 다스리는 일종의 군벌들이었기 때문이다. 여자이기에 유독 그녀의 잔혹함이 더 비난받아야할 이유는 없다.

토스카나의 마틸다, 이 언니를 보라. 교황과 황제의 권력 다툼이 정점에 달했던 11세기, 두 세력권 사이에 낀 북 이탈리아 토스카나에 태어나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원치 않았으나 운명적 싸움에 휘말린 여자. 그러나 운명의 중심이 되어 스스로 싸워나간 여자. 이 언니의 삶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 할까?

이 언니를 보라. 인간은 누구나 랜덤으로 태어난다. 자신이 태어날 시대와 공간, 가족과 환경을 인간이 스스로 결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미 태어난 이상, 자신의 시대를 주도적으로 살아가는 것은 랜덤이 아님을, 전적으로 개인의 역량에 달린 것임을 이 언니는 전 생애를 걸쳐 우리에게 보여 준다. 그러니 마틸다, 이 언니를 보라. 더 이상 운명이, 상황이 주는 것들을 랜덤으로 받지만 말고, 우리 스스로 우리의 운명을 선택하자. 상황을 만들어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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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박신영

한글을 뗀 이후로 책 읽고 글 끄적거린 것 외에는 한 일이 없다. 《소년중앙》과 계몽사 세계 명작 동화 전집, 삼중당 문고와 창비 시선, 문학과 지성사 시선을 통해 세상을 배웠다. 숙명여대 국문과 입학 후 대하 역사소설을 쓰겠다는 커다란 꿈을 품고 사학을 부전공했다. 그러나 신춘문예에 몇 번 떨어진 이후 그동안의 과대망상과 능력 부족을 깨닫고 겸허하게 독자로 돌아가기로 결심, 한동안 조용히 책 읽고 밥벌이를 하며 살았다. 그렇게 혼자 놀다 보니 너무 심심해서 블로그(blog.yes24.com/mkkorean)에 ‘껌정드레스’라는 닉네임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래, 무작정 읽고 쓰다 보면 언젠가는 되겠지’라는 게으른 배짱으로 역사를 공부하며 독서 기록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기록들이 모여 어느새 한 권의 책이 되었다. 그 책이 2013년 1월 출간한 <백마 탄 왕자들은 왜 그렇게 떠돌아다닐까>이다.지금까지 문학, 역사, 인간이라는 세 개의 열쇠로 세상을 여는 역사 에세이를 쓰는 데 주력해 왔다. 앞으로도 익숙한 이야기들에 낯선 질문을 던지는 즐거운 탐험을 계속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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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 문장가 김훈의 신작 산문집. 생로병사의 무게를 실감하며 지나온 그의 치열했던 '허송세월'을 담은 책은 간결하고도 유려한 글맛으로 이 시대의 기쁨과 슬픔을 마주한다. '본래 스스로 그러한 세상'을 파고들어 삶의 비애와 아름다움을 포착한, 김훈 산문의 미학을 만나볼 시간이다.

사라질 직업에 관한 세밀화

『고기로 태어나서』 한승태 신간. 기술 발달로 없어질 확률이 높은 직업과 작업장의 모습을 세밀하게 담았다. 그 대상은 직업 소개소, 콜센터, 택배 상하차, 뷔페식당, 빌딩 청소다. 힘들고 괴로운 노동 현장이 마냥 슬프지만은 않게 느껴지는 건, 한승태 저자의 필력 덕분이다.

우리는 서로를 계속 안아줄 수 있을까?

한국 청소년 문학의 가장 뜨거운 이슈, 이꽃님 작가 신작. 『죽이고 싶은 아이 2』가 이꽃님 월드의 완벽한 결말을 알린다. 서은의 죽음에서 시작된 두 여고생의 진실과 믿음, 그 절망 끝에서 피어난 희망을 그렸다. 아무리 무너져 내린 삶이라도 다시 일으켜 세워야만 하는 것이 삶이므로.

나만의 ETF 투자 전략

국내 최고의 ETF 전문가인 김수정 저자가 ETF 투자를 위한 모든 것을 한 권에 담았다. ETF의 종류부터 투자자가 알아야 할 내용과 투자 전략까지 상세히 다룬다. 안전하고 성공적인 투자는 물론, 나에게 맞는 ETF 포트폴리오를 만드는 데 최적화된 투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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