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형 느와르 소설, <너를 봤어>는 기대해도 좋다
작가 김려령, 그 놀라운 변신
이 소설은 어떤 소설이라고 말하는 게 적합할까? 폭력의 희생자가 폭력의 가해자가 되어 결국 삶이 좌절되는 비극적 서사라고 하면 말이 되려나. 생생한 리얼리즘 소설이 오컬트로 마무리되는 느낌이 살짝 아쉬움을 주지만, 영화 <초록 물고기>나 <달콤한 인생>, <게임의 법칙>,<비열한 거리> 등 한국 느와르 영화를 보는 듯한 진한 페이소스를 느낄 수 있는 소설이다.
친구끼리 같은 영화나 소설을 보고 난 후 나누는 흔한 대화.
“너무 기대를 많이 했나? 생각보다 재미없었어.”
“나는 기대를 안하고 봐서 그런지 재미있더라.”
기대라는 것은 뭐길래, 똑같은 영화나 소설을 보고 난 후에도 누구는 재미있게 하고, 또 누구는 재미없게 하는 걸까? 이 ‘기대’라는 것을 기준으로 봤을 때 김려령의 『너를 봤어』 는 기대를 하지 않고 봐서인지 읽은 후 굉장히 재미있게 느껴졌고, 무라카미 하루키의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는 기대를 많이 하고 봐서인지, 읽은 후 재미있다고 흔쾌히 말하기가 좀 꺼림직했다. 하지만 두 소설 중 어떤 소설이 더 재미있었는지 객관적으로 평가를 하라면,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 훨씬 더 잘 짜여있고, 스케일이 더 크니까. 하지만 2013년 여름에 읽은 장편소설 중 제일 기억에 남는 작품으로 『너를 봤어』 가 될 것 같으니 이 ‘기대’란 놈은 참으로 요물이라 하겠다. 사람의 마음을 들었다 놓았다 하니 말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는 기대감을 가지고 지갑을 들고 상점으로 가고, 이 기대감을 기준으로 본 것에 대하여 평가한다는 것.
영재가 내 겨드랑이 밑으로 손을 넣어 나를 꼭 안는다. 왜? 예뻐서요. 나도 영재를 안는다. 처음 봤을 때부터 그냥 이렇게 안고 싶었다. 영재가 내가 아닌 남자와 함께 있어도 괜찮았다. 거기서 음식을 먹어도 좋았고 누군가와 떠들어도 좋았다. 등 뒤에라도 내가 느낄 수 있는 거기에 있으면 되는 거였다. “앞으로 내가 예쁠 때마다 안겨.” “아.” “뭘?” “혀.” (p.61) 너 그렇게 자랐구나. 영재가 할머니 벽장에 숨은 것처럼 나는 개천 상류 숲에 숨었다. 하늘도 맑고 바람도 좋은데 나는 늘 왜 아픈지, 너럭바위에 누워 눈물을 훔쳤다. 그래도 그곳만큼 나를 잘 숨겨주고 편하게 해주는 데가 없었다. 너럭바위를 돌절구 삼아 벌레와 나비를 찧으며, 오늘은 얼마큼 맞았나, 사람은 몇번을 찧어야 이렇게 가루가 될까, 사람도 송충이처럼 툭 터뜨릴 수 있을까 하는 상상으로 나를 다독였다. (p.118) | ||
형이 상자 끝에 놓인 길쭉한 항아리로 다가간다. “쌀은 좀 남았나.” 하고, 항아리 뚜껑을 연다. 그리고 그것을 들고 내게 곧장 달려들었다. 그럴 줄 알았고 피하지 않았다. 항아리 뚜껑에 왼쪽 어깨를 맞아 팔이 떨어져나갈 것 같았지만, 그 옛날 팔이 부러져 부목을 대고, 부러진 갈비뼈에 내장을 찔렸던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알 텐데. 내가 저한테 맞아서 죽을 사람이 아니라는 거. 그럴 거였으면 그 옛날에 죽었겠지. 알 거면서 그래도 달려든다. 죽일 수 없는 상대를 죽이기 위해 힘을 쏟는 것이다. “개새끼, 너 오늘 진짜 죽었어…….” 형이 항아리 뚜껑을 모로 세워 내 머리를 갈라낼 듯이 들어올렸다. 니가 그러니까 개천 것이라는 소리를 듣는 거야, 알아? 나는 파이프를 든 손에 힘을 주어 그대로 형의 머리를 내리쳤다. (중략) 너는 몇대 패고 뺐으면 되는데, 다른 사람들은 병신같이 일하니까, 진짜 병신 같지? 사람들이 너 같은 쓰레기 좋으라고 일하는 게 아니거든. 너 같은 놈이 팁 줘가면서 양주 처먹으라고 일하는 게 아니라고. 껌 짝짝 씹으면서 모텔이나 전전하는 니 여자 명품 속옷 사주라고 일하는게 아니라고. (p.68)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