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민하고 있어요. 어떻게 표현할지”
3년 만에 선보이는 42번가, 악명 높은 스타 도로시, 그 역을 홍지민이 맡았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기자는 반신반의했더랬다. 잘 어울릴까? 포스터를 보니 독한 분장으로 장난기 가득한 홍지민의 눈가를 잘 메웠다. 그래도 궁금했다. 홍지민표 도로시는 뭐가 달라도 다를 테니까.
“객석에서 봤던 도로시와 작품을 임하면서 본 도로시는 확연히 달라요. 도로시는 제가 객석에서 봤을 때 배려심이 없고 고집이 센 모습이었는데 대본을 본 도로시는 나름의 아픔과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 느껴지면서 이해가 되는 캐릭터였고요. 2막 6장에서 하는 도로시의 대사는 같은 여자로서 굉장히 쿨하고, 멋있고, 어떤 측면에서는 삶의 진정한 가치가 뭔지를 알아서 떠나는 모습이었어요. 제가 요즘 인생의 가치에 대한 변화를 느끼는 시기여서 굉장히 도로시를 연기하면서 생각이 많아지고 있어요.”
최근 집안에 상을 당한 배우 홍지민, 그래서 도로시라는 배역 자체를 분석할 때도 여느 때와 달랐다.
“도로시처럼 무대가 내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하고 전진만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이번 일을 계기로 ‘진짜 행복이 뭐지?’를 돌아보게 됐어요. 나의 건강, 나 자신, 우리 가족, 사랑 이런 것들을 많이 생각하게 되면서 사랑하는 사람과의 시간을 갖는 것이 진짜 내가 원하는 삶이라는 것을 알게 됐어요. 도로시도 쿨하게 페기에게 자신의 자리를 물려주고 떠나는 장면이 있는데 마냥 못된 여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이해가 되는 사랑스러운 여자로 표현하고 싶은 욕심이 좀 있어요. 그래서 고민하고 있죠. 어떻게 표현할지.”
“무대 위에선 질 수 없죠”
기자가 질문지를 준비하며 갖던 궁금증을 슬쩍 집어던졌다. 평소 잘 웃고 털털하고 쾌활한 홍지민, 도로시가 잘 맞는 옷일까?
“사실 제가 안 도도하거든요. 제가 ‘하녀병’이 좀 있어서 이번에 사실 제가 원래 갖고 있는 성격이랑 도로시랑 안 맞을까봐 걱정을 하고 있긴 한데, 어떻게 하면 ‘저’스럽게 만들까 하고 있어요.”
미안하다 싶을 정도로 뻥뻥 웃게 만드는 그녀의 입담까지. 그러게, 도로시는 사실 올해로 세 번째 맡은 선배 박해미가 더 잘 어울릴 법 하긴 하다.
“언니가 무조건 더 잘 하실 거고요. 원래 잘 하시고, 잘 어울리는 역할이니까요. 언니의 색깔이나 제 성향이 좀 다르니까 대신 저는 언니가 없는 사랑스러움, 애교스러움으로 승부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어요. 그렇다고 무대 위에선 질 수 없죠.”
그녀들의 탭댄스 실력이 출중한 이유
공연 전부터 화제가 되었던 건 <브로드웨이 42번가>의 주인공 페기 소여처럼 실제 페기 역을 맡은 배우들이 거의 무명이라는 것. 홍지민은 페기 역의 정단영, 전예지에게 해줄 얘기가 많았단다.
“농담삼아 제가 단영이라는 친구한테 늙은 페기라고 놀렸어요. 실제 페기보단 나이가 많아요. 페기라는 역할은 실제로 22살로 나오고 풋내기 같은데 단영이는 내공을 가지고 있는 친구죠. 오랜 시간 앙상블부터 차근히 밟아온 친구거든요. 그래서 제가 ‘단영아, 네가 정말 잘해주길 바란다.’라고 말했어요. 왜냐하면 저희 뮤지컬 바닥에서 어느 순간부터 차근히 단계를 밟지 않고 어느 날 갑자기 주인공이 되는 게 당연한 대세가 되어버린 것 같다는 거죠. 처음부터 앙상블을 하는 건 배역을 맡는 게 어려운 것처럼 그게 일상이 되어버렸거든요.”
홍지민은 그걸 ‘나쁜’ 거라고 표현했다. 그녀는 반짝 스타가 아니라 앙상블로, 그 진한 땀으로 내공을 쌓아 주인공 자리에 오르는 게 정답이라고 생각한다.
“갑자기 뭔가 이뤄지는 건 세상에 없어요. 그전의 페기들보다 이 친구들 탭댄스 실력이 워낙 출중해서 탭댄스 실력을 보는 것만으로도 관객들이 충분히 흡족하실 거예요. 저도 연습실에서 깜짝 놀랐거든요. 정말 잘 한다고 박수를 보냈죠. 그런 친구들을 보면 응원하고 싶어요. 서로 눈을 쳐다보며 말하죠. 잘 해라잉~”
내 안에 페기 있다?
얘기를 듣다보니 홍지민의 20대가 궁금해졌다. 기자가 그녀의 존재를 알게 된 건 아마도 그녀의 30대. 그렇다면 그녀의 20대 초반, 페기처럼 무대에 오르고 싶은 큰 꿈을 안고 있었을까?
“아뇨. 제가 23살에 서울예술단에 입단했는데 그 때 얼굴이 지금과 똑같아요. 장점이자 단점이었죠. 그래서 그때도 누구나 밟아가는 역할을 못하고 아줌마 역할 같은 걸 많이 했어요. 한 번은 예술단 수석 언니가 임신하는 바람에 지방투어 공연에 제가 갑자기 주인공 아줌마 역을 맡기도 했죠.”
페기처럼 주인공을 맡기도 했지만 그건 이미지 덕이었다. 심지어 그녀는 이런 악담도 들었다.
“네가 잘 나가는 뮤지컬 배우가 되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
아니 그런 악담을 누가? 그렇다면 그게 그녀에게 이를 악물게 한 힘이 된 것일까?
“아니 뭐 그냥 ‘그래? 그럼 우짜지?’ 하고나서 보이스를 바꿔야 하나 싶었죠.(웃음) 제가 원래 긍정적이어서 낙담하기보다는 성대 쪽 잘 보시는 유명한 박사님께 가서 상담을 받았어요. 그런데 수술을 한다고 소리가 소프라노로 바뀌진 않는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우선 노래를 제대로 배워본 적이 없으니까 트레이닝을 시작했죠.”
타고나는 것이다. 그녀의 energy도, 무한 optimism도, 그리고 절대 불변량의 ‘talent’도. 다시 한 번 느꼈다.
“후배들이 그래요. 도로시보단 페기 소여의 모습들이 저한테 많이 보인다고요. 해맑게 웃으면서 다니고, 엉뚱하고, 안무 막 틀리고, 부딪치고. 그래서 저도 그러죠. ‘내 안에 페기 있다~’(웃음)”
그러면서 페기를 능가하는 수준의 탭댄스 실력도 기자와 스탭들 앞에서 선보였다. 주로 입으로 얼굴로 손으로 추는 탭댄스였지만, 발로 하는 탭 그 이상의 경쾌함이 녹아 있었다.
“도로시는 탭이 없거든요. 그래서 너무 아쉬워요. 제가 춤을 잘 추거든요. 제가 발은 못 하는데 손은 잘 해요.(웃음).”
무대 울렁증은 나만의 설렘
타고난 연기와 노래 실력을 갖추고 있는 것으로 평가받는 배우 홍지민, 그러나 무대 울렁증이 있어 연습만이 살 길이라는 고백을 한 적이 있다?
“뮤지컬 <드림걸즈>가 배우로서 터닝포인트가 생긴 지점이에요. 그 전에도 물론 연습을 많이 했지만 타고난 게 많다는 생각을 사실 많이 했어요. 그런데 드림걸즈는 소위 타고난 걸로 해먹기에는, 버티기에는 한계를 느낀 작품이었죠. 1200대 1의 오디션 경쟁률을 뚫고 맡은 역할인데 못 하겠더라고요. 노래가 너무 힘들고요. 이미 영화 OST가 나와 있는 상황이었거든요. 그래서 비교되는 스트레스도 너무 크더라고요. 이렇게 불러 봐도 촌스러운 것 같고, 저렇게 불러 봐도 안 되는 것 같았어요. 더 괴로운 건 내가 하고 있는데 내가 잘 하고 있는지, 못하고 있는지 너무 잘 안다는 거였어요. 훨씬 못한다는 걸. 아주 훨씬 못한다는 걸. 그래서 무대 울렁증이 생겼죠.”
그렇게 자존감이 무지막지 떨어질 무렵, 무대를 포기해야겠다고 좌절할 무렵 <드림걸즈>의 작곡가 헬리 크리거를 만났다. 그는 그녀에게 말했다. 세계적으로 잘 나가는 디바들과 많은 작업을 해봤지만 내 노래를 이렇게 사랑스럽게 부르는 배우는 처음 봤다고.
“믿기지 않았죠. 집에 와서 펑펑 울었어요. 작곡가가 칭찬하니까 힘이 생기잖아요. 그 힘을 받아서 간신히 6개월간 공연을 했죠. 매 공연마다 끝나고 나면 아쉬움이 있지만 그래도 <드림걸즈>에 대한 아쉬움이 굉장히 커요.”
그래서 그렇게 수상소감을 말할 때 펑펑 울었나보다. 그렇게 혼신을 다한 작품 <드림걸즈>로 심사위원 만장일치 여우주연상을 거머쥐었으니. 하지만 이때 생긴 무대울렁증은 후배들보다 더한 독한 연습 아니면 없어지질 않았다.
후배들의 부담스러운 시선에 화장실에서 연습할 정도로. 그렇다면 지금은?
“sometimes. 가끔 그래요. 처음에는 그것 때문에 힘들기도 했는데 너무 없는 것도 별로라는 생각이 들어요. 긴장도 되고. 이제는 그래서 무대 울렁증이라기보다는 나만의 설렘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홍지민이 맡으면 튄다? OR 튀는 역할을 맡는다?
그녀가 맡은 역할은 아무리 조연이라도 한 번만 생각해보면 쉽게 생각날 정도로 분명한 캐릭터가 많다. ‘홍지민이 맡으면 튄다? OR 튀는 역할을 맡는다?’ 그녀는 어느 쪽에 동의할까?
“뮤지컬은 캐스팅 당시에 확실한 캐릭터가 오는 경우가 많고요. 드라마는 제가 만들어 가는 게 많아요. 골든타임 때는 제가 감독님한테 배역에 대해 써갔어요. 저도 그런 건 처음이라 긴장하면서 요청했죠. 제가 생각하는 송경화라는 역할은 이렇다 라고. 감독님과 작가님도 기쁘게 반영해주셨어요. 책으로만 연애를 공부한 모태솔로라는 설정도 그렇고 캐릭터 대부분을 제가 만들었죠.”
그러니까 결론은 대한민국 드라마와 영화, 뮤지컬, 연극에는 그녀 아니면 안 되는 역할이 있다는 것으로. 하지만 모든 일에는 작용, 반작용이 있는 법. 뭐 예를 들어 홍지민이라고 청순가련형 같은 비련의 여주인공, 하고 싶지 않겠냐는 말이다.
“제가 그런 역할을 하면 관객들이 싫어해요.(웃음) 그래도 로맨스는 가능하죠. 뮤지컬 <내 사랑 내 곁에>를 통해 로맨스가 검증된 여자입니다.(웃음) <42번가>에서도 펫과의 로맨스가 있고요. 제가 가장 중점을 두는 부분이기도 해요. 그 점이 중요하게 부각이 되어야만 도로시의 행동이 그렇게 밖에 될 수 없다는 점을 이해할 수 있거든요.”
그녀는 역시 낙천적이다. 연기자가 다양한 변신을 할 수 있다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떤 역할을 두고 저 배우가 했으면 좋겠다면서 그 배우를 떠올려준다는 것, 그것만으로 무척 감사해야 할 일이라고.
“그렇게 떠올려지지 않아서 배역을 못 맡는 수많은 배우들이 있거든요. 그래서 저는 감사해요. 더 솔직히 말씀드리면 어렸을 땐 배역에 대한 욕심을 낸 적도 있어요. 하지만 나이를 먹으면서 여배우가 할 역할이 점점 없어지거든요. 그런데 자기 색깔을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거죠.”
그래도 그녀, 언젠가 액션 영화나 미저리처럼 사이코틱한 역할도 해보고 싶단다. 말하며 순식간에 변한 표정만 봐도 능히 소화 가능해 보였다.
기자의 준비되지 않았던 마지막 질문, ‘오지랖이 넓다는 말 익숙한가?’
“너무 많이 듣죠. 이제 안 하려고요. 심신이 피로해서요. 오지랖 좀 줄이려고 마음먹고 있어요.”
말만 그랬나보다. 기자가 가는 길에 본인과 스탭 먹을 것까지 나눠 챙겨주는 걸 보면. 그래서 5월 11일, 도도하진 않아도 사랑스러울 그녀만의 도로시가 벌써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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