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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의 세계에서 살아남은 어느 매력적인 여탐정 이야기-『제한 보상』

‘어쨌거나 남자는 필요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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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이 깨진 건 내가 너무 독립심이 강했기 때문이에요. 게다가 난 집안일에 취미가 없어요…하지만 진짜 문제는 저의 독립적인 마인드였죠…친한 친구들은 여러 명 돼요. 그들이 내 영역을 침범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하지만 남자들을 상대할 때는 본연의 나를 지키기 위해 싸우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가 많아요.”

P.D. 제임스의 소설 『여탐정은 환영받지 못한다』란 제목이 보여주듯, 탐정의 세계에서 여성이란 존재는 희미하다. 탐정이 형사와 다른 점은, 조직의 일원이 아니라는 것이다. 핑커튼 탐정 사무소처럼 대형 회사에 속해있다면 지원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탐정은 한 명 혹은 파트너 정도로 구성되어 있다. 단지 숫자의 문제만은 아니다. 경찰조직은 범죄자가 쉽게 무시할 수 없다. 경찰 일부를 매수하거나 물리력으로 경찰 개인을 무력화시킬 수는 있지만, 그 이상은 불가능하다. 경찰 조직에 속한 이들은 자신들의 힘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 경찰 신분증은 단순한 신원확인을 넘어 그들의 ‘힘’을 증명하고 발현하는 도구다. 탐정에게는 그런 파워가 없다. 오로지 그 개인이 가진 힘뿐이다.

여성 탐정을 상상해보자. 경찰이 아니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에게 답할 의무는 없다. 심증이 있다 해도 용의자나 참고자로 강제소환할 수도 없다. 물리력으로 굴복시키지 않는 이상은. 그러니 탐정이라면 자신만의 장점과 무기가 있어야 한다. 뛰어난 증거수집력과 두뇌, 웬만한 상대와는 싸워 이길 수 있는 물리력도 갖춰야 한다. 새러 패러츠키의 『제한 보상』의 주인공 V.I. 워쇼스키 역시 그렇다. 얼 스마이슨이라는 깡패 두목이 똘마니 둘을 보냈을 때, 워쇼스키는 그들을 꽤나 고생시킨다. 갈비뼈도 부러뜨리고, 최대한 저항을 한다. 자신이 얼마나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는지를 알게 되었을 때에는 총도 구입한다. 경찰도 가끔 범죄자에게 희생되기는 하지만, 탐정이 처한 위치와는 전혀 다르다. 탐정은 오로지 자신의 힘만으로 스스로를 보호해야 한다. 스스로 싸워 이기고, 스스로 모든 것을 해결해야만 한다. 아무래도 물리력이 약한 여성이라면, 탐정의 세계에서는 약자일 수밖에 없다. 살아남는 것 자체가 그야말로 악전고투다.

하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여탐정은 매력적이다. 남자들의 세계에서 살아남은 여성. 단지 생존이 아니라, 남자들과 어깨를 겨루고 굳건하게 서 있는 여탐정. 그 이미지만으로도 멋지다. 『제한 보상』이 나온 것은 1982년이다. 70년대에 여성운동이 활발하게 벌어졌지만, 여전히 여성의 사회적 지위는 열악했다. 워쇼스키는 늘 사회적 편견과 맞서 싸워야만 한다. 워쇼스키 아버지의 친구였던 경찰 아저씨 바비는 이렇게 말한다. 비키야. 탐정 일이란 너 같이 젊은 여자들이 할 일이 아니야. 재미 삼아 게임처럼 하는 일이 아니란 말이다. 새러 패러츠키는 워쇼스키가 철저하게 독립적인 여성이기를 원했다. 그렇게 창조했다. 그녀는 이름을 말할 때 늘 ‘V. I. 워쇼스키’라고 한다. 빅토리아의 V이지만, 절대로 비키라는 애칭 대신 빅이라 부르라고 한다. 이름에서 ‘여성’으로 인식되는 것을 거부한다. 그리고 지친 몸을 이끌고 집에 돌아와 홀로 쉴 때 행복함을 느낀다. 새벽 1시가 넘어서 아파트에 혼자 돌아왔다. 나는 벗은 옷을 의자에 아무렇게나 걸쳐두고 침대로 쓰러질 수 있다는 것이 너무 좋았다. 워쇼스키는 이혼을 했고, 자유롭게 살고 있다. 딱히 자유를 갈구하거나 분방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 단지 워쇼스키는 자신의 독립적인 삶, 생활을 원한다.

결혼이 깨진 건 내가 너무 독립심이 강했기 때문이에요. 게다가 난 집안일에 취미가 없어요…하지만 진짜 문제는 저의 독립적인 마인드였죠…친한 친구들은 여러 명 돼요. 그들이 내 영역을 침범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하지만 남자들을 상대할 때는 본연의 나를 지키기 위해 싸우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가 많아요.

그래서 워쇼스키는 탐정이라는 자신의 위치에 자부심을 느낀다. 나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건 나 자신뿐이에요. 경관, 간부, 경찰청장의 위계에 따라 명령을 받고 있지 않다고요. 누구의 명령도 받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진실을 찾아 움직인다. 『제한 보상』의 사건은 단순해보였다. 한 중년 남자가 찾아와 아들의 사라진 애인을 찾아달라고 한다. 대학생인 아들의 아파트를 찾아가보니 그는 이미 죽어 있고, 여자는 보이지도 않는다. 의뢰인을 찾아보니 전혀 엉뚱한 사람이었다. 하드보일드 소설의 전형적인 설정이다. 사소한 사건 같았지만, 알고 보니 사회의 복잡다단한 음모와 죄악이 얼키설키 엮여 있다. 노동조합의 추악한 이면, 거대한 보험사기, 몰락한 영웅과 무너진 이상 그리고 희망. 그러나 워쇼스키는 결코 절망하거나 외면하지 않는다. 그녀는 현실을 직시하고, 정면으로 사건의 중심으로 들어간다.

노스 쇼어에 사는 당신들 같은 사람들은 비현실적인 세상에 살고 있어요. 당신들 삶에서 벌어지는 온갖 추악한 일들을 돈으로 은폐할 수 있다고 착각하죠. 청소부를 고용해 쓰레기를 치우거나 루시 같은 가정부를 고용해 쓰레기를 쓸어 담아 밖에 가져다놓는 것처럼 말이죠. 그러나 현실은 달라요….돈을 아무리 들여도 그는 자신이 연루된 지저분한 일을 자신과 아들로부터 치우지 못했어요. 그들이 죽은 이유가 무엇이든지 그것은 더는 당신들만의 일이 아니에요. 당신들의 전유물이 아니라고요. 원하는 사람은 누구든 조사할 수 있어요.

워쇼스키는 천재적인 머리로 사건을 풀어내는 탐정은 아니다. 발로 뛰며, 때로는 몸으로 부딪쳐 단서를 얻어내는 하드보일드의 전형적인 주인공들과 전혀 다르지 않다. 워쇼스키는 단서를 찾기 위해, 시카고 시내의 술집들을 모두 뒤져보기로 한다. 그야말로 단순한 수사방법이다. 이렇게 하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분명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 말고는 더는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지금 내가 선택한 방법으로 실마리를 찾아내야 한다. 방 안에 앉아 논리적으로 완벽한 답을 생각해내는 피터 윔지 경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워쇼스키는 눈앞에 닥친 일들을 한다. 떠오른 아이디어를 증명하기 위해, 몸을 움직인다. 그것만이 세상에 맞서 싸우는 방법이다. 아무리 지옥 같은 현실일지라도.

생각만 해도 역겹다는 거 알아요. 당신이 지옥보다 더한 고통을 견뎌왔다는 것도 잘 알아요. 그리고 앞으로의 상황도 그리 좋아 보이지 않고요. 하지만 일을 빨리 처리하면 할수록 더 빨리 넘길 수 있을 거예요. 끌면 끌수록 더 힘들 뿐이에요. 앞으로 어떻게 될지 걱정만 하다가는 헤어나기 힘든 수렁 속으로 빠져들 거예요.

『제한 보상』으로 시작한 ‘V.I. 워쇼스키 시리즈’는 지금까지 15편이 나왔다. 국내에는 『블랙리스트』가 나온 적이 있고. 이 시리즈의 가장 큰 매력은 무엇보다 주인공 워쇼스키다. 독립적인 여성. 남자들의 세계에서, 그들과 어깨를 겨루며 자신의 영토를 지킨 여성. 워쇼스키는 결코 남자들에게 친절하지 않다. 그들이 뭐라고 훈수를 두거나 충고를 하려 들면 바로 반격을 하거나 무시한다. 『휴스턴 크로니클』의 V.I.의 완고함, 신랄한 말투, 지기 싫어하는 성격 때문에 그녀를 편안한 데이트 상대로 꼽을 수는 없지만 미스터리 소설로서는 곁에 두고 싶은 1순위 캐릭터.라는 말이 딱 맞다. 빈민가에서 병원을 열고 있는, 워쇼스키의 절친인 여성 의사 로티도 그녀 못지않게 강인하고 매력적이다. 새러 패러츠키는 이 시리즈를 통해 워쇼스키와 로티 등 바람직한 여성 캐릭터를 잔뜩 창조해냈다. 21세기에도 여전히 유효하고, 멋진 여성들을 만나는 즐거움이 각별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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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한 보상 새러 패러츠키 저/황은희 역 | 검은숲
폴란드계 아버지와 이탈리아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국선 변호사와 짧은 결혼 생활을 거쳐, 시카고 남부의 초라한 빌딩 4층에 사무실을 마련한 V. I. 워쇼스키는 사설탐정이다. 권력과 돈이 얽힌 화이트칼라 범죄를 폭로하는 것이 그녀의 전문 분야이다. 후텁지근한 여름날, 갑작스러운 정전 중에 한 남자가 워쇼스키의 사무실을 찾는다. 유력한 신탁은행의 부행장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그는 아들의 사라진 여자 친구를 찾아달라고 의뢰한다. 하지만 V. I. 워쇼스키가 발견한 것은 머리에 총을 맞고 이미 차갑게 굳어버린 한 남자의 시체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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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봉석

대중문화평론가, 영화평론가. 현 <에이코믹스> 편집장. <씨네21> <한겨레> 기자, 컬처 매거진 <브뤼트>의 편집장을 지냈고 영화, 장르소설, 만화, 대중문화, 일본문화 등에 대한 글을 다양하게 쓴다. 『하드보일드는 나의 힘> 『컬처 트렌드를 읽는 즐거움』 『전방위 글쓰기』 『영화리뷰쓰기』 『공상이상 직업의 세계』 등을 썼고, 공저로는 <좀비사전』 『시네마 수학』 등이 있다. 『자퇴 매뉴얼』 『한국스릴러문학단편선』 등을 기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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