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춘과 박은옥 [출처: 위키피디아]
나이 오십이 넘은 중년세대는 정태춘을 기억한다. ‘서정적인 포크가수’, ‘노래하는 시인’으로, 다시 말하면 시골의 시냇물, 산천, 계곡을 도는 방랑자이듯 정치 사회 현실과 그다지 무관한 가수로 기억에 둔다. 분명 초기 정태춘의 음악이미지는 서정성과 토속성이다. 아무래도 그를 다수의 음악 청취자들과 연결해 준 곡인 1978년 「시인의 마을」과 「촛불」을 비롯해 「떠나가는 배」 그리고 이제는 일반인들이 정태춘과 그의 아내이자 음악가인 박은옥 커플을 가장 빨리 접속할 수 있게 해 주는 노래 「사랑하는 이에게」 등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이 노래들은 분명 안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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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버리신 내 님 생각에/ 오늘도 잠 못 이뤄 지새우며/ 촛불만 하염없이 태우노라/ 이 밤이 다 가도록…’ 「촛불」
‘그대 고운 목소리에/ 내 마음 흔들리고/ 나도 모르게 어느새/ 사랑하게 되었네/ 깊은 밤에도 잠 못 들고/ 그대 모습만 떠올라/ 사랑은 이렇게 말없이 와서/ 내 온 마음을 사로잡네…’ 「사랑하는 이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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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는 공권력과 지배세력의 눈을 가시 돋게 할 수상한 ‘삐딱’선이 없다. 여느 사랑노래처럼 은은하고 낭만적이다. 「시인의 마을」과 함께 1978년 데뷔작에서 동시 히트한 「촛불」로 정태춘은 이듬해 MBC 신인가수상을 수상하기까지 했다. 지금에 와서 보면 정태춘과 방송사 시상은 참으로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다. 하지만 이 시절에 그는 본인 내면의 진의와 무관하게 대중의 인식 측면에서 포크의 로맨티시즘 계열에 머물러 있었다.
물론 첫 앨범에서부터 「목포의 노래(여드레 팔십리)」나 「그네」와 같은 노래가 웅변하듯 강한 토속성이 불러오는 민족주의적 터치가 완연하고, 그가 전혀 통속성의 틀에 함몰되어 있지 않음을 시사하는 「(산사의 아침)탁발승의 노래」(‘이 발길 따라 오던 속세 물결도 억겁 속으로 사라지고/ 멀고 먼 뒤를 보면 부르지도 못할 이름 없는 수많은 중생들/ 추녀 끝에 떨어지는 풍경 소리만 극락왕생하고…’)도 있다. 「서해에서」의 경우는 1980년대 중반 운동권이라는 말을 제도권 언론이 동원하기 시작할 무렵에 시위 학생들이 감옥에 끌려간 친구를 그리며 현장에서 부르는 노래 중 하나였다. 얼핏 들어도 애초부터 1970년대의 주류 포크와는 차이가 났다.
1집의 성공 후 직접 작업을 주도해 자기세계를 굴착해 들어간 1980년의 2집과 국악을 전면화한 1982년 3집의 흥행성적은 1집에 비해 초라했다. (자기 뜻대로 음악을 만드는 것과 대중성의 확보란 동시 수확하기가 어려운 법!) 1984년 「떠나가는 배」와 「사랑하는 이에게」(정태춘의 몇 안 되는 러브 송으로 나중 1988년 앨범 <무진, 새 노래>에서는 속편 격 「사랑하는 이에게 2」를 수록했다)로 다시 기운을 차렸고 이듬해 여섯 번째 앨범으로는 재기에 확실히 성공했다. 이 음반에서 「북한강에서」는 라디오 전파를 독점했다. 다시 사람들이 정태춘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이 단계에서는 소란스런 도시생활과의 작별, 사색의 천착 그리고 새로운 도약의 준비가 스멀거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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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기 멀리 해가 뜨는 새벽 강에/ 홀로 나와 그 찬물에 얼굴을 씻고/ 서울이라는 아주 낯선 이름과/ 또 당신 이름과 그 텅 빈 거릴 생각하오/ 강가에는 안개가, 안개가 가득 피어나오…’ 「북한강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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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과거의 자신과의 작별이었다. 관념적이고 어설프고 낭만적으로 헤맨 지난날과 금을 긋는 것이다. 헤어짐의 공간은 다름 아닌 강. 연암 박지원은 <열하일기>에서 “이별할 때 그 장소가 어디냐에 따라서 괴로움은 더욱 커지는 것이다. 그 장소란 정자도 아니요 누각도 아니며 산도 아니고 들도 아니다. 물이 있는 곳이 바로 그러한 장소”라며 하량(河粱)을 이별의 최적 장소로 적고 있다. 감상적인 옛 자신을 강에 투척한 뒤 정태춘에게 이후 강의 의미는 새롭게 변치(變置)되었다. 정태춘은 강 노래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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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검은 물결 강을 건너 아 환멸의 90년대를 지나간다…’ 「건너간다」
‘저 도랑을 타고 넘치는 황토물을 보라/ 쿨렁쿨렁 웅성거리며 쏟아져 내려간다/ 물도랑이 좁다 여울목이 좁다/ 강으로, 강으로 밀고 밀려간다/ 막아서는 가시덤불, 가로막는 돌무더기/ 에라, 이 물줄기를 당할까보냐… 「황토강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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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기인 1987년 6월 시민항쟁을 겪고 나서 그는 직설(直說)에 대한 뚜렷한 자신감을 갖게 된다. 추상적, 과거 지향적 언어의 나열은 종지부를 찍었다. 1988년의 앨범 <무진, 새 노래>는 그 발로였다. 앨범의 마지막에 수록된 걸작 「얘기2」는 정태춘 자신의 처절한 고백을 시작으로 ‘고통에서 벗어나 시대를 똑바로 인식하고 그리고 치열하게 덤비고 밝은 미래에 대한 믿음을 갖는’ 투쟁의 항로를 예고한다. 노랫말에서는 ‘귀를 열고 눈을 똑바로 뜨고 어설프게나마 나는 듣고 보았네’라고 하지만 그의 현실 포착은 조금도 어설프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미래로 닿아갔다. 그것은 청춘 자유의 찬가인 밥 딜런의 ‘구르는 돌처럼(Like a rolling stone)’의 현실인식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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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로 서울로 모이는 군중들 지식의 시장에 늘어선 젊은이/ 예배당 가득히 넘치는 찬미와 정거장마다엔 떠나는 사람들/ 영웅이 부르는 (압제의) 노래와 젖은 논 벼 베는 농부의 발자국/ 빛바랜 병풍과 무너진 성황당, 내 겨레 고난의 반도 땅 속 앓이를/ 얼마 안 있어 내 아이도 낳고 그에게 해 줄 말은 무언가/ 이제까지도 눈에 잘 안 띄고 귀하고 듣기 어려웠던 얘기들/ 아직도 풋풋한 바보네 인심과 양심을 지키는 가난한 이웃들/ 환인의 나라와 비류의 역사 험난한 역경 속 이어온 문화를/ 총명한 아이들의 해맑은 눈빛과 당당한 조국의 새로운 미래를/ 깨었는 백성의 넘치는 기상과 한 뜻의 노래와 민족의 재통일을’ 「얘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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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목에서 정확히 10년 전의 노래인 「시인의 마을」과 비교해 보자.
‘나는 고독의 친구/ 방황의 친구/ 상념 끊기지 않는/ 번민의 시인이라도 좋겠소/ 나는 일몰의 고갯길을 넘어가는/ 고행의 방랑자처럼/ 하늘의 빗긴 노을 바라보며/ 시인의 마을에 밤이 오는 소릴 들을 테요…’ 그의 어법은 마침내 관념의 언어에서 사실의 언어로 탈태(奪胎)했다.
시적 언어의 나열에서 스토리를 전하고 있고 그 스토리텔링에는 강성의 메시지로 가득했다. 그러나 메신저로 완성의 어미를 찍은 것 또한 아니었다. 더 큰 변화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자신이 손수 민주투사가 되어 현장을 누비는 것이었다. 노래하고 사라지는 가수가 아니라 현장에서 시위대들과 함께 외치는 행동가, 활동가가 되는 것이었다. 심지어 나중 한 방송에 나와 “나의 궁극적 지향은 이 땅의 민주화가 아니라 혁명!”이라고 발언하기도 했다.
1988년 노래극 <송아지 송아지 누렁송아지>는 ‘다시 태어난 정태춘’의 시발점이 되었다. ‘왜 우리 송아지가 얼룩송아지란 말인가?’ 서구에 눌린 민족의 정체성 혼란을 일깨우는 이 공연은 철저히 그가 제작을 주도했다. 그리고 왜곡시대와 대치한 한 예술가의 고뇌는 행동으로 폭발하기 시작했다. 현장에 몸을 던지다시피 했다. 전교조 지지 순회공연, 전태일 열사 추모 일일찻집, 중소기업 분규 현장, 농민집회 등 모든 시위와 집회의 장소를 찾아가 노래했다.
활동 드라이브는 고스란히 음악에도 반영되었다. 1990년 앨범
<아 대한민국>이 그 집적물이었다. 여기 수록된 곡 「우리들의 죽음」은 생계 때문에 아이를 맡기지 못해 문을 잠그고 일 나간 사이에 성냥불이 붙어 화재로 죽은 어린 남매의 비극적 실화를 노래하고 있다. ‘더운 여름날 전기 사용량에 아랑곳하지 않고 아파트의 여러 대 에어컨을 빵빵하게 틀어대는’ 아무리 천박한 부자라도, 인간이라면 일말의 동정심이 있다면 조금의 측은지심이 있다면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곡이다. 「인사동」은
‘놋요강에 개밥 그릇까지/ 가마솥에 누릉지까지/ 두메산골 초가 마루까지/ 뒤져 뒤져 쓸어다’ 양코쟁이에게 파는 인사동의 일그러진 상업행태를 질타한다.
자신의 레이더에 걸린 모든 세상의 질곡과 부조리를 가차 없이 까발리는 것이다. 앨범과 제목이 같은 곡 「아 대한민국」은 그 꼭짓점이다. 이 정도면 비판적 포크, 개혁적 포크가 아니라 가히 혁명적 포크라고 할까. 이러니 아직 사전심의 즉 검열이 엄존하는 현실에서 노랫말이 무사통과될 수가 없다. 「황토강으로」를 제외하고 전곡의 노랫말이 공륜의 심의에서 반려되었다.
정태춘은 포기하지 않고 왜곡된 사회 룰을 통째로 거부한다는 의미에서 불법음반을 제작해 던지는 담대한 저항으로 맞섰다. 그리고 사전심의에 대한 헌법 소원을 청구했고 길고긴 사전심의 철폐운동을 펼친 끝에 1996년 드디어 헌법재판소로부터 위헌 판정을 받아내기에 이르렀다. 서태지 세대들 중 더러는 「시대유감」 파동에 의해 서태지가 사전심의 폐지를 이끌어낸 것으로 알지만 (촉발제가 된 것은 사실일지라도) 그 공은 전적으로 정태춘과 박은옥 부부의 것이다.
정태춘은
<아 대한민국>에 이어 1990년대의 명반으로 꼽히는 1993년의 <92년 장마, 종로에서>, 1998년의 <정동진/건너간다>, 2002년의
<다시, 첫 차를 기다리며>를 잇달아 내놓으면서 여전히 표현영역에 있어서 음악은 현실투쟁과 등권(等權)임을 만인에 고지했다. 나이 마흔 이후의 이 세 작품은 비록 문민정부 출범 후 사회운동의 급격한 퇴조에 의해 분노가 수그러든 점이 없지 않지만 큰 맥에서 ‘정태춘다움’은 변함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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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는 종로에서 깃발 군중을 기다리지 마라/ 기자들을 기다리지 마라/ 비에 젖은 이 거리 위로 사람들이 그저 흘러간다/ 흐르는 것이 어디 사람뿐이냐/ 우리들의 한 시대도 거기 묻혀 흘러간다…’ 「92년 장마 종로에서」
‘우리는 신성한 노동의 오늘 하루, 우리들 인생의 소중한 또 하루를/ 이 강을 건너 다시 지하로 숨어드는 전철에 흔들리며 그저 내맡긴 몸뚱아리로/ 또 하루를 지우며 가는가…’ 「이 어두운 터널을 박차고」
‘어디에도 붉은 꽃을 심지 마라/ 거리에도 산비탈에도 너희 집 마당가에도/ 살아남은 자들의 가슴엔 아직도 칸나보다 봉숭아보다 더욱 붉은 저 꽃들/ 어디에도 붉은 꽃을 심지 마라…’ 「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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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 없이 달려오던 정태춘은 2002년 이후 신작을 내지 않았다. 노래를 그만두겠다, 만들지 않겠다고 했다. 주변에서 그의 새 노래를 듣고 싶다고 해도, 2009년 데뷔 30주년을 맞아 콘서트와 골든 앨범은 있었지만 신곡 앨범은 감감 무소식이었다. 그러다가 2012년 아내 박은옥을 위해 만들었다는
<바다로 가는 시내버스>를 내놓았다. 「서울역 이씨」, 「강이 그리워」, 「섬진강 박시인」 등이 수록된 이 신보의 마지막에는 「92년 장마, 종로에서」가 새 편곡으로 실려 있다. 스스로는 ‘현장을 떠나’ 만든 작품이라지만 현장에 대한 채무감이 보이지 않게 웅크리고 있음이 엿보인다.
‘너는 가늘게 반짝이며 밤바다로 가고/ 네가 떠나간 여울목에 다시 네가 있는데/ 산은 여기저기 상처 난 길들을 지우고/ 가난한 시인 네 외딴 빈 집 개만 짖는데/ 강이 그리워 네가 그리워/ 그치지 않는 네 노래 들으려 여기 왔지…’ 박은옥이 부르는 이 「강이 그리워」에 그려진 강은 정태춘에게 있어서 늘 그랬듯 상념, 사색, 낭만의 언어가 아니라 재도약의 의미망 아니던가.
모든 것을 떠나 과거 이름만을 먹고살지 않고 지속적으로 신보를 내고 있다는 것만으로 그는 국보급 포크 뮤지션이다. 우리한테 정태춘과 같은 ‘레알’ 음악가가 있다는 것은 실로 행운이요, 축복이다. 마지막으로 정태춘의 위대한 레알 송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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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여기 함께 살고 있지 않나/ 기름진 음식과 술이 넘치는 이 땅/ 최저임금도 받지 못해 싸우다가 쫓겨난/ 힘없는 공순이들은 말고/ 하룻밤 향락의 화대로 일천만원씩이나 뿌려대는/ 저 재벌의 아들과 함께/ 우린 모두 풍요롭게 살고 있지 않나/ 우린 모두 만족하게 살고 있지 않나/ 아, 대한민국. 아, 우리의 공화국... 우린 여기 함께 살고 있지 않나/ 거짓 민주 자유의 구호가 넘쳐흐르는 이 땅/ 고단한 민중의 역사/ 허리 잘려 찢겨진 상처로 아직도 우는데/ 군림하는 자들의 배부른 노래와 피의 채찍 아래/ 마른 무릎을 꺾고/ 우린 너무도 질기게 참고 살아왔지/ 우린 너무 오래 참고 살아왔어/ 아, 대한민국, 아, 저들의 공화국…’ 「아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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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노래를 정태춘의 이름도 모르는 1990년생 젊은이에게 들려줬다. 1992년에 발표한 곡이라고 하고. “20년 전 곡이라고요? 그때도 그랬어요? 지금하고 똑 같은데요!”
글/ 임진모(jjinmoo@izm.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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