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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을 체포한 형사에게 복수하는 여인 이야기 - 『살의의 쐐기』

인질극과 밀실 사건 사이 그녀가 그를 죽여야만 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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꼼짝없이 건장한 사내들은 총과 니트로글리세린 병을 가진 여인 버지니아 도지에게 제압당한다. 그 시간동안 스티브 카렐라는 거대한 저택에서 자살한 노인의 사인을 파헤치고 있다. 자살이 분명해 보이지만, 어딘가 냄새가 나는 사건. 87분서에서 인질극이 벌어지는 동안, 스티브 카렐라는 밀실살인사건을 해결하는 것이다. 두 개의 이야기가 병렬적으로 펼쳐지면서 하나로 합쳐지는 구성을, 에드 맥베인은 탁월한 긴장감으로 그려낸다.

에드 맥베인의 ‘87분서’ 시리즈를 처음 읽은 건 동서추리문고의 『경관혐오』였다. 누구나처럼 홈즈, 포와로, 브라운 신부 등으로 시작했던 추리소설 탐독에서 현실적인 경찰, 형사들의 이야기를 읽는 기분은 조금 색달랐다. 탐정은 대부분 자유인이다. 핑커튼 탐정 사무소처럼 기업에 속한 탐정들도 있지만, 대개의 경우는 조직과는 거리가 있는 혹은 거부하는 사람들이 탐정이 된다. 그들은 의뢰가 들어오는 사건을 처리하고, 자신의 가치와 원칙에 따라 움직인다. 그것이 돈이건, 명예이건 혹은 다른 목적이건 간에.

하지만 경찰은 다르다. 그들은 조직원인 동시에 시민에 대한 봉사와 그들을 지켜야 하는 의무가 있다. 맡기 싫은 사건을 거부할 수도 없고, 범인에게 동정이 간다고 해서 진실을 피할 수도 없다. 현대 사회의 시스템이 확고해지면서 경찰의 임무는 더욱 막중해졌다. 최근 미스터리와 스릴러 소설을 보면 탐정보다는 경찰, 형사가 등장하는 작품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한 가지 이유는 현대 사회에서 탐정이 차지하는 역할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사회가 불안정할 때에는 일종의 장외 권력으로서 탐정이 등장하고 활약할 여지가 많아지지만, 사회가 안정될수록 경찰의 힘이 강해지고 중요해지는 것이다. 게다가 한국에서는 탐정이라는 직업이 법적으로 불가능하니 더욱 탐정소설이 나오기가 힘들고.

사건을 수사하고, 범인을 체포하는 경찰 역시 인간이다. 일본에는 『제 3의 시효』『얼굴』의 요코야마 히데오, 『은폐수사』의 곤노 빈처럼 경찰 내부의 복잡한 권력다툼이나 인간관계 등을 잘 파헤치는 작가들도 있다. 그들이 파고들어가는 것은 ‘경찰’이라는 얼굴을 가진 인간이다. 권력다툼에서 희생되거나 몰락하기도 하고, 조직의 안정과 보편적인 정의 수호 사이에서 길을 잃기도 하고 때로는 아주 사소한 인간적인 약점 때문에 방황하기도 한다. 반면에 ‘영웅’적인 면모를 그려내자면 경찰 내부에서도 독선적이고 어느 모로 보나 튀는 형사를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경우가 많다. 아웃사이더가 되지 않는다면, 경찰에서 자신의 직관과 추리만을 믿고 돌진하기가 쉽지 않으니까.

그런 점에서 에드 맥베인의 ‘87분서’ 시리즈는 경찰 소설의 전범이라고 할만하다. 『경관혐오』가 나온 1956년부터 시작된 ‘87분서’ 시리즈는 2005년의 『Fiddlers』까지 무려 50년간 이어진 시리즈다. 가상의 도시 아이솔라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에드 맥베인은 시대배경과 현실의 사건들을 충실하게 반영했다. 87분서 형사들의 구성부터 당시 뉴욕시의 인종 비율을 그대로 적용하여 흑인 하나, 유대인 하나가 나온다. 9.11. 사태 이후의 불안이 작품에 반영되기도 하는 등 에드 맥베인은 87분서 시리즈가 우리 현실의 이야기라는 점을 결코 잊지 않았다. 다만 시간이 흐르면서, 등장인물들의 나이는 애매해졌다. 그들을 죽이거나 은퇴시키면서 새로운 주인공으로 채우는 방법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하지만 그건 대중 소설의 즐거움이기도 하다. 슈퍼맨과 배트맨이 나이 들지 않는 것처럼. 필명으로 『블랙보드 정글』을 쓰기도 했던 에드 맥베인은 필력이 대단했고, 자신의 방식으로 대중소설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작가였다. 스티븐 킹의 찬사를 빌어 말한다면 ‘그는 장르 소설에 리얼리즘을 성공적으로 결합시킨 최초의 작가였다. 대중 소설의 한 분야를 창조했으며 1960년대에서 2000년대에 이르기까지 미국의 시대상을 충실히 반영했다……단순히 재미뿐만 아니라 시대와 문화를 솔직하게 반영하는 이야기를 어떻게 쓰는지 베이비붐 세대에게 가르쳤다. 그는 경찰 소설이라는 장르를 개척한 사람 이상으로 기억될 것이고, 끝내주는 작가였다.’

87분서 시리즈를 읽는 재미는 요즘 미국 드라마 범죄물을 보는 것과도 비슷하다. <로 앤 오더> <CSI> 등을 보면 보통의 경찰들이 나온다. 엄청난 추리력이나 신체 능력을 가진 ‘영웅’이 아니라 각자의 전문 분야를 가진 보통의 경찰들이. 그들이 서로 힘을 합하고 때로는 반목하다가도 계속해서 한 팀으로서 사건을 해결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관계를 회복한다. 그들은 하나의 유사 가족, 공동체로서 기능한다. 때로는 등장인물이 죽거나 전근을 가고 새로운 인물이 합류하지만 드라마의 기본적인 구성이나 톤은 바뀌지 않는다. 익숙한 구성의 이야기와 친숙한 등장인물을 통해 편안함을 느끼고 그들이 보여주는, 현실을 반영한 드라마틱하고 스릴 넘치는 이야기들에 귀를 기울인다.

이번에 나온 『살의의 쐐기』는 1959년에 나온 작품이다. 한 여인이 38구경 권총과 니트로글리세린 병을 가지고 87분서 형사실로 들어온다. 내근 중인 모든 형사들을 인질로 잡아두고는, 스티브 카렐라 형사를 기다린다. 감옥에서 죽은 자신의 남편을 체포한 카렐라를 죽이겠다는 것이다.

나는 정당한 일을 하는 거야.
꼭 해야만 하는 일이야.
그녀는 간단한 공식이라고 생각했다. 목숨에는 목숨.
내 프랭크의 목숨에 대한 대가로 카렐라의 목숨. 그것이 공평한 것이다.


총이라면 한 명 정도의 희생으로 더 큰 참극을 막을 수 있겠지만, 문제는 니트로글리세린이다. 그것이 폭발하면 87분서 건물 전체가 무너져 내릴 것이다. 그래서 꼼짝없이 건장한 사내들은 총과 니트로글리세린 병을 가진 여인 버지니아 도지에게 제압당한다. 그 시간동안 스티브 카렐라는 거대한 저택에서 자살한 노인의 사인을 파헤치고 있다. 자살이 분명해 보이지만, 어딘가 냄새가 나는 사건. 87분서에서 인질극이 벌어지는 동안, 스티브 카렐라는 밀실살인사건을 해결하는 것이다. 두 개의 이야기가 병렬적으로 펼쳐지면서 하나로 합쳐지는 구성을, 에드 맥베인은 탁월한 긴장감으로 그려낸다. 때로 유머까지 섞어가며. 지금처럼 핸드폰이 있다면 이야기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었겠지만, 『살의의 쐐기』는 그야말로 ‘쐐기’처럼 독자의 마음에 빗장을 걸어두고 나가지 못하게 만드는 짜릿한 작품이다.

에드 맥베인의 소설은 무엇보다 문장을 읽는 재미가 각별하다. 상황을 설명할 때는 간결하고 정확하게 모든 것을 드러내고, 사람들의 마음을 묘사할 때는 적절하고 예리하다. 그리고 문장들의 흐름이 아주 좋다. 때로는 유머러스하게, 때로는 싸늘하게, 때로는 이성적으로 독자들을 자유자재로 이끈다. 이를테면 『살의의 쐐기』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 코튼 호스가, 87분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이렇게 설명한다.

87분서로 전근을 오게 되었을 때, 그는 이곳에 강한 적대감을 갖고 있었다. 빈민가와 빈민가에 사는 사람들에게 거부감이 있었고, 이 형사실 사람들에게 거부감이 있었다……빈민가에서 사는 사람들도 같은 사람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들은 그와 똑같은 기쁨으로 즐거워했고, 그가 겪어 본 적도 없는 불행으로 고통받고 있었다. 그들은 사랑과 존경을 원했고, 공동주택의 벽이 동물 우리의 철창과 같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범죄는 범죄였고, 범죄의 악을 합리화하려는 87분서 형사들은 아무도 없었다……그들은 빈민가에 사는 사람들을 자동적으로 범죄자와 동일시하지 않았다. 도둑은 도둑이었으나 사람은 또한 사람이었다. 이것이 그들의 공정성이었다.

에드 맥베인은 뛰어난 대중소설 작가다. 『살의의 쐐기』를 읽으면서 다시 한 번 감탄했다. 마초적이고, 시대의 한계를 뛰어넘지는 못하지만 에드 맥베인은 자신의 영역 안에서는 누구와 맞서도 때려눕힐 수 있는 강인한 작가다. 하나의 공간에서 벌어지는 ‘작은’ 사건을 이렇게 흥미진진하게 그려낸 『살의의 쐐기』만으로도 증명된다. 앞으로 에드 맥베인의 ‘87분서’ 시리즈가 몇 개의 출판사에서 계속 출간 예정이라는 사실이 더욱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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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의의 쐐기 에드 맥베인 저/박진세 역 | 피니스아프리카에
버지니아 도지는 스티브 카렐라의 머리에 총알구멍을 내고 싶어 한다. 스티브 카렐라를 죽이기 위해서라면 87분서의 형사 전부를 죽여도 상관없다. 총과 니트로글리세린 병으로 무장한 그녀는 형사실에서 조용한 오후를 보낸다. 도와줄 사람 하나 없는 형사실에 억류된 형사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죽음을 맞으러 돌아올 스티브 카렐라를 기다리는 것뿐이다. 언제 형사실로 돌아올지 모르는 스티브 카렐라를 기다리는 형사들은 인질극에서 벗어나기 위해 온갖 지혜를 짜낸다. 한편, 자살 사건을 조사하러 간 카렐라는 밀실이라는 벽에 부닥친다. 자살일까, 타살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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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봉석

대중문화평론가, 영화평론가. 현 <에이코믹스> 편집장. <씨네21> <한겨레> 기자, 컬처 매거진 <브뤼트>의 편집장을 지냈고 영화, 장르소설, 만화, 대중문화, 일본문화 등에 대한 글을 다양하게 쓴다. 『하드보일드는 나의 힘> 『컬처 트렌드를 읽는 즐거움』 『전방위 글쓰기』 『영화리뷰쓰기』 『공상이상 직업의 세계』 등을 썼고, 공저로는 <좀비사전』 『시네마 수학』 등이 있다. 『자퇴 매뉴얼』 『한국스릴러문학단편선』 등을 기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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