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처럼 생각하지 말고 당신처럼 생각하라!”
철학자 강신주가 들뢰즈를 떠나보냈던 1995년
들뢰즈는 내게 있어 하나의 기호였다. 그것도 아주 고강도의 기호였다. 나가르주나, 스피노자, 비트겐슈타인 등이 내게 사유하는 방식을 가르쳐주었다면, 들뢰즈는 사유 자체를 가능하게 했다. 그러니까 1995년 전후에 내게 들뢰즈의 책을 읽는다는 것은 스스로 생각하겠다는 의지에 다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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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오로지 예술을 통해서만 우리 자신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또 오로지 예술을 통해서만 우리가 보고 있는 세계와는 다른, 딴 사람의 눈에 비친 세계에 관해서 알 수 있다. 예술이 없었다면 그 다른 세계의 풍경은 달나라의 풍경만큼이나 영영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채로 남아 있을 것이다. 예술 덕분에 우리는 하나의 세계, 즉 자신의 세계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세계가 증식하는 것을 보게 된다.
-『프루스트와 기호들(Proust et les signes)』
어느 겨울날, 들뢰즈의 자살 소식...
1995년 겨울 어느 날로 기억된다. 가난한 대학원 학생이었던 탓에 나는 학생들에게 과외교습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날 과외도 밤이 늦어서야 끝났다. 오늘도 말이 길어졌나보다. 막차 시간이 다 되었기에 나는 겨울바람이 매섭게 몰아치는 거리를 뚫고 서둘러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다행히도 2호선 전철 막차를 타는 데 성공했다. 날씨가 추워서인지 아니면 마지막 차여서 그런지, 전철 안은 썰렁했다. 몇몇 취객이 좌석에 앉아 졸고 있었다. 막 찬바람을 맞아서 그런지 좌석에 앉자마자 졸음이 밀려들었다. 그렇지만 졸아서는 안 된다. 잘못하다가는 막차를 탄 보람도 없이 내려야 할 정거장을 지나칠 수도 있을 테니까. 그래서 전철 안 짐받이를 올려다보았다. 다른 손님이 놓고 내린 신문이라도 보면서 졸음을 쫓을 생각이었다. 다행히 꾸겨진 신문 한 부를 찾았다.
별 다른 생각 없이 신문을 넘기다가 나는 벼락에라도 맞은 듯 멈출 수밖에 없었다. “생성의 철학자 들뢰즈 자살”이라는 제목을 가진 작은 문화면 기사였던 것으로 기억난다. 오랜 투병 끝에 자신이 살던 아파트에서 투신자살로 삶을 마무리했다는 내용이었다. 짧은 기사를 읽자마자 나의 눈에는 눈물이 맺혔다. 잠시 동안 멘붕에 빠졌다고나 할까. 정거장도 하나 지나칠 정도로 나는 넋이 빠져 있었다. 어쩌면 들뢰즈와 그의 죽음을 생각하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그랬는지도 모를 일이다. 인적이 끊어진 차가운 거리를 걸어 집으로 돌아가면서 나는 깊은 상념에 잠겼다. 당연한 일이다. 당시 나는 한참 들뢰즈라는 철학자에 한참 빠져 있을 때였으니까. 현재 프랑스에 살아있어 나와 같은 공기를 마시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얼마나 행복했었는데. 이제 그도 내가 좋아했던 철학자들처럼 오직 책으로만 볼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이다. 그러니 안타까울 수밖에 없다.
철학자가 되기 위해 넘어야 했던 거인들의 어깨
지금 돌아보면 나의 대학원 시절 내게는 거대한 암벽과 같이 나를 압도했던 철학자들이 몇 명 있었다. “올라오려면 올라와봐!” 그들은 아이거 북벽처럼 압도적이었다. 철학자가 되기로 작정한 내가 그들을 넘지 못한다면, 어떻게 철학자가 될 수 있다는 말인가. 나가르주나, 스피노자, 주희, 그리고 비트겐슈타인이 그랬다. 여기에 한 명 더 강력한 암벽가 추가된 것이다. 그가 바로 현대 프랑스철학의 대가 들뢰즈였다. 특히 그가 남긴 수많은 책 중 『프루스트와 기호들(Proust et les signes)』은 내게 너무도 강한 인상을 남겼다. 철학, 나아가 인문학의 정신이 어디에 있는지 이처럼 분명하게 가르쳐주었던 책도 없을 것이다. 아직도 “한 사람이 탄생하면 하나의 세계도 탄생한다”는 들뢰즈의 가르침은 내 뇌리에 당시와 똑같은 울림을 주고 있을 정도다.
『프루스트와 기호들』에서 들뢰즈는 말했던 적이 있다. “사유하도록 강요하는 것이 바로 기호이다. 기호는 우연한 마주침의 대상이다.” 모든 것이 우리로 하여금 사유하도록 하는 것은 아니다. 너무나 평범하고 너무나 상투적인 것은 우리에게 사유는커녕 권태를 가져주기 마련이니까. 나의 머리를 뒤죽박죽 흩어버리고 새롭게 정리하도록 만드는 것, 오직 그것만이 들뢰즈가 말한 기호라는 칭호에 걸맞을 수 있다. 그렇다. 들뢰즈는 내게 있어 하나의 기호였다. 그것도 아주 고강도의 기호였다. 나가르주나, 스피노자, 비트겐슈타인 등이 내게 사유하는 방식을 가르쳐주었다면, 들뢰즈는 사유 자체를 가능하게 했다. 그러니까 1995년 전후에 내게 들뢰즈의 책을 읽는다는 것은 스스로 생각하겠다는 의지에 다름 아니었다. 그렇다. 다른 철학자들에게서 나는 철학적 정보를 배웠지만, 들뢰즈로부터 나는 스스로 생각하는 법을 배운 것이다.
“나처럼 생각하지 말고 당신처럼 생각하라!”
들뢰즈는 항상 내게 속삭이곤 했다. “나처럼 생각하지 말고 당신처럼 생각하라!” 한 마디로 말해 들뢰즈 자신을 흉내 내지 말고 당신만의 삶과 사유를 펼치라는 것이었다. 어쩌면 이것이 바로 들뢰즈가 자신의 정신적 스승 니체로부터 배운 가르침 아닌가. “차라투스트라를 따라하지 말고, 자신에게 집중할 때 차라투스트라는 되돌아 올 것이다”라고 니체도 외쳤던 적이 있으니까. 자신의 주저 『차이와 반복』에서 들뢰즈가 말한 ‘단독성’과 ‘보편성’이라는 프레임은 바로 이것을 개념화한 것 아닌가. 그렇다. 미리 보편성은 존재할 수 없는 법이다. 보편성은 단지 단독성을 통해서만 확보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만의 사랑을 철저하게 영위한 사람만이 자신만큼이나 처절하게 사랑을 경험한 사람의 속내에 공감할 수 있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일 것이다.
자신뿐만 아니라 모든 것의 단독성에 육박하여 그것에 집요하게 머물러라! 오직 그럴 때에만 보편성이라는 공명이 발생할 수 있을 것이다. 너무나 소중한 가르침이었다. 철학자는 과거 철학자의 가르침을 앵무새처럼 읊조려는 안 되고, 자기만의 목소리를 내야만 한다는 가르침이었으니까. 그렇지만 이것도 또한 얼마나 힘든 일인가. 자신만의 목소리는 항상 새로운 목소리일 수밖에 없고, 그것은 항상 불온한 목소리로 들릴 수밖에 없으니까 말이다. 자기만의 목소리를 내려고 노력해본 사람이라면 안다. 그것이 얼마나 많은 몰이해를 낳는지, 그리고 그것이 끝내 엄청난 불이익과 심지어는 탄압까지 초래하는지. 이렇게 자기만의 목소리를 내는 것을 주저할 때, 시인 김수영이 시로서 나를 격려했다면 철학자 들뢰즈는 엄밀한 철학 개념으로 나에게 힘을 더해주었다. 너무나 고마운 일이다.
들뢰즈가 나에게 가르쳐준 것
1995년 겨울밤 나는 막차마저 끊긴 삭막한 거리를 걷고 있었다. 지금 돌아보니 이상하기만 하다. 무엇이 그리 슬퍼서 눈물까지 흘렸던 것일까. 당시 나는 들뢰즈를 직접 보고 싶었나 보다. 그렇다고 해서 그에게서 무엇인가 물어보고 싶었던 것이 있어서는 아니었다. 단지 그가 어떤 식으로 걷는지, 그가 어떤 커피를 즐겨 마시는지, 그가 진진한 이야기를 할 때 어떤 표정을 짓는지 직접 보고 싶었을 뿐이다. 직접 만났다면 내가 그에게 제자의 제스처를 취하지는 않았으리라는 것은 확실하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고 가르쳐준 철학자에게 보답할 수 있는 것은 제자의 제스처가 아니라 당당한 철학자의 제스처일 테니까 말이다. 그렇지만 그와 헤어질 때 단지 딱 한 번 그에게 고백했을 것이다. “메르시(merci)!” 당혹해하는 들뢰즈를 뒤에 남기고 떠나며. 어쩌면 그도 얼마 지나지 않아 엷은 미소를 띠웠을지도 모르겠다.
이 글을 쓴 철학자 강신주는.,,
강신주는 독자들에게 끊임없이 사유하라고 권한다. 그리고 사랑하라고 말한다. 때로는 시로, 역사로, 일상의 이야기로 강신주는 끊임없이 독자를 자극한다. 그는 강단에서 내려와 ‘교수님’이라는 직함을 포기하고, 대중철학자가 되었다.
그 만큼 많은 사람들과 대화하고 강연한 철학자가 또 있을까. 그 대화를 기반으로 한 그의 책들은, 삶에 무척이나 밀접한 사례로 독자들의 마음을 파고든다. 이를 관통할 수 있는 철학 개념을 대중의 언어로 쉽게 설명하지만, 때때로 머리를 번쩍 깨울 만큼 날카로운 이야기를 전달하기도 한다. 그의 글을 읽으면 때론 아프고, 때론 즐겁다. 그의 글은 우리를 고민하게 만들고, 행복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렇게 그는 우리를 철학하게 만든다. 『철학이 필요한 시간』『상처받지 않을 권리』『철학vs철학』『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김수영을 위하여』『철학의 시대』등의 저서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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