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초연 때 잭 역할에 대한 얘기가 나왔어요. 하지만 먼로 역을 할 만한 사람이 별로 없다면서 제게 맡기셨죠. 사실 잭의 컨셉도 초연 땐 좀 건달같은, 가벼운 역이었어요. 김원준 씨가 그 역할을 맡았는데 좀 더 쇼맨십이 강한 역이었어요. 그런데 이번에 제가 잭을 맡게 된 건 새로운 잭을 보고싶다는 거였죠. 아마 굉장히 무겁고, 무서운 역이 될 거예요.”
왜?
연출은 김법래의 잭이 보고 싶었단다.
‘살인마 잭’부터 ‘잭 더 리퍼’라는 제목으로 세 번째 시즌을 보낼 때까지 잭 더 리퍼의 활력소, 촐랑 맞거나 얄밉거나 때론 능글맞은 먼로 기자 역을 도맡았던 김법래는 사실 이번 네 번째 시즌에선 느끼한 먼로로 캐릭터 구상까지 마친 상황이었다. 그런데 극 중 가장 임팩트 넘치는 살인마 잭이라니?
“사실 초연 때 잭 역할에 대한 얘기가 나왔어요. 하지만 먼로 역을 할 만한 사람이 별로 없다면서 제게 맡기셨죠. 사실 잭의 컨셉도 초연 땐 좀 건달같은, 가벼운 역이었어요. 김원준 씨가 그 역할을 맡았는데 좀 더 쇼맨십이 강한 역이었어요. 그런데 이번에 제가 잭을 맡게 된 건 새로운 잭을 보고싶다는 거였죠. 아마 굉장히 무겁고, 무서운 역이 될 거예요.”
잭 더 리퍼.
1888년 영국 런던에서 실제로 발생했던 잔인한 연쇄 살인 사건이 모티브가 된 작품으로, 뭐 3년 연속 매진과 오는 9월 도쿄 아오야마 공연이 있다는 홍보 없어도 뮤지컬 좀 안다 싶은 사람은 다 알고 기자도 두 번이나 관람했던 한국 뮤지컬의 몇 손가락 안에 드는 작품이다.
사실 뮤지컬 <잭 더 리퍼>는 체코가 원산지.
하지만 음악만 물 건너 왔을 뿐, 배우들이 역할에 불어넣은 생명력과 무대 위 공감각은 모두 한국산. 그래서 체코로의 역수출 얘기도 오가고 있다.
“무대 연출이나 기법, 드라마 구성도 저희 연출님이 다 각색했죠. 거의 95%가 창작이에요. 음악도 두 곡은 또 새로 작곡했기 때문에 창작 뮤지컬이라고 할 수 있죠. 오히려 역수출 얘기도 있어요. 체코에서 ‘한국 뮤지컬을 가져가서 공연하고 싶다.’는 얘기가 있었다고 들었어요.”
시즌 네 번째, 해외에서 들여온 라이센스 뮤지컬에 결코 뒤지지 않는 탄탄한 한국의 대형 창작 뮤지컬 <잭 더 리퍼>의 가장 큰 변화는 단연 김법래의 잭.
“신성우 씨와는 아예 다르죠. 제가 목소리도 굵고 덩치가 크잖아요. 이 캐릭터를 살려서 노래의 옥타브를 내려서 불러요. 음침하고 무겁게.”
가히 인간이 내기에 굉장히 낮은 음색, 실제로 성악을 전공한 그는 대학시절부터 성악을 전공한 사람 중에서도 그보다 낮은 음을 내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독보적이지만, 그게 때론 발목을 잡기도.
“연출님도 안타까워하시는데 음향에 있어 목소리가 너무 크면 하울링이 나서 사고가 생겨요. 저는 무대에서 굉장히 크게 부르는 편이거든요. 특히 에너지를 줘야 하는 부분에. 그래서 제 마이크 볼륨을 줄이죠. 중창할 땐 그래서 제 목소리가 제일 작아요. 제 음량은 다 내리거든요. 그래도 이번에는 연출님도 제 음이 낮으니까 전달을 위해서도 가장 큰 볼륨을 주라고 말씀하셨죠.”
그래서 가장 음침하고 무거운 목소리의 잭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초연 멤버들이 거의 그대로 다시 뭉쳐 화제가 된 <잭 더 리퍼>의 배우들은 이미 했던 역할, 찰떡 같이 맞는 호흡으로 연습량은 초연보단 많지 않다. 하지만 먼로가 아닌 잭으로 변신한 김법래는 남들이 안 나올 때도 나와 연습하는 중이다. 그 ‘남들’은 다름 아닌 유준상, 안재욱, 엄기준, 신성우 등이 되시겠다. 유달리 찰떡궁합을 자랑하는 <잭 더 리퍼>의 배우들, 하지만 그 ‘남들’ 역시 김법래의 애드리브 앞에선 긴장할 수밖에 없다고.
“예전에 다니엘 역을 했던 배우 중에 무대 위에서 실수를 한 적이 있어요. 제가 기계장치를 보고 ‘이게 뭐죠?’ 하면 그 친구가 ‘냉동장치입니다.’해야 하는 장면이 있는데 그 때 그 친구가 ‘냉동…냉동장치입니다.’하고 말을 씹었어요. 그래서 제가 ‘아! 냉동, 냉동장치?’하고 받아쳤죠. 그 순간에 관객들이 박수를 치며 웃더라고요.”
모든 순간이 약속으로 이뤄진 긴장감이 팽팽한 무대 위. 진지한 장면에서 터지는 별 것 아닌 배우의 애드리브는 관객과 배우의 암묵적인 코드를 형성하며 폭발적인 웃음을 터뜨린다.
“그게 대박이었죠. 저도 모르게 그랬거든요. 배우들은 저더러 사악하다고 해요. 어떻게 한 순간도 안 놓치느냐고. 준상이 형이 저를 제일 무서워해요. 가끔은 ‘오늘은 뭐 준비한 거 없냐.’며 즐거워하기도 하고요. 애드리브를 미리 준비하진 않아요. 저도 그 땐 순간적인 애드리브를 발휘한 건데 그게 최고의 애드리브였죠.”
물론 아무 때고 애드리브를 치진 않는다. 상대 배우가 애드리브를 받아치지 못한다면 무대 위 뿐 아니라 관객석까지 썰렁해지므로. 그만큼 배우 사이의 신뢰와 각자의 끼가 밑받침되어야 한다는 말씀.
“제가 상대 배우를 괴롭히는 것으로 웃음을 터뜨리는 편인데요. 뮤지컬 <삼총사>를 하면서 마지막 공연 때 지하 감옥에서 왕을 구하려는 장면에서는 느닷없이 곡괭이를 들고 나갔죠. 다른 배우들이 그런 절 보고 거의 기절했어요. 또 한 번은 <삼총사>에서 부상당한 아토스 역의 준상이 형을 부축해서 무대 뒤로 나와야 하는데 함께 무대 위에 있던 슈퍼 주니어 규현이한테 ‘오늘은 버려!’, 그래서 준상이 형을 버려두고 그냥 나왔죠. 나중에 준상이 형한테 혼났어요.”
누가 말리겠는가, 그의 순발력.
무대에 버려졌던 준상 씨, 혼자 기어 나왔단다.
성악을 하다 아주 우연히 뮤지컬계에 입문했고 9년 동안은 서울예술단과 시립가무단에서 한국무용, 재즈, 발레 등 다양한 춤과 정통 연기를 배우며 기본기를 다졌다. 그렇게 20여 년 사이, 뮤지컬 신인상과 남우주연상, 최고인기상 모두 휩쓸었다. 그런 그에게도 지금, 제일 자신 없는 게 있을까?
“노래, 춤, 연기 모두 두려울 건 없어요. 하지만 나이가 있다 보니까, 그리고 춤을 안 춘지도 오래 돼서요. 십 여 년 됐네요.”
하지만 최근 촬영을 마친 그의 첫 영화 <간첩>에서의 액션 씬까지 무난히 소화한 걸로 봐서 여전히 가벼운 몸놀림은 가능한 걸로.
뮤지컬과 영화를 넘나들며 종횡무진하고 있는 그에게도 시련은 있었다. 레미제라블 주인공 역을 위해 다섯 번이나 오디션을 보고 거의 확정적이었던 찰나, 영국인 연출가의 반대로 무산되었던 것. 라이센스 뮤지컬을 하면서 느낀 한국 스탭의 무기력함에 화가 나기도 했던 그. 그가 뮤지컬을 접을까도 생각했다는 건 뮤지컬계의 위기이기도 했다.
“쓰임을 당하는 배우지만 할 말은 해야죠. 한국 뮤지컬 발전을 위해서도 그러면 안 되니까요.”
한국 뮤지컬 발전을 위해 손해를 보더라도 하기 어려운 발언을 서슴지 않는 김법래, 그가 한국 뮤지컬 배우라 든든하다.
그의 작렬하는 카리스마가 녹아든 살인마 잭을 보기 위해 기자는 객석 의자부터 뒤로 넘어가지는 않는지 단단히 살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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