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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에 가장 중요한 것은 스펙도 연애도 아닌 ‘친구’

우정, 나보다 더 나를 잘 아는, 진정한 타인과의 만남 (1) 나의 가장 친한 친구는 내 편이 아닙니다 20대가 마음속에 품어야 할 키워드 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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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들 모이기만 하면 누가 누구를 좋아한다는 이야기, 누가 누구를 짝사랑하는데 한쪽은 꿈쩍도 안 한다는 이야기에 열을 올리지만, 사실 변덕이 죽 끓듯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사랑이야기보다 중요한 것은 그 사랑의 천태만상을 함께 이야기하고 있는 ‘친구들’ 그 자체라는 것을. 사랑이 떠나도, 사랑이 변해도, 남는 것은 친구들이라는 것을.



무엇인가 슬픈 일이 있을 때, 따뜻한 자리에 눕는 것도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좋은 자리, 거룩한 향기가 가득히 떠도는 자리가 있다.
그것은 상냥하면서도 깊고 측량할 수 없는, 우리들의 우정인 것이다.
-마르셀 프루스트

동창회식 우정을 넘어

나는 동창회를 싫어한다. 친구들끼리 주판알 퉁겨가며 인생의 속도를 비교하고, 괜스레 남의 삶을 곁눈질하기 싫어서. 누구는 의사가 되고 누구는 변호사가 되고 누구는 강남의 어느 아파트에 살고. 이런 요란한 소식들로 우리 삶의 가치를 저울질하기 싫어서. 전쟁 같은 대학 입시의 굴레에서 간신히 풀려난 후에도, 우리는 수많은 엄친아, 엄친딸들의 압박 속에서 좀처럼 벗어나기 어렵다. 꼭 이럴 필요가 있을까. 이것이 정말 행복의 지름길일까.

이렇게 또래 집단으로부터 받는 사회적 압력을 피어 프레셔peer pressure라고 한다. 나는 피어 프레셔를 어떻게든 느끼지 않기 위해 온갖 동창회와 각종 모임으로부터 줄기차게 도망 다니지만 피어peer 자체 친구들 자체는 정말 좋아한다. 어떻게 하면 이 지긋지긋한 피어 프레셔에서 벗어나 친구들, 그 자체의 존재를 사랑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친구들이 ‘가진 것’이 아니라 친구들 ‘그 자신’을 사랑할 수 있을까. 정말 대학생이 되면 진정한 친구를 사귀기 어려운 것일까. 더 나은 스펙, 더 나은 삶을 준비하느라 바빠서, 진정한 친구를 사귈 여유가 없는 것일까.

내가 20대에 느낀 첫 번째 갈등은 바로 그것이었다. 세상의 속도를 따라가느라 내 삶의 고유한 속도를 지닐 수 없을까 봐. 그렇게 세상의 속도를 동경하다가 진정한 친구를 찾을 수 없을까 봐.

나는 본능적으로 예감했다. 모두들 모이기만 하면 누가 누구를 좋아한다는 이야기, 누가 누구를 짝사랑하는데 한쪽은 꿈쩍도 안 한다는 이야기에 열을 올리지만, 사실 변덕이 죽 끓듯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사랑이야기보다 중요한 것은 그 사랑의 천태만상을 함께 이야기하고 있는 ‘친구들’ 그 자체라는 것을. 사랑이 떠나도, 사랑이 변해도, 남는 것은 친구들이라는 것을. 사랑은 물론 중요하지만 미처 시작되지 않은 사랑도, 이미 끝나버린 사랑도, 사랑에는 당최 소질이 없는 자신에 대한 푸념도, 함께 나눌 수 있는 것은 바로 친구들이라는 것을.

나는 20대에 가장 중요한 것은 스펙도 연애도 어학연수도 아닌 ‘친구’라고 믿는다. 누가 대학 가면 진정한 친구를 찾기 어렵다고 했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나는 대학교 때, 그것도 대학교 4학년 때부터 겨우 친해진 벗과 지금까지 매주 만나고 있고, 그 친구야말로 내 인생을 바꾼 최고의 스승이 되어주었다.


내 편을 들지 않는 우정?

나의 베프 K는 ‘편들지 않는 우정’의 힘을 보여준 멋진 친구다. 사실 친구의 존재는 ‘아, 저 사람은 내 편이구나’라는 느낌이 들 때 증명되곤 한다. 어디서 억울한 일을 당하고 왔을 때도 내 말을 차분히 들어주는 사람만 있다면 금방 응어리가 풀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 친구 K는 10년 넘게 만나면서도 한 번도 제대로 내 편을 들어주지 않아 사실은 좀 얄미울 때도 있었다.

그런데 이 친구의 어법은 매우 독특했다. 예컨대 내가 A라는 사람에게 기막힌 봉변을 당했다고 하소연을 하면, 그 친구는 배시시 웃으면서 때로는 얼굴을 찡그리면서 열심히 이야기를 들어주다가 갑자기 끼어든다. 그래서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인데? 그 사람 취향이 혹시 이런 거야? 그 사람의 성향이 혹시 이러저러해? 이런 식으로 ‘내 이야기’가 아니라 ‘A의 이야기’, 그러니까 내 ‘적들의 이야기’에 더욱 커다란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다. 나는 빨리 내 편을 들어주었으면 좋겠는데, 그 친구는 내 적들의 편에 서서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었다. ‘친구는 곧 무조건 내 편’이라고 믿어왔던 나의 인식이 와르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이 친구의 쌀쌀맞은 멘토링은 묘한 중독성이 있었다. 내 편, 내 감정을 심화시키는 것을 가로막고, 잠시 저 사람의 편이 되어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었다. 나에게 적대적인 감정을 가지게 만든 그 사람의 편에서 생각을 해보면, 내가 어떤 사람으로 보일까. 혹시 나도 모르게 그 사람에게 나에 대한 적대감을 품도록 부추긴 것은 아닐까. 나의 존재 자체가 그 사람을 불편하게 한 것은 아닐까. 이런 식의 생각을 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나로서는 매우 새로운 경험이었다. 물론 가슴이 아팠다. 아니, 왜 이 아이는 내 편을 들어주지 않는 걸까. 안 그래도 서러운 내 마음에는 야속함까지 더해져 더욱 기분이 나빠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열심히 내 편을 들고, K는 열심히 A의 편을 들다 보면, 나도 모르게 나도 적도 아닌 제3자의 입장이 되어 사건에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시선이 생기곤 했다. 사실 난 친구란 취향이 비슷하고, 입장도 비슷하고, 감성의 사이클도 비슷한 사람이라고 믿어왔다. 그런데 이 친구는 모든 면에서 나와 달랐다. 집안 분위기도 다르고, 감정의 표현법도 다르고, 심지어 남자를 보는 눈도 확연히 달랐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 ‘다름’이 그 아이를 더욱 매력적으로 보도록 만들었다. ‘친구는 내 편을 만드는 것’이라는 나의 오랜 대전제가 무참하게 깨어지는 순간들. 나는 조금씩 내 시야의 한계를 깨닫기 시작했고, 한 번도 내 편을 고분고분하게 들어주지 않는 그 친구에게 뜻밖에도 고마움을 느끼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고 내 편을 만든다는 일에 집착하는 나의 소심함이 얼마나 편협한 인간관계를 만들어왔는지도 차츰 알아가게 되었다.

인간관계란 곧 아군(我軍)을 만드는 일이라 믿어왔던 편견은 조금씩 빛을 잃어갔다. 아군을 만드는 일보다 중요한 것은 적군을 만들지 않는 일이고, 적군을 만들지 않는 일보다 중요한 것은 적군과 맞서는 상황에서도 마음의 평정을 잃지 않고 대화할 수 있는 용기가 아닐까. 세상을 살다 보면 적도 아도 구분할 수 없는 아비규환에 휩쓸리기도 한다. 그럴 때 중요한 것은 적과 아를 가르는 분별심이 아니라 내 안에도 적이 있고, 적 안에도 내가 있음을 인정할 수 있는 공정함이 아닐까.


(다음 회에 계속)


p.s. ‘정여울의 그때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들’은 20대가 마음속에 품어야 할 20개의 키워드에 대하여 각 주제별로 2회씩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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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정여울

정여울은…

타칭 문학평론가, 자칭 글쟁이 또는 글순이.
문학과 영화와 드라마, 그리고 여행과 음악을 짝사랑하는 사람.

<한겨레신문>에 ‘정여울의 청소년 인문학’ 코너를 연재하고 있으며, 2012년 현재 서울대학교에서 글쓰기를 강의하고 있다. 저서로는 ≪시네필 다이어리1, 2≫ ≪정여울의 소설 읽는 시간≫, ≪미디어 아라크네≫, ≪내 서재에 꽂은 작은 안테나≫, ≪정여울의 문학멘토링≫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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