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인종차별 단체와 총격전, 한국 상관에 보고하자…
“결국 모든 생명은 죽는 것인데…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무슨 소용이 있나.” 자연의 고독보다 더 견디기 힘든 것은 ‘저 세상에서 오는 고독’ 야생 호랑이 관찰 위해 6개월간 잠복
산속에 머물면서 견디기 힘든 것은 홀로 있다는 자연의 고독입니다. 자연의 고독보다 더 견디기 힘든 것은 사람들이 사는, 저 세상에서 오는 고독입니다. 하지만 저 세상의 고독을 자연의 고독이 치유해 줍니다. 사람은 호랑이처럼 홀로 사는 동물이 아니라 더불어 사는 동물이라는 사실을 자연의 고독이 깨닫게 해줍니다.
본 기사는 박수용 피디 10문 10답 3부작 중 마지막 3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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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찰의 어려움
“시베리아호랑이를 관찰하셨던 과정 속에서 피디님을 가장 힘들게 한 것은 무엇입니까?”
마을의 베이스캠프에서 지내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러시아 피의 민족단Russian Bloody Party’ 단원 다섯 명이 쳐들어와 총으로 위협하며 우리의 돈과 귀국을 요구했습니다. 피의 민족단은 미국의 KKK단 같은 인종차별주의자 단체로, 특히 동양인을 싫어합니다. 오랫동안 그 지역에서 생활하다보니 우리 소문이 멀리까지 난 모양이었습니다.
말을 안 듣자 그들은 다짜고짜 우리를 피투성이가 되도록 린치를 가했습니다. 한명이 몰래 빠져나가 그 지역 산지기 대장에게 알렸습니다. 산지기 대장이 마을사람들과 함께 우리를 구출하러 왔습니다. 베이스캠프 앞에서 총격전이 벌어졌습니다. 총알이 핑핑 주변을 스쳐지나갔습니다. 그 소리를 듣고 마을 외곽에서 해안을 지키기 위해 주둔해 있던 군부대가 출동했습니다. 피의 민족단 두 명은 체포되고 세 명은 도망갔습니다. 도망가면서 우리 일행 중 한 명을 납치해 갔습니다.
저는 급히 80km 떨어진 읍내의 전화국으로 달려갔습니다. 한국 본사로 여러 번 전화를 넣었지만 매번 중간에서 끊겼습니다. 연해주 산골의 전화는 수화기를 돌리는 수동식인데다 두 곳의 기지국을 거쳐야만 겨우 해외와 연결이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본사와 연락이 돼 높은 분에게 급히 상황을 보고했습니다. 그러자 높은 분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지금 회의 중이니까 나중에 다시 전화해”
그러고는 전화를 끊었습니다. 혹시 영화 ‘람보’를 보셨나요?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모두 마친 람보는 돌아와 상관들을 향해 마구 기관총을 쏩니다. 왜 그랬을까요? 전 그가 다시 마주한 세상에 대해 고독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높은 분이 전화를 끊었을 때 저는 저 세상에서 오는 고독을 느꼈습니다.
그들은 마치 우물 속에 갇혀 와글거리는 올챙이 떼 같았습니다. 그 우물이 이 세상의 모든 것인 줄 알고 그곳에서 전력을 다해 이전투구 하는 그들이 올챙이들보다 못해 보였습니다. 올챙이는 때가 되면 개구리가 되어 우물 밖으로 기어나갑니다. 하지만 그들은 개구리가 되어 우물 밖으로 나가 볼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우물이 다인 줄 압니다. 이 세상은 그런 우물들이 셀 수 없이 많이 모여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그것이 자연이라는 것도요.
그들은 자신의 우물 속에서 대장 올챙이에게 잘 보이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듯합니다. 대장 올챙이가 이끄는 길이 올바르든 그르든 상관치 않고 진급이나 봉급 같이 개체의 이득을 취하는 것만을 우선시합니다. 당연히 산속의 일은 중요하지 않게 느껴질 것입니다. 저 세상이 가져오는 이런 고독을 저는 많은 사건을 통해 여러 차례 느꼈습니다. 그런 후 6개월의 긴 겨울 잠복생활로 들어가곤 했죠.
연해주 오지의 땅속 잠복지에서 시베리아에서 불어오는 찬바람과 싸우며 야생호랑이를 기다리다 보면 호랑이 코빼기 한 번 못보고 주먹밥만 동이 나기 일쑤입니다. 그러던 차에 3개월 만에 후배가 보급품을 지고 첩첩산중을 넘어 도착했습니다. 오랜 잠복 끝에 보급품을 지고 온 후배를 만나면 마음이 찡합니다. 서로 눈을 마주치지 못합니다. 눈을 마주치면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습니다. 말도 몇 마디 주고받지 못합니다. 말소리에 배인 울음을 들킬 것 같기 때문입니다. 행여나 호랑이가 볼 새라 얼른 보급품을 받아 넣고 다 쓴 배터리와 모아둔 배설물을 챙겨주고는 3개월 후에 만날 것을 기약하며 헤어집니다.
다시 혼자 남습니다. 기분이 울적합니다. 끝없는 사막 혹은 심연과도 같은 잠복지에서 갑자기 고독이 밀물처럼 밀려듭니다. 나를 둘러싼 한 평의 공간이 나를 폐소공포증에 걸린 사람처럼 덜덜 떨게 만듭니다. 그런 절망상태로 밤까지 누워 있습니다. 눈을 감아도 감지 않은 듯 의식이 또렷합니다. 나갈 수만 있다면 바다 속에라도 뛰어들어 엉엉 울고 싶습니다. 얼어붙은 잠복지에서 나를 더 얼어붙게 만드는 것은 절대온도나 맹수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홀로 있다는 고독감이었습니다. 고독을 이기지 못하는 데서 오는 불안과 호랑이를 기다리고 싶은 열망 사이에서 나는 갈팡질팡했습니다. 이 고독이 무엇을 위한 고독이며 누구를 위한 고독인지, 잠복지를 뛰쳐나가 세상으로 나가면 저 세상의 고독은 또 어떻게 감당할 것인지, 나는 생각하고 달래며 나 자신을 추스릅니다.
다음날, 눈이 내립니다. 아침부터 쉼 없이 눈이 내립니다. 이런 폭설 속에서 작은 이 공간이라도 없다면 살아남기 힘들 거라고, 폭설이 그치고 다시 몇 번의 폭설이 내리고 나면 마을로 내려가 따뜻한 난로 옆에 몸을 누이고 깊은 잠에 빠져들 거라고 나를 세뇌시킵니다. 폭설이 나를 고독으로부터 건져냅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다시 잠복지의 안락함에 빠져듭니다.
산속에 머물면서 견디기 힘든 것은 홀로 있다는 자연의 고독입니다. 자연의 고독보다 더 견디기 힘든 것은 사람들이 사는, 저 세상에서 오는 고독입니다. 하지만 저 세상의 고독을 자연의 고독이 치유해 줍니다. 사람은 호랑이처럼 홀로 사는 동물이 아니라 더불어 사는 동물이라는 사실을 자연의 고독이 깨닫게 해줍니다. 누군가 말을 주고받을 사람이, 교감할 사람이 내 옆에 단 한 명이라도 있기만 하다면, 그 사람이 내가 가장 싫어하고 추악하게 생각했던 사람이라 하더라도 아무 상관이 없게끔 만들어 줍니다.
의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디님을 계속 자연 속에서 버틸 수 있게 한 것은 무엇에의 의지였습니까?”
자연에서 오래 지내다보니 저는 시간을 긴 단위로 느낍니다. 계절을 느끼고 다음 해를 미리 느낍니다. 자연의 생명들을 투과해가는 시간을 통해 10년 후의 제 모습을 느끼고, 결국 세월에 투영된 제 죽음의 모습까지 미리 느낍니다. 그러자 허무가 찾아왔습니다.
“결국 모든 생명은 죽는 것인데...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무슨 소용이 있나.”
참 무서운 느낌이었어요. 제 살아생전에 취한 모든 이득, 그리고 사고와 행동이 결국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이 허무한 생각에 제 삶의 활력을 잃어버릴 때조차 있었습니다. 내 생애에 비해 그 흐름이 너무나 긴, 그래서 생겨나는 허무를 저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짧다면 짧은 이 세상에서의 하루하루 생활로 극복했습니다. 부업을 해서 카메라를 마련하고 이런 저런 잡일을 하면서 제작비도 보충하고 그러면서 점점 자연이니 세월이니 허무를 부추기는 긴 흐름의 느낌, 살아있는 생명은 결국 죽을 수밖에 없다는 그 본질로부터 탈출할 수 있었죠.
그러자 새로운 장벽이 기다리는 거예요. 본질적인 허무를 잊기 위해 긴 흐름을 버리니까 이제는 눈앞의 이해관계, 남이야 어떻게 되든 나라는 개체의 삶과 이득에 나의 삶이 국한되는 겁니다. 그리고 나와 유사한 이해관계에 놓인 사람들과 이합집산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겁니다. 그러자 질투가 생기고 모함이 생기고 급기야는 내 이득을 획득하고 보전하며 불리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제가 평소 달라붙지 않던 시장과 이데올로기를 방패로 사용하는 제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시장과 이데올로기라는 짧은 흐름이 가져오는 함정입니다. 살아있는 모든 개체가 빠질 수밖에 없는 너무나 치명적인 함정. 이것은 긴 흐름을 인식함으로써 생겨나는 허무보다도 더 치명적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우주의 어디쯤 있는지를 알고, 그래서 우주라는 것의 깊고 넓음이 자신을 티끌처럼 왜소하게 만들어버리는 공포를 느끼는 우주인은 그 공포를 정신의 힘으로 다독거려 결국 체화시킬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우주의 어디에 있는지도, 아니 자신이 우주 속에 있는지조차도 모르고 눈앞의 잔물결에만 시선을 두는 사람은 긴 흐름이 가져오는 허무를 망각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더 이상 어떤 객관적인 삶의 기준을 가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진퇴양난이었습니다. 긴 흐름에 몸을 실을 수도 짧은 흐름에 몸을 실을 수도 없었습니다. 죽음이 가져오는 허무에도, 삶이 가져오는 생활에도 온전히 몸을 실을 수 없었습니다. 결국 짧은 흐름에 몸을 싣고 긴 흐름을 잊지 않는 방법을 취했습니다. 처음에는 물과 기름처럼 짧고 긴 흐름이 잘 섞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짧은 흐름과 긴 흐름을 섞는 방법이 경묘해졌습니다. 평소에는 개체의 생활이라는 짧은 흐름에 충실하다가, 중요한 결정을 해야 할 기로에 서면 모든 개체에게 찾아오는 죽음이라는 긴 흐름을 기준 삼았습니다. 이것이 삶의 본질을 죽음이라는 허무에 빠트리지 않고 순순히 받아들이면서도 하루하루의 생활을 열심히 해 나갈 수 있는 동력이 되었습니다. 그제야 제 마음의 많은 번민과 갈등들이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허무가 존재의 조건인 것처럼 죽음은 삶을 삶답게 하는 전제입니다. 죽음이 없다면 삶은 어떤 평이하고 지루한 상태의 연속으로, 그 참다운 의미를 잃고 말 것입니다. 삶은 죽음 때문에 유한하지만, 또한 그 죽음으로 인해 무한에 비견되는 의미를 되찾게 됩니다. 이 사실을 깨닫고 느끼려는 의지가 제게 자연 속에서 버틸 수 있는 힘을 주었습니다.
저자는 시베리아에 살면 시베리아호랑이, 한반도에 살면 한반도호랑이 혹은 백두산호랑이라 불리는 우수리와 만주, 한반도를 중심으로 살아가는 호랑이들을 밀착 취재해 왔다. 이 책은 그 과정에서 만난 '블러디 메리'라는 16세기 영국 여왕의 별명(사냥할 때 주변을 온통 피투성이로 만든다고 해선 붙여진 이름)을 이름으로 살아가는 암호랑이 3대 가족의 삶과 죽음, 생존을 향한 강렬한 투쟁을 직접 보고 관찰한 기록이다...
관련태그: 박수용, 시베리아, 야생호랑이, 러시아, 고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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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베리아 10만km의 대장정, 20년의 추적과 잠복. 전 세계에서 한 시간도 기록되어 있지 않던 야생의 시베리아호랑이 1000시간의 기록. 문명의 도전 앞에 멸종 위기에 처한 시베리아호랑이들의 응전, 생존을 향한 그 강렬한 투쟁을 생생하게 그려내며 큰 감동을 선사했던 EBS 다큐멘터리 「시베리아호랑이-3代의 죽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