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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린치, 연서린치, 화폐린치, 똥물린치

쉽게 눈에 들어오지 않는 낱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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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상사를 지나쳤다.쉽게 눈에 들어오지 않는 낱말이다. 무엇이 어떻게 ‘상서롭지 못했다’(불상사)는 말인가. 해당 스크랩을 여러 번 뒤적였지만 그 제목에 눈이 간 건 한참 나중이었다.

‘불상사’를 지나쳤다.
쉽게 눈에 들어오지 않는 낱말이다. 무엇이 어떻게 ‘상서롭지 못했다’(불상사)는 말인가. 해당 스크랩을 여러 번 뒤적였지만 그 제목에 눈이 간 건 한참 나중이었다. “불상사 임의처리 못하도록.” <동아일보> 1962년6월9일치다. 그 아래 부제를 봐도 무슨 뜻인지 긴가민가하다. “유엔군사령부, 주한미군에 강력지시.” 무엇을 강력지시 했는지도 없다. 아하, 감이 잡힌다. 큰 일이 난 거다. 노골적으로 보도하기엔 정부 눈치가 보인다. 실체가 잡히지 않는 추상적인 제목을 뽑은 이유다. 그 옆으로는 ‘서울대생 천여 명 데모…무장헌병 출동’ ‘주동자 10여명에 구속영장’ ‘북한서 악용 선전’ 따위의 제목이 있다. 사단이 났음이 틀림없다. 앞으로 한 장을 더 넘기니 ‘불상사’의 정체가 잡힐 듯하다. “미군인의 ‘린치’ 사건.”



아버지의 스크랩 제5권을 다시 펼쳤다. 지난 회에 이어 두 번째다. 1962년6월부터 1966년12월까지 그 어느 때보다 방대한 4년여가 담겨 한 번에 소화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오늘은 그 중에서 ‘린치’만 골랐다. 이름 하여 62~66년 4대 린치 사건!

린치(Lynch)란 한마디로 말해 ‘사형’(私刑)이다. 법적 절차를 거치지 않은 사적 폭력이다. ‘4대 린치사건’이란 내 맘대로 지어본 이름이다. 아버지는 별 코멘트를 달지 않았다. 특히 1번과 2번 린치사건엔 일언반구도 없다. 이렇게 무심하시다니, 섭섭하기 짝이 없다.


1. 참혹한 린치- ‘미군린치관리협정’을 요구하다

지난28일 파주에서 일어난 미군인의 한국인에 대한 ‘린치’ 사건은 다시금 한 미 두 나라 사이의 커다란 문제가 되어 정부는 미 대사에게 엄중한 항의를 하고 주한미군의 신분협정을 체결토록 촉구하는 한편 ‘버거’ 대사도 유감의 뜻을 표명한 바 있다. 그런데 지난 1일과 2일에도 또다시 양주와 파주에서 각각 미 군인이 한국인에게 구타?폭행을 가하는 사건이 일어나 이와 같은 불상사에 대한 근본적인 방지책이 촉구되고 있다.

1962년6월7일치 <조선일보> 기사다. 기사 앞부분에 나오는 ‘지난28일 파주에서 일어난 미군인의 한국인에 대한 린치 사건’에 관한 세부 내용도 스크랩돼 있다.



발가벗기고 구타
전선 줄에 거꾸로 매달기도

사잰의 진상
피해자 이씨의 진술


28일 8시 20분쯤, 탄피 등 고철을 주우려고 친구 1명과 함께 부대(문제의 3중대) 철조망 밖에서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때 7,8 ‘미터’ 떨어진 부대 후문으로 ‘찦’차 두 대가 나오다가 우리를 보고 멈추면서 우리에게 ‘도둑놈’이라고 소리치며, 구멍이 뚫린 철조망을 가리키기에 우리는 도둑이 아니라고 말했다.
이때 앞 차에서 군인 한 사람이 내리더니 돌을 줏어 던지면서 “죽인다”고 외쳤으며 같이 탔던 미군들도 중위(‘워드’ 중위=중대 부관)를 선두로 차에서 내리자마자 한 사람은 4.5구경 권총을, 다른 한 사람은 ‘M1’을 장탄한 후 “만일 도망가면 쏴죽인다”고 말했다.
우리는 당황한 나머지 약 1‘키로’ 지점에 있는 ‘장산리’까지 도망쳐 그곳 어느 민가 변소에 숨었으나, 계속 추격해 온 그들에 붙잡혔다. (친구는 도망치고) 그들은 나의 양쪽 팔을 뒤로 제쳐 끌고 가면서 차에 올라타기 전 약 10분 가량 구타했다. 중위는 권총으로 전신을 때렸으며 사병들은 몽둥이와 구둣발로 때려 그때 벌써 실신하고 말았다.
그후 상반신만 승차시켜 머리는 ‘찦’차 ‘시드’(시트-필자 주)밑으로 집어넣었으며 하반신은 ‘찦’차 뒤에 늘어지게 했는데 허리를 깔고 앉고서 차 안에서도 권총, 몽둥이, 구둣발 등으로 계속적으로 구타했다. ‘찦’ 차 안엔 피가 고여 있을 정도였으며 다시 3중대 사무실 ‘아스팔드’ 바닥에 넘어뜨린 후 모두 달려들어 구둣발로 짓밟았는데 이때 한 사람은 가슴에, 한 사람은 배 위에 올라타고, 꽝꽝 굴렸다. 특히 중위는 발로 한 쪽 손을 밟고 뒷꿈치로 손등을 찧었으며, 나중엔 톱으로 잔등을 찍는 바람에 약15분간 다시 실신했다.

주말에 집에서 이 글을 쓰다, 여기까지 옛날 신문기사 내용을 소리 내어 읽어보았다. 거실에서 놀고 있던 열 한 살짜리 딸아이가 내용을 들었는지 끼어든다. “아빠, 말이 왜 그렇게 끔찍하고 무서워?” 사건은 계속된다.

그들은 그래도 부족해서 ‘빤즈’와 ‘런닝샤스’만 남기고 모두 벗겼으며 ‘로프’(삼으로 만든 밧줄)를 갖고 와서 목을 매더니 사무실 문 중방에도 걸고 잡아당기며 더욱 고통을 주었다. 그 무렵 중대장(‘스윈슨’중위)이 와서 ‘로프’를 풀은 후 이번엔 발목을 묶어서 개 끌듯이 끌고 뒷산으로 올라갔다. 다시 실신했다가 정신이 들었을 땐 중대장이 직접 몽둥이로 구타했었으며 다른 장병들은 구둣발로 차고 주먹으로 치며 가래침을 얼굴에 배앝는가 하면 흙을 입 눈 코에 마구 넣고 있었다.

이때 또 딸아이가 한 마디 끼어든다. “헐~.” 어이없을 정도로 엽기적인가 보다.

“아프다”고 고함치자 완전히 발가벗긴 후 깡통에서 노란색 음식물을 꺼내서 전신에 발라놓고 또 마구 때렸다. 그들은 곧 옆에 있던 전신주(높이 6,7 ‘미터’) 중간 지점에다 각목을 못으로 박아 십자가처럼 만든 후 그곳에 ‘로프’를 걸고 잡아당겨 이번엔 거꾸로 매달려 고통을 받았으며 다시 실신하고 말았다.
8시 40분에 체포되어 10시 40분까지 이런 모진 사형을 당했으며 그동안 미군은 물론 한국 종업원까지 강제로 동원시켜 구경을 시켰다. 그들은 전신에 유혈이 낭자하고 실신이 계속되자, 의무실에서 응급가료를 시켰으나 “살아날 가망이 없다” 는 바람에 헌병차에 실려 15병원에 갔었다. 그곳에서도 피를 한 사발 반쯤 토했기 때문에 그들은 ‘링겔’을 꽂은 채 44병원으로 나를 옮겼다.
그곳에서 가료를 받은 후 31일 아침 한국 경찰에 인계된 후 경찰 주선으로 도립병원에 입원했다.
목격자 이모씨등 2명의 진술= 보다 참을 수가 없어, 중지를 요구했으나 듣지 않았으며 피해자가 꼭 죽은 것으로만 알았다.

같은 날 <한국일보>는 또 다른 사건들을 전하면서 “한국의 서부, 파주”라는 제목을 달았다. 서부 인디언 원주민을 때려잡던 19세기 아메리카 개척시대가 연상된다는 이야기다. 이번엔 평택에서 일어난 제3의 사건이다.


미 군용견교상(犬咬傷) 사건 원근(遠近)
부대주변 빈곤이 액운의 씨
묘판 피뽑다 오인돼


【평택에서 김기영 기자발】 파주, 오산 등 미군기지에서 요즈음 미군의 행패가 접종하고 있는데 기보한 오산의 군용견교상(咬傷)사건이 일어나게 된 진상은 이렇다고 본다.
이 교상 사건이 일어난 현장인 평택군 송탄면 신장리 남산동 598번지 산등성이 남쪽은 오산비행장 고물창고(살베지)가 있고 그 둔덕을 경계선으로 해서 북쪽에는 가난한 한국빈농 또는 타향에서 벌어먹기 위해 이곳으로 유전해온 하루살이 품팔이 노동자들이 십여채의 초가집 문간방 살이를 하고 있다.
미군의 눈으로 볼 때는 생계의 터전이 없는 듯이 보이는 인근 부락민이 도둑으로 보일 것이고 애매한 부락민으로 볼 때에는 미군의 만행이 너무하다고 격분하게 된다.
피해자 심(심덕선)씨가 말한 바에 의하면 지난 5월30일 하오1시 반쯤 되어 자기는 못자리에서 피를 뽑고 점심을 먹으러 집에 돌아오자 문밖에서 떠들썩하기에 울타리 밖을 내다보니까 웬사람의 그림자가 휙 지나가고 다음 순간 대문을 차고 미군이 달려들면서 ‘캐취’ ‘캐취’ (물어라)하니까 군용견 한 마리가 달려들어 자기를 물어뜯고 발로 핥기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대문 안에서부터 시작하여 나중에는 대문밖 뜰에서 뒹굴어가면서 개와 사투하기 약 15분- 그때 자기가 입었던 ‘카키’색 작업복은 산산이 찢겨져 알몸뚱아리만 남게 되었다는 것이다. 죽을힘을 다하여 개의 두 귀를 꼭 잡고 있게 되자 이번에는 미군이 달려들어 자기 가슴을 지르기에 실신하다시피 땅에 Tm러지게 되자 웬 딴 미군이 또 한명이 나타나서 자기를 미군부대 속에 있는 치료소로 끌고 갔다는 것이다. 그곳에서 응급치료를 받고 하오3시경 평택경찰소로 넘기게 되어 그곳에서 치안재판을 받고 무죄로 인정되어 간신히 하오7시경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는 것이다.<하략> (<한국일보>1962년6월7일치)

주한미군 병력은 1953년 10월의 한미상호방위조약에 따라 이 땅에 본격 상주하기 시작했다. 1957년부터 60년까지 미군 총격으로 사망한 한국 민간인 숫자만 70여명이라는 충격적인 통계가 있다. 그 뒤에도 ‘불상사’ 퍼레이드는 끊이지 않았다. 내가 아는 가장 대표적인 사건 3개만 꼽아보겠다. 1. 1962년1월 파주 나무꾼 사살 사건- 미군부대 주변 출입금지 구역에서 땔나무를 베던 민간인을 영하10도의 추위 속에 발가벗겨놓고 총 쏘아 죽인 사건. 시체 검진 결과, 사냥용 엽총 탄환이 박혀 있었다.

2. 1992년10월28일 윤금이 피살 사건. 미군2사단 소속 케네스 마클 이병이 동두천시 기지촌 술집 종업원 윤금이를 잔혹하게 살해. 시신 발견 당시 그녀의 직장엔 우산대가 26cm 가량 박혀 있었고 음부엔 콜라병이 꽂혀 있었으며 전신에는 합성세제가 뿌려져 있었다.
3. 1997년4월3일 이태원살인사건. 이태원 햄버거 가게 화장실에서 홍익대 휴학생 조중필 씨가 주한미군 아들인 아더 패터슨과 한국계 미국인 에드워드 리에게 칼로 난자당해 살해당함.

위 기사 중에 등장하는 ‘주한미군 신분협정’(한미주둔군 지위 협정 또는 한미행정협정)은 1962년 당시 체결되지 않았다. 아버지의 스크랩에는 미군이 타국과 체결한 협정들을 표까지 그려가며 자세히 비교분석한 기사가 나온다. “미국은 이미 46개국과 협정을 체결했는데 가장 평등한 건 대 나토협정이며 우리 경우는 에디오피아보다도 못하다”는 대목도 있다. 당시 대학생들은 “한미행정협정을 체결하라”고 요구하며 격렬한 시위를 했고, 각 신문에서도 협정체결을 주요한 이슈로 내세웠다.


‘한미행정협정’은 어쩌면 ‘미군린치 관리협정’이다. 미군의 린치를 정당하게 한국 사법부에서 재판하는 룰을 정쿇는 게 눈앞의 과제였다. 한-미 양국은 1966년7월 이를 처음 체결하여 이듬해 2월 발효했다. 아무리 미군이 한국인에게 린치를 해도 미국 맘대로 할 수 있다고 해석할 수 있는 조항이 많아 1991년과 2001년 두 차례 개정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이 협정이 공정하고 평등하다는 칭찬은 접한 적이 없다. 미군범죄 스크랩으로부터 49년이 지났지만, 나는 이 글을 쓰던 날 아침 신문에서 현재진행형인 미군의 린치를 발견하고야 말았다. 2011년 9월 동두천 고시텔에서 열여섯 살 소녀를 성폭행한 미군 이병에 대한 공판 기사였다.


2. 비련의 린치- 총살, 그리고 어머니의 투신

딱 한 페이지다. ‘박 의장, 군정4년간 연장을 제의’라는 제목이 붙은 기사를 넘기면 “모자가 숨져간 ‘연서의 비극’”이라는 활자가 보인다. 큰 기사부터 꼬마 기사까지 모두 한 곳에 가지런히 모여 있다. 이 페이지 오른쪽부터는 다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군정연장 음모를 규탄하는 시위 기사로 빽빽하다. 까딱하면 놓치기 십상이다. 뒤늦게 찾아 읽고 우울해졌다. 이렇게 슬픈 기사는 스크랩에서 처음이었다. 길지만, 내용을 몽땅 실어보았다.


최영호 일병 사형집행-
가랑비나리는 18일 수색서 총살형


애인으로부터 온 편지를 뜯어보고 동료들 앞에서 희롱하는 상관 두 명을 총으로 쏴죽인 죄로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되었던 최영오(崔永吾=25=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기상학과 재학중 학적보유병으로 입대)일등병은 18일 하오2시40분 서울근교의 수색 모사단 사격장에서 총살형이 집행되었다. 19일 상오 이와 같은 사실을 확인한 육군당국은 최일병에 대한 총살형집행명령은 15일 이미 국방부장관에 의해 내려졌고 이날 육군고등군법회의검찰관 서기 군목 및 군의관등이 입회한 가운데 총살형집행절차에 따라 다른 네 명의 죄수와 함께 집행되었고 시체는 19일 상오 11시15분 가족에게 인도되었다고 밝혔다.

모자가 숨져간 ‘연서의비극’
각계의 구명운동 보람없어
비보 듣자 어머니는 한강에 투신자살


아들이 총살형을 받았다는 소식을 뒤늦게 안 어머니 이숙자(李淑子=60-아현동 산10)씨는 이날 밤 10시40분쯤 실의 속에 울부짖는 가족들 몰래 집을 나가 마포강에 투신자살했는데 빗발치는 구명운동을 뒤에 하고 두 목숨을 이미 앗아간 ‘연서의 비극’은 같은날 모자 두 목숨을 숨지게 하고 말았다.
“사랑하는 영(永)! 꿈같은 시간이었어요. 무사히 군대에 들어가셨는지요…”, “영, 이별은 정말 슬펐어요…” 마디마디 사무친 사랑의 사연이 본의 아니게 부대 안에서 공개되고, 급기야 ‘신서의 불가침’ 만을 외우던 성난 연인은 두 사람의 상사를 쏘고-인도(人道)와 군기문제가 사회의 빗발치는 논의의 대상이 되고 아들을 군에 보낸 아주머니, 문인들의 줄기찬 구명운동도 잇달았으나 이제 모든 것은 끝나고 말았다.

영오야! 영오야! 애끓는 혈규(血叫)-아들 망혼 찾아 강물에 진 모정

18일 하오4시15분쯤 서울교도소에서 보낸 한 장의 “19일 하오 5시까지 시체를 인수하라”는 전보가 집에 있던 최군의 형 영수(永壽=29) 큰누이 영애(永愛=37)씨 남매를 통곡하게 했다.
하오6시쯤 집에 돌아온 어머니 이숙자(李淑子=60)씨도 눈치를 채고 6남매의 막내였던 최 일병의 사형집행을 알게됐다. 이날 아침 11시쯤에도 영수씨는 아우를 면회했으나 마지막 일줄은 몰랐었다.
어머니 이씨는 “내일이면 밥도 먹을 터이니 염려 말고 어서자라”고 오히려 두 오누이를 달래고서는 밤10시40분쯤 가족들 몰래 영오군이 사다준 지팡이를 짚고 집을 나갔다는 것이다. 슬픔에 지쳐있던 가족들이 이씨가 없음을 발견한 것은 11시30분쯤-갈만한 이웃집을 찾고 경찰에도 연락하는 한편 마포강으로 한패가 달려갔으나 마포동 419전차 종점근처의 높이 20 ‘미터’쯤되는 벼랑 밑에서 “영오야! 영오야!”하고 부르는 소리를 큰딸과 같이 찾아나온 이웃사람들이 들었다는 것이다.
강가의 벼랑창바위옆에는 지팡이가 꽂혀있고 뒤가 떨어진 털신이 나란히 놓인 틈에 “영오를 죽인 선생님들 나를 죽이는 것이 나을뻔 했습니다. 영오가 죽은 지금 나도 같이 죽는다”는 내용의 짤막한 유서가 꽂혀 있었다고 옆방 아주머니는 울며 말해주었다. 물에 빠져서도 “영오야! 영오야!”부르는 소리가 물속에서 들려왔으나 어두워서 보이지 않아 찾지 못했다고 딸 영애씨는 안타까와했다.
시체인양작업은 19일 새벽5시쯤부터 배7척에 2천원을 주고 시작했으나 시체는 찾을수 없었고 하오에는 바람과 물결이 세어 작업을 중단했다.

최일병의 어머니가 남기고 간 유서

선생님들이 영오를 죽인다니 영오대신 모친이 죽을 터이니 영오를 살려주시오. 모친은 영오가 죽는것을 볼 용기가 없으니 영오를 살려주시오. 말이 잘 안되지만 간단한 펜을 드리올 뿐입니다. 그만 펜을 놓겠습니다.

창백한 얼굴에 엷은 웃음-어머니 건강을 마지막 당부하며-집형(執刑)현장광경

이날 최 일병의 총살형집행현장에 입회했던 관계관은 형 집행 광경을 다음과 같이 전했다.
18일 하오2시쯤 형장에는 다섯 개의 나무기둥이 세워지고 앞뒤에서 ‘찝’으로 호위를 받으며 두 대의 ‘앰뷸런스’가 도착했다.
5명의 쇠고랑을 찬 죄수가 천천히 걸음을 옮겨가고 주위를 약20명의 헌병이 지켜갔다.
다섯 개의 기둥을 향해가는 발걸음은 힘없이 무거웠고 최 일병은 제일 왼쪽의 말뚝 앞에 서고 순순히 손발과 몸을 묶이었다.
몇 번 헛기침을 하는 얼굴은 백짓장같이 새하얗고 엷은 웃음마저 띄우기도 했다.
흰 바지저고리가 유난히 희게 눈을 끌었다.
이윽고 이름 본적 주소 소속 계급 등을 확인하는 물음엔 담담히 “네!” 목소리가 맑았다. 군목의 기도가 약3분간 계속되는 동안 최 일병은 경건히 고개숙이고 있었다.
“마지막 남기고 싶은 말은?” 법무관의 물음에 최 일병은 “홀로 계시는 어머님의 건강과 남은 가족들의 건강을 빕니다. 그리고 동료들에게도 안부를 전해주십시오, 마지막 부탁입니다.”
죄수번호(5709호)를 떼고 죽고 싶다는 소원이 받아들여져 네발의 총성과 함께 소리없이 눈을 감은것은 2시 40분. 관속에 시체를 치울 때는 그때까지 질금거리던 가랑비도 멎고 있었다.
시체는 서울교도소에서 영구차에 실려 이날 하오 1시 반쯤 살아 돌아오기를 애끓게 기다리던 그의 어머니가 이제는 없는 단간방 윗목에 안치됐다.

1963년3월19일치다. 어느 신문인지는 적혀 있지 않다. 총기사건이 벌어진 1962년7월8일부터 1년여 동안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최영오 일병 사건’이다. 기사에 나오는 대로, 그는 ‘학보병’이었다. 학보병이란 대학에 재학하던 중 입대한 병사를 1년6개월 만에 제대시키는 제도였다. 최영오 일병은 제대를 얼마 남겨놓고 있지 않았다. “사랑하는 영(永)! 꿈같은 시간이었어요. 무사히 군대에 들어가셨는지요…”, “영, 이별은 정말 슬펐어요…” 이런 애인의 편지를 뜯어보고 흔들며 희롱한 두 상관의 행동은 어린 사병의 수치심과 증오를 폭발시킨 린치였다. 최영오 일병이 그들을 향해 소총 방아쇠를 당긴 것도 결과적으로는 린치였다. 끝내 총살형으로 생을 마감한 것도 도를 넘은 군 당국과 국가의 린치였다. 어머니는 한강물에 뛰어들며 스스로를 향한 린치를 감행했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 린치의 비극.

이 사건이 터진 뒤 육군참모총장은 특별담화를 통해 “사신(私信) 검열은 육군 규정을 어긴 것이며, 사적(私的) 제재를 금지하고 서신의 기밀을 유지함으로써 인권을 옹호하는 데 만전을 기할 것”을 강조했다고 한다. 군대 내 하급병사에 대한 반인권적 린치가 총기사고의 배경임을 인정한 셈이다. 최영오 일병은 총살형을 당하기 전 옥중수기에 이렇게 썼다. “물론 연서가 살인에 피상적? 동기가 된 것은 부인 못한다. 그러나 나로서는 연서 자체 때문에 살인자가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인간 이하의 불의에 항거하였으며, 또 그것을 말살하려고 한 것이다.… 나는 저 인간됨을 죽인 것이 아니라, 인간 이하의 노리개를 갖고 그것을 향락하려는 씹고 싶도록 잔인한 근성을 삭제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 사건은 2년 뒤 개봉한 <푸른 별 아래 잠들게 하라>는 유현목 감독 영화의 모티브가 되었다. 당대 최고의 배우 신성일, 엄앵란, 독고성 등이 출연했다. 2005년6월 연천 김 일병 사건, 2011년7월 강화도 해병대 김 상병 사건 등 군대에서 총기난사 참사가 벌어질 때마다 ‘최 일병’은 끝없이 ‘역사적 유사사건’의 주인공으로 회자되곤 한다. 그 교훈은 언제나 ‘군대 내 일상적 린치 척결’이다.


3. 황당한 린치- 초과실패한 화폐습격

미국은 황당했다. 한국은행 총재도 황당했다. 경제기획원 장관도 황당했다. 대한민국 주민등록을 지닌 사람 모두가 황당했다. 1962년6월10일 0시를 기해 ‘긴급통화조치법’이 발효됐다. 군사작전 같은 린치와 다름없는 경제정책 발표였다.


최고회의는 9일 밤 7시반에 긴급야간본회의를 열고 십일부터 액면오십환 이하의 소액은행권과 주화를 제외한 구환화(舊?貨)의 유통과 거래를 금지하고 이를 십분의 일의 환가비율로 새 ‘원’으로 바꾸는 화폐개혁을 내용으로 하는 전문29조 부칙의 긴급통화조치법안을 만장일치로 의결하였으며 정부는 즉시 공포하였다. 이 법에 의하면 액면오십환 이하의 소액은행권과 주화는 7월10일까지 신은행권과 병용하며 이 소액권도 6월10일부터 7월10일 사이에 10대1의 비율로 새 은행권과 교환하여야 한다… (중략) 1인당 5백 ‘원’을 한도로 신권과 교환해주도록 되어있다… (하략) (<조선일보> 1962년6월10일치)

기사 앞머리에 ‘9일 밤 7시 반’이라는 시간대가 나온다. 최고회의가 긴급야간 본회의를 연 시간이다. ‘긴급통화조치법’이 발효되기 전 4시간 반 전이었다. 이 시간에 비로소 민병도 한국은행 총재와 김유택 경제기획원 장관은 화폐개혁 사실을 일방적으로 통고받는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였다. 통화개혁의 수장들도 모르게 통화정책을 밀어붙인 것이다. 미국도 48시간 전에야 알았다. 미국이 반대할까봐, 새 화폐를 영국에서 몰래 찍어왔다.

1962년 8월 박정희의 지시로 5.16 쿠데타보다 더 극비리에 진행된 이 작전은 육사 8기 출신 유원식 최고회의 재정경제위원장을 비롯한 극소소의 ‘화폐개혁 주체’만이 알고 있었다고 한다. 그해 1월 발표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장롱 속 음성자금을 끌어내려는 것이었다. 최고회의는 또 후속조치로 금융기관의 신규예금은 물론 기존예금도 동결토록 해 뭉칫돈을 묶어놓았다.

성급하면 탈이 난다. 인쇄부터 탈이 났다. ‘새 돈에 오자’라는 기사가 보인다. 지폐 속 독립문 그림의 ‘독립문’이라는 글자는 ‘득립문’으로 찍혔다. ‘한국조폐공사제조’에서 ‘조폐’는 ‘조페’로 나왔다. 예금이 동결된 서민들은 분통을 터뜨렸다. 당장의 생활비를 위해 ‘환’을 ‘원’으로 바꾸려고 은행 앞에 긴 줄도 서야 했다. 날벼락에 이은 북새통 생난리였다. 여론은 냉소적이었다. 스크랩 속 한 신문칼럼은 이렇게 말한다.


땀흘리는 은행

화폐개혁이라고 해서 야단들이다. 난리 난리하지만 정년 이런 것이 난리다. 구 화폐는 퇴기같이 천대를 받고, 신화폐는 ‘스타’처럼 좋은 대우를 받는다. 새로운 것이 좋다는 하나의 증좌다. 시장에서의 암거래가 쇠고기 4천환, 사이다 500환이었다고. 사람들은 좋은 계절에 소풍이나 각종 계획을 집어치우고 1인당 5천환(신화 5백원)을 바꾸려고 땀을 흘리고 새치기와 싸우면서 은행 앞에 늘어선 장사진이었다. 전문가의 의견에 의하면 통화개혁은 있어야 했다는 정평이다. 의당 와야 할 것이 온 것이지 별다른 것은 아니며 놀랄 일은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일반 국민들은 별다른 것으로 생각하고 놀란 것이 분명하다.
앞으로 통화개혁을 잘만 관리하면 우리나라 백성들은 잘살게 될 것이라고 한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이제 더 앞으론 일반백성들을 놀라게 하는 통화개혁이라는 일이 없이 어느 선진국가처럼 화폐가 오래도록 쓰여지도록 믿음성이 있었으면 한다. 돈이 돈값을 못하고 자꾸 바뀌어지고 사람이 사람값을 못하고 자꾸 인간개조만 하여서야 어디 짧은 50평생에 제대로 숨이나 쉬어보겠는가. 모름지기 앞으로 이 나라 사직을 맡는 위정자들은 명심코 또 다시는 어느 일요일 뜻하지 않은 백성이 은행 앞에 땀흘리며 줄지어서야 하는 일이 없도록 유의하여야 하겠다.

아버지는 떠나는 ‘환’을 한 장 스크랩에 붙여놓았다.


이승만 전 대통령의 얼굴이 조그맣게 나오는 ‘백환’짜리다. 이 돈을 ‘십원’으로 바꾸지 않고 남겨놓으셨다. 스크랩을 두 장 더 넘기면 ‘통화개혁 실패’ 운운하는 칼럼과 만평들이 붙어있다. 실제로 통화개혁은 철저히 실패했다. 기대했던 현찰이 모이지 않았다. 서민들의 장롱속은 썰렁했다. 미국의 반발로, 예금 동결조치도 4일 만에 백지화됐다. 실속 없이 대중들에게 몸고생 마음고생을 시킨 셈이다. 그럼에도 군사정부는 변명을 하고 싶었으리라. 이렇게.

김 내각 수반(김현철-필자 주)이 UPI 기자에게 ‘통화개혁은 완전실패는 아니다. 통화개혁을 통해서 정부는 통화의 분포상황을 알게 되었고 또한 국민은 돈이 얼마나 귀중한 것인가를 알게 되었다’고 말했다는 보도가 담화자들의 진의를 그대로 표현한 것이라고는 보고 싶지 않아진다. (하략)” (<조선일보> 만물상 칼럼)

“ 1962년 7월쯤으로 추정되는 칼럼이다. 아버지는 이 말을 확 뒤집고 싶으셨던 모양이다. 다음과 같은 한 마디를 칼럼 위에 적었다.

“통화개혁은 완전실패는 아니다. 사실은 초과실패이다- 예언.”

분명한 실패라고 못 박고 싶으셨나? 시도 보인다.

지게꾼과 도둑

나는 지게 하나로 일곱 식구가 산다
나는 눈요기로 다섯 식구가 산다.
세상은 자꾸만 달라져 가는데
우리들 직업도 자꾸만 달라져 간다.
만일 통화개혁이
지게꾼의 윗병을 고칠 만큼 위대했다면
혁명정부의 역사는
연필로서 어린아이들 산수노트에 기록이 될 것이다
도둑의 손버릇을 고칠 만큼
보안상 공로가 컸다면
혁명정부의 공과는
노인의 젓가락으로
강물에 기록이 될 것이다.
그래서 정치의 일실(一失)은 죽엄보다도 비싸다.

<한국일보> 4컷 만화 ‘두꺼비’에서 영감을 받으신 모양이다.


만화는 “화폐개혁이 지게꾼의 윗병(위염)과 도둑의 눈을 흐려 손버릇을 고쳤으니 완전실패는 아니다”라고 비꼬았는데, 엄청난 ‘과’(過)에 비하면 그 손톱만한 ‘공’(功)은 장난 같다는 메시지로 읽힌다. 실제로 5개월 뒤인 62년12월17일 박정희는 공식기자회견을 갖고 “화폐개혁은 확실히 실패했다”고 인정했다. “내자동원을 위해 화폐개혁을 하긴 했는데 뚜껑을 열어보니 뜻대로 되지 않았다”고 솔직히 말했다. 개인의 금융자원을 국가가 통제할 수 있다고 자신한 군사정부의 ‘화폐 린치’는 헛방으로 끝났다.


4. 통쾌한 린치- 장군의 아들과 똥물

그날 그는 좋아하는 술도 마다했다. 오후 9시 ‘땡’ 하자마자 집으로 돌아왔다. 비서관에게 “지금 빨리 밖에 나가 한 말 짜리 사각깡통, 신문지, 노끈, 그리고 약국에서 횟가루를 구해오세요”라고 지시했다. 물건을 받은 뒤엔 대문 옆 재래식 화장실로 가 문제의 ‘폭탄’을 제조했다. 한 말 들이 통에 약 반 말쯤 똥을 채우고 냄새를 풍기지 않기 위해 횟가루로 주위를 막은 뒤 신문을 덮고 노끈으로 통을 묶는 일까지 꼼꼼히 지시를 내렸다. 비서관에 건넸다는 마지막 한 마디. “내일 중대한 역사를 쓰게 되니 나만 믿고 따르십시오.” 『김두한 자서전』(2003)이 전하는 ‘똥물 린치’ 하루 전날 밤의 일이다.

김두한 의원, 국무위원에 오물 세례
국회서 “사카린 맛 좀 봐라”
얼굴과 옷 몽땅 버려


재벌 밀수사건에 대한 질문을 벌인 22일 낮 국회 본회의장에서 김두한(한독당) 의원은 미리 준비해온 오물을 국무위원석에 퍼부어 의사당 안은 혼란에 빠졌고 이 때문에 본회의는 산회됐다.
이날 낮 12시45분쯤 김 의원은 마분지 포장지로 싼 오물 한 양철통을 들고 질문사로 등단, 1시5분쯤 “부정과 불의를 합리화시켜준 장관들을 심판하겠다”고 말하고 단상 앞에 나와 포장지를 끌러 장관들이 자리잡고 있는 자리에 오물을 부었다.
김 의원은 단 앞에서 “이것은 밀수사카린인데 국무위원들에게 맛을 보여주어야겠다”고 말하면서 포장지 위에 있던 흰 가루를 국무위원들에게 뿌리고 잇따라 오물을 뿌려 국무위원석에 앉았던 김 재무장관(김정렴-필자 주)은 온 얼굴과 옷에, 정 총리(정일권)?장 기획(장기영)?민 법무(민복기)?박 상공(박충훈) 등 장관들은 옷을 몽땅 버렸다.
이날 김 의원이 오물을 들고 의사당에 들어갈 때 경위과에서 체크했으나 김 의원은 증거로 갖고 온 사카린이라고 속였다고 한다. 이같은 사태가 벌어지자 여야 원내 총무들은 의장실에서 회합, 대책을 논의했는데 일부에서는 국회법에 따라 김 의원을, 제적을 불사하는 징계처분을 하자는 주장도 내세웠다.

1966년9월23일치 신문기사다.


이 사건 직후 한독당 김두한 의원은 의원직 제명을 당했다. 곧 이어 남대문경찰서로 연행됐으며 국회모독죄?공무집행방해죄로 구속되었다. 나중엔 서대문감옥에 수감됐다. 일제시절엔 종로통의 깡패로, 미군정 시절엔 살상을 서슴치 않는 과격한 반공투사로 이름을 날리던 독립운동가 김좌진 장군 아들의 정치적 생명은 이렇게 영원히 끝났다.

‘똥물 린치’사건의 최대피해자는 삼성 회장 이병철이었다. ‘똥물 린치’ 일주일전에 <경향신문>(9월16일치)은 ‘한국비료의 사카린 밀수’를 특종보도했다. 같은 해 5월 삼성이 경남 울산에 공장을 짓던 한국비료에서 사카린 2천259포대를 건설자재로 꾸며 들어와 판매하려던 걸 부산세관이 적발한 일이었다. 삼성계열의 <중앙일보>와 <동양텔레비전>(TBC)이 “직원 개인의 비행에 불과하다”며 삼성 비호에 안간힘을 쓰던 참이었다. 공화당 이만섭 의원과 민중당의 김대중 의원도 국회에서 “이병철의 즉각 구속”을 주장하긴 했지만, 국무위원들에게 날아간 김두한 의원의 똥물이야말로 ?정타였다. 이병철은 사건 당일인 9월22일 서둘러 기자회견을 했다. 한국비료의 국가헌납과 경제계 은퇴를 발표했다.

현직 국회의원 김을동(미래희망연대)의 아버지이자 현직 배우 송일국의 외할아버지인 김두한의 ‘똥물 린치’를 ‘쾌거’라고 평하기엔 낯뜨겁다. 본때 보여주기가 필요하다지만, 조폭들에게나 어울릴 법한 막가파식 행동이었다. 영화 <장군의 아들>이나 드라마 <야인시대>는 그를 ‘반일 깡패’로 고무?찬양하고 미화했지만, 전체 행적을 꼼꼼히 뜯어볼 때 고개를 갸웃거리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찝찝함 속에서도 ‘불쾌감’과 ‘통쾌감’이라는 두 가지 감정을 저울에 동시에 달아보면 ‘통쾌감’ 쪽으로 조금 더 기우는 게 사실이다. ‘꼴통 린치’였으되 보는 이들의 가슴 속 체증이 내려앉는 ‘거사’의 측면도 있으니 말이다. 그냥 ‘통쾌한 린치’였다고 봐주자.

여기 깨끗한 선물이 있다.
미친 놈은 미친개의 진액을 빨고 산다.
도박꾼들의 행패는 언제나 쌍스럽다.
명예도 황금도 권력도
똥물에 튀긴 밀수품이다.
빈곤한 민족의 얼굴들
창백한 역사의 손.발
황금의 얼굴을 한 이병철씨의
양심도 죽일 놈이지만
그의 심장도 망할 놈이다.
백성을 근심케 하는 자는
이 나라의 역사를 근심케 하는 자이다.

기사 밑에 적혀 있는 아버지의 시다.


‘깨끗한 선물’이라는 표현은 반어적이다. 한데 “황금의 얼굴을 한 이병철씨의 양심도 죽을 놈이지만 그의 심장도 망할 놈이다”라고? 아아, 이것은 ‘양비 린치’다. ‘그의 심장’에서의 ‘그’란 김두한을 말하는 모양이다. 아버지, 욕을 할 땐 한 사람 욕만 확실히 하셨어야죠. 영화 <주유소습격사건>에서 나오는 “딱 한놈만 팬다”는 유명한 대사도 있답니다. 모호한 중립은 ‘똥물’처럼 구릴 수 있거든요.

미군린치, 연애편지린치, 화폐린치, 똥물린치…. 50여년이 흐른 2011년 가을 의 화제는 단연 리비아 시민군 린치! 배수구에서 발각된 카다피는 린치당해 죽어버렸다. 린치 드라마는 오늘도 계속된다.



◎ 참고한 책


『김두한 자서전』(김두한 지음, 메트로신문사, 2003)
『숫자 없는 경제학』(차현진 지음, 인물과사상사, 2011)
『대한민국사 04』(한홍구 지음, 한겨레출판, 2006)
『한국 현대사 산책-1960년대편2』(강준만 지음, 인물과 사상사, 2004)
『한국 현대사 산책-1960년대편3』(강준만 지음, 인물과 사상사,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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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고경태

「한겨레」 토요판 에디터. 「한겨레21」「씨네21」편집장과 한겨레 esc 팀장을 지냈다. 지은 책으로 『글쓰기 홈스쿨』(2011)과 『유혹하는 에디터』(2009), 『직설』(공저, 2011)이 있다. 가족을 사골국물처럼 글감으로 우려먹는다는 비판에도 굴하지 않고 아버지 이야기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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