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연재종료 > 고경태의 아버지의 스크랩
미군린치, 연서린치, 화폐린치, 똥물린치
쉽게 눈에 들어오지 않는 낱말
불상사를 지나쳤다.쉽게 눈에 들어오지 않는 낱말이다. 무엇이 어떻게 ‘상서롭지 못했다’(불상사)는 말인가. 해당 스크랩을 여러 번 뒤적였지만 그 제목에 눈이 간 건 한참 나중이었다.
‘불상사’를 지나쳤다.
쉽게 눈에 들어오지 않는 낱말이다. 무엇이 어떻게 ‘상서롭지 못했다’(불상사)는 말인가. 해당 스크랩을 여러 번 뒤적였지만 그 제목에 눈이 간 건 한참 나중이었다. “불상사 임의처리 못하도록.” <동아일보> 1962년6월9일치다. 그 아래 부제를 봐도 무슨 뜻인지 긴가민가하다. “유엔군사령부, 주한미군에 강력지시.” 무엇을 강력지시 했는지도 없다. 아하, 감이 잡힌다. 큰 일이 난 거다. 노골적으로 보도하기엔 정부 눈치가 보인다. 실체가 잡히지 않는 추상적인 제목을 뽑은 이유다. 그 옆으로는 ‘서울대생 천여 명 데모…무장헌병 출동’ ‘주동자 10여명에 구속영장’ ‘북한서 악용 선전’ 따위의 제목이 있다. 사단이 났음이 틀림없다. 앞으로 한 장을 더 넘기니 ‘불상사’의 정체가 잡힐 듯하다. “미군인의 ‘린치’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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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28일 파주에서 일어난 미군인의 한국인에 대한 ‘린치’ 사건은 다시금 한 미 두 나라 사이의 커다란 문제가 되어 정부는 미 대사에게 엄중한 항의를 하고 주한미군의 신분협정을 체결토록 촉구하는 한편 ‘버거’ 대사도 유감의 뜻을 표명한 바 있다. 그런데 지난 1일과 2일에도 또다시 양주와 파주에서 각각 미 군인이 한국인에게 구타?폭행을 가하는 사건이 일어나 이와 같은 불상사에 대한 근본적인 방지책이 촉구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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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가벗기고 구타 전선 줄에 거꾸로 매달기도 사잰의 진상 피해자 이씨의 진술 28일 8시 20분쯤, 탄피 등 고철을 주우려고 친구 1명과 함께 부대(문제의 3중대) 철조망 밖에서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때 7,8 ‘미터’ 떨어진 부대 후문으로 ‘찦’차 두 대가 나오다가 우리를 보고 멈추면서 우리에게 ‘도둑놈’이라고 소리치며, 구멍이 뚫린 철조망을 가리키기에 우리는 도둑이 아니라고 말했다. 이때 앞 차에서 군인 한 사람이 내리더니 돌을 줏어 던지면서 “죽인다”고 외쳤으며 같이 탔던 미군들도 중위(‘워드’ 중위=중대 부관)를 선두로 차에서 내리자마자 한 사람은 4.5구경 권총을, 다른 한 사람은 ‘M1’을 장탄한 후 “만일 도망가면 쏴죽인다”고 말했다. 우리는 당황한 나머지 약 1‘키로’ 지점에 있는 ‘장산리’까지 도망쳐 그곳 어느 민가 변소에 숨었으나, 계속 추격해 온 그들에 붙잡혔다. (친구는 도망치고) 그들은 나의 양쪽 팔을 뒤로 제쳐 끌고 가면서 차에 올라타기 전 약 10분 가량 구타했다. 중위는 권총으로 전신을 때렸으며 사병들은 몽둥이와 구둣발로 때려 그때 벌써 실신하고 말았다. 그후 상반신만 승차시켜 머리는 ‘찦’차 ‘시드’(시트-필자 주)밑으로 집어넣었으며 하반신은 ‘찦’차 뒤에 늘어지게 했는데 허리를 깔고 앉고서 차 안에서도 권총, 몽둥이, 구둣발 등으로 계속적으로 구타했다. ‘찦’ 차 안엔 피가 고여 있을 정도였으며 다시 3중대 사무실 ‘아스팔드’ 바닥에 넘어뜨린 후 모두 달려들어 구둣발로 짓밟았는데 이때 한 사람은 가슴에, 한 사람은 배 위에 올라타고, 꽝꽝 굴렸다. 특히 중위는 발로 한 쪽 손을 밟고 뒷꿈치로 손등을 찧었으며, 나중엔 톱으로 잔등을 찍는 바람에 약15분간 다시 실신했다. |
그들은 그래도 부족해서 ‘빤즈’와 ‘런닝샤스’만 남기고 모두 벗겼으며 ‘로프’(삼으로 만든 밧줄)를 갖고 와서 목을 매더니 사무실 문 중방에도 걸고 잡아당기며 더욱 고통을 주었다. 그 무렵 중대장(‘스윈슨’중위)이 와서 ‘로프’를 풀은 후 이번엔 발목을 묶어서 개 끌듯이 끌고 뒷산으로 올라갔다. 다시 실신했다가 정신이 들었을 땐 중대장이 직접 몽둥이로 구타했었으며 다른 장병들은 구둣발로 차고 주먹으로 치며 가래침을 얼굴에 배앝는가 하면 흙을 입 눈 코에 마구 넣고 있었다. |
“아프다”고 고함치자 완전히 발가벗긴 후 깡통에서 노란색 음식물을 꺼내서 전신에 발라놓고 또 마구 때렸다. 그들은 곧 옆에 있던 전신주(높이 6,7 ‘미터’) 중간 지점에다 각목을 못으로 박아 십자가처럼 만든 후 그곳에 ‘로프’를 걸고 잡아당겨 이번엔 거꾸로 매달려 고통을 받았으며 다시 실신하고 말았다. 8시 40분에 체포되어 10시 40분까지 이런 모진 사형을 당했으며 그동안 미군은 물론 한국 종업원까지 강제로 동원시켜 구경을 시켰다. 그들은 전신에 유혈이 낭자하고 실신이 계속되자, 의무실에서 응급가료를 시켰으나 “살아날 가망이 없다” 는 바람에 헌병차에 실려 15병원에 갔었다. 그곳에서도 피를 한 사발 반쯤 토했기 때문에 그들은 ‘링겔’을 꽂은 채 44병원으로 나를 옮겼다. 그곳에서 가료를 받은 후 31일 아침 한국 경찰에 인계된 후 경찰 주선으로 도립병원에 입원했다. 목격자 이모씨등 2명의 진술= 보다 참을 수가 없어, 중지를 요구했으나 듣지 않았으며 피해자가 꼭 죽은 것으로만 알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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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군용견교상(犬咬傷) 사건 원근(遠近) 부대주변 빈곤이 액운의 씨 묘판 피뽑다 오인돼 【평택에서 김기영 기자발】 파주, 오산 등 미군기지에서 요즈음 미군의 행패가 접종하고 있는데 기보한 오산의 군용견교상(咬傷)사건이 일어나게 된 진상은 이렇다고 본다. 이 교상 사건이 일어난 현장인 평택군 송탄면 신장리 남산동 598번지 산등성이 남쪽은 오산비행장 고물창고(살베지)가 있고 그 둔덕을 경계선으로 해서 북쪽에는 가난한 한국빈농 또는 타향에서 벌어먹기 위해 이곳으로 유전해온 하루살이 품팔이 노동자들이 십여채의 초가집 문간방 살이를 하고 있다. 미군의 눈으로 볼 때는 생계의 터전이 없는 듯이 보이는 인근 부락민이 도둑으로 보일 것이고 애매한 부락민으로 볼 때에는 미군의 만행이 너무하다고 격분하게 된다. 피해자 심(심덕선)씨가 말한 바에 의하면 지난 5월30일 하오1시 반쯤 되어 자기는 못자리에서 피를 뽑고 점심을 먹으러 집에 돌아오자 문밖에서 떠들썩하기에 울타리 밖을 내다보니까 웬사람의 그림자가 휙 지나가고 다음 순간 대문을 차고 미군이 달려들면서 ‘캐취’ ‘캐취’ (물어라)하니까 군용견 한 마리가 달려들어 자기를 물어뜯고 발로 핥기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대문 안에서부터 시작하여 나중에는 대문밖 뜰에서 뒹굴어가면서 개와 사투하기 약 15분- 그때 자기가 입었던 ‘카키’색 작업복은 산산이 찢겨져 알몸뚱아리만 남게 되었다는 것이다. 죽을힘을 다하여 개의 두 귀를 꼭 잡고 있게 되자 이번에는 미군이 달려들어 자기 가슴을 지르기에 실신하다시피 땅에 Tm러지게 되자 웬 딴 미군이 또 한명이 나타나서 자기를 미군부대 속에 있는 치료소로 끌고 갔다는 것이다. 그곳에서 응급치료를 받고 하오3시경 평택경찰소로 넘기게 되어 그곳에서 치안재판을 받고 무죄로 인정되어 간신히 하오7시경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는 것이다.<하략> (<한국일보>1962년6월7일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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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호 일병 사형집행- 가랑비나리는 18일 수색서 총살형 애인으로부터 온 편지를 뜯어보고 동료들 앞에서 희롱하는 상관 두 명을 총으로 쏴죽인 죄로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되었던 최영오(崔永吾=25=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기상학과 재학중 학적보유병으로 입대)일등병은 18일 하오2시40분 서울근교의 수색 모사단 사격장에서 총살형이 집행되었다. 19일 상오 이와 같은 사실을 확인한 육군당국은 최일병에 대한 총살형집행명령은 15일 이미 국방부장관에 의해 내려졌고 이날 육군고등군법회의검찰관 서기 군목 및 군의관등이 입회한 가운데 총살형집행절차에 따라 다른 네 명의 죄수와 함께 집행되었고 시체는 19일 상오 11시15분 가족에게 인도되었다고 밝혔다. |
모자가 숨져간 ‘연서의비극’ 각계의 구명운동 보람없어 비보 듣자 어머니는 한강에 투신자살 아들이 총살형을 받았다는 소식을 뒤늦게 안 어머니 이숙자(李淑子=60-아현동 산10)씨는 이날 밤 10시40분쯤 실의 속에 울부짖는 가족들 몰래 집을 나가 마포강에 투신자살했는데 빗발치는 구명운동을 뒤에 하고 두 목숨을 이미 앗아간 ‘연서의 비극’은 같은날 모자 두 목숨을 숨지게 하고 말았다. “사랑하는 영(永)! 꿈같은 시간이었어요. 무사히 군대에 들어가셨는지요…”, “영, 이별은 정말 슬펐어요…” 마디마디 사무친 사랑의 사연이 본의 아니게 부대 안에서 공개되고, 급기야 ‘신서의 불가침’ 만을 외우던 성난 연인은 두 사람의 상사를 쏘고-인도(人道)와 군기문제가 사회의 빗발치는 논의의 대상이 되고 아들을 군에 보낸 아주머니, 문인들의 줄기찬 구명운동도 잇달았으나 이제 모든 것은 끝나고 말았다. |
영오야! 영오야! 애끓는 혈규(血叫)-아들 망혼 찾아 강물에 진 모정 18일 하오4시15분쯤 서울교도소에서 보낸 한 장의 “19일 하오 5시까지 시체를 인수하라”는 전보가 집에 있던 최군의 형 영수(永壽=29) 큰누이 영애(永愛=37)씨 남매를 통곡하게 했다. 하오6시쯤 집에 돌아온 어머니 이숙자(李淑子=60)씨도 눈치를 채고 6남매의 막내였던 최 일병의 사형집행을 알게됐다. 이날 아침 11시쯤에도 영수씨는 아우를 면회했으나 마지막 일줄은 몰랐었다. 어머니 이씨는 “내일이면 밥도 먹을 터이니 염려 말고 어서자라”고 오히려 두 오누이를 달래고서는 밤10시40분쯤 가족들 몰래 영오군이 사다준 지팡이를 짚고 집을 나갔다는 것이다. 슬픔에 지쳐있던 가족들이 이씨가 없음을 발견한 것은 11시30분쯤-갈만한 이웃집을 찾고 경찰에도 연락하는 한편 마포강으로 한패가 달려갔으나 마포동 419전차 종점근처의 높이 20 ‘미터’쯤되는 벼랑 밑에서 “영오야! 영오야!”하고 부르는 소리를 큰딸과 같이 찾아나온 이웃사람들이 들었다는 것이다. 강가의 벼랑창바위옆에는 지팡이가 꽂혀있고 뒤가 떨어진 털신이 나란히 놓인 틈에 “영오를 죽인 선생님들 나를 죽이는 것이 나을뻔 했습니다. 영오가 죽은 지금 나도 같이 죽는다”는 내용의 짤막한 유서가 꽂혀 있었다고 옆방 아주머니는 울며 말해주었다. 물에 빠져서도 “영오야! 영오야!”부르는 소리가 물속에서 들려왔으나 어두워서 보이지 않아 찾지 못했다고 딸 영애씨는 안타까와했다. 시체인양작업은 19일 새벽5시쯤부터 배7척에 2천원을 주고 시작했으나 시체는 찾을수 없었고 하오에는 바람과 물결이 세어 작업을 중단했다. |
최일병의 어머니가 남기고 간 유서 선생님들이 영오를 죽인다니 영오대신 모친이 죽을 터이니 영오를 살려주시오. 모친은 영오가 죽는것을 볼 용기가 없으니 영오를 살려주시오. 말이 잘 안되지만 간단한 펜을 드리올 뿐입니다. 그만 펜을 놓겠습니다. |
창백한 얼굴에 엷은 웃음-어머니 건강을 마지막 당부하며-집형(執刑)현장광경 이날 최 일병의 총살형집행현장에 입회했던 관계관은 형 집행 광경을 다음과 같이 전했다. 18일 하오2시쯤 형장에는 다섯 개의 나무기둥이 세워지고 앞뒤에서 ‘찝’으로 호위를 받으며 두 대의 ‘앰뷸런스’가 도착했다. 5명의 쇠고랑을 찬 죄수가 천천히 걸음을 옮겨가고 주위를 약20명의 헌병이 지켜갔다. 다섯 개의 기둥을 향해가는 발걸음은 힘없이 무거웠고 최 일병은 제일 왼쪽의 말뚝 앞에 서고 순순히 손발과 몸을 묶이었다. 몇 번 헛기침을 하는 얼굴은 백짓장같이 새하얗고 엷은 웃음마저 띄우기도 했다. 흰 바지저고리가 유난히 희게 눈을 끌었다. 이윽고 이름 본적 주소 소속 계급 등을 확인하는 물음엔 담담히 “네!” 목소리가 맑았다. 군목의 기도가 약3분간 계속되는 동안 최 일병은 경건히 고개숙이고 있었다. “마지막 남기고 싶은 말은?” 법무관의 물음에 최 일병은 “홀로 계시는 어머님의 건강과 남은 가족들의 건강을 빕니다. 그리고 동료들에게도 안부를 전해주십시오, 마지막 부탁입니다.” 죄수번호(5709호)를 떼고 죽고 싶다는 소원이 받아들여져 네발의 총성과 함께 소리없이 눈을 감은것은 2시 40분. 관속에 시체를 치울 때는 그때까지 질금거리던 가랑비도 멎고 있었다. 시체는 서울교도소에서 영구차에 실려 이날 하오 1시 반쯤 살아 돌아오기를 애끓게 기다리던 그의 어머니가 이제는 없는 단간방 윗목에 안치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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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회의는 9일 밤 7시반에 긴급야간본회의를 열고 십일부터 액면오십환 이하의 소액은행권과 주화를 제외한 구환화(舊?貨)의 유통과 거래를 금지하고 이를 십분의 일의 환가비율로 새 ‘원’으로 바꾸는 화폐개혁을 내용으로 하는 전문29조 부칙의 긴급통화조치법안을 만장일치로 의결하였으며 정부는 즉시 공포하였다. 이 법에 의하면 액면오십환 이하의 소액은행권과 주화는 7월10일까지 신은행권과 병용하며 이 소액권도 6월10일부터 7월10일 사이에 10대1의 비율로 새 은행권과 교환하여야 한다… (중략) 1인당 5백 ‘원’을 한도로 신권과 교환해주도록 되어있다… (하략) (<조선일보> 1962년6월10일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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땀흘리는 은행 화폐개혁이라고 해서 야단들이다. 난리 난리하지만 정년 이런 것이 난리다. 구 화폐는 퇴기같이 천대를 받고, 신화폐는 ‘스타’처럼 좋은 대우를 받는다. 새로운 것이 좋다는 하나의 증좌다. 시장에서의 암거래가 쇠고기 4천환, 사이다 500환이었다고. 사람들은 좋은 계절에 소풍이나 각종 계획을 집어치우고 1인당 5천환(신화 5백원)을 바꾸려고 땀을 흘리고 새치기와 싸우면서 은행 앞에 늘어선 장사진이었다. 전문가의 의견에 의하면 통화개혁은 있어야 했다는 정평이다. 의당 와야 할 것이 온 것이지 별다른 것은 아니며 놀랄 일은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일반 국민들은 별다른 것으로 생각하고 놀란 것이 분명하다. 앞으로 통화개혁을 잘만 관리하면 우리나라 백성들은 잘살게 될 것이라고 한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이제 더 앞으론 일반백성들을 놀라게 하는 통화개혁이라는 일이 없이 어느 선진국가처럼 화폐가 오래도록 쓰여지도록 믿음성이 있었으면 한다. 돈이 돈값을 못하고 자꾸 바뀌어지고 사람이 사람값을 못하고 자꾸 인간개조만 하여서야 어디 짧은 50평생에 제대로 숨이나 쉬어보겠는가. 모름지기 앞으로 이 나라 사직을 맡는 위정자들은 명심코 또 다시는 어느 일요일 뜻하지 않은 백성이 은행 앞에 땀흘리며 줄지어서야 하는 일이 없도록 유의하여야 하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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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내각 수반(김현철-필자 주)이 UPI 기자에게 ‘통화개혁은 완전실패는 아니다. 통화개혁을 통해서 정부는 통화의 분포상황을 알게 되었고 또한 국민은 돈이 얼마나 귀중한 것인가를 알게 되었다’고 말했다는 보도가 담화자들의 진의를 그대로 표현한 것이라고는 보고 싶지 않아진다. (하략)” (<조선일보> 만물상 칼럼) |
지게꾼과 도둑 나는 지게 하나로 일곱 식구가 산다 나는 눈요기로 다섯 식구가 산다. 세상은 자꾸만 달라져 가는데 우리들 직업도 자꾸만 달라져 간다. 만일 통화개혁이 지게꾼의 윗병을 고칠 만큼 위대했다면 혁명정부의 역사는 연필로서 어린아이들 산수노트에 기록이 될 것이다 도둑의 손버릇을 고칠 만큼 보안상 공로가 컸다면 혁명정부의 공과는 노인의 젓가락으로 강물에 기록이 될 것이다. 그래서 정치의 일실(一失)은 죽엄보다도 비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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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한 의원, 국무위원에 오물 세례 국회서 “사카린 맛 좀 봐라” 얼굴과 옷 몽땅 버려 재벌 밀수사건에 대한 질문을 벌인 22일 낮 국회 본회의장에서 김두한(한독당) 의원은 미리 준비해온 오물을 국무위원석에 퍼부어 의사당 안은 혼란에 빠졌고 이 때문에 본회의는 산회됐다. 이날 낮 12시45분쯤 김 의원은 마분지 포장지로 싼 오물 한 양철통을 들고 질문사로 등단, 1시5분쯤 “부정과 불의를 합리화시켜준 장관들을 심판하겠다”고 말하고 단상 앞에 나와 포장지를 끌러 장관들이 자리잡고 있는 자리에 오물을 부었다. 김 의원은 단 앞에서 “이것은 밀수사카린인데 국무위원들에게 맛을 보여주어야겠다”고 말하면서 포장지 위에 있던 흰 가루를 국무위원들에게 뿌리고 잇따라 오물을 뿌려 국무위원석에 앉았던 김 재무장관(김정렴-필자 주)은 온 얼굴과 옷에, 정 총리(정일권)?장 기획(장기영)?민 법무(민복기)?박 상공(박충훈) 등 장관들은 옷을 몽땅 버렸다. 이날 김 의원이 오물을 들고 의사당에 들어갈 때 경위과에서 체크했으나 김 의원은 증거로 갖고 온 사카린이라고 속였다고 한다. 이같은 사태가 벌어지자 여야 원내 총무들은 의장실에서 회합, 대책을 논의했는데 일부에서는 국회법에 따라 김 의원을, 제적을 불사하는 징계처분을 하자는 주장도 내세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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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깨끗한 선물이 있다. 미친 놈은 미친개의 진액을 빨고 산다. 도박꾼들의 행패는 언제나 쌍스럽다. 명예도 황금도 권력도 똥물에 튀긴 밀수품이다. 빈곤한 민족의 얼굴들 창백한 역사의 손.발 황금의 얼굴을 한 이병철씨의 양심도 죽일 놈이지만 그의 심장도 망할 놈이다. 백성을 근심케 하는 자는 이 나라의 역사를 근심케 하는 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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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토요판 에디터. 「한겨레21」「씨네21」편집장과 한겨레 esc 팀장을 지냈다. 지은 책으로 『글쓰기 홈스쿨』(2011)과 『유혹하는 에디터』(2009), 『직설』(공저, 2011)이 있다. 가족을 사골국물처럼 글감으로 우려먹는다는 비판에도 굴하지 않고 아버지 이야기를 시작했다.
<강준만> 저266,400원(10% + 5%)
1945년부터 2009년까지 65년의 역사를 촘촘히 담아내다 '한국 현대사 산책' 시리즈, 194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23권으로 구성된 이 책은 방대한 지면에 한국 현대사의 굴곡 하나하나를 써내려간다. 3만 3천 장이 넘는 원고지에 1945년부터 2009년까지 65년의 역사를 촘촘히 담아낸 '한국 현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