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다. 장맛비가 연일 계속 내리고 있다. 언젠가 비는 그친다. 뙤약볕에 지친 도시인은 떠난다. 바다로, 섬으로. 며칠 전 어머니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가족여행을 간 기억이 까마득하니 이번 여름에는 함께 휴가를 보내자고 말씀하신다. 당신은 기왕이면 서해안이나 남해안의 섬이 좋겠다고 덧붙이셨다.
내가 태어나서 자란 곳, 섬이다. 태종대가 있어 유명했고 한진중공업 사태로 한층 더 이름이 알려졌다. 섬에 사는 사람이 휴가를 섬에서 보내고 싶단다. 이유를 물었다. 어머니는 영도가 섬이 아니라고 하셨다. 육지로 연결된 다리가 3개나 있는데 어떻게 섬일 수 있느냐는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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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어느 섬으로 떠나 볼까 | |
그렇다. 섬을 섬으로 규정짓는 속성이 바로 단절이다. 육로로 연결된 섬은, 비록 섬이라도 섬 같은 느낌이 나지 않는다. 휴가철, 섬에서 사람이 바라는 것은 일상의 단조로움에서 탈주할 수 있는 공간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섬으로 떠난다. 일반인 뿐만 아니라 작가 역시 섬에 매료되었다. 섬이 지니는 단절, 고립, 고독, 탈주 등의 매력적인 속성은 문학 작품에 등장하는 단골 메뉴다.
1명의 여성, 30명의 장정이 도착한 무인도에서 벌어진 일
육지 사람에게 모든 섬은 신비하다. 그중에서도 무인도는 특별하다.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이라는 뜻의 무인도. 잊을 만하면 TV 토크쇼나 라디오에서는 ‘당신이 무인도에 간다면, 무엇을 갖고 갈 것인가’라는 물리지만 언제 들어도 흥미로운 질문이 나온다.
이 때문에 ‘충격, 무인도에서 살았던 XX씨 OO년 만에 극적인 구조’와 같은 뉴스는 수많은 사람의 클릭질을 유도한다. 다른 사람의 체험담이라도 듣고 싶은 것이다. 제44회 다니자키 준이치로 수상작인
『도쿄섬』은 일본에서 화제가 됐던 ‘아나타한 사건’이라는 실화를 모티브로 한 소설이다. 물론 실화를 소재로 한 소설이 대부분 그렇듯,
『도쿄섬』 역시 실제 내용보다는 작가의 상상력이 서사를 이끈다.
무인도에 30여 명의 장정과 1명의 여성이 도착했다. 여기까지는 ‘아나타한 사건’과 똑같다. 만약 아나타한 사건처럼 그 여성이 20대였다면 이 소설은 삼류 포르노로 전락했을지도 모르겠다. 유일한 여성인 기요코는 젊고 예쁜 여성이 아니라, 뱃살이 나오고 꽤 많이 늙은 40대 여성으로 등장한다.
『도쿄섬』은 바로 홍일점 기요코 아줌마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이 소설은 인류학적 질문으로 가득 차 있다. 종교의 기원, 문자의 발명, 분업의 탄생, 계급 분화 그리고 무엇보다 인간 생식의 다양한 형태가 바로 그러한 물음이다. 본의 아니게 무인도에 표류하게 된 이들은 섬 이름을 ‘도쿄’로 붙이고 지역을 나누며 생산 활동을 하는 등 문명에서의 생활을 그대로 유지해 나간다.
레비-스트로스는 원시와 문명의 차이를 날것과 익힌 것의 비유로 설명했다. 익히기 위해서는 불이 필요하고 불은 폭력의 다른 이름이다. 문명화 과정은 곧 폭력의 과정이기도 했다. 도쿄섬에서 발생한 폭력은 여러 단계에서 발생한다. 처음에는 여왕벌 40대 기요코를 둘러싼 수컷들의 싸움. 싸움은 살인으로까지 이어진다. 기요코로 인한 수컷들 싸움이 격정으로 치닫자, 주민 스스로 조정 작업에 들어간다. 동성애를 발전시키고 기요코 외모를 실제 그대로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결과, 기요코는 잉여로 전락한다. 짝짓기 싸움이 끝난 뒤에는 뒤늦게 도착한 홍콩인과 일본인의 세력 다툼이 벌어진다. 도쿄섬의 실권을 잡기 위한 일본인 내부에서의 권력투쟁도 치열하게 전개된다.
야만과 문명. 이곳은 지옥인가, 낙원인가. 소설을 읽는 내내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공저한
『계몽의 변증법』이 떠올랐다. 문명이 야만으로 전락하는 것은 한순간이다. 야만을 문명으로 바꾸어 보려 하지만, 문명을 가장한 야만의 레토릭에 불과한 일도 많다. 인간이 잠시 정신을 놓는 사이, 계몽을 위해 태어난 신화는 폭력으로 끝날 수도 있다. 2차대전의 교훈이고, 도쿄섬에서 벌어진 촌극이 시사하는 바다.
우리가 쌓아온 문명은 무엇인가섬이라는 고립된 공간에서 문명과 야만과의 갈등을 긴장감 있게 묘사한 작품은 많다. 대부분 그 원형을 대니얼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에서 찾는다. 무인도에 표류한 로빈슨 크루소가 생산활동을 하고, 기록을 남기고, 프라이데이라는 원주민을 노예로 부리는 장면에서 많은 유럽 지식인은 찬사를 보냈다. 문명화 과정을 소설로 훌륭하게 묘사했다는 이유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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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밤섬에서의 무인도 생활을 그린 영화, 「김씨 표류기」 | |
로빈슨 크루소는 신화적 존재다. 신화란 역사의 반대말이다. 시간에 구속받는 역사와 달리 신화는 시공간 맥락에서 자유롭다. 이러한 신화의 보편적 속성 덕분에 이야기는 여러 차례 변용된다. 디포가 창조한 한 남자가 신화적 존재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미 세계의 많은 소설가가 그들만의 로빈슨 크루소 이야기를 썼다. 생 종 페르소, 장 지르도, 쥘 베른. 심지어 로빈슨 크루소가 전혀 몰랐을 21세기 한국에서도 로빈슨 크루소는 나타났다. 영화 「김씨 표류기」가 그렇다.
모든 사람이 로빈슨 크루소에 열광한 것은 아니다. 에드워드 사이드, 가야트리 스피박과 같은 후기식민주의자가 제기한 후폭풍도 만만치 않았다. 후기식민주의는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키플링, 카뮈의 작품이 서구 제국주의 침략을 직?간접적으로 옹호했다고 비판한다. 다니앨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도 이러한 지적에서 벗어날 수 없다. 프랑스의 대표 작가 미셸 투루니에는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에서 디포가 만들어낸 로빈슨 크루소를 거꾸로 세운다.
문명화 과정을 몸으로, 행동으로 표현한 로빈슨 크루소는 주인공이었다. 하지만 트루니에는 그를 조연의 위치로 끌어내린다. 대신, 방드르디라는 유색인 소년을 주연으로 등장시킨다. 로빈슨와 유색인인 프라이데이의 관계가 뒤집힌다. 원작에서 기묘한 긴장을 이루던 두 대립항 역시 모두 바뀐다.
디포는 로빈슨 크루소라는 백인을 주체, 계몽, 이성, 선, 합리성와 동의어로 표현했다. 대신 프라이데이라는 유색인종을 타자, 야만, 비이성, 악, 비합리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묘사했다. 트루니에는 반대다. 생산활동을 하고 성경을 외우는 로빈슨 크루소를 방드르디(프라이데이)는 조소한다. 오히려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에서 크루소는 방드르디의 새로운 가치관, 새로운 종교에 매료된다. 백인 문명이 유색인 야만을 교화하는 게 아니라, 유색인 야만이 백인 문명을 가르친다.
섬에서는 오로지 웃자트루니에에게 로빈슨 크루소는 조롱거리다. 왜? 즐겁지 않기 때문이다. 열심히 생산활동을 하고, 기도하며, 노예를 부리지만 그의 표정에는 웃음이 없다. 방드르디는 반대다. 언제나 즐겁다. 헤르만 헤세의
『황야의 이리』에서 비슷한 문제를 제기했다. 작가 자신을 반성한 이야기라고 하지만, 헤세는 이 작품에서 웃음을 잃은 사상, 가치, 철학, 문학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물었다.
GNI가 늘고, 과학기술은 나날이 발전하며, 평균 수명은 증가했다. 이것이 서구 문명이 그토록 자랑하는 이성, 계몽, 문명의 업적이다. 언뜻 보기에 썩 괜찮아 보인다. 하지만 인류는 정말 근본적인 삶의 문제를 해결했던가. 쇼펜하워는 이런 말을 했다. 삶이란 고통과 권태의 양 극단을 오가는 시계추와 같다고. 쇼펜하워는 틀렸다. 권태로워하는 사람이라도 있다면 그나마 다행, 현대사회에서는 모두 저마다의 문제로 힘겹게 살아간다. 지금 인류는 전쟁, 테러, 경제공황, 실업, 빈곤, 자연재해 등 수많은 위험에 노출된 채 하루하루를 연명한다.
미시적인 삶에서의 모습도 마찬가지다. 사교육비, 전세, 월세, 대학 등록금, 자장면 가격은 오르는데 청년 실업 문제는 해결될 기미가 없고 로또 당첨 확률은 그대로다. 삶은 참 팍팍하다. 그러니까 여름 휴가철에 일상과 단절된 곳에서 머리라도 식혀야 한다.
건강한 삶은 일상과 비일상이 조화로울 때 가능한 법. 비록 성수기 펜션 빌리는 비용이 비싸더라도, 파라솔 하나 빌리는 값이 서울 심야 택시비와 맞먹더라도, 그냥 웃자. 헤르만 헤세와 미셸 투르니에가 내린 처방책이다. 힘들 때, 웃음이 최고다. 이번 여름 섬에 가서는, 눈 부신 햇살을 보고 웃을 것이다. 구름이 껴도 웃겠다. 태풍이 와도 웃어야지. 설사 휴가 가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해도 웃지 않을 수 없을 만큼 명랑해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