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기다렸다. 『치우천왕기』가 드디어 완간됐다. ‘치우’가 누구던가. 우선 떠오르는 것은 ‘붉은 악마’다. 한국 축구대표팀 응원단 붉은 악마의 상징으로 눈에 박혔다. 한민족의 신화를 이야기할 때 거론되고도 있으나, 치우에 대한 가장 흔한 수식은 ‘전신(戰神)’ 혹은 ‘병기의 신(兵主神)’이다.
치우는 또한 중국고대신화에 등장한다. 중국의 오제 가운데 한 명인 헌원과 동북아시아의 패권을 두고 다툰 오랑캐들의 영웅. 조선에서도 이에 치우를 끌어들였다. 북애자가 저술했다고 알려지는 『규원사화(揆園史話)』에서, 치우는 환웅(桓雄)의 명에 따라 여러 제후의 땅을 빼앗았다고 기록돼 있다.
이우혁 작가가 그런 치우를 다시 끄집어냈다. 『퇴마록』으로 판타지소설의 열풍을 몰고 온 그가, 한국형 판타지라고 일컬은 『치우천왕기』 1권을 내놨다. 치우천왕의 유물을 찾아다니며 방대한 자료를 조사한 그는, 기원전 2700년경, 치우천왕을 한민족의 기원으로 설정된 ‘주신족’의 영웅으로 상상했다. 특이하게도 치우천왕은 치우천, 치우비 형제의 영웅담으로 다뤘다.
독자들의 환호는 대단했다. 치우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상상이 독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관통했다. 그러나 치우천왕의 이야기는 더뎠다. 언제쯤 치우의 이야기가 이어질까, 10여 년이 흘러, 마침내 『치우천왕기』가 완결됐다. 이우혁 작가가 꿈꾸던 한 세계가 마침내 종결됐다.
오랜 기다림 끝, 지난 13일, 서울 홍대부근 상상마당에서 펼쳐진 ‘향긋한 북살롱’에 이우혁 작가가 초청됐다. 강연의 제목은, ‘이우혁 작가의 한국 판타지소설 쓰는 법 최초 강연’. 많은 사람들이 『치우천왕기』의 이야기와 판타지소설 쓰는 법을 듣기 위해 모였다.
이우혁, 치우천왕을 좇다
『치우천왕기』 ‘작가의 말’을 잠시 인용하자.
“소설에서 내가 바라는 점은, 우리가 이제까지 갖지 못한 우리의 ‘영웅 신화’를 가져 보자는 데 있다. 중국인의 시조(始祖)이며 위대한 영웅이었던 황제와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맞섰던 치우천왕은 황제와는 다른 생각이나 근본을 가진 인물이었다. 아울러 그는 주신의 한웅이었고, 동북아의 모든 부족의 맹주였다. 고구려나 발해 등의 어떤 국가보다도 더 광범위한 세력을 가진 고대의 제왕이었다.”
이우혁 작가는 치우의 흔적을 찾기 위해 중국을 들락날락했다. 고대유적만 있으면, 치우와 관련한 유적만 있으면, 불필요한 것만 빼고는 무조건 발을 디뎠다. 이날, 그 가운데 일부를 보여줬다. 그가 직접 촬용한 치우채, 즉 치우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성채의 흔적을 담은 동영상을 10여 분 가량 틀었다. 또 벽화/유물 사진, 치우채에서 직접 얻어온 토기 몇 점도 독자들에게 선을 보였다.
영상을 보면서, 그는 한 가지 단상을 끄집어냈다.
“동북공정이 엄청나게 많이 진행됐고, 중국은 땅 욕심이 아직 많은 것 같다. 중국은 동북공정에서 자신들에게 불리한 것은 다 빼고, 안 파고 안 건드리더라. 그래서 이걸 쓴 거다. 국수주의나 민족주의, 나도 싫어한다. 그런데도 날 만나지도 못한 사람이 날 안다고 떠드는데, 거참…”
판타지 소설, 무엇을 어떻게 쓸까?
이우혁 작가는 전제를 든다. 한국 판타지 소설. 이건 ‘틀린’ 말이란다. 소설을 쓸 때, 이렇게 접근하는 건 좋지 않단다. “어떤 주제가 있는데, 이걸 판타지 형식으로 써야겠다, 그렇게 접근하면 안 된다. 나는 한국 판타지를 쓰겠다고 『치우천왕기』를 쓴 게 아니라, 『치우천왕기』를 쓰면서 그렇게 됐다.”
소설쓰기의 첫 번째. 즉, 무엇을 쓸 것인가의 문제에서, 판타지소설을 쓰겠다고 주제를 잡을 것이 아니라, 내 삶을 주제로 쓰면서 판타지라는 형식을 빌릴 것. 그의 지적은 이렇다. “처음부터 판타지소설을 쓰겠다고 하는 건 튼 거다.”
이어서 어떻게 쓸 것인가. 그는 『해리 포터』시리즈를 쓴 조앤 롤링과 『반지의 제왕』시리즈를 냈던 판타지소설의 대가, 톨킨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톨킨은 중간계를 만들었고, 롤링은 마법학교를 만들었다.
“해리 포터가 잘 된 것은 학교 이야기를 판타지 형식을 빌려 잘 표현했기 때문이다. 말포이가 끝까지 화해를 안 하고, 선생이 애를 죽이려고도 하는데, 롤링의 의도는 뭘까. 학교는 위험천만한 곳이라고 알려준 거다. 톨킨은 하나의 세계를 만들었는데, 톨킨이 표출하려고 한 것은 운명의 범주다. 조안은 자신이 잘 아는 것이 학교였고, 톨킨은 공부를 진짜 많이 한 덕에 하나의 세계를 창조할 수 있었다. 판타지로 세계를 만들겠다고 하는데, 종교, 세계, 철학관 없이는 만들 수 없다.”
결국 작가가 쓸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세계다. 아이디어나 대사만으로 소설이 나올 수 없다. 세계에 대한 인식을 하기 위해선 공부를 많이 해야 한다는 것. 이우혁 작가의 조언이다.
“소설을 쓴다고 해야 한다. 판타지소설을 쓰는 게 아니라. 나도 판타지소설이 아니라, 소설을 쓰고 싶은 거다. 나는 판타지소설을 쓰겠다고 하는 사람이 있으면, 진정으로 당신이 표출하고 싶은 게 뭐냐, 이렇게 묻는다. 누구나 펜이 있으면 그림을 그릴 수 있으나 모두 명화가 되진 않는다. 글로 원고지 1,000매를 썼다고 소설이 되진 않는다.”
두 번째, 솔직할 것. 가령, 책을 내고 부끄럽다고 하는 사람들. 이 작가의 비판. “남들이 내 글을 안 봐줘서 걱정이지, 부끄럽다고 하면 왜 (책을) 냈어?”
그에 의하면, 책은 ‘콘텐츠(내용)’와 ‘작가(글 솜씨)’와 ‘독자의 능력’의 총체다. 이 가운데 특정 부분이 도드라질 수 있고, 작가에게 가장 요구되는 것은 이 세 가지 가운데, 역시 작가(글 솜씨)다.
작가에게 요구되는 덕목
그렇다면 작가는 어때야할까. “남의 얘기를 안 된다. 그러면 다른 사람의 수준에 맞춰진다. 자기가 진짜 원하는 것이 뭔지도 모른다. 자신이 쓰는 소설은 자신이 쓰는 거다. 작가는 기댈 생각을 하거나 힘을 얻어서 대충 가려고 하면 안 된다.”
작가에게 요구되는 또 하나의 덕목. 이우혁 작가는 세상을 흑과 백으로 이분화 시켜선 안 된다고 지적했다. “사고방식을 이분화해서 가져가는 건 위험하다. 사람이 머리 좋다고, 돈 많다고, 잘 생겼다고 꼭 성공하는 건 아니다. 사고방식을 건실하고 다양한 상황에 대처할 수 있도록 가져가야 한다. 주의?주장만 내세울 것은 아니다.”
독자들이 책을 고를 때도 필요한 것이 있다. 자신의 수준을 알아야 하고, 콘텐츠가 어떠하며, 작가가 어떤지, 그런 것들을 매칭해서 자신에게 맞아야 한다.
이 작가가 요구하는 것은 또한 이렇다. “소설은 글자만으로 이뤄졌다고 할 수 없다. 글이 글자로 돼 있다고 다 똑같은 게 아니다. 뭘 써야 하느냐를 놓고 고민을 하는데, 작가도 행간을 읽어야 한다. 몰입도를 줄 수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하다. 체화를 할 수 있느냐. 내 책이 잘 읽힌다는 분들이 있는데, 그게 그냥 되는 걸까? 그렇지 않다.”
그래서 그에게 글을 쓴다는 건, 인지(認知)에 가깝다. 그는 인간의 본질을 알기 위해 판타지라는 형식을 빌려 소설을 썼다고 했다. 한국인이어서 한국 판타지를 쓴 것이 아니라, 한국을 상대적으로 다른 나라보다 잘 알아서 한국 판타지를 썼다. 그러나 이젠 그는 다른 세계를 꿈꾼다. 한국이 아닌 전세계적으로 통용될 수 있는, 그것을 그는 ‘토탈 휴먼’이라고 지칭했다.
마지막으로 작가에게 요구되는 덕목은 체화다. “중국의 그 많은 장수들 중에서 『손자병법』을 읽지 않은 장수는 없을 거다. 그런데 누구는 백전백승이고, 다른 누군가는 패배만 한다. 왜 그럴까. 체화가 그 답이다.”
배우고 익힌다고, 그것들을 잘 알고 삶에서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내 것이 아니 된다면, 그 배우고 익힘은 삶이 아닌 앎으로만 끝날 수 있다.
“지식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내 삶으로 스며들어야 한다. 체화가 행동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지식이 체화되기 위해선 처절한 고뇌와 시간이 필요하다. 공짜로 얻어지는 것은 없다. 습득한 지식을 겉핥기로만 알아서 이를 쓰면 독자들이 순간적으로 넘어갈 수 있지만 결국엔 ‘재미없다’고 독자들이 말한다. 알면 고통 받고 힘들 수도 있지만, 자신이 하는 일에 넓고 막히지 않는 길이 열릴 수 있다. 체화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