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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진에 불 꺼진 도쿄타워

20대 대학생과 40대 주부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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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인 나도 쓸쓸한데, 불 꺼진 도쿄타워를 바라보는 도쿄진(東京人)들의 마음은 오죽할까요. 학교가 도쿄타워 바로 옆에 있는 탓에 등하교길마다 도쿄타워와 조우하게 되는데요. 어느 날부터 불 꺼진 도쿄타워가 ‘감바레 닛뽄(がんばれ、にっぽん)’이라는 작은 네온사인 허리띠를 두르고 있더군요. 처연하다는 느낌밖에 주지 않는 그 불빛마저 열심히 카메라에 담고 있는 도쿄 시민들을 보면서 이 영화가 생각났습니다.

3월에 일어난 동일본 대지진으로 도쿄타워 꼭대기 송신탑이 휘어진 사건은 꽤 의미심장합니다. 이 뉴스는 듣는 순간, ‘지진인데 어찌하여 꼭대기가 휘어진 것이야’라는 공학스러운 질문과 함께 ‘한 시대의 종말’이라는 사회과학스러운 표현이 동시에 떠오르더군요. 1958년 완공된 후 하루도 빠짐 없이 저녁마다 불을 밝혀 왔다는 도쿄타워는, 지진 후 절전계획 협조라는 명목 하에 2달 가까이 불을 끄고 있는 상태입니다. 지진 후 간 총리는 “지금 일본은 2차 세계대전 후 가장 큰 위기에 처해 있다”는 말을 여러 번 했죠. 종전 후 상상초월의 속도로 세계 2위의 경제대국에 올라섰고, 그 풍요로운 열매를 맘껏 누렸던 일본의 ‘좋은 시절’이 이제 끝나가고 있음을, 어둠 속에 웅크린 도쿄타워를 볼 때마다 실감하게 됩니다.

외국인인 나도 쓸쓸한데, 불 꺼진 도쿄타워를 바라보는 도쿄진(東京人)들의 마음은 오죽할까요. 학교가 도쿄타워 바로 옆에 있는 탓에 등하교길마다 도쿄타워와 조우하게 되는데요. 어느 날부터 불 꺼진 도쿄타워가 ‘감바레 닛뽄(がんばれ、にっぽん)’이라는 작은 네온사인 허리띠를 두르고 있더군요. 처연하다는 느낌밖에 주지 않는 그 불빛마저 열심히 카메라에 담고 있는 도쿄 시민들을 보면서 이 영화가 생각났습니다. 도쿄타워가 이 도시의 중심에 자리를 잡아가던 시절, 이 송신탑과 함께 꿈을 키워가던 일본인들의 모습을 그린 <올웨이즈 3번가의 석양(Always 三丁目の夕日)>입니다.

 

일본의 인기작가인 사이간 료헤이의 『3번가의 석양(三丁目の夕日)』이 이 영화의 원작입니다. 요즘 한국에서 ‘쎄씨봉 문화’가 대세인 것처럼, 수년 전부터 일본에서는 쇼와시대(昭和時代 1926~1989년)의 정서를 자극하는 ‘쇼와 레트로’ 열풍이 불었습니다. 이 영화는 ‘쇼와 레트로’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작품이었는데요. 2005년 개봉 당시에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하고 2006년 일본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는 작품상을 비롯해 12개 부문을 석권했습니다.

한국전쟁을 등에 업고 일본 경제가 쑥쑥 성장하던 1950년대의 도쿄를 배경으로, 힘들지만 꿈을 갖고 살아가는 도쿄 시타마치(서민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립니다. 전쟁 통에 부모에게 버림받은 소년은 생판 남인 문방구 아저씨네서 더부살이를 하게 되고, 젊고 아름다운 아가씨는 아버지의 병원비를 벌기 위해 술집에 나갑니다. 동네에 하나밖에 없는 TV를 보기 위해 밤마다 마을 사람들이 모여들고, 새로 산 냉장고가 신기해 가족들이 얼굴을 들이밀곤 하던 시절입니다.

“그땐 참 좋았지”가 핵심인 이런 영화에 그다지 끌리지 않습니다만, 이 작품은 굉장히 매력적이었습니다. 아마 다분히 만화적이면서도 현실에 있을 법한 생생한 등장인물들과, 이를 훌륭하게 소화한 배우들의 열연 덕분이었을 겁니다. 작은 정비소를 자동차 회사로 키우겠다는 꿈을 가진 마초 사장님 역할의 츠츠미 신이치도 딱이었지만, 꿈을 갖고 시골에서 상경한 소녀를 연기한 호리키타 마키의 사투리가 너무 귀여웠습니다. 작가를 꿈꾸는 어리버리한 문방구 주인을 연기한 요시오카 히데타카는 이 작품으로 일본 아카데미상 남우주연상을 수상하기도 했죠.


하지만 이 영화의 진짜 주연은 도쿄타워입니다. 영화의 시작, 취업을 위해 상경한 소녀 무츠코가 역에 마중 나온 사장님과 함께 차를 타고 도쿄 거리를 지날 때, 3분의 1쯤 지어진 도쿄타워의 모습이 저만치 비춰집니다. 바지를 입다 만 듯 어정쩡한 상태인 도쿄타워를 보며 사장님은 뻐기듯 말하죠. “저게 도쿄타워라는 거야. 공사가 끝나면 세계에서 가장 높은 송신탑이 될 거라고!!”

영화의 마지막에도 도쿄타워가 등장합니다. 명절을 쇠러 고향으로 향하는 무츠코를 역까지 바래다준 사장님 가족은 언덕 위에 서서 도쿄의 석양을 바라봅니다. 거기에는 그들의 꿈을 담은 도쿄타워가 이미 당당한 모습으로 완성되어 서 있죠. 영화를 보면서는 ‘아니 몇 달 사이에 벌써 공사가 끝났다는 게 말이 돼?’ 라고 궁시렁거렸는데요. 나중에 자료를 찾아보니, 높이 333m의 도쿄타워는 실제로 기공 후 불과 1년 3개월 만에 후닥닥 완공이 되었다고 합니다.

‘도쿄타워’가 가진 상징성을 생각하면 의외지만, 직접적으로 ‘도쿄타워’라는 제목을 가진 소설이나 영화는 많지 않습니다. 가장 먼저 생각나는 건 일본의 대표적인 ‘문화백수’ 릴리 프랭키의 자전적 소설이자 오다기리 죠 주연의 영화로도 만들어졌던 『도쿄 타워-엄마와 나, 때때로 아버지』 라는 작품이네요.

이 작품은 2006년에 일본 전국의 서점 직원들이 가장 팔고 싶은 책을 선정하는 ‘책방대상’을 수상한 후, 200만부를 돌파한 대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이 책에서 그려지는 도쿄의 모습은 <올웨이즈 3번가의 석양>에서 조금 더 시간이 흐른, 1970~90년대 풍경입니다. 자주 등장하는 ‘구루구루구루구루(빙글빙글빙글빙글)’라는 표현처럼, 꿈을 찾아 도쿄로 왔지만 이 도시에 섞여 들지 못하고 빙글빙글 겉도는 이들의 삶을 따뜻하게 그리고 있죠.


가로등에 모여드는 나방처럼 우리는 찾아왔다. 한번도 본 적 없는 휘황한 불빛을 원하며 거기에 빨려 들었다. 고향 땅을 버리고 기차에 흔들리고 마음마저 흔들리며 이곳에 끌려왔다.
빙글빙글빙글빙글, 빙글빙글빙글빙글.
5월에 어느 사람은 말했다.
그 도쿄타워를 바라보며 쓸쓸해 보인다고 말했다.
그저 우두커니 선 채, 한낮을 채색하고 밤을 화려하게 비춰내는 그 모습이 쓸쓸해 보인다고 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그래서 더욱 동경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이 텅 빈 도시에서 홀로 등을 꼿꼿이 세우고 늠름하게 빛을 발하는 그 풍경에서 강인함과 아름다움을 느끼는 거라고 생각했다. 어딘가에 휩쓸리고 패거리를 만들고 친해졌다 배신하며 서로를 속고 속이며 넘어가는 우리는 그 고독한 아름다움에 저절로 끌려드는 거라고. 외로움을 견디지 못해 계속해서 빙글빙글 돌고 있는 우리가 그것을 동경하는 것이라고.
그리고 사람들은 그곳을 행해 나아간다. 태어난 땅에 등을 돌리고, 그것처럼 될 수 있는 무언가를 찾기 위해 도쿄로 나온다.
이 이야기는 오래 전에 그것을 향해 나아가기 위해 상경했었고 결국 떨려나서 고향으로 돌아갔던 내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이곳에 나왔다가 돌아갈 곳을 잃어버린 나, 그리고 단 한번도 그런 환상을 품은 일이 없는데도 도쿄까지 따라 나왔다가 다시 돌아가지 못한 채 도쿄타워 중턱에 영면한 내 어머니의 조그만 이야기다.

『도쿄 타워-엄마와 나, 때때로 아버지』 중에서


자신의 희생해 아들을 키워낸 어머니와 바람처럼 떠도는 아버지, 시골청년의 좌충우돌 도쿄생활 등 이 소설에는 대중적으로 공감할만한 요소들이 많긴 합니다. 하지만 작가이자 화가이며 라디오DJ이기도 하고 배우이기도 한 저자 릴리 프랭키를 잘 모르는 한국독자들에게는 소설보단 영화가 더 인상적이었을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거적때기 속에 감춰진 완벽 미모’라고 평하는 배우 오다기리 죠 덕분에 이 작품을 더 아끼게 되었는데요. 특히 맘에 들었던 것은 분홍색 가디건에 연분홍색 바지 등, 보통 남자들에게는 적용 불가능한 의상을 너무나 훌륭히 소화한 그의 자태였습니다. 특히 허리를 묶는 트렌치 코트에 페이즐리 무늬 스카프를 두르고, 병원에 입원하는 엄마의 손을 꼭 잡은 채 도쿄 도심을 걸어가는 장면은 너무 아름다웠습니다. 도쿄라는 이 거대하고 쓸쓸한 도시를, 유일한 내편이자 영원한 내편인 엄마의 손을 잡고 걸어갑니다. 그 어느 때보다 정성스럽게 차려 입은, 엄마와 아들의 마지막 산책길입니다.

영화 속 오다기리의 스타일은 한때 도쿄의 패션남들 사이에서 크게 유행했다고 하는데요. 영화가 한참 인기였던 2007년 가을 도쿄에 출장을 왔을 때는 핑크와 꽃무늬로 휘감은 ‘10미터(떨어져서 보면) 오다기리’ 들을 오모테산도 대로에서 자꾸 마주쳐 깜짝깜짝 놀라기도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 『도쿄타워』에 대해 짧게 이야기하려 합니다.

‘20대 대학생과 40대 주부의 사랑’을 그려 화제가 된 작품이죠. 작가는 ‘도쿄타워가 보이는 장소에서 일어나는 사랑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고 합니다. 이 소설 속에서의 도쿄타워는 사랑에 빠진 연인들의 마음을 연결해주는 매개체인 동시에, 세상의 편견과 오해 속에 길을 잃은 이들의 힘겨운 사랑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풍경은 비에 젖은 도쿄 타워이다.
트렁크 팬티에 흰 셔츠만 걸치고 인스턴트 커피를 마시면서, 코지마 토오루는 생각한다.

어째서일까. 젖어있는 도쿄 타워를 보고 있으면 슬프다. 가슴이 먹먹해진다. 어릴 때부터 쭉 그렇다.

『도쿄타워』 중에서


개인적으로는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을 즐겨 읽지 않습니다. “나는 아름다운 것들에 둘러싸여 그녀의 전화를 기다린다” 거나 “아름다운 것들을 보면 눈물이 나요. 곧 사라져 버릴 것 같아서”와 같은 ‘오글오글한’ 대사들을 잘 참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 작품 역시 소설보다는 영화를 먼저 보게 되었는데요. 일본 아이돌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피해갈 수 없는 영화였습니다. 일본의 대형 기획사인 쟈니스의, 한참 떠오르는 신예스타였던 오카다 준이치(‘V6’)와 마츠모토 준(‘아라시’)이 연상녀를 사랑하는 파격적인 연기에 도전했기 때문이죠. 최근 다시 이 영화를 보게 되었는데, 오카다 준이치는 2005년과 지금의 모습이 거의 비슷한 반면, 어린 마츠모토 준의 뽀송뽀송한 모습은 꽤 신선하게 느껴지더군요.

도쿄타워는 언제쯤 다시 불을 밝히게 될까요. 어쩌면 도쿄타워가 다시 불을 밝힌다 해도, 도쿄를 상징하는 마스코트로서의 역할에서는 이제 물러나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올해 7월부터 지상파 방송 디지털화를 앞둔 일본이 도쿄 스미다구에 도쿄타워를 대신할만한 세계 최고 높이의 송신탑 ‘도쿄 스카이트리(TOKYO SKY TREE)’를 건설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벌써부터 도쿄의 새로운 명소로 떠오르고 있는 스카이트리는 올해 초 600m를 돌파해 중국 광저우 타워를 제치고 세계에서 가장 높은 타워가 되었습니다. 완공되고 나면 높이가 634m에 이른다고 합니다.

대지진 후 자숙하는 분위기 속에서도 많은 일본인들이 스카이트리를 보기 위해 스미다 강가로 모여듭니다. 도쿄타워가 한때 일본인들의 꿈을 대변했듯, 스카이트리가 경기침체와 재해로 힘이 빠진 일본인들에게 새로운 희망이 되어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차갑고 예민해 보이는 스카이트리보다 낡았지만 정감 있는 ‘짝퉁 에펠탑’ 도쿄타워에 더 정이 갑니다. 젊은 시절의 활력은 사라졌지만 여유로움이 멋스러운 트렌치코트 차림의 중년신사를 보는 느낌입니다. 이번 위기를 뛰어넘어 일본이, 도쿄가 향하게 될 새로운 길이 이처럼 연륜이 빛나는 성숙한 모습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도쿄타워 주변을 매일 지나면서도 전망대에 올라가본 적이 없네요. 도쿄 타워가 다시 불을 밝히는 날, 지진 때문에 서먹해진 도쿄와 화해하는 의미에서라도 전망대에 꼭 한번 올라가볼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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