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인가? 잠 안 오는 밤, 문득 나를 남처럼 바라보며 물은 적이 있다. 스무 살에 성장을 멈춘 영혼이다. 80을 코앞에 둔 늙은이이다. 그 두 개의 나를 합치니 스무 살에 성장을 멈춘 푸른 영혼이, 80년 된 고옥에 들어앉아 조용히 붕괴의 날만 기다리는 형국이 된다. 다만 그 붕괴가 조용하고 완벽하기만을 빌 뿐이다.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p. 26)
한국문학의 거목 박완서 작가가 지난 22일 토요일 새벽 세상을 떠났다. 올해로 80세를 맞는 박완서 작가는 지난 가을 담낭암 진단을 받았다. 수술 후 회복되는 듯 보였으나, 끝내 눈을 감았다. 올해는 그가 문단에 데뷔한지 41주년, 최근까지 수필집 발간, 문학상 심사 등의 활동으로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현역작가로 활동했다.
지난 해 5월 <현대문학> 창간 55주년 기념으로 묶인 소설집 『석양을 등에 지고 그림자를 밟다』 독자만남 행사에서 박완서 작가를 뵌 기억이 난다. 소녀다운 맑은 감성이 여전한 눈으로 어린 독자들을 반겼던 기억이 생생해 그의 부고 소식이 실감나지 않았다. 그때만해도, “마당을 가꾸는 일 덕분에 건강해지는 것 같다”며 웃었고, 다음 작품 계획을 묻자, “에이, 그건 이제 힘들어” 라고 손사래를 치며 예의 그 수줍은 미소를 띄었다.
상처에서 비롯된 글 쓰기
젊은 시절의 박완서 작가
금년은 또 경인년이다. 나에게는 그냥 경인년이 아니라, 또 경인년이고 또 경인이기 때문에 내 생전에 또 전쟁을 겪게 될 까봐 두려운 것이다. 6.25가 난 해도 경인년이었으니 꽃다운 20세에 6.25전쟁을 겪고 어렵게 살아남아 그 해가 회갑을 맞는 것까지 봤으니 내 나이가 새삼 징그럽다. 더 지겨운 건 육십 년이 지나도 여전히 아물 줄 모르고 도지는 내 안의 상처이다. 노구지만 그 안의 상처는 아직도 청춘이다.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p.20)
서울대 문리과에 막 입학하자마자 발발한 6.25 전쟁은 소녀 박완서의 많은 것을 앗아갔다. 큰 오빠와 숙부를 잃었고, 무엇보다 그녀의 청춘을 빼앗?다. “내 처녀 시절, 내 인생의 가장 빛나는 시절을 나는 이렇게 지긋지긋하게 보냈다. 무서운 게, 무서워하며 사는 게 지긋지긋했다. (「나에게 소설은 무엇인가」,『우리시대 소설가 박완서를 찾아서』p.24)
장정들을 잃은 가정의 어둠을 과연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왜 저 사람은 살았냐? 왜 안 죽었어?” 악다구니를 쓰는 어머니와 올케 사이에서 시들어가던 그 소녀는 오래된 슬픔에서 깨어나, 행복해지고 싶다는 ‘앙큼한 생각’을 품었다고 자전 에세이를 통해 회고했다.
나는 그들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었다. 삼킨 죽음을 토해 내고 싶었다.(…) 나는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그 이야길 했다. 실상은 말이야, 6.25 때 말이야, 우리 아버진 말이야, 우리 오빤 말이야, 오래 묵은 체증을 토하듯이 이야길 했다. 그러나 아무도 내 비밀을 재미있어 하지도 귀를 기울여 주지도 않았다.(『우리 시대 소설가 박완서를 찾아서』 p.27)
그렇게 일자리를 찾던 중에, ‘커다란 행운’같이 미8군 PX에 채용된다. 국문과에도 불구, 영문과 재학 중이라고 속이고 들어간 곳이었다. 허나 영어실력을 보고 눈치를 챘는지, ‘황홀한’ 미제 물건을 파는 곳이 아닌, 인기 없는 초상화 부에 배치된다. 그리고 거기서 화가 박수근을 만나게 된다.
소설 『나목』에 등장하는 박수근 화백의 작품 ‘나무와 여인’, 오른쪽이 박수근 화백
그 일이 그녀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는다. “그가 제대로 평가 받는 데 대한 기쁨과 놀라움이 클수록 그의 생전의 가난이 억울했고, 한 예술가의 운명에 대한 비감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가 어떻게 살아왔다는 걸 증언하고 싶었다. 그리하여 그에 대한 평가에 보탬이 되고 아울러 그의 그림을 거래함으로써 수지를 맞추기에 급급한 화상들의 장삿속에 충격이 되었으면 싶었다.” (p.39)
그녀는 그의 전기를 쓰려고 하였으나, 글을 쓰면서 그의 이야기보다 그녀 자신의 이야기가 더 간절했음을 깨닫게 된다. 그의 논픽션은 결국 픽션으로 다시 쓰여졌고, 이 소설이 <여성동아> 장편소설 응모에 당선된 『나목』이다. 그녀의 나이, 마흔. 그녀는 그렇게 글을 쓰기 시작했고 소설가가 되었다.
평생의 절반 동안 꾹꾹 눌러만 놓은 ‘잡담, 수다, 눈물, 웃음, 곡, 염불, 비명, 신음, 딸꾹질, 주정, 도리질’(황도경, 「생존의 말, 생명의 몸」, 『우리 시대의 여성작가』)을 나머지 40년의 생의 시간 동안 끊임없이 글로 풀어냈다. 그 왕성한 창작욕은 놀랄 만큼 다작을 만들어냈고, 문제의식이 살아있는 소설은 비평가들의 주목을 받아왔다.
“분단은 오래 전에 피 흘리기를 멈추고 굳은 딱지가 된 채 통일을 꿈꾸지 않은 지 오래입니다. 통일이란 말은 도처에 범람하고 있습니다만 산 채 분단된 자의 애절한 꿈으로서가 아니라 그것을 직업으로 삼고 사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구호로서 행세하고 있을 뿐입니다. 통일이 직업인 사람은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구호를 만들어 내어 분단을 치장하면 되겠지만 진실로 통일이 꿈인 사람은 끊임없이 분단된 상처를 쥐어뜯어 괴롭게 피 흘리게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상문학상 수상소감’中)
삶이 그녀 마음에 낸 가혹한 상처는 그 뿐만이 아니었다. 1988년 한창 왕성하게 소설을 쓰던 무렵, 남편이 암으로 세상과 작별했고, 4개월 후 의과대학생인 아들이 갑작스런 죽음을 맞는다. “돌이켜보면 내가 살아낸 세상은 연륜으로도, 머리로도, 사랑으로도 상식으로도 이해 못 할 것 천지였다.”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p.31)
이 참척(慘慽)의 고통 역시 그녀를 오랜 시간 생생히 따라다녔다. 2010년 초에 발간된 대표작가 9인의 자전소설집 『석양을 등에 지고 그림자를 밟다』에, 박완서는 남편과 아들을 떠나 보내야 했던 심정을 담담하게 회고한 소설을 실었다. “원점 같은 악몽”의 상처는 그토록 끈질기고 생생했다.
그녀의 이런 상처들을 헤아려본다면, 도대체 박완서 작가 얼굴의 늘 드리워져 있는 수줍고 순수한 미소는 그 상처받은 가슴 어디서 어떻게 빚어 나오는 것일까 묻게 된다. 아마 그의 영혼 자체가 맑은 사람이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물질 만능주의, 가부장 사회를 향한 일침
왼쪽에서 세 번째가 박완서 작가. 제일 왼쪽에 이해인 수녀님이 보인다.
친척들 중에도, 친구들 중에도 그까짓 30년 전 난리 때 일어났던 일을 대수로운 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의 관심은 땅을 도봉지구에 사 두는 게 더 유리한가. 영동지구에 사 두는 게 더 유리한가에 있었고, 사채놀이의 수익이 더 높은가 증권 투자의 수익이 더 높은가에 있었다. 그들의 관심은 오로지 어떡하면 더 잘살 수 있나에 대해 곤충의 촉각처럼 곤두서 있을 따름이었다. (『우리시대 소설가 박완서를 찾아서』 p.28)
이러한 인식이 1970년대 사회에 만연한 물질 만능주의, 중산층의 물욕, 허위의식, 한탕주의 등의 심리를 포착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지렁이 울음 소리』 『닮은 방들』 『휘청거리는 오후』 등의 작품이 도덕적 타락의 징후를 보이는 사회의 단면을 그려낸 작품들이다.
박완서는 한 에세이에서 “6.25의 경험이 없었으면 내가 소설가가 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나도 느끼고 남들도 그렇게 알아줄 정도로 나는 전쟁 경험을 줄기차게 울궈 먹었고 앞으로도 할 말이 얼마든지 더 남아 있는 것처럼 느끼곤 한다.(p.24)”고 고백하면서도 “소설을 통해 구원받았다는 걸 인정하고 소설가인 것에 자부심도 느끼고 있지만 그렇게 말하고 나면 마치 허세를 부린 것처럼 뒷맛이 허전해지곤 한다.”고도 덧붙였다.
이렇게 늘 자신의 자리를 돌아보는 겸손한 품성이 그의 많은 에세이에 그대로 묻어 나왔다. 에세이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1977) 『서 있는 여자의 갈등』(1986) 『나는 왜 작은 일에만 분개하는가』(1990)는, 한 시도 낮은 자리에 있는 것들을 돌보지 않은 적이 없는 그녀의 마음씀씀이를 짐작할 수 있는 글들이다. 글뿐 아니라, 1993년부터 유니세프 친선대사로 활동하며 실천하는 작가의 삶을 살았다.
그를 회고하는 많은 문인들은 그가 따뜻한 사람일 뿐 아니라, 유머러스한 사람이었다고 밝힌다. 그녀의 소설이 단숨에 잘 읽히고, 풍부한 사실적 질감으로 넘쳐나는 까닭은, 그녀 특유의 솔직한 글쓰기뿐 아니라, 곳곳에 유머가 포진되어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이기적이나 물욕에 어두운 어리석은 캐릭터를 그려낼 때, 유머는 한층 빛을 발했다.
최근에 쓰인 ‘내 식의 귀향’이라는 수필에는 남편과 아들이 잠들어 있는 천주교 공원묘지를 거닐며 미리 세운 자신의 비석을 둘러보는 풍경이 담겨 있다. 그 글에는 “우리들 것보다 조금만 더 큰 봉분과 비석을 가진 김수환 추기경님의 묘소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것도 저승의 큰 ‘빽’”이라며, ‘세상에 대한 마지막 농담’을 건넨다.
대 작가였을 때도, 후배 작가들과 스스럼 없이 어울렸던 박완서는 그야말로 문단의 어머니였다. 평소 “문인들은 돈이 없다.”며 “내가 죽거든 찾아오는 문인들을 잘 대접하고, 절대로 부의금을 받지 말라는 당부”는 지금 여기를 향한, 그의 마지막 배려가 되었다.
우리는 이런 소설가와 함께 살았다
지난 5월에 진행된 독자와의 만남 자리, 활짝 웃고 계신 박완서 작가
소설이 뭔지도 모르고 소설부터 쓰고 본 주제에 내가 소설가라는 게 그렇게 소중하고 대견스러웠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소설가 중에서도 뛰어난 소설가야 물론 우러러 보이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지만 소설가 외의 딴 직업이나 신분은 아무리 높아도 부러워해 본 적이 없다.
아직도 비록 신분증은 못 얻어 가졌지만 ‘나는 소설가다.’라는 자각 하나로 제아무리 강한 세도가나 내로라하는 잘난 사람 앞에서도 힘 안들이고 기죽을 거 없이 당당할 수 있고, 제아무리 보잘것없는 밑바닥 못난이들하고 어울려도 내가 한 치도 더 잘난 거 없으니 이 아니 유쾌한가. (『우리시대 소설가 박완서를 찾아서』 p.46)
경기도 개풍(현 황해북도 개풍군) 출생으로, 세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서울로 이주했다. 1944년 숙명여자고등학교에 입학한 뒤 교사였던 소설가 박노갑에게 영향을 받았으며, 작가 한말숙과 동창이다. 1950년 서울대학 국문과에 입학했으나 전쟁으로 중퇴하게 되었다. 개성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서울에서 학창시절을 보낸 박완서에게 한국전쟁은 평생 잊을 수 없을 없는 기억이다. 의용군으로 나갔다가 부상을 입고 거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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