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한 칠레 광부들이 영웅이 아닌 이유 ①
인간다움을 잃은 ‘나’, 인간이기를 포기한 ‘나’. 내 존재 자체가 누군가에게 별없는 하늘, 슬픔과 비탄의 장소, 아가리를 벌린 지옥문일 수 있다.
칠레 광부들은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함구하기로 굳게 약속했다고 한다. 그 침묵의 이면에는 차마 말하기 어려운 공포와 수치심 역시 존재할 것이란 걸 어렵지 않게 짐작할수 있다.
칠레 광부들은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함구하기로 굳게 약속했다고 한다. 그 침묵의 이면에는 차마 말하기 어려운 공포와 수치심 역시 존재할 것이란 걸 어렵지 않게 짐작할수 있다. 우리도 이런 상상을 해 볼 수 있다.부족한 햇빛, 부족한 먹을 것, 물, 신선한 공기, 자위와 육체의 슬픔, 대변을 볼때의 엉덩이, 생리적인 냄새, 샤워, 치통, 좌절감, 시커먼 곡괭이와 수레, 그리고 모든 그리운 것들, 인간적인 기억들, 일요일에 먹던 음식들, 베일 쓴 성모 마리아, 축구, 달리기, 숨겨둔 연인, 곧 태어날 딸, 시, 낙서, 기록, 약속, 연민과 눈물, 내일 아침.
서른 세 명의 사연은 무궁하지만 집단적인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들의 생존은 서로간의 이해와 협력, 연대 아래서만 가능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은 초조함과 절망감, 분노를 억누르고 간신히 버텼을 수도 있고 참치 한 숟가락을 떠먹는 옆 사람의 입을 눈이 빠지게 바라봤을 수도 있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그 안에서 다른 어느 때보다도 인간으로서 자신의 생명력에 대해 깊숙이 음미해 봤을 수도 있고 왜 살아 나가야 하는가 자문해 봤을 수도 있고 자신을 위해서 이익을 취하려는 행동을 자제했을 수도 있다. 혹시 누군가 한 사람쯤 죽기를 바랐을 수도 있을까? 그러나 동시에 자신의 사소한 행동이 타인의 생명과 존엄에 직결된다는 것을 강렬하게 의식했을 수도 있고 이곳을 나가면 어떤 삶을 살아갈지, 누가 자신을 진정으로 뜨겁게 안아줄지, 누가 자신을 위해서 울어줄지 전에 없이 곰곰이 따져봤을 수도 있다. 내가 누군가를 슬프게 한 적은 없었을까? 그러다 오히려 지상의 사람들에 대한 책임감과 연민 때문에 더러운 소매 끝에 눈을 비비며 흐느껴 울었을 수도 있다. 자신보다 타인이 더 중요하고 더 행복했음 좋겠다는 생각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영웅은 아니다. 테렌스 데프레의 『생존자』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영웅주의의 의미를 비범한 사람들의 운명에 대한 극적 도전으로 풀이한다면 영웅들의 시대는 이미 끝이 났다. 영광이나 어마어마한 제스처를 생각한다면 생존자는 결코 영웅이 아니다. 생존자란 인간으로서의 행동 방식을 영위하려는 의지를 잃지 않은 채 공포와 절망을 견디어 낸 사람, 즉 육체뿐만 아니라 정신까지도 살아남은 사람을 말한다.
칠레 광부들의 생존은 지하에서 불사조의 날개를 타고 솟구쳐 오른 영웅들에 대한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그들이 땅위로 나왔을 때도 지상의 백색 태양 밑 땅은 새로운 고통으로 가득 차 있을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칠레 광부들의 이야기는 영웅적인 행위를 묻는 것도 아니고, 그들 중 누가 최고의 영웅인가를 따지는 것도 아니고 생존자의 인간다움을 묻는 이야기다. 그리고 생존자와 다른 인간과의 관계를 묻는 이야기다. 살아남았다는 것 자체로 가치 있는 이야기고 결국은 ‘삶’이 어떤 식으로 유지되어야 하는가에 관한 이야기 일 것이다.
그래서 어느 날 우리가 칠레광부들의 땅 밑 증언을 듣는다면 모두가 ‘인간’이란 인식을 공유하고 극한 상황에서도 인간으로 살아남으려 했던, 좌절과 자기 연민을 떨치고 일어서 어떤 순간에 양심을 찾고 그 내면의 목소리에 따라 행동한, 바로 그 부분에서 우리에게 지혜를 주는 ‘개개인의 목소리’를 듣는 일이 되길 바란다. 어두컴컴한 땅 밑에 갇혀있지 않아도, 수용소에 있지 않아도 쉽게 절망하고 존엄성을 포기하려는 순간들이 우리에게 명백히 존재하기 때문이며 우리 사회 속에 이미 인간을 인간으로 보지 않는 비인간적인 일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며 나의 이익을 위해서 타인을 져버리는 일 또한 눈 한번 질끈 감으면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생존에 관해서 잊을 수 없는 책은 프레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와 『생존자』이다. 이탈리아 토리노 출신 유대인 화학자(토리노 대학 화학과 최우등 졸업생이기도한) 프레모 레비는 스물네 살의 나이로 아우슈비츠 제 3수용소로 끌려간다. 그의 이름은 174517. 왼쪽 팔뚝에 문신으로 새겨졌다. 그리고 그 아우슈비츠의 경험을 묶어 『이것이 인간인가』라는 책을 썼다. 수십 만중 살아남은 수백 명 중의 하나가 바로 프로모 레비다. 그러나 레비는 혼자서는 살아남을 수 없었다. 프레모 레비와 알베르토, 프레모 레비와 피콜로 장, 프레모 레비와 로렌초. 이 책을 읽다보면 레비란 한 인간이 생존하는데 타인의 도움과 우정이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 알 수 있다.이를테면 프레모 레비와 로렌초의 이야기는 이렇다. 수용소의 가장 큰 문제는 배고픔이다. 수용소 자체가 배고픔이다.
길 건너편에서 증기삽 차가 작업을 하고 있다.케이블들에 매달려있는 삽이 톱니 모양의 아가리를 벌리고 ..부드러운 점토에 달려들어 게걸스럽게 한 입 퍼올린다.그 사이 운전석에는 만족스러운 듯 하얀색의 짙은 연기가 훅하고 퍼져나온다. 증기삽은 흙을 담아 올린 뒤 반 바퀴정도 돌아 입안의 무엇을 것을 뒤쪽에 토해놓고 다시 시작한다
수용소의 재소자들은 그 광경을 홀린 듯 구경하는데 증기삽이 흙을 퍼올릴 때마다 그들의 입도 같이 반쯤 벌어지고 가죽만 남은 살밑에서 목젖이 가여울 정도로 도드라진 채 위아래로 춤을 춘다. 그들은 굶주림 때문에 증기삽이 식사하는 광경에서 눈을 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 순간 로렌초는 프레모 레비에게 누구였을까? 프레모 레비는 “나와 로렌초의 이야기는 길면서도 짧고 평범하면서도 불가사의한 이야기다”라고 말한다. 차라리 전설 속에서나 나올법한 이야기다라고 말한다. 이탈리아 민간인 노동자인 로렌초가 여섯 달 동안 매일 레비에게 빵 한쪽과 자기가 먹고 남은 배급을 갖다 주었던 것이다. 누덕누덕 기운 자기 스웨터를 선물로 주고 레비를 위해 이탈리아로 엽서를 보내주었고 답장을 전해 주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에 대해 그는 어떤 보답도 바라지 않았다.
로렌초는 착하고 단순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리고 자기가 보답을 받을 만한 선행을 베풀었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일을 했지만 프레모 레비는 이 모든 일이 사소한 일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그 당시 프레모 레비를 포함한 수용소의 재소자들은 밤하늘의 별빛과 햇빛에 무감각한 사람, 동물처럼 말하는 사람, 머리카락도 없고 이름도 체면도 없는 비천한 사람, 매일 얻어맞고 매일 굴욕을 당하는 더럽고 냄새나는 사람, 자살할 힘도 방법을 생각할 여력도 없는 희망도 내일도 없는 사람, 불가촉천민, 인격도 없고 얼굴도 과거도 기억도 명예도 추억도 없는 중성 단수 명사, 슬프게 꾸물거리고 구부정하게 걷는 무감각하고 마비된 살아있다고 할 수도 없는 회색 무리.
내가 지금 이렇게 살아있게 된 것은 로렌초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물질적인 도움 때문이 아니라 그의 존재 자체가 나에게 끊임없이 상기시켜 준 어떤 가능성 때문이었다. 선행을 행하는 너무나 자연스럽고 평범한 그의 태도를 보면서 나는 수용소 밖에 아직도 올바른 세상이 부패하지 않고 야만적이지 않은 증오와 두려움과는 무관한 세상이 존재할지 모른다고 믿을 수 있었다. 정확히 규정하기 어려운 어떤 것,선(善)의 희미한 가능성, 하지만 이것은 충분히 생존해야할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로렌초는 인간이었다. 그의 인간성은 순수하고 오염되지 않았다. 로렌초 덕에 나는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그래서 레비는 나중에 돌아간다면 그를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다 하고 싶다고 마음은 먹지만, 하지만 그런 말을 한다는 게 무슨 소용이 있지?
로렌초도 우리가 돌아가 힘들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당장 뭔가를 해보고 싶다.
그래서 레비는 우리 수용소의 구두 수선소에서 그의 신발을 수선해다 주도록 해 볼 수 있지 않을까 궁리한다. 하지만 로렌초의 도움은 보상도 약속도 필요 없는 도움이었고 이유없는 선물이었다. 숭고함은 희망 때문에만 생기는 것은 아닌 듯하고 오히려 알 수 없는 어떤 것,인간 내면에 있는 어떤 신비로운 것인 듯하다.
레비와 피콜로장의 이야기는 이런 것이다. 레비는 그 정신이 파괴되지 않고 강인하고 현명한 젊은이 피콜로 장과 함께 급식 죽을 타러 간다. 죽을 타러가는 것은 대단히 영광스런 일이다. 적어도 그 시간만큼은 일을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게다가 장은 현명하게도 가능하면 멀리 돌아서 가는 길을 알고 있다. 레비는 이탈리아를 좋아하는 친절한 장에게 단테의 신곡이 무엇인지를 간단하게 설명하려 애쓴다. 그러다 보니 자신도 어느새 신선하고 낯선 감정에 휩싸인다. 지옥이 어떻게 나뉘어 있는지, 거기서 어떤 벌을 받는지. 그래서 “피콜로 잘 들어봐”라고 말하고 지옥의 이 구절을 암송해준다.
그대들이 타고난 본성을 가늠하시오
짐승으로 살고자 태어나지 않았고
오히려 덕과 지를 따르기 위함이오
아무 의미도 없는 피 흘리는 짐승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던, 거의 짐승이었던 레비는 이 부분을 암송하다가 전율을 느꼈다.
잠시 나는 내가 누군지 잊고 신의 목소리를 들은듯했고 피콜로는 다시 들려달라고 했다
그러나 이탈리어도 잘 모르는 피콜로가 그 순간 다시 들려 달라고 말한 것이 어떻게 자신을 위한 것이었겠는가? 피콜로는 죽통을 나를 장대를 어깨에 짊어진 채, 수용소 한가운데서 단테를 들려 달라고 말하는 것이 바로 레비를 위한 것임을 알고 있었다.
“피콜로 용서해줘. 최소한 네 줄은 잊어버렸어”
“괜찮아요. 하여튼 계속해요”
“산이 거리 때문에 희끄무레하게
내 눈앞에 나타났다. 내가 한번도
본적이 없을 정도로 그렇게 높아보였다”
그렇게 높아보였다. 아! 그 다음 행들이 생각나면 나는 오늘 먹을 죽을 포기 할 수도 있을 텐데 하며 레비가 발을 구르는데 그 다음 순간 다음 행이 떠오른다.
“세 번이나 그것이 물로 완전히 뒤덮여 버리더니
네 번째에는 선미다 위로 치켜 올라가
뱃머리가 밑으로 가라앉는다. 그분이 원하는대로”
레비는 피콜로를 꽉 붙잡는다. 피콜로. 너는 이 구절을 꼭 그것도 빨리 들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내일 너 아니면 내가 죽을 수도 있고 우리가 다시 만나지 못할 수도 있으니까. 너무 늦기 전에 ‘그분이 원하는 대로’의 뜻을 이해해야 하니까. 이 거대한 무엇인가를, 어쩌면 우리의 운명을 우리가 오늘 여기 있어야하는 이유를 설명해야 하니까.
그리고 다음 순간 퍼뜩 오늘의 죽은 양배추와 순무라고 선언되는 목소리가 들리고 레비의 머릿속에 마지막 구절이 떠오른다.
마침내 바다가 우리 위를 덮쳤다
나는 이 부분을 읽을 때 마다 피콜로 장의 선량함과 배려에 놀라고 레비의 절박함에 깊히 공감하고 서로가 서로의 처지에도 불구하고 갖는 동정심과 측은함에 놀라고 피콜로가 길잡이 스승처럼 (단테의 베르길리우스처럼) 느껴지고 그러다가 인간의 몸을 덮치는 파도가 아직 인간이 살아있음에 놀라 펄쩍 뛰어오르는 광경이 떠오르고 기억하소서 자비의 예수여! 바로 이 장면을, 이 측은한 인간들이 서로에게 베푼 자비를, 인간 영혼이 파괴되지 않고 남아있는 것을 똑똑히 지켜보소서! 라고 마음속으로 외치게 된다.
하지만 서로에게 구원이 되는 길은 좁고도 험하다. 인간다움을 지키는 것은 엄청난 노력이 필요할 일인데 이를테면 레비처럼 민간인들의 도움을 받은 사람 중에는 그런 관계를 자랑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 재소자들은 자신들이 매우 힘 있고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관대한 민간인들의 은총을 받는다는 힌트와 암시를 주는데 그런 이야기들을 그렇게 흘리는 이유는 듣는 사람이 혼란스럽고도 심란한 전설 이야기를 듣는 듯한 기분을 느끼도록 하려는 시커먼 계산을 깔고 있는 것이고, 결국은 남보다 자기 자신이 더 살아 남아야하는 이유를 남들이 느끼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수용소에는 셀렉차(선발)란게 있다. 선발이 되면 가스실로 끌려간다. 선발이 있을 즈음 며칠 전에는 화장터 굴뚝에서 연기가 난다. 젊은이들은 노인들이 선발될 것이라고 하고 건강한 사람은 병든 사람이 선발 될 거라고 한다. 너는 선발될 것이고 나는 제외될 것이다 라고 서로 속으로 생각한다. 선발이 있는 날은 알몸인 채로 차가운 공기 속에 전 재소자가 자신의 카드를 들고 ss 대원 앞에 서야 한다. ss 대원은 불과 몇 초 사이에 재소자의 등과 얼굴을 보고 각자의 운명을 결정한다. 모두들 몸을 유연하게 펴고 가슴을 쫙 펴고 고개를 꼿꼿이 세우고 근육을 불거지게 하려고 애쓰며 ss 대원 앞을 지나간다. 레비는 살아 남았지만 그 이유는 모른다. 어쩌면 바로 앞에 서있는 건강한 젊은이와 카드가 바뀐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선발결과 살아남은 쿤 노인은 머리에 모자를 쓰고 큰 소리로 신께 기도한다. 자신이 선발되지 않은 것을 신께 감사하고 있는 것이다.
쿤은 생각이 없는 사람이다. 그는 옆 침대의 그리스인, 스무살 먹은 베포가 내일 모레 가스실로 가게 되었다는 것을 모른단 말인가? 베포 자신이 그것을 알고 침대에 누워 아무 생각도 않은 채 작은 전등만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게 보이지 않는단 말인가? 다음 선발 때는 자기 차례가 올 것임을 모른단 말인가? 그 어떤 위로의 기도로도 그 어떤 용서로도 죄인들의 그 어떤 속죄로도 간단히 말해 인간의 능력 안에 있는 그 무엇으로도 절대 씻을 수 없는 혐오스러운 일이 오늘 벌어졌다는 것을 쿤은 모른단 말인가? 내가 신이라면 쿤의 기도를 땅에 내동댕이쳤을 것이다.
우리는 끔찍한 수용소에서 벌어진 일과 우리 삶을 절대로 간단히 비교해서는 안 되지만 지옥과도 같은 일이 많은 이 세상에서, 상황이 어떠하더라도 계속 계속 인간으로 남아있는 문제는 우리에게도 너무나 중요하다. 선택이 있고 대가가 있다. 칠레 광부들의 이야기를 듣고 영웅주의를 기대한다면 그것은 한 특출난 인간의 영웅주의가 아니라 ‘인류’의 영웅주의에 대한 이야기가 되어야 할 것이고 그것이 어둠 속의 한줄기 희망일지도 모른다. 나는 프레모 레비가 수용소 한가운데서 단테의 지옥을 암송하려했던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어느 해 8월에 단테의 『지옥』을 읽기 시작했다. 지옥문 9행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나를 지난 사람은 슬픔의 도시로
나를 지난 사람은 영원한 비탄으로…
그런데 이 ‘나’는 상상속의 지옥문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인간다움을 잃은 ‘나’, 인간이기를 포기한 ‘나’. 내 존재 자체가 누군가에게 별없는 하늘, 슬픔과 비탄의 장소, 아가리를 벌린 지옥문일 수 있다.
(다음 회에 계속 )
마술적 저널리즘을 꿈꾸는 라디오 피디. 세월호 유족의 목소리를 담은 팟캐스트 [416의 목소리] 시즌 1, 재난참사 가족들과 함께 만든 팟캐스트 [세상 끝의 사랑: 유족이 묻고 유족이 답하다] 등을 제작했다. 다큐멘터리 [자살률의 비밀]로 한국피디대상을 받았고, 다큐멘터리 [불안], 세월호 참사 2주기 특집 다큐멘터리 [새벽 4시의 궁전], [남겨진 이들의 선물], [조선인 전범 75년 동안의 고독] 등의 작품들이 한국방송대상 작품상을 수상했다. 저서로는 『삶을 바꾸는 책 읽기』, 『사생활의 천재들』, 쌍용차 노동자의 삶을 담은 르포르타주 『그의 슬픔과 기쁨』, 『인생의 일요일들』, 『뜻밖의 좋은 일』, 『아무튼, 메모』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