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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쯤 쓴 초고를 버렸지만 아깝지 않은 이유

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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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뼈대를 만들자.

이제 모든 취재의 과정을 마쳤으므로 원고와 마주치는 일만이 남았습니다. 말로야 간단하지만, 막상 취재에서 집필 단계로 넘어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아무리 취재를 해도 작가는 집필에 들어갈 만큼 충분히 자료와 생각을 모았다는 생각이 들지 않거든요. 쓸 거리와 책을 내고 싶다는 의욕을 넉넉히 가진 작가 지망생들 중에는 이 단계에서 부족함을 느껴 오랫동안 집필에 들어가지 못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전에 제 강의를 들은 분이 ‘항상 완벽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집필에 들어가느냐, 불완전하다는 느낌을 어떻게 극복하느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저도 적지 않은 책을 써 보았지만 그때마다 아직 뭔가 미흡하다는 기분을 가지고서 집필 단계에 들어갑니다. 처음에는 조금이라도 더 준비를 하기 위해 집필을 될 수 있는 한 미루려고 해 보았지만, 어느 순간 십 년을 기다려도 마찬가지 기분일 거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만 하면 충분하다’ 라는 느낌만 기다린다면 영영 책 한 권 탄생시킬 수 없게 될지도 모릅니다. 물론 운과 실력이 따라 준다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쓴 마거릿 미첼처럼 평생 단 한 권의 명작을 낼 수도 있겠지만요.

얼마 전에는 반쯤 쓴 초고를 버리게 된 일이 있었습니다. 쓰고 나니 스스로 원고가 마음에 안 드는데, 경험상 고치는 것보다는 다 잊고 새로 쓰는 것이 오히려 쉽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기획과 구성 단계에서 마음에 걸리는 사소한 문제가 있었는데 원고를 웬만큼 쓰고 나서야 그게 중대한 문제였다는 걸 알게 된 것이었지요.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인 결과물이 눈앞에서 사라졌지만 저는 그게 낭비였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조금이라도 완성도 있는 책을 내기 위한 투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나마 영화나 다른 사업에 비해 손해가 적으니 다행이지요. 작가가 집필에 들어갈 수 있는 용기는 완벽함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여차하면 처음부터 다시 쓰면 되지 뭐’하는 배짱에서 나오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어떤 종류의 책이건 구성을 완성해 놓고서야 비로소 글을 쓰는 타입입니다. 먼저 대략의 시놉시스를 쓴 다음, 그 내용을 나누어 제목을 붙입니다. 이것이 나중에 나올 책의 목차가 됩니다. 목차를 작성하다 보면 앞으로의 작업이 녹록할지 그렇지 않을지 ‘감(感)’이 옵니다. 쉽게 목차가 뽑히는 책은 수월하게 씌어지는 반면 그렇지 않은 책은 애를 먹이더군요. 하지만, 그 책에 대한 독자의 반응이 어떨지는 또 그와는 별개입니다.

이렇게 해서 목차가 나오면 집필의 3분의 2 이상은 마친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아직 원고는 한 줄도 나오지 않았지만, 앞으로 쓸 원고 600-1,000매(출판 원고는 200자 원고지 기준으로 분량 계산을 합니다) 이상의 내용이 머릿속에 대략 정리되는 셈이니까요. 이 시점에서 출판 에디터들이 글이 얼마나 되었냐고 물으면 난감해집니다. 사실대로 말하면 아무리 부연 설명을 한다 해도 눈에 보이는 결과물이 없으므로 몹시 불안해들 하시기 때문이지요. 처음에는 곧이곧대로 말을 했다가 서로의 정신 건강에 해가 된다는 걸 깨닫고 지금은 손님의 독촉 전화에 매번 ‘방금 배달원이 떠났다’고 하는 배달 음식점 사장님처럼 일관된 대답을 하고 있습니다. ‘거의 다 되어 간다’고요.

『여자, 그림으로 행복지다』 책의 목차-내 책으로서는 예외적으로 소제목만으로 이루어져 있다

목차가 완성되면 이제 드디어 구상, 취재 과정 내내 함께 했던 집필 수첩을 꺼내 들게 됩니다. 집필 수첩에 끼적여 놓은 내용들을 해당되는 목차 아래에 일일이 타이핑해서 옮겨 적어 놓습니다. 이러면 나중에 집필할 때 하고 싶었던 말이나 근거 자료들을 빼놓지 않고 사용할 수 있게 되지요. 용도는 그렇다 치고 이런 무식? 방식으로 정리를 하는 이유는 그 과정에서 책에 쓸 내용들을 다시 생각해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옮겨 적는 과정에서 뭔가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그것 또한 보태서 두서없이 적어 넣습니다. 이런 작업을 거치고 나면 A4용지 20여장 정도의 두툼한 자료가 완성됩니다. 저는 이것을 시나리오 작업하던 때의 습관대로 ‘트리트먼트’ 라고 부릅니다. 원래 트리트먼트란 영화 시나리오를 쓰기 전 공동 작업자(혹은 투자자)들이 세부 줄거리와 구성을 파악할 수 있게 만드는 글입니다. 시놉시스와는 달리 영화 장면 구성대로 씌어지기 때문에 시나리오 직전 단계라고 할 수 있지요.

제 트리트먼트에 적혀 있는 내용들은 책의 뼈대나 마찬가지이지만 남들이 보기에는 되도 않는 말들을 아무렇게나 부려 놓은 낙서장으로 보일 것입니다. 여기에는 이전 모든 준비 과정의 결과물이 들어 있기 때문에 일단 집필에 들어가게 되면 이것 없이는 아무 일도 할 수 없게 됩니다. 저는 완성된 트리트먼트를 꼭 종이에 프린트해서 옆에 두고 작업을 합니다. 펜으로 자유롭게 메모를 하고 남은 분량을 직관적으로 확인해 가며 작업을 할 수 있어서 좋습니다. 대학교 졸업 후까지도 인터넷 없이 살았던 세대인 저는 노트북과 워드 프로그램으로 작업을 하면서도 이렇게 결정적인 부분에서 늘 아날로그적입니다.

출력해 묶어 놓은 트리트먼트. 집필이 끝날 때쯤이면 손때를 타 너덜너덜해져 있다

『여자, 그림으로 행복지다』는 그림이 글 만큼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에 이전의 작품과는 구성의 방법이 조금 달랐습니다. 글의 내용 이전에 먼저 그림을 정리해야 했습니다. 하드 디스크에 들어 있는 수천 점의 그림 중 책의 주제와 어울리는 것, 그리고 제 마음에 들어오는 것을 추려내야 했습니다. 그림을 골라내는 과정 자체가 글의 구성 과정의 일부가 된 셈입니다. 그렇게 그림의 순서를 정하고 주제별로 묶어 내고 그 묶음의 큰 제목을 정하고 하는 과정을 거쳐 트리트먼트가 나왔습니다. 나중에 주제별로 묶는 것보다는 감정선에 따라 자유롭게 배치하는 게 더 좋겠다는 에디터들의 의견을 받아들이게 되어 애써 만든 단락 구성과 제목은 없어졌지만, 전체 내용의 균형을 위해서라도 당연히 불필요한 작업은 아니었습니다.

자, 이제 모든 준비가 끝났습니다. 남은 것은 수도승이나 고시생처럼 세상과 단절되어 글을 쓰는 것뿐입니다. 앞으로 남은 작업은 창작보다는 노동에 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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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남인숙

소설가, 에세이스트. 1974년 서울 출생. 숙명여대 국문학과 재학 시절부터 방송작가, 자유기고가,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했다. 출간 이후 80만 부 이상이 판매되며 여성 에세이 분야의 새로운 트렌드를 주도한 베스트셀러 『여자의 모든 인생은 20대에 결정된다』(2004)를 비롯하여 『여자의 모든 인생은 20대에 결정된다 : 실천편』(2006), 『여자, 거침없이 떠나라』(2008), 『여자의 인생은 결혼으로 완성된다』(2009), 『여자, 그림으로 행복해지다』(2010) 등 2030 여성을 위한 에세이를 펴내어 독자들의 뜨거운 지지와 공감을 얻었다. 또한 그녀의 여성 에세이는 중국과 대만, 베트남, 몽골에 번역 출간되었고 특히 중국에서는 150만 부 이상의 판매고를 보이며 자국 위주의 중국 출판계에서는 드물게 비소설 분야의 베스트셀러 1위 기록을 세우는 등 여자에게 솔직하고 현실적인 조언을 전해주는 멘토의 지침서로서 언어와 문화의 한계를 극복하고 동시대 아시아 여성들의 필독서로 자리 잡았다.

여자, 그림으로 행복해지다

<남인숙> 저10,800원(10% + 5%)

『여자의 모든 인생은 20대에 결정된다』의 작가 남인숙이 전하는 여자를 행복하게 하는 명화 에세이 소설가가 소설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담아낸다면, 화가는 그림에 자신의 모든 존재를 담아낸다. 소설 속에 작가가 살아있듯이 그림 속에는 그 그림을 그린 예술가가 오롯이 살아있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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