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옛날 이야기는 책처럼 그저 낡아버렸을까?
무대 벽면을 두르고 있는 책장들, 무대 위는 작은 서점으로 꾸려져 있다. 아마도 ‘오늘의 책’ 서점은 이런 풍경이었나 보다. 90년대 중반 문을 닫은 ‘오늘의 책’은 연세대 앞 유명한 사회과학 서점이었다. 『쇳물처럼』 『보도지침』 『타는 목마름으로』 『열린 사회와 그 적들』 『지식인을 위한 변명』…… 나로서는, 추천도서 100권 목록에서 마주쳤을 책들이 손때 묻은 채로 전시되어 있다. 탁자 위로 쭉 늘어져 있는 책은, 권하고 싶은 책을 꺼내두고, 혼자 보고 싶은 책은 슬그머니 책장 속에 숨겨두어도 좋게끔 되어 있다.
어디든 기대 앉아 책을 봐도 이상할 게 없는 풍경. 그러게, 정말 그날의 서점은 몽땅 어디로 갔을까? 학창 시절, 시내 건물 1층 구석마다 자리 잡고 있던 작은 서점들, 지나다닐 통로마저도 책을 가득 쌓아두어 겨우겨우 책을 피해 한 걸음 움직여야 했던 공간, 높은 곳에 꽂힌 책 제목을 읽으려고 한 걸음 물러서면, 금세 등 뒤에 서 있는 서가에 머리를 부딪치던 공간. 요즘의 서점처럼 깔끔하고 세련되지는 못했지만, 비좁아도 자주 찾고, 일 없어도 괜히 찾던 그날의 서점들. 풍경이 아련하게 떠오른다. 이런 기억이라도 갖고 있어서 다행이야, 생각하는 사이, 무대 위에는 인물들이 등장해 말다툼을 벌인다. 연극 <오늘의 책은 어디로 사라졌을까>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오늘의 책’이 재정난,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문을 닫고, 유정이 이를 똑같이 복원해 헌책방 ‘오늘의 책’을 열었다. 그날의 서점에 모인 이들. 국문과 91학번 동기생이란다. 교수와의 불화로 박사과정을 포기, 소설가가 된 현식, 신문사 문화부 기자가 된 광석, 그리고 독립영화 감독이 된 재하. 모처럼 오늘의 책을 찾은 모양이다. 듣자 하니, 이들 대학 시절에 운동 좀 같이한 모양인데,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렇게 서로 빈정대고 서먹한지, 이렇게 다른 곳에 서 있는지. 이야기 속에만 등장하는 여자 유정을 둘러싼 세 친구의 미묘한 감정. 아픈 기억으로 언급되는 지원 선배의 이름. 극이 진행될수록 유정과 지원을 둘러싼 이들의 이야기가 서서히 밝혀진다. 뜨겁게 열망하던 것이 있었던 그 시절을 지난 친구들이 털어놓는 진실 그리고 진심 관한 이야기다.
워워, 운동권 후일담이라고 속단하긴 이르다. 그저 옛 후일담을 털어놓는 연극으로 치부하기에는 재미와 의미를 잘 갖췄다. 종종 삽입되는 민중가요나 그 시절 언어들은 낯설고 오래된 감상을 주기도 하지만, 잘 짜인 유머가 이를 충분히 상쇄한다. 고로, 그 시절, 그때 기억 없는 분이라도 관람을 권하고 싶단 말씀. “그땐 왜 저런 이야기들에 줄을 쳐가면서 읽었는지 알 수 없지만, 그때 중요했던 것들이 왜 지금은 중요하지 않을까?” 연극이 관객에게 여전히 유효한 질문을 던지니까 말이다. 접어놓은 책, 숨겨둔 책, 편지를 적어 선물한 책……. 책에 관한 추억을 나눌 때는, 객석의 많은 독자들이 웃음으로 공감을 표하기도 했다.
죽음 아닌 삶에 대한 소설…… 선입견 없이 봐 주시길
| 한강 작가가 환하게 웃으며 무대 위로 올라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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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에 환한 불이 켜지고 한강 작가가 등장했다. 한강 역시 ‘오늘의 책’을 즐겨 찾았던 기억을 들려주며 연극을 본 소감을 나눴다.
“책에서 보자, 메모 남겨 놓을게. 친구들과 이런 얘길 자주 했다. 상당히 아날로그적이었지. 그때 기억이 나서 더 남다르고 재미있었다,” 『바람이 분다, 가라』. 그녀의 새 책을 들고 독자들을 만난 이 자리. 서점과 책과 작가 한강은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오늘의 책 무대 위에 앉아 있는 그녀가 하나도 낯설지 않았다.
고요함, 수줍음, 나긋함, 그러니까 한강 작가는 이런 단어들이 연상되는 모습이었다.
“입술을 악물었다. 딱딱한 손들을 주머니에서 꺼내 뜨거운 두 뺨에 얹었다. 더 차가운 것이 필요했다. 얼음들. 가장 냉혹한 눈발. 무자비한 비난과 손가락질이 필요했다. 모든 것을 잃은 것 같았다. 모든 것에 굴복한 것 같았다. 모든 것에 버림받은 것 같았다.”(p.149) 아마 모르고 만났더라면, 아마도 나는 이런 치열한 문장을 쓴 작가라는 걸 결코 알아챌 수 없었을 거다. 소녀처럼 웃는 모습이라니. 저 그윽한 안개 같은 목소리라니. 작가님 스스로 강조(!)하지 않았더라면, 한강 작가가 유머러스하다는 것, 개그 본능이 넘친다는 것도 짐작하지 못했을 거다. (물론, 이건 여전히 짐작이지만. ^^) 객석의 독자들과 자유로운 질의응답 시간이 이어졌다.
| 작가와 가까운 거리에서 독자들은 자유롭게 묻고 감상을 나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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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을 쓸 때, 자전거 타면서 슬럼프를 극복했다고 들었다.
“일 년 정도 소설을 쓰다 자포자기 상태에 빠졌다. 남재천에서 자전거를 타며 시간을 보냈는데, 정말 이제 못 쓰게 되었구나 생각했다. 다시 못 볼 사람 생각하는 것처럼 애틋한 생각이 많이 들었다. 문득, 그래도 써봐야겠다 싶어서 출간하고 나니 못 볼 줄 알았던 사람 만난 것처럼 반갑더라.”
한 땀 한 땀 수 놓은 듯한 문장이 인상적이었다. 그럼에도 글로 표현할 수 없는 상념은 어떻게 하나.
“무엇을 써야지 쓰는 게 아니라, 상념을 담아내려고 하기보다는 써가면서, 마지막 장면 정도만 생각하면서 써 나간다. 함께 살았던 것 같다. 소설 속에도 선을 덧그려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나오는데 그것처럼 내 의지와 감정이 덧그려져 소설이 만들어진 것 같다. 그 안에 스며들어 쓰기 때문에, 소설을 쓸 때는 남는 게 없다.”
소설 속에 빅뱅 이론은 어떻게 담게 되었나.
“빅뱅 이론을 단순히 소도구로 보지 않았다. 소설의 본질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연과학 얘기들에 매료되었다. 인간이 모든 것의 처음과 끝을 생각할 수 있다는 것 자체도 흥미로웠다. 내가 인간인 것에 대한 다행스러움, 경외감, 전율을 딛고 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채식주의자』를 힘들게 집필했다는데.
“그 소설이 가장 힘들었다. 그때는 손 관절이 아파서 글을 못 써서 힘들었을 때였는데, 그 시기는 돌아보기도 싫을 정도로 힘든 시간이었다. 그걸 다시 소설로 써보면 어떠냐고 하는데, 못 쓸 것 같다. 양손에 볼펜을 거꾸로 쥐어 들고 타자를 쳤다. 사실 지금은 그런 식으로도 타자가 빨라져, 동생이 <생활의 달인>이나 <진기명기>에 나가보라고 하기도 했다.(웃음)”
우울하고 슬픈 글을 많이 쓰는 것 같다. 실제로도 내면세계가 슬픈가.
“나름대로는 재밌다.(웃음) 아들이 하나 있는데, 아들은 나보고 개그맨이 됐어야 한다고 말한다. 가족 소개를 하는데 ‘엄마는 개그를 잘한다’고 소개하더라. 소설마다 세계가 너무 어두워서 돌아볼 때, 마음이 착잡해지기도 하지만, 애정도 있다. 그때에는 분명 그렇게 써야만 했었던 것 같다.”
소설 속에서 결국 인주가 자살한 건가.
“결코 자살하지 않았다! 독자들이 내 책을 읽을 때, ‘이 사람은 원래 어두운 소설을 쓰니까 그런 결말이 자살일 거다’ 생각한다. 나는 노골적으로 살아가고자 애썼던 여자들 얘기를 썼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정말 강한 의지를 가지고 쓴 작품마저도 어둡게 보시는 걸 보고, ‘작가의 말’을 다시 쓸까 고민했다.(웃음) 내 나름의 균형 잡힌 시각으로 세상을 보고 있다고 생각한다. 훌쩍 어둠에서 밝음으로 건너뛰지 못하는 사람이어서, 그런 기질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지금보다 더 어둡거나, 혹은 훨씬 밝은 희극을 쓸지도 모르겠다. 앞으로도 선입견 없이 봐주시면 감사하겠다.”
소설이 목소리를 갖다
| 질의응답 후 저자의 낭독이 이어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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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인파에 떠밀려 지하철을 탈 때, 혼잡한 환승 구간을 어깨로 헤치며 나아갈 때, 매표구 앞에서 길고 무질서한 줄이 줄어들기를 기다릴 때 난 성스러움을 느껴. 인간을 믿을 수 없어질 때, 흉폭한 모서리가 가슴을 찢고 튀어나올 때 성스러움을 느껴. 차가운 장판 바닥에, 씻지도 않고 코트도 안 벗고 웅크리고 누워서 내 안의 마모된 부분을 들여다볼 때, 영원히 망가졌거나 부서져버린 그것들을 들여다볼 때 성스러움을 느껴. 어떤 종교 서적에서도 아니고, 신앙 회합의 자리에서도 아니고, 예배당의 고적한 기도처도 아니고…… 너덜너덜 찢어진 이 삶 가운데서.(p.151)
한강 작가는 소설의 한 대목을 낭독했다.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깊숙하고 웅숭깊고, 무언가 무너져 내릴 듯하지만 침착한……. 누군가는 과장이라고 말할지도 모르겠지만, 어쩌면 그날 무대의 분위기 때문에 그런지도 모르겠지만, 낭송은 또 다른 소설 체험이었다. 그녀의 문장과 목소리가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그저 읽을 때와는 또 다른 감상을 불러일으켰다.
“정이야 하고 인주는 나를 불렀다.” 마치 소설 문장이 제 스스로 목소리를 낸다면, 그러니까 음색은 저렇지 않을까. 말투는 저렇지 않을까. 빠르기는 저렇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절묘하게 매치되었다.
살고 싶다.
포기하고 싶다고 생각할 때마다 가슴과 배가 벌레처럼 필사적으로 꿈틀거렸다. 한 뼘, 또 한 뼘. 폭발하는 소리를 내며 책상이 부서져 내렸다.
살고 싶다.
살고 싶다.(p.381)
욕망을 상징하는 육식을 거부하고, 나무가 변해간다고 믿는 영혜. 전작
『채식주의자』의 그녀는 서서히 식물처럼 마른 몸으로 죽음을 선택했다. 그에 반해, 생에 의지가 인상적으로 담긴 여자들의 이야기
『바람이 분다, 가라』는 훨씬 강렬하다. 정희는 자신의 친구이자 화가인 인주를 자살로 미화하려는 평론가에 맞서 친구의 진실을 밝히려고 한다. 자신까지 죽음의 상황으로 몰아가는 평론가의 음모에 맞서 그녀는 끝까지 삶을, 진실을 포기하지 않는다.
한강 특유의 촘촘하게 파고드는 묘사는 세상 앞에 나약한 여성들이 지닌 열망의 뜨거움을 고스란히 전한다. 작가에게 던져진 첫 질문이 글쓰기의 고단함에 대한 까닭을 알 만도 하다. 어느 독자는 한강의 글이 “아픔에 눈이 멀고 입을 열수가 없었을 때, 대신 소리쳐줘서, 대신 아파해줘서 고마웠다”고 말하기도 했다. 바람이 분다. 저자와 함께 한 폐쇄된 극장 속에서도 바람이, 부는 듯했다. 그녀의 목소리에, 문장 속에. 독자의 이야기 속에. 불었다. 주말 오후, 우리는 이런 시간을 보냈다.
아마 물고기는 물이 텅 빈 공간이라고 생각할 거야. 우리가 공기를 마시면서도 허공이 텅 비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하지만 허공은 결코 비어있지 않아. 바람이 불고, 벼락이 치고, 강한 압력으로 우리 몸을 누르지. 그러니까 우리가 알지 못하는 눈…… 더 높은 차원의 눈으로 우주의 공간을 볼 수 있다면, 모든 건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될 거야.(p.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