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오래 전에 그의 시를 읽었을 것이다. 시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무딘 감성을 지닌 사람이라 남들 모두 공감하는 시들도 거들떠보지도 않던 그 무렵, ‘서른’이라는 단어가 서른이 되어가는 모두에게 무조건적으로 공감을 주던 그때 말이다.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를 들었고, 잉게보르크 바흐만의 『삼십세』를 읽지 않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구입을 했다. 지금은 온갖 장르의 ‘서른’이 존재하여 선택의 기회를 주지만 그 오래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그러므로 최영미 시인의 ‘서른’은 무조건에 해당 되었다.
시를 몰랐으니 그 시집이 ‘이념의 홍수가 지나간 후 그에 가담했던 세대의 과감하고 솔직한 기록’이라는 것도 몰랐을 터, 그저 쉽게 읽히고 공감하는 몇 편의 시로 뚜렷한 이유가 없는 우울한 ‘삼십세’를 보내었다. 그리고 너무나 오랜만에 그의 시집을 읽었다. 그도 늙고(!) 나도 늙고(!) 이젠 ‘(…)차렷 자세로 앞만 보는 너를 독점하면서/옆에서 훔쳐보는 이모의 시선도 의식하지 못하(…)’는 조카에게 빠져 있는 그의 모습에 동질감을 느끼며, ‘(…)떠나기만 하고 도착하지 않은 삶./여기에서 저기로,/이 남자에서 저 여자로 옮기며/나도 모르게 빠져나간 젊음/후회할 시간도 모자’라는 걸 뼛속같이 경험하고, 한 편 한 편 넘길 때마다 고개를 주억거리며 떨리는 가슴을 쓰다듬었다.
시집을 읽었으나 시집이라기보다는 그의 삶을 읽은 듯한 느낌, 처음보다 두 번, 세 번 읽을수록 공감하는 시들이 늘어나는 최영미 시인의 『도착하지 않은 삶』은 아직도 시라는 게 무엇인지 잘 모르는, 그럼에도 시를 읽는 기쁨을 알게 해주었다고나 할까. 대부분의 시들에 밑줄을 긋고 모퉁이를 접어 표시를 하며 조금은 너덜해진 시집을 보며 흐뭇해하는 표정이라니, 그에게 다시 ‘(…)옆으로, 뒤로, 먼지처럼 시가 스며들(…)’지 않았다면 나는 어쩌면 평생을 그런 표정 짓지 못했을 것이다.
이야기꾼 최영미 시인을 만나 낭송의 시간을 즐기다
화창한 날씨였다. 최영미 시인은 “이런 날 다른 약속 잡지 않고 <향긋한 북살롱>에 와주어 감사하다.”라는 짧은 인사를 했다. 곧이어 사회를 맡은 출판사 직원의 “이야기꾼이라고 소문이 났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이야기꾼은 맞다.”라며 말을 꺼냈다.
지난 주말 코엑스에서 있었던 도서전 행사로 현재 살고 있는 춘천에서 일찌감치 서울로 올라온 그는, 이날 만남의 장소인 상상마당이 있는 홍대 앞으로 오면서 많은 생각을 했단다. 홍대 앞은 20대 후반이었던 1989년부터 거의 십여 년간 그의 활동무대(!)였다. 그런 추억의 장소로 이제는 시인이 되어 강연을 위해 오게 되니 세월의 놀라움은 차치하고 온갖 추억들이 그의 머릿속을 헤집고 다녔다. 소설 한 편이 저절로 만들어졌다.
이제까지의 삶을 되돌아보면 시인에겐 세 번의 전환점이 있었고 그때마다 성격이 변했다. 어렸을 땐 별명이 ‘전화통’일 만큼 동네에서 알아주던 이야기꾼이었지만 이십 대엔 입도 제대로 열지 않는 조금은 멍청한(!) 이십 대였다. 어린 시절의 친구들은 변해버린 그의 성격으로 인해 알아보지 못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시인이 되고 나서 또 한 번의 변화가 있었다. 이번엔 이십 대 시절의 친구들이 그의 변화에 놀라워했다. 세 번의 변화를 두고 그는 의도적이라기보다는 생존의 전략이었던 것 같다고 했다. 여러 인생, 변화 많은 삶을 살면서 많은 사람을 만나왔기 때문에 세상 잣대로는 실패한 삶이라고 하겠지만, 이야기꾼으로서의 삶으론 굉장히 유리한 위치에 있었던 것이 아니겠냐며 이야기꾼이라는 데 동의한다며 웃었다. 살짝 내비친 그의 이야기에 왠지 모를 씁쓸함이 느껴졌다. 세 번씩이나 한 사람의 성격을 변할 시킬 만한 고통은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이어진 낭송의 시간, 한동안 축구에 열광하고 있던 최영미 시인은 올림픽 야구를 계기로 야구에 매혹되어 야구팬이 되었다. 가끔 서울에 오면 꼭 야구장엘 가게 되는데 전날에도 후배랑 같이 야구장에 다녀왔고 날씨가 나빴던 탓에 목소리가 좋지 않다며 양해를 구했다. 그는 모두 6편의 시를 읽어주었다. 혹여나 내가 공감한 시를 읽어주지 않을까 기대를 했는데 희한하게도 이 날 시인과 독자가 고른 시들 중엔 딱 한 편의 시만 제외하곤 공유한 시가 없었다. 이렇듯 사람마다 받아들이는 시들이 다르구나, 새삼 깨달았다. 처음으로 읽은 「일요일 오전 11시」는 “유럽인들이 버린 神을/아시아의 어느 뭉툭한 손이 주워/확성기에 쑤셔넣는다”로 끝나는 짧은 시다. 이어 나오는 「종이 울리고」와 한 편인 시였는데 두 편으로 잘랐다고 한다. 이 시는 그 역시 가톨릭 세례를 받은 종교인이지만, 일요일 오전마다 교회로 향하는 신도들을 보며, 유럽에서 온 종교지만 막상 유럽의 교회들은 텅텅 비어 있는데 멀고 먼 아시아의 신도시 교회에선 일요일마다 교회에 가는 아이러니를 잡아본 시라고 한다.
세 번째로 읽은 시는 「아파트를 꿈꾸며」였다. “(…)서울과 가까운 열쇠를 움켜질/손을 내려다보며 손톱을 자른다/새로운 문이 열리면,/지나간 쓰라린 번호들은/손톱먼지처럼 공중에 분해되겠지” 어느 곳에 가더라도 6개월을 버티지 못하던 그가 마침내 길고 긴 방황(!)을 끝내고 신도시에 아파트를 얻게 되었다. 이사 가기 전 처음으로 구입한 아파트를 생각하며 손톱을 깎다가 시상이 떠올랐고, 그때의 기분을 적은 시라고 했다. 그의 방랑벽은 너무나 심해서 여행지에서조차도 같은 호텔에서 이틀을 머무는 법이 없었다. 그런 사실을 모르고 있다가 2006년 독일 월드컵을 앞두고 호텔 예약을 하려다가 우연히 알게 되었다. ‘피곤한 인생을 살았구나!’ 그제야 깨닫게 되었다. 그리하여 최영미 이름으로 집을 장만하게 되었는데 그때 쓴 시라고 한다.
그는 암울한 80년대를 보냈다. 시위와 집회로 청춘은 물들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작년 이맘 때 일어났던 촛불 집회에 관련한 뉴스는 바로 접하지 못했다. 그 당시 그는 오바마에게 열광하며 하루 종일 CNN만 틀어 놓고 살았다고 한다. 촛불 집회에 관련한 기사도 CNN뉴스를 통해서 알게 되었다. 그때 약간 미묘한 감정을 느끼며 ‘몰랐다’는 것에 대해 살짝 죄의식을 느끼기도 했다. 예전 같았으면 당장 서울로 가서 집회에 참여했을 테지만 그러지 않았다. 약간 냉정해지는 기분. 일단 신문부터 읽어보자 싶어 신문을 읽었는데 신문의 논조가 너무나 상이했다. 이건 같은 나라에서 벌어지는 일을 다룬 신문이라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직접 올라가 눈으로 확인해야 할 것 같았다. 허나 예전처럼 혼자 가질 못했다. 후배를 앞장세워 갔지만 그 옛날하곤 달랐다. 그리고 6월의 서울시청 광장 앞에선 한 시간 이상도 있질 못했다. 구세대가 된 기분이었다. 「2008년 6월 서울」은 그때의 기분을 시로 풀어 놓은 것이다.
광장엔 옛날 사진들이, 피 묻은 신문들이 붙어 있고
확성기에서 울려퍼지는 노래도
어쩜! 이십 년 전과 똑같지만,
큰길에서 느긋하게 나눠주는 선언문은
그때보다 두껍고 인쇄 상태도 좋다.
(…)
유모차 부대를 호위하는 청년들이 어찌나 멋있던지!
한국 남자들의 품종이 눈부시게 개량됐어.
역사는 이렇게 진보하는 거야.
친구들과 수다를 즐기며 이탈리아 식당에서
칼을 들고 연어의 생살을 갈랐다.
입 안에 죄의식의 거품을 품지 않고이 시는 마지막 행이 바로 주제다. 지금 젊은이들은 이해가 되지 않겠지만 어쩌면 이것도 우월감일 수도 있는데 음식은 음식, 집회는 집회라고 생각했다. 80년대라면 집회 참석하고 양식당 가면 죄의식을 느껴야 했다. 하지만 2008년 6월에는 가장 좋아하는 식당에서 좋아하는 요리를 먹을 수 있었다.
나도 조카에 대한 사랑을 말하라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데 최영미 시인의 조카 사랑은 나보다도 더 유별나다. 올해 초등학교 5학년인 조카를 위해 어릴 때부터 쓴 시가 꽤 많았다. 그 시들로만 시집을 내고 싶지만 그럴 수는 없었고 그중에 간추려 5편을 이번 시집에 수록했는데 나중에 조카가 커서 이모의 시집을 보면 기념이 될 수 있을 거라며 뿌듯해했다. 「지루하지 않은 풍경」부터 시작하여 「행복」「아이에게」「똑똑한 아이」「극장」까지의 시가 조카를 위해 쓴 시다. 그중에 한 편 「똑똑한 아이」는 조카의 말을 그대로 옮긴 것이므로 조카가 쓴 시나 마찬가지라고 했다.
-엄마! 줄기세포가 뭐야?
-너와 똑같은 아이를 여럿 만들어…
복제하는 기술이야
-정말 나랑 똑같이 생겼어?
-당연하지. 얼굴도 다리도 배꼽도 같아
-그래? 되게 기분 나쁘네. 그런데…
(엊그제 다친 무릎을 가리키며)
상처는 복제 못 하잖아!조카 얘기를 할 때마다 최영미 시인은 미소를 가득 머금고 눈을 반짝거렸다. 이젠 강남으로 이사를 가 버려 한번 만나려고 해도 아이의 스케줄에 따라야만 만날 수 있는 사이가 되었지만 조카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 그 마음을 알 것 같은 고모인 나.
최영미 시인의 낭송이 끝나고 이번에 독자들의 낭송 시간이 있었다. 시를 읽을 줄도 모르고 친구 따라왔다가 시집을 보고 짧은 시간에 읽게 되었다는 한 독자는 시집이 참 좋다고 말하며 「지상 최대의 쇼」를 읽으면서 엄마 생각이 떠올라 너무 좋았다며 낭송을 했고, 15년 전 최영미 시인에게 컴퓨터를 팔았다는 한 독자는 개인적으로 시집이 나오길 많이 기다렸다며 「나쁜 평판」을 낭송했다. 또 꼭 낭송해보고 싶었다며 멋진 목소리로 「어느 새」를 낭송하고선 그보다 더 멋진 해설을 덧붙여 준 문학동네 직원은 ‘비스듬히’라는 부사 때문에 이 시를 좋아하게 되었다며 지그시도 아니고 무심코도 아닌 ‘비스듬히’라는 부사가 그동안 일상이었던 삶을 뒤돌아보며 누군가를 쳐다보았을 때 다시 한 번 쳐다보게 되는 그런 느낌이라고 하였다. 그에 보답(!)하여 예스24의 직원도 한 편 낭송해 주었다.(물론 이것은 절대로 미리 짠 각본이 아니었다. 여기에서 나는 ‘시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구나.’ 하고 놀랐다. 북살롱을 하면서 한번도 이런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회사에서 일하다가 혹은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음악을 많이 듣는데 그 어떤 음악보다 자연이 들려주는 소리가 제일 아름답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런 음악을 들을 수 없는 현실이 슬퍼서 공감하게 되었다며 「자연의 합창」을 낭송해주었다.
최영미 시인에게 궁금한 몇 가지독자들의 낭송이 끝나고 질문의 시간이 있었다. 한 독자가 전작인
『돼지들에게』는 어떤 심정으로 쓴 것이냐고 묻자 시인은 가장 두려워한 순간이 왔다고 말하며 그의 모든 시집은 이전 작품이 계기가 되어 쓰인 것이라고 한다.
『서른, 잔치는 끝났다』를 펴내고 많은 소문과 오해에 시달렸다. 그 오해를 풀기 위해 낸 것이 두 번째 시집
『돼지들에게』였다.
『돼지들에게』를 펴내고 정신적 위기감이 들고 삶에 위기가 왔었다.
『돼지들에게』를 내면서 기자들을 만나면 예상했던 질문들이 있었다. 나름 이렇게 저렇게 해서 빠져나가면 된다고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다들 ‘돼지’가 누구인지 물었다. 그것도 직접 물어보진 못하고 편집자를 통해서 물었다. 하지만 “돼지들이란 그들이 생각하는 사람이 맞을 수도 아닐 수도 있지만 상상하고 있는 사람은 아니며 설령 상상의 인물이 돼지라 하더라도 진주는 최영미일 수 없으니 나의 상상력을 과소평가하지 말라.”고 했단다.
물론 시를 쓸 때는 그 대상이 있었다. 계기도 말하자면 그 대상을 두고 쓴 것이지만 시를 쓰다 보니 한 사람에서 여러 대상으로 바뀌었다. 상상력이 개입하게 된 거다. 그러므로 진실을 말하자면 돼지들은 한 사람의 특정 인물이 아니고 다수의 불특정한 인물들인 셈이다.
『도착하지 않은 삶』에 제목이 「?」인 시가 있다. 제목도 묘하고 내용도 묘한 탓에 궁금증을 유발하기도 하는데 그 의미를 독자가 물었다. 시인은 그 시를 빼지 않은 것을 후회한다고 했다. 대부분의 시인들이 그렇겠지만 그 역시 시집을 묶을 때 시가 많았다. 80여 편의 시가 있었는데 그중에서 20편을 솎아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안정한 시들이 있게 마련이다. 재미삼아 쓴 시도 많다. 스스로 굉장한 무대 체질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어떨 때는 수줍어하기도 하고, 또 다른 때는 이야기꾼이 되어 남을 즐겁게 해 주기도 한다. 시를 쓸 때도 마찬가지다. 즐거운 기분으로 쓴다. 고통스러운 주제를 다룰 때조차도 냉정해진다. 그게 아마 시인의 장점이자 한계점이라고 생각한단다. 마찬가지로 『?』 역시 어느 물음에 대한 답변의 시인 셈인데 그에게 모욕감을 준 질문들에 대한 불쾌한 기억을 떠올리며 그런 비겁한 인간들에게 복수를 하는 지적인 즐거움을 가지고 쓴 시이므로 시를 쓰는 동안은 즐거웠다고 토로했다.
최영미 시인의 사진을 보면 꽤 날카로워 보인다. 나도 이전엔 그를 만나본 적이 없었으므로 꽤나 까칠하지 않을까 외견상만 보며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외모로 보이는 모습은 항상 다른 결과를 가져온다. 의외로 밝고 활달한 성격인 시인을 보며 이 시간 내내 즐거웠었다. 때론 너무나 솔직하게, 때론 시인다운 감성적이고 진지함을 담은 채 그가 보여준 그의 진심은 아름다웠다.
마지막으로 나 역시 낭송을 하고 싶었으나 사투리의 두려움에 하지 못했던 아쉬움을 시인과 독자들이 낭송했던 시들 중에서 딱 하나 공유하며 공감했던 시를 올려본다.
어느새
사랑이 어떻게 오는지
나는 잊었다
노동과 휴식을 바느질하듯 촘촘히 이어붙인 24시간을
내게 남겨진 하루하루를 건조한 직설법으로 살며
꿈꾸는 자의 은유를 사치라 여겼다.
고목에 매달린 늙은 매미의 마지막 울음도
생활에 바쁜 귀는 쓸어담지 못했다 여름이 가도록
무심코 눈에 밝힌 신록이 얼마나 청청한지.
눈을 뜨고도 나는 보지 못했다.
유리병 안에서 허망하게 시드는 꽃들을
나는 돌아보지 않았다.
의식주에 충실한 짐승으로
노래를 잊고 낭만을 지우고
심심한 밤에도 일기를 쓰지 않았다
어느날 당신이 내 앞에 나타나
비스듬히 쳐다볼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