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약간 세월이 흘렀다. 한때 모 방송국에서 일을 봐주던 한 친구는 진중권 중앙대 겸임교수를 간혹 본다고 했다. 담배를 피우러 가면 진 교수도 같은 장소에서 흡연을 하고 있었던 거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일종의 담배 친구? 물론 친구는 진 교수를 알고 있지만, 진 교수는 친구를 모르는 상태. 당시 진 교수는 해당 방송국의 라디오 시사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던 때였다. ‘(할 말 있)수다회’라는 모임을 종종 갖던 우리는 모임 때마다 ‘게스트’를 초청하곤 했다. 그냥 함께 수다나 풀자고, 이 풍진 세상, 우리만의 유희나 즐기면서 세상을 씹자고.
어느 날, 친구가 진 교수를 한번 초청해보자고 했다. 담배피울 때 종종 맞닥뜨리는데, 자기가 보기엔 외로워 보인다면서. 담배피울 때, 한번 말해보겠다고 했다. 뭐, 사실 별 기대 않았다. 따지고 보면 우리만의 친목 모임에, 당대의 논객이자, 이래저래 바쁜 양반이 초대에 응해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으니까. 뭐 그래도 밑져야 본전이니까. 해보라고 등을 떠밀었다.
그러나 거사(!)는 결국 이뤄지지 못했다. 내 기억으로는, 해당 라디오 프로그램이 막을 내리면서 친구도 진 교수를 만날 일이 없어졌다. 약간, 아쉬웠다. 함께 담배를 피우면서, 수다를 떨어대면서 담론놀이를 하면 재미있겠다는 생각도 했으니까. 그냥 함께 놀고 싶었거든.
그렇게 세월이 흘렀다. 진 교수는 언제나처럼 ‘동 번쩍 서 번쩍’ 하면서 우리 사회에 대한 수다(?)를 멈추지 않았다. 그를 책으로 처음 만난 것이 아마 10여 년 전,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였다. 정말이지, 통쾌하고 유쾌한 책읽기로 기억한다. 삐뚤어진 우파 이데올로그의 폐부 깊숙이 파고드는 유희. 과장하자면, 오르가슴이라도 느낄 정도였다. 하여튼 이후에도 책을 통해 꾸준히 그를 만났다.
알다시피, 진 교수는 본디 미학자다. 논객보다는 미학자라는 정체성을 더 먼저 달았을 터이다. 그런데 나는 안타깝게도, 미학과 관련한 그의 책은 아직 읽지 못했다. 이 사회에 쏘아올린 각종 시론들을 묶어놓거나 논객으로서의 정체성에 가까운 책들은 읽어댔지만, 미학자 진중권은 다소 내겐 멀었다. 그의 미학 관련 책을 읽어본 주변인들의 추천에도 불구하고! 그런 그가 어느 순간, 영화잡지 『씨네21』에 글을 연재했다. 눈이 갔다.
진중권 교수와 영화. 그 조합이 어색한 사람도 있겠다. 대중적인 논객으로서, 미학자로서 정체성을 각인시킨 그에게 영화라니. 시사나 미학이 아닌, 영화라니. 물론 그것은 오해다. 영화는 시사와 미학을 모둠할 수 있는 좋은 테마다. 그의 연재물은 흥미로웠다. 영화 비평도 아니었다. 그의 전공인 미학과 인문학이 어우러져 새롭게 접근하는 영화의 세계. 진중권이기에 가능한 시도. 이미 브랜드화된 진중권의 담론 놀이는 1년여 지속됐던 것 같다. 그리고 마침내 책이 나왔다. 이름 하여, 『진중권의 이매진』(진중권 지음/씨네21북스 펴냄). 방가방가~
진중권을 만나다
지난 20일 서울 신림동 롯데시네마 신림관에 진중권이 떴다. 예스24와 롯데시네마가 주최하는 ‘아름다운 책 人터뷰’ 3월의 두 번째 작가로 초대됐다. 『진중권의 이매진』 출간과 관련한 독자와의 만남. 오래 전, 게스트 초대에 실패하여 대면하지 못한 아쉬움 때문이라도 그를 만나야 할 이유는 충분했다.
논객으로서 대중에 널리 이름을 알린 그를 잠깐 소개하자면, 그는 미학을 전공한 학자다. 독일에서 언어 구조주의 이론을 공부했으며 미학자로서의 목표는 철학, 미학, 윤리학의 근원적 통일성을 되살려 새로운 미적 에토스를 만드는 것, 예술성과 합리성으로 즐겁게 제 존재를 만드는 것 등이다. 한편 대중적 논객으로서 사회에 대한 다양한 글쓰기와 강연을 해오고 있으며, 촛불 시위나 TV 토론 프로그램 등에서 보여준 그의 활약상도 우리에겐 익숙할 것이다.
지은 책으로는
『미학 오딧세이』『현대 미학강의』『놀이와 예술 그리고 상상력』『춤추는 죽음』『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 1, 2』『앙겔루스 노부스』『시칠리아의 암소』『페니스 파시즘』『호모 코레아니쿠스』『폭력과 상스러움』 등이 있다.
참고로, 그는 이미 다른 책 등을 통해 채널예스 독자들과 만난 바 있다.
☞ [향긋한 북살롱]예술은 항상 아름다움만을 추구하는 것은 아니다! - 『서양미술사』의 저자 진중권이날 사회는 김혜리 『씨네21』 편집위원이 맡았다. 아래는, 충분하지는 않고 띄엄띄엄하지만, 이날 두 사람이 독자 혹은 관객들과 함께 나눈 디지털과 미디어와 영화를 아우른 시시콜콜한 담론이다. 내가 보기에도, 진 교수는 호모 루덴스(유희의 인간)가 맞다.
디지털 기술이 만든 새로운 영화의 세계김 위원이 진 교수에게 물었다.
<베오울프>와 같은 영화가 실사, 애니메이션 외에 제3의 (영화)양식으로 떠오르고,
<폴라 익스프레스> 등에서 선보인 ‘퍼포먼스 캡쳐’라는 신기술이 영화의 새로운 생산양식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에 대해. 진 교수는
“연극배우의 연기는 전체적이지만 영화배우의 연기는 파편적이다.”라는 말로 운을 뗐다.
“배우들이 스크린 앞에서 사라진 듯한 느낌을 받는다. <베오울프>를 보면 카메라 앞에서 배우들이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컴퓨터에 데이터를 제공하는 것 같다. 움직임의 다이어그램을 제공하는 것이다. <베오울프>에서 주인공은 난쟁이 연기도 했다. 배우의 사라짐 현상이 심해진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디지털 분라쿠(文樂:실물 크기에 가까운 인형들이 까만 옷을 입고 작은 샤미센 반주로 영창되는 사설에 맞추어 연기하는 일본의 전통인형극)이거나 분라쿠의 디지털 버전처럼 보인다.”<베오울프>에 대한 그의 의견은 책에서도 이렇게 정리돼 있다.
“<베오울프>는 ‘제3의 장르’가 되기를 원한다. 그러려면 그의 실험이 기술의 시연을 넘어 (앞에서 시사한 것처럼) 매체에 고유한 미학성을 보여주어야 한다.”(p.64)김 위원이
<베오울프>를 통해 영화윤리의 문제를 제기한다. 실사영화는 아무리 여름용 오락영화라고 해도, 현실 등을 상기시키면서 스크린 속의 인간이 피를 흘리면 아픔을 느끼고 모욕을 당하면 슬픔을 느끼나, 퍼포먼스 캡처로 만든 영화는 안전판 역할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을 이용하는 예술가가 어떻게 활용하는 가에도 달려있지만, 상당히 위험한 부분이 있다고 상기시켰다. 그렇다면 이런 기술 발전이 이야기에는 어떤 영향을 미칠까.
진 교수는 우리가 갖고 있는 서사의 틀이, 영화건, 드라마건, 대부분 아리스토텔레스 서사라고 지목하면서
<나비효과>를 예로 들었다.
“<나비효과>는 잘 만든 영화는 아니지만, 서사의 실험은 재미있다. 주사위의 눈은 여섯 개지만 실현되는 것을 하나다. 그것이 플롯을 만들어간다. <나비효과>는 6개의 눈이 병렬진행하면서 잠재성의 축을 현재성의 축으로 옮겨놓는다. 재미있는 것은, 미래의 원인이 과거의 결과를 낳는다는 것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인과관계를 뒤집을 수 있다는 사고방식이다.” 하, 그랬다. 그게 신기하지 않았던가. 그 전에 보아왔던 타임루프의 서사는 ‘과거 원인, 미래 결과’의 틀이었는데,
<나비효과>는 신기했다.
“<나비효과>의 구조는 하나의 플롯을 선형적으로 진행시키는 게 아니라, 다수의 플롯을 공간적으로 병행시키는 방식으로 짜인다. 이는 디지털 시대에 이미 대중의 일상이 된 하이퍼링크를 형식화한 것. 오프라인의 독서는 텍스트를 앞에서 뒤로 읽어나가는 선형적 글 읽기다. 인터넷 서핑은 다르다. 온라인의 읽기는 대개 비선형적으로 이루어진다.”(p.79)
진 교수는
<메멘토>와 <타임코드>의 예도 든다.
“<메멘토>는 역행진행을 취하면서 데칼코마니 같은 느낌을 준다. 이 영화를 DVD로 실험을 해봤다. 거꾸로 돌리면 완벽한 선형적 서사다. 정말 재미없었다. <타임코드>는 못 봤는데, 듣자하니 4개 프레임이 동시에 나온다. 이건 CCTV와 비슷한데, 그래서 익숙하다. 나만 해도 TV를 보면, 스포츠, 뉴스, 드라마 등 몇 개를 동시에 본다. 그런 것들이 미디어의 변화로 인한 새로운 지각방식인데, 그걸 영화로 재현한 셈이다. 사람들이 이미지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촛불시위 때 방송을 했는데, 왜 그렇게 인기를 끌었는가 생각해보면 제가 잘 생긴 덕도 가장 중요한 이유고, (웃음) 부차적인 이유가 방송에 게임 포메이션을 도입했다는 것이다. 대중들은 이미지를 보고 끝나는 것이 아니고, 이미지를 조작하고 싶어한다.” 그렇다. 미래영화의 모습. 상상해 본적 혹시 없는가. 인터렉티브 시네마라는 말은 어떤가. 진 교수는
<타이타닉>의 잭과 로즈의 생사여부를 둘러싸고 관객들이 선택하게 됐을 때, 맥이 끊기면서 재미가 없게 되는 경우를 들었다. 책은 <파렌하이트>를 예로 들며 이렇게 언급한다.
“최근 미술에 이어 영화에도 인터랙션을 도입하려는 실험이 활발히 일어나고 있다. 이게 못마땅했던 걸까? 어디선가 어느 감독이 인터랙션 시네마에 대해 논평했던 대목을 읽고, 유쾌하게 뒤집어졌다. 관객이 매번 영화를 중단시켜 놓고 버튼을 눌러 플롯을 진행시켜야 한다면, 관객은 영화 속으로 몰입하는 데에 심각한 방해를 받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터랙션 영화는 극을 중단시켜놓고, 관객의 의견을 물으며 태도를 결정하라고 다그쳤던 브레히트의 연극을 닮았다.”(p.82)
인터렉티브 시네마는 아직 멀다. 인터렉티브 시네마의 서사는 결정론적이 아니고 참가자 해위나 관객들의 행위에 따라 달라진다. 이럴 경우 컴퓨터가 병렬처리가 가능해지고 기존의 방식으로 해결할 수 없었던 다양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되는 양자컴퓨터가 되지 않으면 불가능하고, 이렇게 되면 그야말로 ‘SF’라는 것이 진 교수의 언급.
영화의 촉각적 경험그렇다면 관객들의 지각방식은 어떻게 바뀔까. 마셜 맥루언은 미디어를 ‘인간의 확장’으로 규정한 바 있는데, 육체는 미디어와 기술의 변화에 따라 어떻게 변할까. 진 교수는 미디어 아트가 지닌 육체화와 탈육체화의 측면에 주목했다. 베냐민도 영화가 지닌 촉각적 지각에 주목한 바 있었다. 그는
<라이언 일병 구하기> 초반부를 언급했다. 우리가 그 영화를 보면서 느꼈던 촉각적 경험을. 그것은 곧 1인칭 체험자 시점이라는 새로운 방법이었다. 종전까지 대부분 전쟁영화는 3인칭 시점을 취했다.
<블랙호크다운>은 특별한 기법이 없음에도 트라우마를 느끼게 할 정도의 체험을 가능하게 했고,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는 촉각적 효과가 극대화한 경우라고 일컬었다.
책에서는 이런 설명이 추가된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는 영화사에 일찍이 없었던 ‘폭력의 현상학’을 구현한다. 이는 효과를 내는 기술의 차이이기도 하겠지만, 무엇보다 기억을 조작하는 미학의 차이다. 가령 <지상 최대의 작전>의 관객은 전투를 ‘밖에서’ 관찰하게 하나, <라이언 일병 구하기>는 전장을 객석으로까지 연장해 관객을 불현듯 그날 오마하 해변의 전장에 처하게 만든다.”(p.125) “영화 매체의 촉각성으로 상처를 주어 역사를 트라우마로 기억하게 하는 것. 거기에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성취가 있다.”(p.128)<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도 이렇게 설명된다.
“이 영화는 뜨겁다. 고해상의 이미지에는 공간적 빈틈이 없고, 초당 24장의 프레임은 이미지 사이의 시간적 간극을 지운다. 맥루언의 말대로 정보의 밀도(해상도)가 높으면 관객의 참여도(상상력)는 떨어지는 법. 이미지가 뜨거우면 상상력은 식는다. 중세의 목판화는 차갑다. 관객에게 앙상한 뼈대의 빈틈과 간극을 스스로 채우라고 요구한다. 이미지가 차가울 때 상상력은 뜨겁다.”(p.133)진 교수의 이날 선언 중 하나를 꼽자면, 우리가 이미 사이보그라는 것이다.
“차나 자전거를 탈 때 우리 신체는 그것을 기억한다. 우리는 그렇게 기계와 이미 접속된 상태다. 사실상 사이버다. 인간은 이미 사이보그화 돼 있을지 모른다.” 이에 대한 예로
<마이너리티 리포트>와
<스파이더 맨>을 들었다.
“‘사이보그’라는 낱말은 그 사이에 심보그(symborg)라는 신조어로 전환했다. ‘symbios’와 ‘organization’의 합성어인 심보그는 한마디로 인간과 동물, 신체와 기계, 가상과 현실의 공생관계 위에서 살아가는 유기체를 가리킨다.… 생명 자체가 실은 다른 생명체와의 공생을 통해서만 탄생하고 존속할 수 있다는 얘기. 이 자연현상을 인공적으로 수행하는 존재가 바로 ‘심보그’다.”(p.100) <스파이더 맨>은 그래서 ‘심보그’ 선언이다. 내게 2개의 주체가 존재하는 것.
리얼리즘은 저해상으로부터?김혜리 위원에게 지난해 가장 충격적인 영화 중의 하나가
<클로버 필드>란다. 최고의 괴수는 형식이고, 특수효과는 마케팅이라는 이야기. 예전에는 고해상이 몰입의 전제였는데, 지금은 그렇다면 달라졌다는 얘기? 진 교수의 대답은,
“고전적 리얼리즘의 개념이 살아있는 것이 저해상”.
어느 정도 고해상의 영상에 익숙해진 관객들은 이제 고해상을 연출?합성?허구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흔들리는 영상을 되레 리얼하게 생각하게 된다는 것.
“영화에 초점조차 안 맞는 저해상의 영상을 도입할 수 있었던 것은, 이미 대중에게는 그런 동영상에 대한 취향이 생겼기 때문일 게다. 흔들리고, 초점이 안 맞고, 해상도가 떨어지는 영상에 대중이 열광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캘리포니아공대 총기난사 사건 때 휴대폰으로 찍은 동영상을 생각해보라. 시각이 제한되어 있어 범인의 모습은 보여주지 않으나, 거기에는 영화나 방송의 카메라로 전달할 수 없는 생생한 현장감과 진실성이 있다.”(p.142)
정말, 그 같은 저해상의 리얼리즘을 이용한 것이 바로
<클로버 필드>의 핸드헬드 카메라였다. 괴수의 습격 앞에서 벌벌 떠는 캠코더. 그것에 몰입됐던 경험, 당신도 갖고 있진 않은가. 몰입에 반드시 고해상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한마디로 디지털 대중이 사용하는 영상의 전략을 본격적으로 영화 속에 도입하는 실험이라 할 수 있다. 이 흔들리는 저해상의 불량한 영상을 대중이 기꺼이 참아주는 것은, 그것이 자신들의 일상적인 영상 취향과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물론 영화관에서만은 다른 영상을 보고 싶어하는 이는 거기에 불만을 가질 수도 있겠다.”(p.143)영화는 진화한다그렇다면, 이런 디지털이나 신기술들이 영화사를 바꿔놓을까.
“최초의 몰입 영화는 디지털이 아닌 아날로그였다. 이상한 장치는 가망이 없다. 사람들이 번거로워하기 때문이다. 디지털 영화가 계속 진화하고 있지만, 현실이 주는 감동을 넘지 못한다. 과거에도 뉴미디어가 올드미디어를 없애지 않았다. 서로 전략을 차용하면서 진화했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영화는 게임을 차용하고, 게임은 영화를 차용하면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을 것이다.”진 교수에 따르면, 대중의 이미지 취향은 이미 변했다.
<워낭소리>만 봐도 그렇다. 감동은 원래 피사체에서 오나, 피사체를 조작했음에도 사람들은 속았다고 말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그냥 넘어가는 분위기다. 아마 우리의 영화는 어떤 식으로든 진화할 것이다. 그것이 어떤 방향성을 갖든, 어떻게 변화하든. 아마도, 고민은 계속될 것이다.
“디지털 시대는 새로운 상형문자의 시대다. (…) 디지털은 영화로 하여금 제 언어에 대해 다시 고민하게 만들고 있다.”(p.29)
진 교수의 강연은 그렇게 유익한 시간이었다. 현재의 그리고 미래의 영화를 기대하게 만든. 영화 안에서 나는 새로운 세계와 만나고 새로운 기술이 주는 사유를 만날 수 있다. 성사되지 못했던 게스트 초청은 몇 년이 지난 시점에서 이렇게 이뤄졌다. 영화와 만나는 디지털 인문학이 즐거웠던 이유. 나의 영화도 계속 진화한다. 당신의 영화는 어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