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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힌, 그러나 잊을 수 없고 잊어서도 안 되는

20세기의 혁명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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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대 사학과 임경석 교수의 『잊을 수 없는 혁명가들에 대한 기록』은 내가 올해 읽은 국내 저자의 책 가운데 제일 뛰어나다. 단연 ‘올해의 책’으로 꼽고 싶다. “이 책은 역사 속 인물들에 관한 기록이다.”

내가 나서 자란 동네엔 주물공장이 있었다. 가내수공업 수준의 공장치고는 규모가 제법 커서 공장 안에 ‘사택’도 있었다. 번듯한 집이 아니라 공장 한구석에 임시로 방을 만들어 놨다. 준수는 거기 살았다. 준수는 누군가의 본명이다. 홍 씨 성의 준수 아버지는 그걸 알았을까? 설마! 어쨌든 주물공장은 우리 동네 도랑에 노란색 물이 흐르게 했다.

꽤 오래 전, 학생운동에 젊음을 바친 실천적 지식인의 스스로에 대한 과장된 평가를 듣고 ‘이건 아니지!’ 싶었다. 그는 자신을 체 게바라에 비유했다. 게바라에게 꿀릴 게 없다고 여겼다. 그가 활동한 시기 우리나라 숲에 안개가 좀 끼기는 했지만(그는 학림?무림 사건 관련자다), 밀림과 정글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도, 그때만 해도 호시절이었다. 게오르크 루카치 가라사대 “별이 총총한 하늘이 갈 수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들의 지도인 시대, 별빛이 그 길들을 훤히 밝혀주는 시대는 복되도다.”(『소설의 이론』, 김경식 옮김, 문예출판사, 2007, 27쪽)

거의 최후의 파르티잔인 남도부의 본명은 하준수(河準洙, 1921-1955)다. 임경석의 『잊을 수 없는 혁명가들에 대한 기록』(역사비평사, 2008)은 남도부의 한자를 ‘南道富’에서 ‘南到釜’로 바로잡는다. 마지막 남은 파르티잔 우두머리 이름이 ‘남도의 부유한 사람’을 뜻한다면 약간 우습다.

남도부는 인민군의 6.25 남침 하루 전날, 북에서 내려 보낸 인민유격대 사령관이다. 인민유격대 사령관에게 붙여진 이름은 ‘남쪽으로 부산까지 다다른다’는 의미다. 만에 하나 남도부가 그 이름의 속뜻을 이뤄냈다면 우리의 삶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지금보다 더 나쁘면 나빴지 좋을 것 같진 않다. (허걱, 지금보다 어떻게 더 나쁠 수 있지!)

성균관대 사학과 임경석 교수의 『잊을 수 없는 혁명가들에 대한 기록』은 내가 올해 읽은 국내 저자의 책 가운데 제일 뛰어나다. 단연 ‘올해의 책’으로 꼽고 싶다. “이 책은 역사 속 인물들에 관한 기록이다.” 그들은 식민지 시대를 전후한 때에 한반도를 중심으로 중국 상해와 만주, 그리고 연해주를 누볐다. 때로는 모스크바까지 활동영역을 넓혔다.

“이 책의 주인공들에게 직업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들 중 몇몇은 학생이거나 교수였다. 몇몇은 농사를 지었으며, 또는 신문기자이거나 신문사 지국을 경영했다. 그러나 그들은 학교, 경작지, 신문사의 일에 전념하지 않았다. 다른 일에 마음을 두었다. 그것은 ‘혁명’이었다.”

이 책에 나오는 사람들은 한이 많다.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 비명횡사했다. “이 책의 주인공들은 잊힌 사람들이다.” 하지만 공적인 논의의 장에서 거론하지 못했다는 게 더 타당하다. “그러나 그들은 잊을 수 없는 사람들이다. 아니, 잊어서는 안 될 사람들이다.” 내게 앞표지에 이름이 인쇄된 이 책의 등장인물 9인은 박헌영을 빼고는 그 이름마저 낯설었다.

이름과 죄수복을 입은 곱상한 외모가 여자일지도 모른다는 오해를 사는 윤자영(尹滋瑛, 1896-1938)부터 그랬다. “윤자영은 식민지 조선이 낳은 걸출한 혁명가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는 국내에서의 합법적 공개운동과 비밀 지하운동에 적절하게 대처할 줄 알았다. 합법 영역과 비합법 영역을 배합하는 능력을 그는 훌륭히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김단야(金丹冶, 1900-1937), 박헌영(朴憲永, 1900-1956), 임원근(林元根, 1900-1963) 이 세 사람은 이른바 ‘경성 트로이카’다. 임경석 교수는 1900년생 동갑내기 트로이카 중에서 동지의 손에 처형당한 두 사람의 운명에 주목한다. “인류의 오래된 염원을 위해 한평생을 헌신했던 박헌영과 김단야의 죽음은 앞으로 다시 반추될 날이 있을 거라고 믿는다.”

나는 혁명가로서 강달영(姜達永, 1888-1942)의 생애와 비극적 최후가 인상적이었다. “억압과 굴종을 강제하는 현실세계에 감연히 저항하던 뜨거운 자유의지의 소유자였으되, 그 빛나던 자의식이 점차 허물어져가는 한 혁명가의 초상이다.” 강달영은 귀중한 동지들의 안전을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시달리다 끝내 미치고 만다. 나는 임경석 교수의 인물평에 공감한다.

“강달영은 외유내강의 인물이었다. 늘 부드럽고 겸손한 태도를 취했지만, 자신의 판단을 강력히 밀고나가는 힘을 갖고 있었다. 진퇴양난의 곤란한 현안에 부딪치더라도 그것을 회피하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지체 없이 적절한 조치를 취했다. 그와 동시에 생각이 다른 사람을 부드럽게 설득하고 위로하는 일을 잊는 법이 없었다.”

『잊을 수 없는 혁명가들에 대한 기록』은 혁명가 9인을 다룬 여덟 편의 약전(略傳)을 싣고 있다. 윤자영, 김단야, 박헌영, 임원근, 강달영, 김철수(金□洙, 1893-1986), 고광수(高光洙, 1903-1930) 남도부, 안병렬(安秉烈, 1917-?)이 그들이다. 남도부와 『남부군』의 이태가 다르고, 같은 학자 출신 파르티잔이라도 안병렬과 『조선소설사』의 김태준이 주는 느낌이 또 다르다.

그런데 윤자영 편인 1장 「만남」과 2장 「트로이카」는 나머지 여섯 편과 형식이 약간 다르다. 앞에 놓인 두 편은 각주가 없는 데 비해 뒤에 놓인 여섯 편은 각주가 달려 있다. 서론의 성격이 있는 윤자영 편은 각주가 없는 게 오히려 자연스럽다. 「트로이카」는 본문을 통해 각주를 넣기 어려운 정황을 드러내 보인다. 이렇게 말이다.

“그가 어떤 방법을 사용하여 국경 경비 경찰의 검문을 따돌렸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정확한 원인은 아직 알 수 없다.” “체포된 세 사람이 주로 어떠한 추궁을 받았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이 어떤 방법을 사용했는지를 직접 알려주는 자료는 아직까지 발견하지 못했다.” “임원근이 사회주의운동선에 복귀했다는 증거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강조 전부 필자)

3장 「일그러진 초상」의 강달영 편부터 각주가 등장하는 데에는 더 본질적인 측면이 있는 것 같다. “민주화가 진전된 뒤에는 금제의 벽이 얇아진 듯했지만 아직도 완전히 걷혔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게다가 무서운 것은 세월이다. 긴 시간이 흐른 뒤인지라 자료는 인멸되었고, 기억은 점차 색이 바라고 있다.”

내가 이 책에서 받은 가장 강한 인상은 초창기 조선공산주의운동의 놀라운 역동성이다. 그것은 빼앗긴 국권을 되찾기 위한 민족해방운동의 차원에서 전개돼 불혹에 이른 내 피를 덥힐 정도다. 이제 보니 우리 현대사에서 대하드라마의 소재는 무궁무진하다.

‘왼쪽 치우친 방송, 가운데 갖다 놔라’는 식의 시대착오가 팽배한 요즘으로선 난망한 노릇이나 앞으로 은근히 기대가 된다. 이에 앞서 일제강점기 사회주의계열의 독립운동은 어서 온당한 평가와 대접을 받아야 한다. 토종 혁명가들의 결기어린 삶의 행적은 정말이지 체 게바라가 부럽지 않다.

이제 나라 바깥으로 눈을 돌려보자. 장석준이 쓰고 엮은 『혁명을 꿈꾼 시대』(살림, 2007)는 ‘육성으로 듣는 열정의 20세기’다. “20세기의 육성을 모았다. 백 년의 역사에서 중요한 마디마디에 이뤄진 연설들 가운데 지금도 우리에게 강렬하게 호소하는 바가 있는 것들을 뽑아 옮겼다.”

앞표지 책날개에 있는 저자의 ‘선명한’ 출간목록과 무관하게 출판사로선 어떤 실용적인 출간의도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논술 부교재로 써도 될 것 같다. 각 편마다 21세기와 20세기의 가상대화, 연설자에 대한 짧은 소개, 연설 한두 개로 이어지는 형식이 그렇게 보인다.

헬렌 켈러로 시작해 러셀, 빌리 브란트, 유진 뎁스, 트로츠키, 흐루시초프, 아옌데, 간디, 체 게바라, 네루다, 마틴 루터 킹, 말콤 X, 만델라, 그람시, 디미트로프, 돌로레스 이바루리, 프랭클린 루즈벨트, 에멀린 팽크허스트, 로자 룩셈부르크, 베티 프리던, 토니 벤, 제시 잭슨, 우고 차베스로 이어지는 20세기의 열정적인 연설(자) 선정은 무난해 보인다.

다만,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이 낄 자리는 아닌 것 같다. 저자 또한 이를 의식하고 있다. “물론 불안한 요소들도 적지 않다. 차베스가 개인 독재의 유혹에 빠져들지는 않을까, 석유 수입에 대한 지나친 의존이 언제까지 지속 가능할까 등등.” 그러면서 저자는 한 가지만은 분명하다고 강조한다.

“역사의 방향타는 이미 차베스와 그의 정부 핵심 인사들의 손을 떠났다는 것. 그것은 이제 수천만 민중들의 작품이 됐다.” 나는 이런 식의 구렁이 담 넘는 책임 떠넘기기보다는 살바도르 아옌데 칠레 대통령의 낙관주의를 신뢰할 수밖에 없다.

“이 나라의 노동자 여러분, 저는 칠레와 그 운명을 믿습니다. 반역자들이 우리에게 강요하려는 이 암울하고 가혹한 순간을 딛고 일어서 또 다른 사람들이 전진할 것입니다. 이걸 잊지 마십시오. 자유로운 인간이 활보할, 더 나은 사회를 향한 크나큰 길을 열어젖힐 일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칠레 만세! 민중 만세! 노동자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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