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고속도로를 따라 안동 쪽으로 달리다보면 서안동 IC 초입의 커다란 입간판을 만나게 되는데, 거기에는 ‘한국 정신문화의 수도 안동’이라는 글귀가 씌어 있다.
안동을 처음 방문하거나, 혹은 막연하게 스쳐간 사람들은 그 글귀에 강한 인상을 받는다. 콘크리트와 철골구조의 문화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영남 유학의 본고장, 종가와 종부 같은 키워드가 확 다가오는 느낌이 들게 하는 글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차를 돌려 안동 시내로 진입하면, 입간판에서 보았던 ‘정신문화’라는 이미지를 발견할 수 없어 당황하게 된다. 그 다음엔 예정된 코스인 봉정사나, 하회마을, 혹은 도산서원 등을 돌아보고는 안동에 대한 기존의 이미지를 재확인하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그러고는 ‘뭐 하회마을에는 음식점만 있고, 봉정사나 도산서원은 우리나라 어디를 가도 눈에 띄는 고건축에 불과하더만……’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안동에 대한 기억을 그동안 다닌 많은 여행지에 대한 추억 중의 하나로 넘겨버린다…….
하지만 안동에 사는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그들의 말을 들어보면 그야말로 정신문화의 수도라는 자부심이 가득하다.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는 ‘안동 답답’이라는 말이 나온다. 안동 사람들은 풍산들판이 가장 넓은 줄 알고, 안동에서 보는 세상이 가장 큰 세상이라고 여긴다는 뜻이다. 이것은 어쩌면 중요한 통찰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의 사실을 간과한 데 있다.
안동은 폐쇄형 도시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서울에서 안동으로 가려면, 중부고속도로를 타고 일죽이나 음성을 거쳐, 문경새재를 넘어가거나, 아니면 영주 소백산을 넘어가는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고, 그 탓에 서울-안동 간의 거리는 자동차로 최소 네 시간이 소요됐다. 철도 역시 마찬가지, 곳곳에 뻗은 산길을 돌아 굽은 철길인지라 제 속도를 내지 못하는 기차를 타면 청량리역에서 안동까지 열심히 달려야 네 시간이었다. 서울만이 아니라 도청이 있는 대구까지 가려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중앙고속도로가 개통되기 전까지는 대구까지 의성, 군위를 거쳐 직행버스로 세 시간, 다시 동대구역에서 기차로 세 시간이나 걸리는 곳이 안동이었다.
때문에 안동은 그동안 외지인의 접근이 용이하도록 허락한 적이 없었다. 그러다보니 안동 사람들이 서울이나 대구로 나가려면 최소한의 결심이 필요했다. 물건을 사고파는 상인들이야 할 수 없다 쳐도, 유학이나 일자리를 위해 안동을 벗어난다는 것은 일종의 각오가 따라야 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안동에서 외부로 나간 사람들은 대개 그곳에서 이름을 올리고 사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 말은 반대로 안동은 여타 도시에 비해 나가는 사람도, 다른 곳에서 들어오는 사람도 적은 폐쇄적인 도시라는 말과도 같다.
사실 ‘안동 답답’이라는 말은 거기서 유래된 것이다. 외부와 단절된 오지 아닌 오지에서 살아간 안동 사람들이 물정을 모르고, 변화에 더딘 것은 필연적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오늘 안동의 독특한 문화를 형성했다. 개화 이후 우리나라는 그야말로 상전벽해에 가까운 변화를 이루어냈다. 도시는 건축물로 넘쳐나고, 행동양식은 서구화되어 어디에서도 우리 고유의 원형을 발견하기가 어렵게 된 것이다. 하지만 안동은 아직도 조선시대 영남 유림이 중앙에 나간 이후 국가 경영에 참여했던 이들로서의 자존심과, 개화 이후에도 우리의 본디 정신을 지키고 산다는 자부심이 충만하다.
하지만 그것도 최근 십 년간 교통과 물류의 발달로 서서히 무너지고 있다. 그래서 안동 도심은 구시장과 태화동, 금곡동 주변의 오래된 동네를 제외하면 아파트촌이 밀집하고, 다방과 호프집이 번성하는 일반적인 지방 중소도시의 모습으로 변해버렸다. 하지만 안동이 갈아입은 것은 겉옷일 뿐, 아직도 내밀한 속곳은 명주와 무명으로 만들어 입고 산다. 사람들의 정서를 지배하는 흐름도 마찬가지다.
한때 미니스커트를 입거나, 담배를 피우는 여성을 찾아볼 수 없던 근엄한 도시에서, 새빨간 립스틱을 바른 여성과, 꽁지머리를 묶은 청년이 서로 팔짱을 끼고 스스럼없이 걸어다닌다. 그래서 외부인 사이에서는 도시 이름은 안동이되, 사람들은 안동 사람이 아니라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한다. 하지만 겉에 쳐진 장막을 한 꺼풀만 벗기고 들여다보면, 그 안에는 여전히 흐르고 있는 정신문화의 DNA가 살아 숨쉬고 있다.
안동은 길이다. 많은 이들이 종택이나 서원, 사찰과 같은 구조물을 찾지만, 안동의 진짜 모습은 길이다. 그 길은 옛 선비들이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 가던 길이고, 안동이 세상의 중심이라 여겼던 경상도 북부 사람들이 등짐을 이고 걷던 길이며, 선비들이 책을 지고 서원으로 가던 길이고, 드넓은 풍산들에 소달구지를 몰고 가던 길이다.
그 길 중의 으뜸은 청송 가는 길이다안동을 찾았으면 안동 시내를 벗어나, 청송으로 달려볼 일이다. 안동 시내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외곽도로를 십 분만 달리면 용상을 지나 국립안동대학이 나온다. 그곳에서 좌측은 청송, 우측은 길안을 거쳐 영천으로 빠지는 국도를 만나게 된다. 그중에서 먼저 청송으로 가는 길을 찾아가면, 어느새 우리는 거대한 구조물을 벗어나 오랫동안 그 모습을 지키고 있는 비경들을 쉽게 만나게 된다. 청송으로 넘어가는 국도는 좌우가 아직도 원시림이다. 6?25전쟁 때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된 현장이지만, 지금은 오십 년간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아 짙은 신록이 그 자리를 채우고 있다. 청송은 BYC 벨트(안동을 중심으로 청송, 봉화, 영양 세 곳을 가리키는 별명)의 핵심이다. 한때 개발이냐 환경이냐로 논쟁을 벌였지만, 현명하게도 청송은 환경을 도시의 기반으로 택했다. 그 덕분에 청송에는 아직도 개발의 손길이 미치지 못한 느낌이 역력하다. 마치 60년대나 70년대의 영화의 한 장면 같은 도시 풍경, 그리고 주왕산을 중심으로 사방이 숲으로 남아 있다.
많은 사람들이 주왕산을 찾으면 달기약수를 떠올린다. 하지만 달기약수에 들어 있는 철분은 지나치면 건강에 좋지 않다는 설이 있어서, 지금은 예전만큼 인기가 있지 않다. 한두 대의 관광버스가 약수터에 줄지어 서 있고, 각자 양손에 커다란 물통을 든 사람들이 꼬리를 물던 광경은 사라진 지 오래다. 하지만 그래서 청송은 더 청송다워졌다. 주왕산에 오르면 많은 사람들이 가벼운 표정으로 아이들의 손을 이끌고 걷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주왕산은 전문 산악인이 아니어도, 대개의 등산코스가 평지에 가깝기 때문이다.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기기묘묘한 바위로 이루어진 소(沼)와 폭포가 나오고, 그곳에 들어선 사람들은 이곳에 펼쳐진 놀라운 비경에 탄성을 지른다. 하지만 때를 잘 만나지 못한 사람들에게 그런 탄성은 아직 이르다. 주왕산의 본모습은 늦가을과 초봄에 볼 수 있다. 늦가을 주왕산은 문자로 표현할 수 없다. 단지 느끼는 수밖에 없다. 특히 오후 네 시경 해가 서편으로 넘어가며 햇살의 채도가 달라지는 시점에 드리워진 단풍과 빛의 조화를 만나는 순간은 말로 표현하기가 도리어 송구해진다. 사방이 봉우리에 둘러싸인 주왕산의 진면목이 이때 드러난다. 나뭇잎은 마지막 수분을 머금고 빛을 반사한다. 나뭇잎에 반사된 그 아름다운 빛들은 모네가 보았다면 그 자리에 주저앉아 붓을 꺼내들고야 말았을 모습이다. 여행객이 한순간 아름다움을 느끼는 때가 있다면 바로 이 장면 앞에서일 것이다.
두 번째 길은 선비의 길이다퇴계종택에서 출발해서 낙동강을 따라 굽이도는 길이다. 이 길은 퇴계가 집을 짓고, 서원을 열고, 은거하며 걷던 길이자, 안동의 선비들이 세상을 논하던 길이다. 이 길은 봉화 청량산까지 그대로 이어진다. 안동을 찾는 이들은 온혜를 거쳐 봉화로 이르는 국도를 달리며 절벽과 산을 아름답다 하지만, 그 길은 죽은 길이다. 생명쟀 땅 위로 아스팔트가 덮여버렸고, 오늘도 그 길로 버스들이 관광객을 실어나른다. 많은 이들이 이 길을 걸으며 예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꺼내들고 찬탄을 하지만, 그것은 모조품이다. 하지만 농암종택을 시발점으로 청량산에 이르는 길은 살아 있다. 사람들의 발길은 드물고, 퇴계의 발자국은 아직도 선명하다. 중간중간 시멘트로 포장되어 옛맛은 잃었지만, 그래도 이 땅에서 길을 걸으며 사상과 철학을 논할 수 있는 괴테의 길을 꼽으라면 단연 이 길이다. 길은 청량산으로 이어진다. 이 산에는 청량산 육육봉을 나는 새들이 바깥세상에서 이곳을 자랑할까 저어했던 퇴계의 시심이 살아 있다. 높지 않은 산, 가파르지 않은 길이다. 하지만 청량산을 올라 청량사에 이르면 놀라운 경험을 한다. 이곳의 지불이 어떻고, 건축이 어떻고를 보면 포장지만 본 것이다. 청량산의 아름다움은 청량사에서가 아니라, 청량사를 거쳐 응진전에 이르러서야 제 맛을 알 수 있다. 산은 절을 안고 있고, 절은 불심을 품고 있지만, 봉우리는 아직도 퇴계의 이기철학을 이고 있다. 아름답고 재미있는 곳이다.
다음 길은 불심의 길이다서안동을 거쳐 봉정사 삼거리에서 영주 방면으로 난 길은 이제 그 원형이 많이 사라졌다. 길가의 능수버들이 홀로 남아 옛이야기를 전하고 있지만, 어느새 길은 포장이 되고, 오래된 참나무들은 하나씩 뽑혀버렸다. 교통 안전이 우선인 탓이다.
하지만 이 길은 안동의 심장을 가로지른다. 우측으로 빠지면 제비원 석불이 있고, 좌측으로 흐르면 봉정사가 나타난다. 봉정사는 의상대사가 부석사에서 날린 종이봉황이 내려앉은 곳이라는 뜻이다. 이 절의 의미는 새롭다. 한때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이 들렀다고 떠들썩해지고,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이라는 영화가 이 절의 상징이 되기도 했지만, 정작 이 절의 원형은 그 이전에 존재했다. 관광객의 발길이 늘면서 매표소가 생기고, 아이들은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이라는 현판 앞에서 열심히 무엇인가를 기록하지만, 그 역사의 일부분을 지켜본 사람의 마음은 쓸쓸하다. 그래서 봉정사는 평일 오후에 갈 일이다.
평일 오후 사람 발자국이 뜸한 해거름에 봉정사 돌계단에 앉아 있으면 십자가를 가슴에 품은 나그네도 어느덧 불심에 스며든다. 하지만 어느새 요란한 절집으로 변해가는 봉정사를 바라보면 더 늦기 전에 눈에 새겨두어야겠다는 생각이 허전한 가슴을 파고든다.
다음 길은 농부의 길이다이 길은 아름답다는 표현이 무색한 길이다. 어쩌면 사람의 손이 닿은 길 중에서 가장 원형을 잘 담고 있는 길이래야 맞을 것이다. 안동에서 영양으로 그리고 다시 태백으로 넘어가는 옛길은 섬진강 벚꽃길만큼이나 인상적이다. 섬진강의 그 길이 꽃길이고, 금모래빛이라면, 이 길은 숲길이고 푸른빛이다. 영양, 수비를 거쳐, 태백, 정선으로 가는 길과, 바다 너머 동해로 가는 길이 이어진다. 안동 사람들은 이 길을 통해 넘어온 고등어에 소금을 뿌려 염장을 했다. 그리고 고등어 한 손으로 삼대가 세 끼 식사를 하고도 남았다. 그만큼 귀한 바닷물산이 넘어오던 길이다. 하지만 길을 가다보면 세상에 이 길을 어찌 넘어왔을까 싶게 가파르다. 길은 산을 굽이굽이 돌아간다. 숲은 끝이 없고 중간중간에 농부들의 논과 밭이 보인다. 옛날 사람들은 이런 심심산골에 농사를 짓고 고추를 심어 수확하고 안동장으로 이고 지며 나왔을 것이다. 비록 지금은 이차선으로 포장이 되어 차가 다니는 길이 되었지만, 어찌 보면 이 땅에 남은 몇 안 되는 원시길이자, 여전히 농민들의 길이기도 하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여전히 옛날처럼 살아간다. 고추를 심고, 나락을 거둔다. 아직도 몸이 아프면 한두 시간씩 걷고 차를 타며 안동 시내로 나온다. 그래서 안동장터에는 곳곳에서 온 다양한 사연들이 숨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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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공이 휘젓는 삿대질에 하늘이 갈라지고 나룻배는 조금씩 강심을 향해 나아간다. 이제 더 이상 비는 오지 않을 듯 쪽빛 창공에 열구름 가득하다. | |
나물을 팔러 나온 이, 고추를 수매하러 나온 이, 농사일에 망가진 무릎을 치료하러 나온 이…… 무얼 하러 왔든, 그들의 손에는 항상 무엇인가 들려 있다. 병원을 찾아 의사에게 진료를 청하면서도 책상 위에 검은 봉지를 하나 턱 하니 올린다. 그 안에는 풋고추나 대추, 곱게 빻은 깨소금이 가득 들어 있다. 남의 집에 빈손으로 갈 수 없는 농심이 시키는 일이다. 그래서 이 길은 아직도 살아 있다.
길을 보았으면 이제 집을 볼 일이다집에는 사람이 산다. 하지만 안동의 곳곳에 있는 몇몇 집에는 예사롭지 않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 그 집에 들어서면 “본관이 어디인고?” 정도에는 바로 답이 튀어나올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가는 돌아선 후 영문도 모르고 쇠상놈 소리를 듣기가 십상이다. 이것은 또 하나의 원형이다. 아무리 혈통과 가문이 시대착오적이라지만, 바다 건너 일본에는 혈통으로 이어받은 천황이 떡하니 버티고 있고, 대서양 너머 유럽에는 여전히 가문과 혈통이 살아 꿈틀거린다. 자존심, 아니 자긍심이다. 비록 하회 류씨, 안동 김씨는 아니더라도, 혈통이 가진 자긍심은 안동의 자존심이다. 남의 집이면 어떻고 남의 가문이면 어떠랴, 따지고 보면 다 한 핏줄인 것을. 그래서 안동에는 여전히 양반가가 존재한다. 종택에는 종손과 종부가 있고, 종가의 기제사에는 일가 대대의 자손들이 모인다. 객들에게 그 모습은 신기한 광경이지만, 정작 당사자들에게는 무겁고 진지한 일이다. 그들에게 조상은 바로 자신의 뿌리다. 조상을 살피는 일은 자손을 돌보는 마음과 같고, 그 마음은 다시 자손들이 어른을 섬기는 마음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안동의 제례와 관습은 그나마 마지막 안간힘을 쓰며 버티려는 우리들의 미풍과 양속의 최후 방어선이다.
아무리 세태가 변하고, 시대가 바뀌어도 부모는 부모다. 그 부모를 모시는 마음이 조상을 대하는 자세고, 조상과 가문을 지키는 노력은 전통을 잇게 한다. 안동을 방문하는 이는 돌아가며 생각해볼 일이다. 나는 내 부모에게, 또 내 자식은 내게, 과연 어떤 모습이었는지, 그리고 우리가 지금 손에 쥔 것들을 얻기 위해 무엇을 버려야 했는지를 생생하게 돌아볼 수 있을 것이다. 안동에는 그런 종택들이 곳곳에 산재해 있다. 그리고 그곳은 아직도 정중하게 방문한 외부의 객을 허투루 내치지 않으니 꼭 한 번 찾아볼 일이다.
다음은 서원이다안동에서 도산서원을 모르는 이는 없다. 방문객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도산서원을 들렀다 오며 무엇을 보았는지 기억하는 이는 별로 없다. 도산서원은 눈으로 볼 곳이 아니다. 건축양식이 특별하다거나, 문화재적 가치가 높은 곳도 아니다. 그곳에 들면, 서원에서 공부했던 학인들을 떠올려보아야 한다. 경상도 곳곳에서 퇴계에게 수학하기 위해 짐보따리를 꾸려 나섰을 조선시대의 선비들이 어떤 자세로 그곳을 찾았을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도산서원 입구에서 서원에 이르는 길을 걸으며 수백 년 전 그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지, 그리고 그 안에서 퇴계에게 무엇을 배웠을지 미리 떠올리고, 퇴계의 서적들과, 퇴계의 빗자루를 만져보아야 한다.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는 그들에게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그들에게 학문은 벼슬길로 나아가는 도구가 아닌 무엇이었을지를 생각해보라. 그들이 격물하고 치지했던 그 이상을 느끼고 돌아선다면 당신의 여행은 그리 헛되지 않을 것이나, 그냥 관광지를 스쳐가는 길이라면 아예 들르지 않는 것이 차라리 나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돌아서면 다음 발길은 하회마을이다낙동강으로 이어지는 물길이 마을을 굽이돌아 물도리동을 만든 하회마을에는 정작 ‘하회마을’이 없다. 서애 유성룡의 기념관이 있고, 고택과 민속마을이 있고, 주변에 병산서원이 있지만, 정작 마음속의 하회마을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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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용대에 올라서면 그때서야 하회가 보인다. 때론 멀리서 바라보는 것이 더 아름다울 수도 있다. | |
그곳에는 민박집과 닭도리탕집, 그리고 헛제삿밥을 파는 밥집과, 초입부터 자리잡은 파크만 즐비하다. 하회의 원형은 사라지고 가든과 파크만 남은 셈이다. 그래서 하회를 찾은 많은 이들이 실망감을 표현한다. 말로 듣던 것과 다르다는 것이다. 사실이다. 차라리 낙안읍성이나 혜미읍성이 훨씬 보존이 잘된 편이고, 용인민속촌이 훨씬 잘 다듬어져 있다. 그렇게 보면 하회마을은 관광객의 입장에서 최대의 적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행객이 관광객과 다른 점은 마음으로 볼 수 있다는 점이다. 하회는 서애 유성룡의 정신이 스민 곳이다. 여기서는 당대의 대학자이자 정치가였던 그가 오백 년 전 이곳에서 품었던 사상과 철학을 떠올려야 한다. 그리고 기념관에 전시된 몇 점의 유물보다는 이 작은 동네에서 당대의 인물로 거듭난 그의 이야기에 주목하자. 그럼 그 땅은 어느새 의미가 되고, 동네 입구의 몇몇 거슬리는 장면들은 고스란히 잊혀질 것이다. 하룈는 눈으로가 아닌 마음으로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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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철 의학박사. 외과전문의. 현재 안동신세계병원장으로 있으면서, 머니투데이 편집국 전문위원, 한국 소아암재단 고문으로 활동중이다. 매일경제 mbn <경제나침반 180도>의 진행 또한 맡고 있다. 저서로
『시골의사의 아름다운 동행』『시골의사의 부자경제학』『착한 인생, 당신에게 배웁니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