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내 고향은 강원도에서도 백두대간 동쪽 땅이다. 그곳은 한쪽으로는 험준한 산맥이 쏟아져내려 만든 산자락 비탈밭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쪽빛 바다가 있다. 그래서 누군가는 산골짜기의 적막을 멋대로 형용하고 바다의 풍광을 당돌하게 묘사하는 나를 태생적으로 축복받은 소설가라 한다. 아무렴!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러나 이제 이곳에서 고향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나는 산이나 바다보다는 그곳에서 떠오르는 해에 대한 경배를 우선 하겠다.
소설가가 된 뒤 전라도 광주에서 살던 나는 이태 만에 고향으로 돌아갔다. 1994년인가 1995년인가 하여튼 그해 12월 하순 어느 날, 나는 삼척 MBC PD인 친구 김준희한테 이끌려 태백산 정상에 올랐다. 당시에 내가 살던 동해시에서 방송국이 있는 삼척시를 거쳐 두어 시간 만에 태백시에 도착하니 저녁 무렵이었다. 시내 여관에서 스태프와 함께 잠을 잤는데, 잠들기 전 고주망태가 되도록 술을 마셨다. 새벽녘 친구가 흔들어 깨울 때까지 술은 조금도 깨지 않아 추위를 느끼지 못했을뿐더러, 취중의 호기로 옷도 제대로 갖춰 입지 않은 채 촬영장비를 이고 진 그들을 따라 겨울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우리의 목적은 태백산 정상에서 일출을 배경으로 신년 메시지를 전하는 특집 프로그램 촬영이었다. 지금껏 나는 얼음과 눈으로 미끄러운 태백산 산길을 오르던 그 고역스런 미명의 등정을 기억한다. 딱딱하게 언 산길은 시린 발을 아프게 했고, 싸락눈을 몰아와 이마와 뺨을 할퀴던 바람의 속도와 냉기는 그야말로 살을 에었다. 어둠 속에서 보자니 그악스런 바람 탓에 키 낮은 주목들은 모두 가로퍼진 채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김준희는 “다 왔다, 다 왔다” 하면서 나를 속였지만 산정까지 오르는 데는 한 시간이 넘게 걸렸고, 산정에 올라서도 날이 밝으려면 한참 기다려야 했다.
그러나 추위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갈증이었다. 수풀을 뒤져 깨끗한 눈을 움켜서 입에 퍼넣었지만 해갈될 성싶지 않았다. 카메라맨인가 오디오맨인가 하는 친구가 산 아래로 조금 내려가면 절간이 있다고 알려줬고, 나는 혼자 미끄럽고 어두운 비탈길을 더듬어 가기로 했다. 조심조심 발을 디디면서 이 지경에도 물을 탐하는 육신의 이기심에 놀랐다. 한참을 내려가자 절간 요사가 어슴푸레 나타나더니 공양간 문틈에서 솟아나오는 김덩이가 보였다. 플라스틱 바가지 하나 가득 물을 얻어마시고 나자 정신이 살아나며 추위가 몰려오는 중에 기막힌 물건이 내 앞에 서 있었다. 절간 마당 한쪽에 버티고 선 커피자판기였다. “야, 내 육신의 욕구도 어지간하고 내 술버릇도 어지간하지만 참으로 인간이란 족속의 장삿속도 기막히구나.” 하고 탄식했다. 등짐으로 지고 온 게 아니라 헬리콥터로 운반했으리란 걸 모르지 않았으나 그 경황 중에도 산꼭대기의 커피자판기는 나를 실소케 했다.
갈증을 해소하고 스태프가 있는 산정으로 돌아오자 오한이 시작됐다. 추위도 추위지만 이러다가는 방송을 하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이들은 저마다 파카의 깃을 세우고 머플러로 얼굴을 동인 채 산정에 있는 제단 한쪽 벽 밑에 모여 웅크리고 있었다. 그나마 부실한 의복으로 깡깡 언 나는 제단 정면에 있는 철제함을 부둥켜안았다. 바람으로부터 촛불을 지키기 위해 둘러막은 장방형 철제구조물의 표면은 촛불의 온기로 따뜻했다. 그 제단은 단군을 받드는 곳이었고 촛불은 단군께 올리는 치성의 증표였으므로, 나는 고약한 자세로 신성을 모독한 셈이었다. 육신의 욕구로 인해 어마어마한 불경을 저지르면서도 두렵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우선은 내가 살아야 한다는 절박함뿐이었다.
그러다가 곧 동쪽 하늘이 훤해지며 해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불시에 어둠과 냉기가 가시며 쌩쌩거리던 바람 소리도 멎었다. 단군님의 보살핌이었던지 촛불의 온기 때문이었던지 나는 오한을 걷어내고 간장종지 쪼가리처럼 떠오르다가 이내 산나물 소쿠리만큼 커지는 해를 배경으로 NG 없이 한방에 촬영을 마쳤다. 친구에게 마이크를 건네준 뒤 해를 바라보는 순간 혈거부족의 원망과 태양 숭배사상의 근저를 깨달았다.
내 고향은 그곳이라 생각한다. 해가 뜨는 태백산 꼭대기. 밤새 빛과 볕과 만상의 형상과 천지의 질서를 기다리며 발가숭이 인간이 웅크려 있는 곳. 접신(接神)을 꿈꾸는 곳. 그리하여 나는 언제나 고향을 떠올릴 때마다 ? 섣달 미명의 태백산 정상에서 깨달았던 인간의 나약함과 강인함, 자연의 가혹함과 위대함, 그리고 인간과 신의 관계를 뒤섞어 생각하게 된다.
2.
강릉시 옥계면 남양리에서 태어난 나는 초등학교 4학년 봄철에 지금은 동해시 일부가 된 명주군 묵호읍으로 이사했다. 그 뒤 묵호항을 중심으로 읍내에서 펼쳐지던 삶의 도가니 속에서 소년기를 보냈다. 묵호는 바다와 항구의 도시였으며 오징어와 꽁치의 도시였고, 석탄과 시멘트의 도시였으며 뱃사람과 작부들의 도시였다. 그러한 도시는 세월을 거쳐 그곳에서 삶의 한 시절을 보냈던 사람들의 아우성과 물고기 비린내와 새벽 뱃고동 소리를 기억하는 어린아이 둘을 소설가로 만들었다. 고향에서 교직에 있는 친구 김동훈과 내가 그들이다.
동해시 묵호항은 해방 직전 일제가 건설했는데, 이유는 병자년 대홍수 때문이었다. 관서와 경기, 호남과 영남을 휩쓴 1925년 을축년 대홍수와 함께 1936년 영동 지방을 뒤집어엎은 홍수를 ‘병자년 대홍수’라 한다. 양양에서부터 강릉과 삼척, 울진까지 강원도 동해안을 삼킨 어마어마한 물난리였다. 삼척시립박물관 학예연구사로 있는 친구 김태수가 알려준 바에 의하면 당시 삼척만 해도 천오백여 호의 가옥과 수만 정보의 농지가 유실되고 육십여 척의 선박이 파손됐으며 백칠십여 명의 사상자가 났다고 한다. 오십천(五十川)이 토사로 메워졌을뿐더러 석회석과 철광석, 무연탄 선적항인 정라진항이 토사에 매몰돼 항구의 기능을 잃었다. 일제는 언젠가 또 일어날 수 있는 이러한 재난에 대비해 홍수와 토사로부터 안전한 항구를 만들기로 하고, 근처 해안을 살피다가 단애로 둘러싸인 묵호의 작은 만(灣)을 점찍었다.
그 단애 밑동을 파내고 아래편 바다를 메워 해변도로를 닦았다. 그런 공정을 거쳐 유입되는 수로가 없고 수심 깊은 양질의 항구를 건설했다. 그러나 일제는 패전 뒤 묵호항을 제대로 사용해보지도 못하고 쫓겨 섬으로 달아났고, 해방 이후 묵호항은 어업과 군사적 목적만이 아니라 근대산업국가를 만들고자 한 신생 공화국의 유용한 물류 운송 기반시설로 기능하게 된다. 삼척과 태백 인근에 널린 광산의 생산물 송출항구로 일신하면서 산업화의 주자원인 석탄과 시멘트가 이곳을 통해 전국으로 분배됐다.
삼척시 일원은 지형적 운명에 있어서도 광산업과 밀접한 지역이다. 패망한 일제가 철수하고 나자 연대병력인가 대대병력인가 하는 미군병력이 일순간에 삼척으로 상륙했다고 한다. 워낙 많은 병력이라 각급 학교와 공공시설을 임시막사로 사용하고도 대부분의 병사들은 도로변 공지(空地)와 산자락 비탈에서 천막 생활을 했다. 이들이 그렇게 벽촌에 몰려와 얄궂은 병사(兵舍)를 꾸미게 된 이유가 참 재미있다.
미 국방성 수뇌부는 일제가 철수한 뒤 한반도 지도를 펼쳐놓고 파병과 주둔에 관한 전략을 수립하게 되는데, 한반도에 대한 이들의 빈약한 지식이 문제였다. 이들의 상식과 안목은 대체로 유럽식이며 영국 중심이다보니 한반도의 생김새가 영국과 비슷하다는 점에 주목하게 됐다. 한반도 동부해안 중심 지역에 위치한 삼척에 제철, 제련소 표시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이들은, 이 지역을 영국 동부해안 중심 지역에 위치해 있으며 주요한 공업도시인 맨체스터와 동일시했다. 따라서 미 국방성은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한반도의 맨체스터’를 신속하고 완전하게 접수하기 위해 많은 군병력을 급파했다. 상륙 이후 자신의 착오를 알아차린 주둔군이 본국의 철수 명령을 받아 삼척에서 떠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석탄광산이 넘쳐나던 시절 리어카로 돈다발을 실어나르고, 한일관이라는 유흥음식점에서는 전국 각지에서 선발된 삼백 명이 넘는 아가씨가 광부들을 상대로 접대부 노릇을 했다는 이 지역은 ‘한반도의 맨체스터’였음이 틀림없다. 지금도 삼척과 동해, 강릉에는 세계적 규모의 시멘트 생산공장이 세 개나 자리하고 있다. 또한 지난날 광부의 도시였던 태백과 정선쟀 접경 산꼭대기에는 강원랜드라는 도박장이 성업 중이다. 이 역시 ‘한반도의 맨체스터’ 삼척의 과거를 투영하며 현주소를 현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이곳에서 역사의 때가 묻은 ‘사북사태’와 ‘진폐증’, ‘산업역군’과 ‘막장인생’, 그리고 ‘쫄딱구뎅이’라는 지난 시절의 관용어를 단지 추억으로 만날 뿐이다. 후기산업사회는 화석연료로 공장을 돌리고 방을 덥히던 지난 시절을 석탄산업 합리화사업으로 마무리하면서 삼척의 명성을 화석으로 파묻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이곳은 시인 묵객의 고장이다. 시인 김지하 선생님은 이곳 동해시 두타산 무릉계곡과 자신의 고향인 전남 해남 백방포를 묶어 노래한 『검은 산 하얀 방』이란 시집을 펴낸 바 있다. 그 무릉계곡 반석 위쪽 산중에 있던 옛 삼화사에서 두타산 자락 너머 삼척 천은사에 머물면서 『제왕운기』를 저술한 이는 동안거사 이승휴다. 또한 지금 일출 장면으로 유명한 동해시 추암언덕은 바닷가에 우뚝 속은 석회석기암으로 유명한데, 한쪽에 동로 심한의 해암정(海巖亭)이 선인의 낭만을 상징하며 서 있다. 이전까지 지역민들이 용추암(龍湫巖)이라 부르던 그 언덕의 풍광을 시적으로 형용해 ‘능파대(凌波臺)’라 명명한 이는 압구정(狎鷗亭)의 주인 한명회다. ‘능파’란 이름은 기암괴석을 희롱하는 파도의 모양을 미인의 가볍고 아름다운 걸음걸이에 비유한 말로 격조의 측면에서 지극히 고급하다고 하겠다.
3.
며칠 전 이 글을 준비하면서 강릉에 다녀왔다. 강릉은 내 출생지이면서 고등학교 삼 년을 다닌 도시고 지금도 수시로 오르내리는 곳이다. 소용이 있건 없건 고향 이야기를 쓰자니 한 군데 가봐야 할 곳이 있었기 때문인데, 그곳은 ‘대관령 옛길’이었다. 이전부터 술만 취하면 전화를 해 “여보게, 대관령 옛길을 한번 가보세. 엄청 좋아! 너무 좋아! 갔다가 내려오면서 하산주로 막걸리를 한잔하세.” 하고 늙은이처럼 조르는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 정연홍 교수를 만나러 동서울터미널에서 여섯 시 이십 분 고속버스를 타고 세 시간 만에 강릉에 도착했다. 친구의 승용차로 대관령 옛길 어귀로 가니 아직 이른 시각이라 ‘옛길주막’은 비어 있었고 등산 채비를 하면서 바라본 하늘은 세상에 짝이 없을 만큼 쾌청했다. 너무 맑고 환해 눈을 다칠까 걱정될 정도였다. 모자를 준비하지 않아 이마가 그을고 땀이 흐르리라 걱정했으나 옛길은 초입부터 정상까지 그늘진 나뭇잎의 터널이었다. 굳이 선글라스를 낄 필요도 선캡을 쓸 필요도 없는, 그야말로 신선의 산책로라 할 만하였다.
옛길을 들어서며 생강나무를 만났다. 이 낙엽관목은 김유정이 소설 「동백꽃」에서 강원도 사투리 그대로 ‘동백나무’라 지칭해 아직도 오해를 남기고 있는 주인공이다. “한창 피여 퍼드러진 노란동백꽃속으로”라는 표현이나 “알싸한 그리고 향깃한 그 내움새에”라는 묘사를 보더라도 김유정의 동백나무는 남부 지방에서 자라며 눈 속에서 다홍의 꽃을 피우는 상록교목이 아니라, 강원도 토속어로 ‘개동백’이라 불리며 봄철 노란색 꽃을 피우고 잔가지를 꺾어 혀를 대면 생강 맛이 나는 생강나무임을 알 수 있다. 그러한 이야기를 나누며 두 벗님은 녹음의 터널을 천천히 걸어 코딱지만큼 잗다란 오디가 잔뜩 열린 산뽕나무 아래를 지나고, 하얀 찔레꽃 만발한 찔레넝쿨 더미 곁을 지나고, 키 낮은 시누대 밭을 지나고, 올챙이가 고물고물 헤엄치는 계곡의 개울을 건넜다. 길은 계곡을 따라가면서 한쪽으로 녹수백석(綠水白石)의 진풍경을 펼쳐 보였다. 등산객은 몇 년 전 루사와 매미가 휩쓸어 더욱 청결해졌다는 계곡의 푸른 물과 흰 돌덩이, 그리고 코발트빛 하늘을 배경으로 출렁거리는 연록의 나뭇잎, 그리고 그 나뭇잎을 흔드는 산바람 소리를 듣는다.
옛길은 옛 영동고속도로에서 아랫길과 윗길로 나누어지는데, 우리는 아랫길 정상에서 발길을 돌렸다. 우연히도 죽마고우 윤우섭을 그곳에서 만났기 때문이다. 미처 연락하지 않은 동무를 그런 곳에서 덜컥 만나니 미안하기도 했고, 반가운 얼굴을 보니 막걸리 생각이 간절했던 까닭이다.
우리가 발길을 돌린 도로변에는 대관령 옛길을 알리는 지석과 함께 교산 허균의 오언율시 시비가 서 있다. 그 아래 옛길을 따라 내려오다보면 쉼터 한쪽에는 ‘사친시(思親詩)’로 불리는 사임당 신씨의 칠언절구를 한글로 옮겨 적어놓은 그림판이 그늘에서 쉬고 있다. 그러니 이 지역은 그야말로 문향(文鄕)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들 두 인물은 난설헌 허초희의 동생과 율곡 이이의 어머니라는 혈연을 가지고 있다. 앞서 적었듯이 이웃한 삼척에는 고려조의 대시인 이승휴의 유허지가 있으며 동해에는 시조 ‘동창이 밝았느냐’로 유명한 소론의 영수 약천 남구만의 은거 유적지가 있다. 송강 정철의 『관동별곡』도 이 지역을 순찰하며 이 고장의 자연미를 노래한 가사가 아닌가? 뿐만 아니라 이 지역은 자치국가 동예(東濊)가 고구려에 편입된 미천왕 14년(313년)부터, 이후 신라에 통합 복속된 내물왕(재위 356~402)대를 거쳐 내려오면서 향가 「헌화가」와 설화 「조신몽」의 배경지역으로 문학적 향기를 담뿍 함유하고 있다.
그럼에도 이중환은 어찌하여
『택리지』에서 이 지역을 설명하며 “문학에 힘쓰는 자가 없다”고 하고, “강원도 사람은 산골 백성이어서 많이 어리석고…….” 운운하였을까? 이력을 보면 청화산인 이중환은 열네 살 적에 강릉부사로 부임하는 부친을 따라 강릉에 내려갔었다고 한다. 더불어 그는 이 지역과 인연이 깊은 소론 계열의 인사가 아닌가? 그런데도 이곳에 대한 애정이 부족했던 저간의 사정은 무엇이었을까? 깊은 속은 알 수 없으나 같은 책에서 청화산인은 이 지방에 대해 “다만 서쪽에 영이 너무 높아서 이역(異域)과도 같아, 한때 유람하기에는 좋지만 오래 살 곳은 아니다” 하였으니 그가 살던 시대의 교통과 지리적 여건에서 비롯된 오해라고 이해할 수밖에 없겠다.
여러 해 전 미국 시애틀에 가 있던 소설가 은희경 씨가 마침 서울에 들렀을 때 일이다. 시애틀이 좋냐고 묻는 내 질문에 잠깐 생각하던 은희경 씨는 간단히 대답했다. “한마디로 미국의 강릉이야!” 어린 시절 강릉과 설악산으로 수학여행 가기 위해 밤잠 설친 추억을 가진 우리 또래는 누구나 강릉이란 도시에 대한 설명하기 힘든 설렘과 환상을 가지고 있다. 은희경 씨의 말인즉 시애틀은 미국인들이 우리가 강릉을 생각하듯이 여기는 동경의 도시라는 것이었다. 이후 나는 소설가 은희경 씨를 우리 시대 최고의 안목을 가진 문학인이라 여긴다. 진정이다! 그리고 또 한 명의 문학인이 있는데, 그분은 나의 은사인 소설가 최인훈 선생님이다. 어느 날 선생님의 고향 회령과 이후 남한으로 내려와 고등학교를 다닌 목포에 대해 말하던 끝에 강릉을 언급하게 되었다. 내 고향이 강릉이라는 말에 선생님은 잠시 황홀한 눈빛으로 허공을 쳐다보더니 곧 그곳에 대한 인상을 이렇게 표현했다. “그 지방은 사방이 다 동양화더구만!” 아아, 이제 좀 전 은희경 씨에게 바쳤던 감격의 찬사를 절반 나누어야겠다. 최인훈 선생님의 미적 안목과 품격이야말로 신선의 경지에서 노닐고 있지 아니한가.
이제 마지막은 술에 대한 이야기로 서둘러 마쳐야겠다. 대관령 옛길에서 내려온 우리 옛 동무들은 옛길 어귀에 있는 ‘옛길주막’ 목로에 둘러앉아 햇감자부침과 좁쌀막걸리를 시켰다. 그러고는 오십 고개를 오르느라 서리 맞은 동무의 귀밑머리를 바라보면서 어서 취기에 젖기만을 기다렸다. 고향마을과 죽마고우의 안부를 주고받고, 대관령 옛길과 화창한 날씨를 고마워하며 자랑하고, 양은주전자를 기울여 황금빛 막걸리를 막사발에 부으며 주막 주인 여인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내 손으로 훔쳐주고 싶어한다.
아하, 술 이야기는 미주알고주알 길게 쓰면 좋지 않다. 아무리 뛰어난 글이라도 술맛을 당해낼 수 없기 때문이며, 글로 술을 운위한다는 건 도취와 절망으로 이루어진 삶에 대한 모독이다. 정녕 옛길주막 막걸리 맛을 궁금히 여기는 이가 있다면 대관령 옛길을 걸어야 한다.
동서 어디로 가든 자신의 고향이 제일이라지만, 그래도 백두대간 동쪽 내 고향은 좀 더 특별한 곳이다. 누군가 이다음 내 고향을 찾아가는 이가 있어, 사방천지가 동양화 같은 풍경 앞에 주저앉아 탄식할지라도 날 탓하지는 마라. 엄동설한 태백산 정상에 올라 단군 제단 앞에 서서 해를 기다리며 오한에 떨거나, 초여름 어느 날 대관령 옛길 어귀 옛길주막에 들러 좁쌀막걸리에 취한 채 달아난 여인을 생각하며 씁쓸히 웃음 지을 적에도 날 야속타 욕하지 마라. 나도 늘 남의 고향에 가거니와, 그 산천에 취하고 인심에 취하고 술에 취하여 하양 울고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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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대 1960년 강릉시 옥계면에서 태어나 강릉제일고와 고려대 고고미술사학과를 졸업했고 고려대 대학원 문예창작과에서 수학했다. 1990년 『세계의문학』 봄호에 세 편의 단편소설을 발표하며 등단한 뒤, 소설집
『묵호를 아는가』『명옥헌』『사랑과 인생에 관한 여덟 편의 소설』『망월』『심미주의자』, 연작소설
『떨림』, 산문집
『갈등하는 神』『탁족도 앞에서』 등을 출간했다. 2001년 제46회 현대문학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