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삼십 년을 넘겨 살고 있는 고장 춘천은 도시를 에워싼 넉넉한 물 때문에 호반의 도시, 물과 안개의 고장, 수향 등의 낭만적 이름으로 불리운다. 봄내라는 예쁜 애칭도 갖고 있다. ‘봄내’를 소리내어 불러보면 정말 봄시냇물의 맑고 명랑하고 다정하게 흐르는 물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잖은가. 내가 춘천에서 살기 시작할 무렵 인상 깊게 들은 소리가 ‘물이 운다’는 것이었다. 큰 물이 얼거나 녹을 때 토해내는, 흡사 우주로부터의 신호음인 양 멀리서부터 쩡쩡 울려오는 소리를 두고, 강가에 터 잡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물이 운다’는 의인화된 표현을 썼다. 그렇게 울음으로 몸을 푼 물은 흰 비단폭 같은 안개로 피어오르고 강가에 줄지어 선 메마른 나뭇가지에 눈물 같은 눈꽃을 피운다.
경춘선 열차의 종착역인 춘천역 광장을 지나칠 때면 방금 도착한 기차에서 내린 사람들이 여행자로서의 기분을 한껏 내며 오래된 역사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모습이 쉽게 눈에 띄곤 하였다. (1939년 경춘선 개통과 함께 세워졌던 춘천역은 경춘선 복선철도를 위한 궤도와 역사 이설로 휴업중이어서 지금은 남춘천역이 임시 시종착역이 되었다.) 청량리-춘천. 기차로 달려 두 시간이 채 안 걸리는 93.5km의 짧은 거리에도 불구하고 강원도에 대한 심리적인 거리감 때문에 ‘나들이’가 아닌 ‘여행’이라는 단어를 서슴지 않고 쓸 수 있는 것이리라. 또한 낯선 곳에의 기대감. 일상을 떠나왔다는 홀가분함이 일탈의 해방감을 주기에 그렇게 ‘특별한’ 생의 한순간을 카메라에 담는 것이리라.
아주 오래전 식민지 시절에 지어진 낡은 역사와 어수선하고 초라한 역 광장은, 날씨가 맑든 궂든, 그곳에 모여들고 흩어지는 사람들이 귀향객이든 나그네든 혼자든 여럿이든 자연스러운 조화로 품어안는다. 오래된 것들이 갖는 힘과 품격으로, 어떠한 것들도 넉넉히 감싸안을 수 있는 것이리라.
그들은 아마도 동양 최대의 담수호라는 소양댐과, 그 물 건너 천년고찰인 청평사를 관광하고 춘천의 명물로 익히 알려진 닭갈비와 메밀막국수로 식사를 하고
<겨울연가> 촬영지 중의 하나인 명동 거리, 배용준과 최지우의 엠블럼 앞에서 사진을 찍으면서 춘천을 보고 느끼고 알았다고 할 것이다.
1978년 봄, 나는 서울 살림을 정리하여 남편의 직장이 있는 춘천으로 이주해왔다.
『서울은 만원이다』라는 이호철의 풍속소설이 나온 것은 그보다 십 년 남짓 이전인 1966년의 일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날로 사람살이의 환경이 나빠지고 있는 서울을 빠져나가게 된 것이 부럽다고도 하였으나 나로서는 이주(移住)가 아닌 ‘이식(移植)’이라는 말이 어울릴 만큼 강원도 춘천이라는 지명이 멀고 낯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으로 등 떠민 것은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새로이 살기 시작해보고자 하는 내 안의 요구와, 외로움과 적막감이 나를 깊고 강하게 해주리라는 기대였다. 스승께서는 이제사 겨우 첫 창작집을 낸 신출내기 작가인 내가 자극 없고 느슨한 지방 소도시의 생활에서 문학적 열정이 사그라질까 염려하시는 한편 문학은 혼자 할 수 있어야 한다고 독려해주기도 하셨다.
봄바람이 사납게 불던 날, 헌책 더미가 주종을 이루는 살림살이들을 실은 트럭의 조수석에 앉아 산과 강을 낀 구불구불한 길을 두 시간 가까이 달린 끝머리, 절정에 이른 개나리의 노란빛들이 아우성처럼 엉겨들 즈음 남편이 말했다. “다 왔어. 이제 춘천이야.”
첫돌이 안 된 아기를 붉은 누비포대기에 둘러업은 젊은 아낙이었던 나는 봄볕 속에 적막하고 고즈넉하게 가라앉은 도시를 마치 전생의 풍경인 양 기시감과 낯섦이 기묘하게 혼합된 눈길로 바라보았다. 춘천에서 태어나고 성장기를 보낸 남편은 손을 들어 멀고 가깝게 겹겹으로 도시를 에워싼 산의 능선들을 짚어가며 대룡산과 삼악산, 용화산이라고 말했다.
그 봄에서 여름, 가을이 가기까지 나는 이 도시의 곳곳을 정처 없이 헤매고 다녔다. 깃들이는 것, 길들여지는 것이 정신의 안주와 나태함으로 여겨지던 시절, 나는 배회자이고 탐색자였다. 햇빛도, 바람도, 거리의 풍경도,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도, 간유리 저편의 세상처럼 모호하고 수상쩍었다. 주머니를 뒤집듯 이 도시의 모든 것을 샅샅이 보고 싶고 갑옷 속에 숨긴 몸을 투시해보고 싶었다. 아니, 그래야 할 것만 같았다. 낯선, 그리고 오랫동안 살아가야 할 도시는 내게 정체가 파악되지 않는 모호한 생명체였다. 도심의 뒷골목과 장터 마당, 도시를 가둔 강물, 이 세상의 시간에서 돌아앉은 듯한 무중력의 적요로움뿐인 선사 유적지를 헤매는 동안 얼굴에는 잘 여문 채송화 씨앗 같은 주근깨가 까맣게 돋아났다. 젊은 어미의 불안과 외로움에 감염된 아기는 잠시도 등에서 떨어지지 않고 나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라고 되뇌며 비장하게 마음을 일으켜세우곤 하였다.
개발이 이루어지지 않은 대개의 중소도시들처럼 춘천 역시 큰길을 한 걸음만 벗어나면 옛 모습을 그대로 지니고 있었다. 처마를 맞댄 집들 사이로 실 같은 골목길들이 끊일 듯 이어지고 막다른 곳인가 하면 또 어디론가로 소통하듯 뚫려 있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미로와 같은 길들을 헤매다보면 이 도시가 가만가만 숨쉬며 몸 일으키는 소리, 어디선가 흐르는 물소리 같은 것이 마음 안으로 스며들었다.
넉넉한 물과 비옥하고 너른 땅 춘천에는 구석기시대로부터 사람이 살았고 성읍국가인 맥국의 천년고도였다. 의암호 안의 섬인 중도의 선사시대 유적들이 남아 있는 곳에서 하릴없이 하루해를 보내다보면 어디에선가로부터 무리지어 흘러들어와 움집을 짓고 강과 숲에서 먹이를 구하고 자손을 퍼뜨리며 살았던 옛사람들이 환각처럼 찾아오기도 하였다. 물 건너가 바로 수만 년의 시간인가, 선사시대에 발을 디디고 물 저편을 바라볼라치면 예술적 상상력을 한껏 발휘한 붉은 벽돌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의암호반의 어린이회관은 김수근 건축의 개성과 특징이 한눈에 드러나는 장중한 건물로, 강을 향해 머리를 두고 날개를 편 나비의 형상이다. 먼 곳으로부터 정다운 벗들이 찾아올 때, 혹은 가만가만 내리는 비에 마음이 그만 하염없어질 때면 나는 곧잘 이곳을 찾곤 했다. 혼자여도 둘이어도 셋이어도 좋은, 수려하고 고즈넉한 분위기를 한껏 누리노라면 자신이 귀히 존중받는 존재인 양 소중히 여겨지고 물가에 나비를 앉힌 건축가의 섬세하고 다정한 동심이 느껴졌다.
문학은 그 시대의 소산이자 작가를 에워싼 토양의 산물이기도 할 것이다. 선택의 여지없이, 생활의 필요에 의해 옮겨온 탓에 나 자신이 이곳에 속해 있는가, 이곳에서 진정 살고 있는가, 지금 이곳에서의 삶이 일종의 해리현상이나 꿈이 아닐까, 아득해지는 마음으로 스스로 물을 때가 있다. 삼십 년을 살았어도 나는 내가 살고 있는 도시의 어떠한 것도 예사롭거나 당연하지 않다. ‘작가로서의 눈’을 견지해야 한다는 자의식의 작용도 있을 것이다. 언제나 조금은 서먹하고 낯설 만큼의 거리, 바라보고 표현하기에 알맞은 객관적인 거리를 유지하고자 하는 긴장, 즉 중독이 되거나 관습화되지 않으려는 필사적인 마음의 저항이 숨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시인 천상병은 이 세상에 소풍 온 것이라고 했지만 이 생이란, 이승이란, 이 세상이란 기실 얼마나 낯선 곳인가.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암암리에 내가 쓰는 글에 이 도시를 에워싼 물과 안개가 잠입해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 도시에서 태어났거나 성장했거나 한 시절 머물러 살았던 작가 시인들의 글을 조금 예민하게, 주의 깊게 읽는다면 그들의 글 속에 체취처럼 배어 있는 원죄의식과 불안과 권태와 이 도시를 에워싼 안개로 표상되는 미망과 그들만이 감지하는 숨은 눈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 도시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을 쓰고 싶었다. 일찍이 김승옥의
「무진기행」에서 소설의 주인공이, 무진에서 만나는 햇볕의 밝음과 해풍에 섞여 있는 소금기와 서늘한 공기를 합성하여 수면제를 만들 수 있겠다고 상상하였듯이 이 도시가 숨기고 있는 수많은 미로와 물세수한 듯 단정하고 어여쁜 자태 뒤에 숨긴 불온한 열정과 나른함과 권태 욕망 들을, 야행성의 동물처럼 밤이면 가만가만 숨쉬며 몸 일으키는 이 도시의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경기도의 도계(道界)를 넘어 강원도 땅으로 들어선 경춘선 열차가 종착역을 턱밑에 두고 잠시 머무는 곳이 김유정역이다.
이상과 더불어 30년대 한국문학을 이끈 천재작가 김유정의 작품들을 섭렵한 사람들일지라도 그가 춘천 출신이고 작품의 무대와 정서의 뿌리가 춘천 외곽의 실레마을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김유정의 생가가 복원되고 문학촌을 연 것은 2002년의 일이다. 2004년에는 실레마을이 있는 신남역을 김유정역으로 변경하였다. 우리나라에서 특정인의 이름을 기려 역의 이름을 지은 것은 처음일 것이다. 그가 춘천의 실레마을에서 태어났는지 서울에서 태어났는지는 미상으로 남아 있고 춘천에 머문 것은 이십삼 세인 1931년부터 이십오 세인 1933년까지 이 년에 지나지 않는다. 판소리 명창인 박녹주를 향한 구애가 끝내 거절당하자 본가가 있는 춘천에 내려와 간이학교인 금병의숙을 운영하고 농민운동을 하면서 당시 춘천 근교에서 살아가던 하층민들의 삶과 정서를 소설로 생생하게 그려냈다.
그의 소설들, 폐결핵이라는 병마, 스물아홉 나이의 요절, 몇 장의 흐릿한 흑백사진 외에는 아무런 것도 남기지 않은 종생(終生)은 오직 김유정이라는 소설가의 운명성으로밖에는 풀 길이 없다.
김유정이 1937년 3월 18일에 친구 안회남에게 보낸 편지.
“나는 참말로 일어나고 싶다. 지금 나는 病魔와 最後 談判이다. (……) 나에게는 돈이 時急히 필요하다. 그 돈이 없는 것이다. (……) 내가 돈 百圓을 만들어볼 작정이다. (……) 또다시 探偵小說을 飜譯하여보고 싶다. 그 外에는 다른 길이 없는 것이다. 허니 네가 보던 中 아주 大衆化되고 興味 있는 걸로 한둬 卷 보내주기 바란다. (……) 그 돈이 되면 于先 닭을 한 三十 마리 고아먹겠다. 그리고 땅군을 디려, 살모사, 구렁이를 十餘 뭇 먹어보겠다. 그래야 내가 살아날 것이다. (……) 나는 지금 막다른 골목에 맞닥드렸다. 나로 하여금 너의 팔에 依支하여 光明을 찾게 하여다우. 나는 요즘 가끔 울고 누어 있다.”
그리고 열하루 뒤에 그는 세상을 떠났다.
“나는 요즘 가끔 울고 누어 있다.” 나는 이 편지를 그의 문학인생의 마지막 절창으로 본다.
하루하루의 삶이 일상성 속에 갇혀 매양 똑같이 되풀이된다 해도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부단히 변화하게 마련이다. 나의 생도, 내가 살고 있는 이 도시도 그러하다. 도심을 벗어나면 어디나 눈에 띄던 논과 밭, 복사꽃이 흐드러져 도원경을 이루던 과수원의 풍경들은 조금씩 조금씩 지워지듯 사라지고 고층 아파트들이 우뚝우뚝 섰다. 변화와 소멸과 생성의 속도는 삶의 리듬과 비례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도시는 자체의 생명력과 역동성으로, 저대로의 운명성으로 움직여가는데 내가 알고 있던 것들, 친숙했던 것들은 얇은 미농지가 덮이듯 흐릿하게 멀어지고 기억의 지층 속으로 묻힌다.
시인 기형도 씨는 나와 첫인사를 나누자마자 대뜸 그가 경험했던 어느 봄날 오후, 춘천의 햇볕과 바람과 물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것들이 그의 마음 안에 만들어준 특별한 울림과 공간에 대해 설명할 적당한 어휘를 찾느라 눈을 조금씩 찡그려가며 말하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를 다시 만난 일은 없었지만 오래지 않아 그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춘천의 햇볕과 바람과 물에 대해 설명하려 애쓰던 얼굴을 떠올리며 안타깝게 짧았던 생애 중 춘천에서의 어느 아름다운 봄날 오후를 애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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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정희 1947년 서울에서 출생했다. 1978년 강원대 교수로 임용된 남편을 따라 춘천으로 이주했고, 이후 2008년 현재까지 효자동, 후평동, 퇴계동으로 옮겨가며 살고 있다. 소설집
『불의 강』『유년의 뜰』『바람의 넋』『불꽃놀이』, 장편소설
『새』, 동화
『송이야 문을 열면 아침이란다』, 산문집
『살아 있음에 대한 노래를』『내 마음의 무늬』 등이 있다. 이상문학상, 동인문학상, 동서문학상, 오영수문학상, 리베라투르 상 등을 수상했다.